1. 오이라트와 북원
오이라트는 알타이산맥 근처에 살던 부족이었습니다. 몽골 서북쪽 끝에 살던 산림 부족이었죠. '오이라트'라는 단어가 몽골어로 '숲의 사람들'을 뜻하기도 합니다.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세우자 13세기 초 그에게 복종했습니다. 오이라트의 지도자들은 몽골 제국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4세기 후반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과 서달과 상우춘의 북벌로 원나라가 무너지고 명나라가 비상했습니다. 오이라트의 족장들은 새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명나라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1368년 수도가 명나라에게 넘어가자 원나라의 11대 황제 혜종(토곤테무르)가 이끄는 잔존 세력은 북쪽 몽골 고원으로 피해서 북원으로 존속했습니다. 북원은 세력이 축소되었지만 계속 명나라와 다투었습니다. 1388년 북원의 3대 황제 천원제(토구스 테무르)는 명나라에게 패퇴하고 수도 카라코룸으로 오다가 예수데르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예수데르는 '조리그투 칸'이라는 이름으로 북원 대칸의 직위에 올랐지만 북원 황제의 칭호까지 이어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대칸과 황제, 두 칭호 중 대칸의 이름은 남았지만 북원 황제의 계보는 20년 만에 끝난 것입니다.
오이라트와 북원은 장기간 대립했습니다. 조리그투 칸이 막 대칸에 올랐을 때 오이라트는 내부에서 권력 이양이 진행 중이라 그를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북원의 내부 사정은 뒤죽박죽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상 부족 연맹이 되어서 내부에서도 죽고 죽인 것이죠. 북원의 대칸들 중 조리그투 칸부터 델베그 칸까지 7명의 대칸이 즉위했지만 평균 재위 기간은 4년도 안 될 정도로 혼란했습니다. 북원의 엘베크 칸 부터 북원과 오이라트는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1399년 엘베크 니굴세그치 칸은 오이라트와의 전쟁에서 전사했고, 1412년 울제이 테무르 칸도 오이라트의 지도자 마흐무드에게 붙잡혀서 살해당했습니다. 오이라트는 서쪽 몽골 고원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2. 비상하는 오이라트 부족
오이라트 부족들과 동쪽 몽골 부족들은 계속 대립했습니다. 명나라는 둘 사이를 이간질하고 분열시킴으로써 이이제이의 방향을 취했습니다. 오이라트는 울제이 테무르 칸을 생포하여 처형했던 마흐무드라는 부족 지도자 시대에 본격적으로 비상했습니다. 그는 델베그 칸을 꼭두각시 칸으로 만들기도 했죠. 1416년 마흐무드가 죽고 아들 토곤이 오이라트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토곤은 오이라트의 4부족을 연합시켜서 스스로 타이시라는 사령관의 이름을 칭했습니다. 토곤 타이시 시대에 오이라트는 몽골 초원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북원의 아다이 칸과의 대결에서 완승하면서 남은 북원의 보르지긴 왕가 세력을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었죠. 토곤 타이시의 아들 에센에 이르러서 오이라트는 최전성기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1439년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고 아버지가 진행했던 영토 확장 사업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몽골 초원을 완전히 통합시켰고, 서쪽으로는 발하시 호수를 끼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만주, 북쪽으로는 바이칼 호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 영토의 일부를 빼앗는 위업도 달성했습니다.
3. 토목의 변 발발
이제 주변국들 중 오이라트를 이길 수 있는 건 남쪽의 명나라뿐이었습니다.
시작점은 무역 문제였습니다. 영락제는 1406년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을 통한 무역을 허용했습니다. 명나라는 마시(馬市), 즉 말을 파는 시장을 만들고 말과 가축 등을 수입하면서, 대신 비단을 필두로 한 의류와 식량 등을 수출하였습니다. 하지만 영락제 시절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정통제 시대에 조공 사절단 규모가 60배 가까이 커지면서(50명 -> 3,000명) 부작용이 심각해졌습니다. 오이라트 상인들은 말을 팔면서 말 숫자와 금액을 속였고 주변 위구르의 상인들까지 가세해서 밀무역도 벌어졌습니다.
