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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사] 16세기에 시작된 페르시아 사파비 제국의 이야기(vs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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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파비 왕조의 건국

사진 속 'Persia'가 사파비 왕조입니다.

  사파비 왕조는 근대 이란 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창건자 이스마일 1세는 1501년 사파비 교단과 튀르크계 전사들을 모아 지금으로 치면 이란 북부의 '타브리즈'라는 도시(카스피해 서쪽의 도시)에 사파비 왕조를 건국했습니다. 이스마일 1세에게 강력한 전력이 된 붉은 모자를 쓴 기병을 '키질바시'라고 합니다. 그는 자기자신을 시아파의 화신이라 칭하고 과거 페르시아 군주의 칭호인 '샤'를 계승하기로 했습니다. 주변국이 쓰고 있던 '칸'이나 '숱탄'의 칭호가 아니었죠.

 

키질바시 전사의 그림 중 하나입니다.

  수도 주민들의 반 이상이 수니파교도였음에도 이스마일 1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수니파가 존경하는 초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와 2대, 3대 칼리프인 우마르와 우스만을 폄하할 것을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기존 시아파가 그랬듯이 4대 칼리프인 알리를 신성시했습니다.

  옛 페르시아의 영광을 찾고자 이스마일 1세는 남쪽, 동쪽, 서쪽으로 정복전쟁을 벌입니다. 아제르바이잔에 머물렀던 국가가 10년이 안 되어 제국을 이룩하죠. 이란 전역을 석권했고, 동쪽으로는 페샤와르(현재 파키스탄 도시), 서쪽으로는 바그다드와 디야르바키르(현재 터키 도시)에 닿았습니다.

 

이스마일 1세(왼쪽)과 셀림 1세(오른쪽)

 

  2. 찰디란 전투(Battle of Chaldiran, 1514년)

  하지만 서쪽으로는 당시 사방에 세력을 넓히는 오스만 제국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정복자인 셀림 1세가 재위하고 있었죠. 수니파가 국교인 국가와 시아파가 국교인 국가는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1514년 8월 찰디란 전투에서 사파비의 기병은 오스만의 포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마일 1세는 중앙에 쏟아지는 포격을 피해 오스만군의 양익을 노렸습니다. 하지만 마차로 이루어진 장벽을 뚫을 수는 없었습니다. 막힌 기병의 앞에는 강력한 머스킷으로 무장한 예니체리 군단과 배치를 바꾼 포병의 화력 사례가 소나기처럼 쏟아졌습니다.

 

찰디란 전투 전후의 상황을 그린 지도가 있습니다.
찰디란 전투의 상상화입니다.

 

  패색이 짙어지는 와중에 이스마일 1세 본인조차 팔에 총상을 입고 도망쳤고, 양쪽의 수만명이 격돌한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2,000명의 사상자 뿐이었지만 사파비군은 5,0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 때 확실한 병력을 찾기 힘든데 개인적으로 오스만군은 8만, 사파비군은 5만 쯤 되지 않을까 예측합니다. 디야르바키르를 비롯한 서쪽 영토를 상실했고, 일시적이지만 패전의 여파로 수도인 타브리즈까지 점령당했습니다. 동쪽의 부하라 칸국과의 싸움에서도 국력을 소모해야 했습니다. 병사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셀림 1세는 철수했습니다.

  3. 계속 웅크리는 사파비 제국

 

쉴레이만 1세(대제)의 초상화입니다.

  1520년대 이스마일 1세가 죽고 타흐마스프 1세가 샤의 자리를 이었고, 오스만에도 셀림 1세가 죽고 그 아들인 쉴레이만이 뒤를 이었습니다. 후자는 그 위대한 쉴레이만 대제로, 알제리와 이라크 지역을 손에 넣고 헝가리를 멸망시키고 지중해의 절반 이상을 장악한 세계사의 초역대급 명군이었습니다. 사유재산을 보호했고 노예 신분일지라도 능력이 출중하면 등용했으며, 모스크 건설을 지원하는 등 예술인들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전설적인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입니다. 당연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합니다.

  그의 정복에는 선대부터 맞붙은 사파비가 빠질 수 없었습니다. 1532년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라는 장군에게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고, 대제 본인은 뒤에 합류했습니다. 2년 뒤 수도인 타브리즈와 바그다드를 점령했으나 사파비군은 청야 전술로 대응했고, 1536년까지 점령하다가 물러갔습니다. 타브리스에서는 물러갔지만 바그다드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은 내주지 않았습니다.

 

쉴레이만 대제 시대에 오스만 제국 최대 영역입니다.

  쉴레이만 대제는 그 해에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과거 오스트리아와 사파비가 동맹을 맺고 양쪽에서 오스만을 압박한 적이 있었는데, 똑같이 대응하고자 한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프랑스 국왕인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그는 스스로를 '술탄 중의 술탄, 지상의 군주에게 왕관을 하사하는 신의 그림자'라고 표현했습니다.

  1548년과 1553년에 연이어 오스만군은 계속 사파비를 침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서쪽 영토를 획득하고, 20년 동안 휴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파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압박과 청야 전술의 피해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결국 1555년 수도를 타브리즈에서 남동쪽의 카즈빈으로 천도했습니다.

  4. 제국의 황금기 - 아바스 1세 시대, 그리고 우르미아 전투(Battle of Urmia, 1604년)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이 사파비 제국의 첫 번째 수도 타브리즈, 두 번째 수도 카즈빈, 세 번째 수도 이스파한입니다.

