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Next Question | '역사' 카테고리의 글 목록
250x250
반응형
안녕하세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며,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을 접하길 원하는 1인입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며 주기적으로 헌혈하는 헌혈자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TODAY TOTAL
역사 (20)
[중동사] 7세기 이슬람의 이집트와 페르시아 정복, 우마이야 왕조의 시작
728x90
반응형

https://neovisionnew.tistory.com/501

 

[중동사]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황혼의 영광(부제: 야르무크 전투)

https://neovisionnew.tistory.com/384 [중동사] 초기 이슬람에서 무함마드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승리(~634년) https://neovisionnew.tistory.com/59 [전쟁사]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악연(Main: 530년

neovisionnew.tistory.com

 위 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1. 양면전쟁

 

  634년, 할리드가 피라즈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이하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을 때 계획대로라면 페르시아를 계속 공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전선에서도 이슬람군이 싸우고 있었고, 여기서 아부 우바이다 등이 밀리자 아부 바크르는 할리드에게 서쪽으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페르시아도 가만히만 있지 않았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이슬람 군대를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내부 사정이 엉망이라 그 이상으로 깊게 진격하지는 못했고, 2년 가까이 대치 상황만 지속했습니다.

 

  2. 알 카디시야 전투(Battle of al-Qadisiyyah, 636년)

 

  우마르는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라는 장수에게 4천 명의 지원 병력을 주고 페르시아에게 밀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는 7번째로 이슬람에 귀이한 인물이고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위협당할 때부터 함께 싸운 인물이었습니다. 사드는 우마르의 말대로 계속 협상하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귀이하라고 계속 회의했죠.

 

  페르시아군을 이끄는 사령관 루스담도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했습니다. 636년 8월, 이슬람 군대가 야르무크 전투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고 비잔티움 전선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우마르는 동쪽과 서쪽의 전선에게 모두 전령을 보냅니다.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에게 동쪽으로 지원군을 보내라고 명령했고, 사드에게는 지원군이 도착하면 행동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5천 명의 지원군이 카디시야 근처에 도착하자, 사드는 전투를 개시합니다.

 

  페르시아 군대의 병력은 5만, 이슬람 군대의 병력은 3만 5천 정도로 병력은 전자의 우위였습니다. 양쪽 군대 모두 기병이 4분의 1, 나머지가 대부분 보병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은 2년 ~ 3년 전 할리드에게 왈라자, 울라이스, 피라즈 전투 등에서 정예병을 대부분 상실했기에 경험이 전무한 병사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루스담은 병력을 4개로 나누고 각각 코끼리를 8마리씩 배치했습니다. 사드 역시 보병과 기병을 4개로 분리해서 맞대응했습니다.

 

 

  636년 11월 16일부터 나흘 동안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첫 날 페르시아 궁병의 공격과 코끼리의 돌격으로 기세가 매서웠습니다. 사드는 용맹한 기병들로 하여금 코끼리 가까이 진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코끼리 위 안장을 고정시킨 줄을 끊어버리거나 탑승한 페르시아 병사들을 화살로 저격했습니다. 사드는 바로 반격을 개시했지만 종결짓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병력의 일부는 상대 측 사령관 루스담을 노렸으나 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루스담은 이 기습으로 몸 여러 군데에 잔부상을 꽤 입었습니다.

 

  둘째 날에 '알 카카 이븐 암르 알 타미미(이하 카카)'라는 이름의 장수가 천 명의 지원군을 추가로 이끌고 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도착하기 직전 한 덩어리로 오는 게 아니라 지원군을 여러 갈래로 나누었습니다. 나누어진 모든 병력에게 흔히 말하는 '장사진' 진형으로, 길게 줄을 지어서 오도록 지시했습니다. 페르시아는 적들의 병력이 훨씬 더 많이 불어났구나 라고 착각했고, 그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이슬람의 선제공격이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전투를 종결짓지는 못했지만, 3배 ~ 4배에 달하는 전투교환비 이득을 봤습니다.

