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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말기 위나라와 오나라의 최대 공방전: 동흥전투(252년)와 합비신성전투(2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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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폭풍전야

 

  위촉오 삼국시기 중 250년대 초반은 권력 승계의 시대였습니다. 251년에 사마의가 죽고 아들 사마사가 위나라의 권력을 승계하고, 252년에는 손권이 죽고 손량이 오나라의 제위에 오릅니다. 253년에는 비의가 죽고 강유가 촉나라의 군사권을 잡습니다.

  이 시기 오나라의 대장군 제갈각이 전권을위임받습니다. 제갈각은 제갈근의 아들이고 제갈량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제갈서, 제갈탄 등 제갈씨 성을 가진 인물은 위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제갈각은 위나라의 국경 바로 앞의 '동흥'이라는 곳에 동흥제라는 제방을 건축합니다.

 

 

 

  (하늘색 선 왼쪽이 위나라 영토, 오른쪽이 오나라 영토입니다.)

 

  위 지도의 푸른색 호수가 소호입니다. 소호는 위나라의 영역에 있었지만 오나라가 옆의 강을 제방으로 막으면 소호의 물이 막히게 됩니다. 자칫 범람할 위험도 있었죠. 제갈각은 이를 노리고 여기에 수비를 강화하고자 동흥제의 양쪽으로 성을 쌓습니다. 옆에 산이 있어서 수비하기에도 용이했습니다. 성 하나당 천 명의 병력만을 남겨두고 제갈각은 본진으로 귀환합니다.

 

  2. 동흥전투의 시작

 

 

 

(맨 왼쪽 파란색 지점이 강릉, 보라색 지점이 무창, 청록색 지점이 동흥으로 향하는 위나라 군대고 분홍색 지점은 오나라 구원군의 방향입니다.)

 

  제갈각의 도발에 사마사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오나라를 침공했습니다. 정남장군 왕창, 진남도독 관구검, 진동장군 제갈탄과 정동장군 호준에게 각각 강릉, 무창, 동흥 공격을 지시했습니다. 제갈탄과 호준은 7만 대군의 주력 병력을 이끌고 동흥을 공략했고, 사마소가 감군의 직책에서 이 둘을 감독했습니다.

  무창에는 대치전이 계속되었고, 강릉은 워낙에 요충지인 곳이라 오나라가 쉽게 내주지 않았습니다. 제갈각은 무창과 강릉에 지원을 하면서도 4만 대군의 지원군과 정봉, 여거, 당자, 주이 등의 휘하 장수와 함께 동흥에 당도합니다. 동흥의 두 성은 각각 병력이 천 명밖에 없었지만 지원군이 올 때까지 위나라 대군의 공세를 충실히 방어합니다.

  제갈각과 정봉은 행군이 지지부진 하다는 사실을 알고 별동대를 조직합니다. 이는 위나라가 병력을 강에 놓은 부교로 이동시키고 제방 위에 많은 병력을 배치시켰기 때문입니다. 정봉은 3천 명의 별동대를 제갈각은 평북장군 정봉에게 군사 3000명을 주어 장강을 따라 나가고 여거, 당자, 주이에게 나머지 병력을 주어 따르게 했습니다. 정봉은 병력을 30척의 배에 나누어서 싣고 빠르게 진군합니다.

 

  3. 평북장군 정봉, 전장을 뒤흔들다

 

  정봉이 도착했을 때 절묘하게도 위군은 공성을 중단하고 연회를 벌이면서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정봉과 그의 별동대는 칼과 방패만 가지고 제방에 올랐습니다. 갑옷이 없어서인지, 병력이 적어서인지 위군은 오군을 보고 크게 비웃으며 방심했습니다. 정봉과 오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나라의 주둔지를 깨뜨렸고, 여거, 당자, 주이가 이끄는 오나라 대군이 뒤를 이어 도착하자 놀란 위군은 앞다투어 도망쳤습니다.