이 문에 경제적으로 막심한 손해를 입은 명나라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정통제가 총애하는 환관 왕진이 앞장서서 오이라트와의 무역을 제한시켰고 말 가격도 오이라트가 제시한 가격의 20%만 지급했습니다. 화가 난 에센은 병력 2만 명을 이끌고 1449년 지금의 산시 성을 침공했습니다.
명나라의 방어선은 오이라트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오이라트군은 군사적 요충지인 대동(위에서 오른쪽 지도의 DATONG)을 손에 넣고 동쪽으로 빠르게 진군했습니다. 이에 정통제는 기록상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을 나와서 에센 타이시와 맞섰습니다. 그러나 고작 2만의 군대에게 명나라의 대군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했습니다.
명나라의 졸전은 이 50만 대군이 형편없는 오합지졸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애당초 병력이 과장되었을 게 뻔하고, 물론 정예군도 꽤 포함되었지만 잡병이나 귀족과 문신들까지 포함된 거품이 가득한 병력이었습니다. 심지어 황제 다음의 지휘관이라는 자가 앞에서 말한 환관 왕진이었습니다. 애당초 정통제는 주변에서 직접 진군하지 말아달라고 간언했는데 왕진이 부추겨서 나선 것이었습니다.
무능한 지휘관이 이끄는 병력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오이라트의 기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도망쳐서 토목보라는 요새(지금의 허베이 성 장자커우 시)에 도망치긴 했지만 금방 포위당했습니다. 토목보에는 물이 부족해서 버틸 수도 없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시켰고, 결국 정통제는 포로로 잡혔습니다. 대륙을 통일한 제국의 황제가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힌 끔찍한 일이라는 의미로 이 사건을 '토목의 변'이라고 부릅니다. 오이라트의 시각에서 보면 대첩이고 대승이겠지만요.
4. 북경 공성전
명나라 조정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황제는 물론 상당수의 조정 대신들도 죽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패닉 상태에 빠진 많은 대신들이 남경으로 천도해야 산다고 주장했지만 병부시랑 우겸은 강력한 반대 의견으로 이를 막았습니다. 그는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송나라의 예를 못보았느냐!", "수도는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을 버리고 어찌 살길 바라는가?", "북경은 천리이므로 반드시 사수하여야 한다!"라는 말로 간신히 뜯어 말렸습니다.
남아 있는 우겸과 조정 대신들은 정통제를 태황제로 부르고 그의 동생 주기옥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이렇게 경태제가 즉위했습니다. 그리고 남경과 각 도시로부터 엄청난 숫자의 병력과 군수물자를 북경으로 집중시키고 요새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명나라의 존속 걸린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한편 에센 타이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만큼 엄청난 야망을 품었습니다. 명나라를 손에 넣을 생각으로 정통제를 앞세워서 항복하라는 언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우리는 이미 황제를 새로 추대했다는 강경한 태도와 함께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분노한 에센 타이시는 각 유목민족을 총동원한 10만 대군으로 북경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22만의 대군이 북경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9개의 성문에는 수많은 진지가 건설되어 있었고, 우겸과 지휘관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겸은 "선봉이 물러서면 후위가 선봉을 참수할 것이요, 병졸이 장군을 버리고 도망치면 그 역시 참수할 것이요, 장군이 병졸을 버리고 도망친다면 그 또한 참수할 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북경 공성전에 나선 명나라 지휘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덕승문(德勝門) : 병부시랑 우겸, 무청백 석향(石享), 부총병 범광(范廣), 무흥(武興) 등
안정문(安定門) : 도독 도근(陶瑾)
동직문(同直門) : 광녕백 유안(劉安)
조양문(朝陽門) : 무진백 주영(朱瑛)
서직문(西直門) : 도독 유취(劉聚)
부성문(阜成門) : 진원후 고흥조(顧興祖)
정양문(正陽門) : 도지휘 이단(李端)
숭문문(崇文門) : 도독 유득신(劉得新)
선무문(宣武門) : 도지휘 양절(楊節)
여기에 남쪽 외성인 중도성(中都城)의 창의문(彰義門)에는 우첨도어사 왕횡(王竑)이 이끄는 도독 모복수(毛福壽), 고례(高禮)의 군대가 수비했고, 북경성 내부에는 도독첨사 왕통(王通), 좌부도어사 양선(楊善), 병료급사중 정신(程信)이 배치되었습니다.