 

 

  셋째 날, 이슬람군의 눈앞에는 재정비를 마친 코끼리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슬람 진영 가까이까지 페르시아의 기병과 보병은 코끼리를 호위했고, 코끼리들이 이슬람군을 밟을 때가 되자 코끼리 앞에 있던 병력은 길을 비켜주었습니다. 무자비한 전투 코끼리들로 인해 이슬람 진형은 계속 뒤로 밀려났고,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사드는 싸울 수 있는 기병들에게 측면으로 파고 들어가 코끼리를 한두 마리씩 차례로 제압하도록 했습니다. 기병은 다시 한 번 코끼리 궁수들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었고 코끼리의 눈을 멀게했습니다. 서로 수천 명의 병사들을 또다시 잃었습니다.

 

 

  누구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넷째 날 전장에 모래 폭풍이 불었고, 서로 시야를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카카가 이끄는 이슬람 결사대는 페르시아가 정신을 못 차리는 시간을 틈타 중앙으로 파고 들어 루스담을 살해했습니다. 사드는 루스담이 희소식을 듣고,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반면 페르시아 군대는 우리들의 총지휘관이 죽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고, 혼비백산 상태에 처해졌고 도망쳤습니다.

 

  전투의 승리로 전리품이 산처럼 쌓이자 우마르는 병영 도시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쿠파'라는 도시가 만들어졌는데, 오늘날 이라크 도시 나자프의 시초였습니다. 이슬람군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바빌론에 도달했습니다. 바빌론을 지키던 페르시아의 장수들은 겁을 먹고 도망치고, 오히려 바빌론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슬람의 편에 서서 첩보원 역할을 하거나 건설 사업에 뛰어드는 등 협조적이었습니다. 심지어 공성 무기를 생산해주기까지 했습니다.

 

  3. 크테시폰 공성전(Siege of Ctesiphon, 637년)

 

  이제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은 풍전등화의 신세에 처했습니다. 637년 1월, 이슬람 군대는 크테시폰 옆에 있는 바르시르를 포위했니다. 티그리스 강 바로 동쪽에 크테시폰이, 서쪽에 바르시르가 있었습니다. 샤한샤(페르시아의 황제, 왕중의 왕) 야즈데게르드 3세는 바르시르 주위에 해자를 파면서 버텼습니다.

 

지도 속 Ktesiphon이 크테시폰, Veh-Ardashir가 바르시르입니다.

 

  수성 도중 크테시폰에서 바르시르로 가는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2개월 뒤 3월이 되자 바르시르 내부의 물자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페르시아는 포위망을 깨기 위해 훈련된 사자까지 동원했지만, 하심이라는 이슬람 장수가 명궁이었는지 화살을 쏴서 사자가 날뛰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페르시아는 주흐람이라는 이슬람 장수 1명이 전사하는 공적만 달성하고 전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고민 끝에 사신을 보냅니다.

 

  "우리 황제께서는 티그리스 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동쪽은 우리 페르시아의 것으로 남고, 서쪽은 당신들의 것으로 된 후에 평화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조건이 당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당신들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사드는 전혀 만족하지 않았고, 페르시아가 이슬람에 복종하고 세금을 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전쟁이라고 콧방귀를 뀌었죠.

 

  역시나 바르시르는 더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습니다. 다만 바르시르에 있던 페르시아군이 탈출하면서 티그리스 강에 있는 다리를 끊었습니다. 배는 강의 동쪽 기슭의 페르시아 진영 가까이 두었습니다. 마침 티그리스 강이 불어났고, 페르시아는 도랑을 파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슬람에 귀이한 페르시아인들이 강이 얕은 지점을 알려줬고, 덕분에 이슬람 기병대는 활로를 통해 강을 건넜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배로 대부분의 군대가 크테시폰으로 진입했습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왕궁의 보물을 갖고 동쪽의 '훌완'이라는 도시로 도망쳤습니다. 그럼에도 황궁 창고에 은화만 90억냥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사드는 크테시폰에 있던 페르시아인들에게 공물을 내는 조건으로 목숨을 살려두었지만, 도망친 난민들을 쫓아서 학살하고 약탈했습니다.