  그 뒤에 전투는 일방적이었습니다. 부교에 너무 많은 퇴각 병력이 타서 무너지기도 했고, 주이의 별동대 수군으로 인해 부교가 끊어지기도 했습니다. 퇴각로가 막히자 위군이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거나, 도망치지 못하고 죽는 병력도 셀 수 없었습니다. 호준의 휘하 장수인 환종과 한가로 정봉에게 죽었습니다. 호준은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수만 명의 위군이 죽었고, 강릉과 무창 방면에 있었던 왕창과 관구검은 동흥에서의 패전 소식을 접하고 후퇴했습니다. 전투의 대승으로 오군은 수천 대의 수레와 가마, 수천 마리의 소, 말, 노새, 당나귀를 노획하고, 빼앗은 물자와 무기가 산처럼 쌓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4. 동흥전투 이후의 향방

 

  패전한 위나라에는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위나라 조정에서는 일선에 장수들을 처벌해야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서쪽 지방에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심각한 대패에 사마사는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면서 본인과 동생 사마소의 즉위를 강등시키면서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반면 오나라의 제갈각은 대승에 고무되어 대규모의 북벌을 주장합니다. 입지가 탄탄해진 그는 지금이 기회라고 주장하며 반대 목소리를 눌렀습니다. 동흥전투 이후 3개월 만에 자그마치 20만 대군을 모아서 합비로 진군합니다. 삼국지에서 20만 명이 한 전쟁에 동원된 사례는 손에 꼽을 만큼 대병력이었습니다.

 

 

 

 

  5. 3,000 vs 200,000: 수성의 장특

 

  253년 3월, 제갈각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신성을 포위합니다. 이 때 위나라의 장특이라는 장수가 합비신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배송지주-장특전'에 의하면 신성 안의 병력은 겨우 3천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90여일간 필사적으로 수성하지만, 제갈각이 토산까지 쌓으며 공격하고 성의 곳곳에 구멍이 생깁니다. 풍전등화의 상황에 이르자 장특은 고심 끝에 항복하겠다는 말을 전합니다.

 

  ["오늘 나는 다시 싸울 마음이 없다. 그러나 우리 위나라의 법에는 공격을 받아서 100일이 넘었는데도 구원병이 오지 않게 되었다면 비록 항복을 하여도 그 집안사람들이 연좌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적의 공격을 받은 이래로 90여 일이 지났고, 이 성 안에는 본래 4천여 명이 있었는데, 전사자가 이미 반을 넘겼지만 성이 비록 함락된다고 하여도 오히려 이 반쯤 남은 사람들은 항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돌아가서 서로 상의하여 좋은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해서 내일 일찍 명단을 보내겠고, 또한 인수를 버리는것으로 신표를 삼겠다."]

 

  장특은 오군 쪽으로 인수를 던지고 제갈각은 공격을 중단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항계였고, 오군이 공격을 중단한 날 밤에 성 안에 있던 목재로 성벽을 채우면서 성을 수리합니다. 다음 날 장특은 "나는 다시 싸우다가 죽을 뿐이다."라고 전하죠. 분노한 제갈각은 재차 공격을 명령하지만 오군의 피해는 막심해지기만 했습니다. 심지어 여름이 되어 전염병이 창궐하고 그렇게 병력 태반이 병에 걸리거나 공성전에서 죽고 다치는 사태로 귀결됩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지자 오군은 뒤늦게 퇴각하지만 관구검과 문흠의 위나라 추격병으로 또다시 많은 피해를 입고 간신히 퇴각합니다.

 

  6. 대패의 후폭풍

 

  오나라는 합비신성의 패전으로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인구 250만명인 오나라에서 20만명의 대군이 만신창이를 입었으니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져갔죠. 그러나 제갈각은 실패를 인정해도 시원찮을 시기에 주변 사람들을 탓하면서 재차 북벌을 주장합니다. 지난날 숙부 제갈량이 1차 북벌 실패의 책임을 느끼고 즉위를 스스로 낮췄던 것과는 비교되는 일입니다. 결국 오나라에는 당해 내분이 일어났고 제갈각은 암살당합니다.

 

  반면 위나라와 사마씨 형제의 권력은 오히려 공고해졌습니다. 오나라는 그 이후 동흥 전투만큼 위나라 상대로 수만 명을 살해하는 전공을 다시 세우지 못합니다. 물론 그 뒤에도 양국 사이에 계속 충돌은 있었지만 오나라는 유의미한 전과를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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