1449년 10월 11일, 오이라트의 공격으로 공성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우선 창의문을 노렸지만 선봉대만 수백명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오이라트군의 앞에은 지난 번 토목의 변과 차원이 다른 우주방어선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명나라는 강력한 대포와 화약을 배치했습니다.
명나라의 화력에 놀란 에센 타이시는 잠깐 공격을 중단했습니다. 이틀 뒤에 화기를 쓸 수 없을 것만큼 비가 내리자, 만 명의 병력으로 덕승문 쪽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우겸은 진지 지붕이 있는 곳에 이미 포병대를 배치시켰고. 오히려 에센의 동생을 포함한 오이라트의 지휘관들까지 잃는 패배만 입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격노해서 여러 성문을 계속 공격했지만 포탄과 화살만 날아왔습니다. 명나라 지원군이 속속들이 북경에 도착했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10월 15일에 퇴각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오이라트로 돌아온 뒤에도 정통제를 송환하는 대가로 뭔가 얻어내려고 했지만 명나라는 협상에서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무 대가 없이 1450년 정통제를 명나라로 돌려보냈습니다.
5. 그 이후 정치상황과 북경 공성전의 의의
경태제는 돌아온 형 정통제를 남궁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경태제 파와 정통제 파로 나뉘었고, 경태제는 더욱 강경하게 나가기 위해 1452년 황태자였던 정통제의 아들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을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했습니다. 그러나 경태제의 아들은 다음 해에 병으로 사망하고 경태제 본인까지 몇 년 뒤 병에 걸려 끙끙 앓고 말았습니다.
기회를 노린 정통제 파는 1457년 쿠데타를 일으켜 경태제를 폐위시키고 옛 황제 정통제를 재차 황제의 자리로 올렸습니다. 이 사건을 '탈문의 변'이라고 부릅니다. 경태제는 병이 악화되어 얼마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복위한 황제는 예전처럼 '정통'이라는 연호를 버리고 '천순'이라는 연호를 썼습니다. 천순제는 지난날 경태제를 세운 우겸을 처형시켰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유였죠. 우겸은 담담하게 처형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문무에 밝았고 청빈한 인물이라 재산을 몰수했는데도 가진 보물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겸을 처형한 건 쿠데타를 일으킨 장수들이 부추긴 것이 컸고, 천순제도 우겸을 죽인 걸 크게 후회했습니다.
한편 에센 타이시는 1452년 동몽골의 황족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 타이순 칸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자신을 공격하자 바로 진압하여 살해했고, 황족들 중 어머니가 오이라트 출신이 아니라면 모조리 죽였습니다. 그는 동몽골의 기록, 문서, 족보까지 거의 대부분 불태웠습니다. 이듬해 그는 타이순 칸의 뒤를 이은 아크바르진 칸까지 죽인 다음 스스로 대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타이시라는 칭호에 만족하지 못한 에센은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몽골 부족들은 칭기즈 칸의 직계 후손 만이 대칸에 오를 수 있었던 규율을 깨뜨린 에센을 향해 대대적인 반란을 개시했죠. 대혼란 상태에서 그는 재위한지 1년 만에 부하의 손에 죽었습니다.
에센의 죽음 이후 오이라트 부족도 분열되었고, 동몽골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났습니다. 오이라트는 부족으로서 존속했지만 한때나마 강성했던 오이라트 제국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북경 공성전에서 에센 타이시가 승리했다면 명나라는 건국한지 80년 만에 남북으로 분열되거나 멸망하는 결과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또다시 유목민족이 중국 대륙의 중원을 정복했을 것이고, 동아시아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우겸의 업적을 통해 리더 한 사람에게 모든 걸 기대하는 맹신은 착각이겠지만, 뛰어난 리더로 인해 크게 발전하는 경우는 미래에도 계속 나올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영문위키 토목의 변( https://en.wikipedia.org/wiki/Tumu_Crisis )
나무위키 토목의 변( https://namu.wiki/w/%ED%86%A0%EB%AA%A9%EC%9D%98%20%EB%B3%80 )
도서 <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
위키백과 오이라트부 (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9D%B4%EB%9D%BC%ED%8A%B8%EB%B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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