 

 

빨간색 화살표는 사드가 이끄는 이슬람군의 진격로고, 노란색 화살표는  야즈데게르드 3세가 도망친 퇴각로입니다.

 

  4. 잘룰라 전투(Battle of Jalula, 637년)

 

  남은 페르시아 군대는 북쪽의 모술, 티그리트, 잘룰라 등으로 흩어졌습니다. 태반 이상이 잘룰라에 있었는데, 이곳은 티그리스 강의 지류인 디얄라 강을 끼고 있는 곳이자 아제르바이잔으로 가는 길목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크테시폰 공성전에서 화살로 활약을 한 하심이라는 장수가 1만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라자드와 미흐란이 이끄는 페르시아 2만 군대와 싸웠습니다. 프라자드와 미흐란은 크테시폰 공성전에서도 페르시아 사령관으로 있었고, 프라자드는 알 카디시야 전투에서 전사한 루스담의 형제이기도 했습니다. 637년 4월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미흐란은 적들이 돌아서 공격하지 못하도록 자그로스 산맥과 디얄라 강 사이에 자리 잡았고, 앞에 마름쇠를 설치하고 참호를 팠습니다. 전투가 벌어지자 페르시아 궁수들이 전과를 올리고 이슬람군은 후퇴했습니다. 전황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미흐람은 참호에 다리를 놓고 페르시아군을 진격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심의 계산대로였습니다. 카디시야 전투에서 활약한 카카라는 장수에게 기병을 맡겨서 참호에 놓인 다리를 점령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역시나 이슬람의 승리로 끝났지만 수천 명의 페르시아군이 방어 요새로 다시 들어가는 것까지 막지 못했고, 이슬람 쪽 피해도 적지 않아서 몇 개월 간 포위전이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공물을 바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이슬람에 항복했습니다. 미흐람은 동쪽으로 도망치다가 추격병에 붙잡혀서 전사했고, 프라자드는 남동쪽으로 피신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뒤이어 모술도 무난하게 이슬람의 깃발이 꽂혔고, 638년이 되어서 이슬람은 이라크 일대를 완젆히 장악했습니다.

 

  다만 아라비아와 시리아에 가뭄과 전염병 사태가 심각해져서 몇 년 동안 정복전이 멈췄고, 당분간 이슬람은 페르시아의 역공을 막아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메디나로 몰렸고, 우마르는 식량을 배급하고 세금을 면제해주면서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5.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이집트를 정벌하다.

 

  637년 말 전염병 사태가 가라앉고 시간이 지나 식량 사정도 점차 개선되었습니다. 지난 글의 야르무크 전투에서 할리드 바로 밑의 부하 장수들 중 아므르 이븐 알 아스(아므르)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집트를 공격할 때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마르는 시리아 안정화가 우선이라며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므르는 지금이야말로 기회라고 간곡하게 호소했습니다. 우마르는 우선 기병 4천의 병력을 주긴 했지만 경거망동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메디나로 돌아가서 잘 의논하고 확답하겠다. 전령을 보낼테니, 그대가 이집트 국경에 도착하기 전에 허락하지 않는다는 서신을 열었다면 바로 회군하라. 그러나 그대가 이집트 땅에 침입한 뒤라면 알라에게 기도를 올리고 신의 뜻에 맡겨라."