 

  훗날 1588년 아바스 1세가 사파비 제국의 5번째 샤로 즉위했습니다. 즉위 당시에 또다시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3세와 10년 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1590년 조약을 맺고 약간의 남서쪽 영토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대부분을 넘겼습니다. 피해를 감수하고 전쟁이 멈추자 아바스 1세는 칼을 갈았습니다.

 

아바스 1세의 초상화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키질 바쉬'는 과거에는 사파비 왕조 창건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바스 1세에 이르자 왕에게 불충하고 지방 족장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아바스 1세는 이들을 해체하고 '샤 샤반'이라는 새로운 샤의 군대를 창설했습니다. 500문의 포병대와 12,000명의 보병을 총으로 무장시키고 이들은 샤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러시아, 스페인, 영국에 사절을 파견하고, 서양의 군사 전문가들을 관료로 채용하고 무기의 근대화에 성공했습니다. 봉건적인 영주제를 폐지하는 걸로 말미암아 중앙에 권력을 집중시켰고, 지방의 조세권을 확실히 장악하자 샤의 군대에게 충분한 봉급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맘 광장의 사진과 그림입니다. 원래 이름은 샤의 광장이었는데 이란 혁명이후 팔레비 왕조가 끝나고 이름이 바뀝니다.

  1597년 새롭게 옮긴 수도 이스파한에서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대도시가 생겼고 지금도 이스파한은 이란의 제 3의 도시입니다. '이스파한은 세계의 절반'이라는 이란의 유명한 속담까지 있을 정도죠.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이맘 광장(당시 샤의 광장)은 이 때 건설을 시작하여 1629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에게 쉴레이만 1세가 역사상 최고의 군주였다면 사파비 제국에게는 아바스 1세가 역사상 최고의 군주였던 셈입니다.

  아바스 1세는 정예화된 병력으로 복수를 시작했습니다. 부하르 칸국 상대로 잠깐이지만 발흐(Balkh,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도시)까지 나아갔으며 오스만 제국 상대로도 더 이상 청야 전술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우르미아 전투를 묘사한 지도입니다. 철저히 준비된 언덕 매복&포위로 오스만군의 선봉을 괴멸시킵니다.

  1604년 발발한 우르미아 전투가 아바스 1세에게는 영광의 순간일 것입니다. 전투가 사파비 장군 알라흐베르디가 기병을 이끌고 작전 장소까지 오스만군을 유인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아바스 1세가 매복군을 여러 개로 나누었는데, 언덕에 포병을 배치하고 남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일부는 알라흐베르디를 쫓아온 적군을 정면에서 막고 나머지는 오스만 본진을 타격하는 듯하다가 기민하게 방향을 바꿔 튀어나온 적군의 후미를 급습했습니다. 오스만군의 선봉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남은 병력은 그대로 퇴각했습니다. 이어진 수피얀 전투, 간자 전투에서 사파비는 연전연승했고 1600년대 전황은 사파비 제국의 승리였습니다.

  이렇게 옛 수도인 타브리즈가 포함된 아제르바이잔 영토를 재탈환했고 야전에서오스만을 이길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 뒤 두 나라는 휴전과 전쟁 재개를 반복하고, 1624년에는 거의 90년 만에 바그다드를 회복하는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남쪽에서는 반다르아바스, 바레인, 호르무즈 해협의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고 1622년 무굴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로 마무리했습니다.

  5. 제국의 황혼기와 몰락

 

 

  그러나 아바스 1세 사후 사파비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1638년 바그다드가 다시 오스만의 손에 넘어가고 사파비 왕조는 멸망할 때까지 이라크를 되찾지 못합니다. 15세기 ~ 16세기 오스만과 사파비의 전쟁에는 대부분 오스만이 승리했습니다. 찰디란 전투를 시작으로 100년이 넘는 기나긴 전쟁에서 사파비가 이겼던 건 거의 아바스 1세 시기 뿐이었습니다.

  7대 샤인 아바스 2세를 제외하고 후대의 왕들은 내치든 외치든 무능한 경우가 아주 많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대항해시대에 실크로드의 무역로 중요성이 예전같지 않았고, 사파비 왕조의 비단 산업도 무굴 제국의 비단 산업에 고전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1724년 지도에서 사파비 왕조는 사라졌습니다.

  1722년 수도 이스파한이 동쪽의 호타키 왕조에게 점령당한 건 사파비 왕조에게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죠. 왕조 영토 중에 중부와 동부의 대부분이 호타키 왕조에게, 카스피해 남쪽 땅은 러시아에게, 서부는 오스만에게 넘어가서 왕조가 산산조각났죠.

  수도가 함락되자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던 타흐마스프는 북쪽의 호라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훗날 새로운 샤가 되는 호족 나디르 베그를 만납니다. 몇 년 뒤 나디르 베그는 왕조를 재건했으나 실권자에 만족하지 않았고, 사파비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샤의 자리에 올라 아프샤르 왕조를 창건합니다.

훗날 새로운 왕조의 초대 샤가 되는 나디르 베그입니다.

 

출처: 미야자키 마사카츠, 『한눈에 꿰뚫는 중동과 이슬람 상식도감』, 이다미디어(2015)

고원, 『이슬람 역사 1400년 - 알라가 아니면 칼을 받아라』, 동서문화사(2002)

영문위키 <Battle of Chaldira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haldiran)'

영문위키 <Abbas the Great> (https://en.wikipedia.org/wiki/Abbas_the_Great)

영문위키 <Battle of Urmia (1604)>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Urmia_(1604))

영문위키 <Suleiman the Magnificent> (https://en.wikipedia.org/wiki/Suleiman_the_Magnificent)

<GeaCron Project>(http://geacron.com/hom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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