 

  아므르가 이집트 삼각주로 진격할 동안, 메디나의 회의 끝에 우마르는 공격을 중단하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전령은 아므르가 이집트 국경을 넘어가기 전 만났습니다. 하지만 아므르는 눈치를 챘는지 일부러 이집트 국경 너머로 들어간 다음에야 우마르가 보낸 서신의 겉봉을 뜯었습니다. 639년 12월, 이슬람의 아프리카 팽창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음해 아므르는 이집트의 펠루시움과 발바이스 요새를 점령하고 바빌론 요새를 포위했습니다.(페르시아의 바빌론 요새과 이름만 같고 다른 장소입니다.) 우마르도 병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4천 명의 병력으로 아므르의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병력으로 바빌론을 함락시키는 건 무리였습니다. 시간이 지연되자 우마르는 주바이르라는 장수에게 다시 4천 명을 맡겨서 보냈습니다. 이렇게 1만 2천 명의 이슬람군은 동쪽의 헬리오폴리스라는 거점을 손에 넣었습니다. 2만 명의 비잔티움군은 늦은 대응으로 격퇴 당했고 바빌론은 다시 포위되었습니다. 바빌론은 이번에는 견디지 못했습니다.

 

  다음은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무역의 중심지이자 비잔티움에게 있어서 2번째로 큰 도시라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곳을 빼앗기면 이집트도 이슬람에게 내주게 되는 셈이었죠. 헤라클리우스는 대규모 지원군을 모아서 알렉산드리아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비잔티움으로서도 해볼만 했던 게, 해상 도시라 지중해를 통해 보급하면 당시 해군이 전무했던 이슬람은 그걸 저지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641년 2월 헤라클리우스는 세상을 떠나고 지원 계획은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여러 겹의 요새와 성벽이 축조된 알렉산드리아였지만, 반 년 가까이 자력으로 싸우다가 함락되었습니다. 얼마나 부유한 도시였는지 아므르는 우마르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우리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습니다. 이 곳에는 4천 개의 대궐과 4백 개의 유흥 시설, 헤아릴 수 없는 재산이 있습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므르는 나일강을 따라 계속 내려가서 누비아 지역을 점령했고 현재 리비아 북부까지 진격했습니다.

 

  6. 니하완드 전투(Battle of Nahavand, 642년), 그리고 페르시아의 멸망

 

니하완드 요새의 그림입니다.

 

  한편, 크테시폰을 빼앗기고 야즈데게르드 3세는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에 위치한 메르브로 저멀리 천도했습니다. 4년 가까이 힘을 기르고 각지를 돌면서 5만 명이라는 군대를 모았습니다. 이슬람을 공격하기 위해 니하완드 성에서 병력이 집결했습니다.

 

  우마르는 그 때까지 페르시아 정복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이슬람 수뇌부들은 부유한 시리아와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을 평정한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우마르 본인도 잘룰라 전투이후 동진하려는 장수들에게 그만 가라고 저지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자꾸 옛 땅을 노리는 페르시아의 태도에 칼을 뽑았습니다.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등 여러 이슬람 지휘관들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었습니다. 이 전투의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번에도 이슬람의 승리였고, 페르시아는 니하완드 성을 뺏겼습니다.

 

 

  니하완드 전투의 패배로 페르시아 사람들은 왕중의 왕이라고 불리는 야즈데게르드 3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페르시아는 더욱 분열되었고,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각 지역의 군벌이 난립했고, 백성들은 세금을 거부하기까지 했습니다. 다시 군대를 모집하려고 해봤자 허사였습니다.

 

  이슬람은 거침없이 페르시아의 남은 땅을 흡수했습니다. 오늘날 캅카스 산맥, 이란 전체, 투르크메니스탄과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아무다리야 강(당시 명칭은 옥수스 강)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였지만, 전쟁의 신이 와도 더 이상의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영토는 없었습니다.

 

 

지도 속 Nahavand가 니하완드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보라색으로 표시한 곳이 페르시아가 마지막으로 저항한 메르브입니다.

 

  651년,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렇게 멸망했습니다. 3세기 초반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400년 가까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지속된 나라가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 이후 야즈데게르드 3세는 방랑하다가 메르브의 한 방앗간 주인에게 죽었고, 황태자 페로즈는 당나라 장안으로 도망쳐 당나라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사실 당태종 때부터 야즈데게르드 3세가 당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공물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당나라라도 고구려쪽 정세를 먼저 신경써야했고, 그 머나먼 이란까지 원정군을 보내는 건 무리라 제대로 도울 수 없었습니다. 당고종은 도망친 페르시아 황족과 난민들을 받아들였고, 명목 상의 직책이지만 페르시아 총독 자리를 주었습니다.

 

  7. 우마르와 우스만의 죽음

 

  이슬람군이 한창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나가는 644년, 칼리프 우마르가 암살당하고 우스만 이븐 아판(이하 우스만)이 3대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사위였고 메카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습니다. 우스만의 부는 초기 이슬람의 군자금이며 오아시스와도 같았습니다.

 

  우스만은 우마르 사망 직후 각자의 반란을 진압했고, 영토확장을 이어나가 리비아와 아르메니아를 점령했습니다. 무엇보다 이슬람의 교리인 '쿠란'을 대대적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는 우마르와 다르게 창고의 돈을 아끼지 않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습니다. 수로를 파서 물을 공급했고 수천 개의 모스크를 건설했습니다. 상인 출신이라 상인들을 위한 도시와 시장도 대폭 늘어났습니다. 곳곳에 도로가 건설되었습니다.

 

  하지만 우스만은 지나치게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본인 가문(우마이야)에게 나눠주고, 다른 사람이 주는 선물을 마음껏 챙겼습니다. 사적으로 선물을 받지 않았고 가족에게도 금기시켰던 우마르와 대비되는 부분입니다. 또 규정을 변경해서 정복지의 매매를 허용했고, 장군과 병사들에게 중앙 정부의 돈을 마음껏 빌려주어서 그들이 땅을 사게 장려했습니다. 정복지의 이슬람 총독은 부를 축적하게 위해 세금을 크게 올렸습니다. 심지어 우스만은 일가친척을 정복지의 총독으로 보냈습니다.

 

  우스만과 우마이야 가문을 향한 피정복민의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메디나에 있는 우스만의 집 주위로 시위대가 모여들었고 우스만을 호위하는 사람들과 시위대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그는 담을 넘어 침입한 폭도들에게 656년 살해당했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 읽었던 쿠란은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하자티 이맘 모스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우스만의 쿠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쿠란이라고 일컬어지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위 사진은 타슈켄트에 있는 하자티 이맘 모스크고 아래 사진은 모스크 내부에 안치된 우스만이 죽기 직전 읽었다고 전해지는 쿠란입니다. 굉장히 낡은 쿠란으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8. 알리의 즉위, 그러나...

 

  우스만 사후 무함마드의 사촌인 알리가 4대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의 단결은 이미 퇴색되었고, 알리는 반대 세력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우스만과 가까웠던 우마이야 가문과 특히 주요 도시의 총독은 알리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알리는 그들을 해임했지만 요지부동이었고 예멘 총독은 국고의 돈을 모조리 털어서 달아났습니다.

 

  우스만의 친척이자 다마스쿠스 총독인 무아위야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비군을 자주 훈련시키고 투석기를 늘리는 등 무력으로 알리와 맞먹었습니다. 무아위야는 알리의 해임 명령에 반란을 일으켰고, 아므르 이븐 알 아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여기에 이집트 원정에서 후발대 역할을 맡았던 주바이르, 메카의 권력자 중 하나인 탈하, 셋째 부인인 아이샤 등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예멘 총독은 빼돌린 돈으로 그들을 지원했습니다.

 

 

  알리는 656년 12월 이라크 남부 외곽의 바스라(Barsa)에서 그들을 제압했습니다. 주바이르와 탈하는 죽고 알리는 아이샤를 포로로 잡아 메디나로 보냈습니다. 다음은 무아위야였습니다. 서로 우스만의 죽음에 대해 책임 공방을 벌였지만 결렬되었고 657년 7월 유프라테스 강의 라카(Raqqa)에서 알리와 무아위야는 '시핀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투는 알리 측의 우세였지만 아므르가 꾀를 발휘했습니다. 그의 조언대로 무아위야의 병사들은 창 끝에 쿠란 구절을 적은 종이를 꽂고 쿠란을 암송하면서 걸었습니다. 알리의 병사들은 쿠란을 찢으면서 싸우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였고 다시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내부 분열로 알리는 다시 동쪽으로 군대를 물릴 수밖에 없었고, 무아위야는 세력을 계속 넓혔습니다. 몇 년 동안의 내전 끝에 알리는 반대파의 자객에게 661년 목숨을 잃었습니다. 알리의 아들 하산이 다섯 번째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기충천한 무아위야군에 비해 하산 측의 병력은 싸울 의지를 잃었습니다. 병력 12,000명 중 8,000명이 무아위야 쪽으로 탈영하고 배신자가 나와서 하산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그는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하고 칼리프에서 물러났습니다.

 

  자연스럽게 무아위야가 6대 칼리프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1차 피트나(내전을 의미하는 아랍어)가 종결되었고, 그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다마스쿠스로 옮겼습니다. 680년 무아위야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깨고 죽기 전 아들 야지드에게 권력을 세습했습니다. 그로 인해 반발이 시작되는 2차 피트나에서, 훗날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는 3차 피트나에서 알리 지지자들은 계속 잔존하고 저항했습니다. 알리 지지자들은 시아파가 되어 이슬람에서 두번째로 많은 종파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슬람 신자 중 시아파는 10% ~ 20%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수니파입니다.

 

  (여기까지 글을 마치고 8세기 이슬람 정복 전쟁은 시간이 나면 다뤄보겠습니다.)

 

  9. 출처

도서

버나드 루이스, 『이슬람의 세계사. 1』, 이산(2009)

김승철, 『포용의 정복자 이슬람』, 좋은땅(2014)

허진모, 『전쟁사 문명사 세계사 2』, 미래문화사(2020)

 

유네스코 세계디지털도서관 (https://unesdoc.unesco.org/home)

B. A. 리트빈스키 외 2인, The Arab conquest

 

유튜브

<Early Muslim Expansion - Khalid, Yarmouk, al-Qadisiyyah ...(초기 무슬림 제국 팽창사 - 시리아 및 이라크 정복 602-636)> (https://www.youtube.com/watch?v=r2cEIDZwG5M)

<Early Muslim Expansion - Arab Conquest of Iran and Egypt> (https://www.youtube.com/watch?v=baHT2nR5Wr4)

영문위키

<Battle of al-Qadisiyyah>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l-Qadisiyyah

<Siege of Ctesiphon (637)>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Ctesiphon_(637)

<Battle of Jalula>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Jalula

<Batle of Nahavand>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Nahavand

<Amr ibn al-As> https://en.wikipedia.org/wiki/Amr_ibn_al-As

<Muslim conquest of Egypt> https://en.wikipedia.org/wiki/Muslim_conquest_of_Egypt

<Siege of Alexandria (641)>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Alexandria_(641)

<Yazdegerd III> https://en.wikipedia.org/wiki/Yazdegerd_III

<First Fitna>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Fitna

 

728x90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부분동원령으로 30만명 증강한 러시아군
728x90
반응형

https://n.news.naver.com/article/020/0003452042?cds=news_media_pc

 

다급해진 푸틴, 예비군 30만명 동원령 발표…“모든 수단 동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30만 명 규모로 예상되는 부분 동원령 발동을 공식 선언했다. 러 관영 타스통신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오

n.news.naver.com

 

  오늘 푸틴이 부분동원령을 선포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그 밖에 국방장관 등이 몇 가지 조치를 살펴보면...

 

1. 예비군과, 전투에 경험이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징집한다. 총 30만명이 동원됩니다.

 

2. 동원된 군인은 계약군인 지위를 부여 받고 그에 맞는 임금을 받습니다.

 

3. 소집 대상자들은 출국이 금지됩니다. 50세 이상의 예비군과 예비병력, 60세까지의 장교는 특별한 허가 없이 러시아 국경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4. 서방 세력은 오랜 시간 러시아의 분열을 조장해왔다. 그들은 1991년 소련 분할에도 개입했고 우크라이나와 함께 러시아를 위협해왔다.

 

5. 헤르손, 자포리자, 도네츠크, 루한스크 등 점령한 영토를 합병하기 위해 조치를 취할 것이다.(국민투표 암시)

 

6. 러시아의 영토와 국민 수호에 위협이 될 경우 핵무기와 대량 살상 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

 

 

  러시아가 병력을 대폭 늘렸습니다. 초기 인원이 20만 명인데 30만 명을 동원했다는 건 밀리고 있는 현재 상황을 그냥 두고보지는 않겠다는 뜻이죠. 차마 총동원령까지는 아직 못 내린 걸 보면 러시아 내부 민심을 아예 무시하지는 않은 듯 합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선에 병력을 투입한다고 전세가 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필자는 러시아군의 겨울 방한 준비가 부실할 것으로 예측합니다. 전쟁 초반에도 동상으로 죽는 군인들이 많이 나왔었는데 몇 달 뒤라고 다를까요.

 

  부분동원령으로 뽑은 30만명의 인원이 전선에 투입되기 보다는, 원래 있던 러시아 상비군을 우크라이나 전선으로 밀어넣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네요. 상비군의 빈 자리는 부분동원령으로 징집된 병력이 대신하고요. 그 병력을 무장시키고, 훈련시키는데 시간이 걸리는데 그 사이에 전황이 더 나빠질 상황도 있으니까요.

 

  일단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병력을 대폭 늘리는 건 확정인데, 그 많은 인원을 어떻게 준비시킬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머지 않아 라스푸티차가 시작됩니다. 그 많은 인원을 보급하기에도 어려워지고, 특히 전차나 장갑차를 운송하는데도 최악의 조건이라 시간이 지연됩니다.

 

  러시아군이 남은 점령지를 모두 잃고,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면 푸틴은 권좌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와서 우크라이나가 양보할 리가 없고요. 2월 말 회담에서도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에서 손을 떼라고 요구했는데, 대대적인 반격의 결실을 거두는 현재 상황에서는 말할 것도 없죠.

 

  푸틴은 2차 체첸 전쟁에서의 성공처럼 우크라이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무슨 생각으로 이 전쟁을 벌였는지 정말 궁금합니다. 전쟁사에서 전쟁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벌어질 수 있다고 하지만, KGB 정예 장교 출신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부실한 계획을 짰다는 게 의아하네요.

 

  우크라이나는 크림반도까지 되찾으려 할테고, 필자 역시 우크라이나의 승전을 바랍니다만 그렇게 대실패가 임박하면 푸틴이 눈이 뒤집혀서 무슨 짓을 할까 두렵네요. 특히 핵무기 버튼을 누르는 끔찍한 일은 제발 없기를 기원합니다. 결과적으로 속전속결로 끝내지 못한 시점부터 이미 푸틴이 패배한 전쟁인 것 같네요.

 

 

  푸틴의 전임이었던 옐친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를 빈털털이로 만든 지도자입니다. 국민의 5분의 1이 생계를 유지하기도 어려운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임기 말 러시아의 GDP가 소련 말년의 절반으로 추락했죠.

 

  사진 속 2명은 분명 러시아 역사에서 연이은 암군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728x90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중동사]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황혼의 영광(부제: 야르무크 전투)
728x90
반응형

https://neovisionnew.tistory.com/384

 

[중동사] 초기 이슬람에서 무함마드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승리(~634년)

https://neovisionnew.tistory.com/59 [전쟁사]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악연(Main: 530년의 다라 전투) 1.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476년, 오토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

neovisionnew.tistory.com

  예전에 썼던 글에서 계속 이어지는 글입니다.

 

배교 전쟁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X자 표시로 된 곳이 모두 전투지입니다.

 

  1. 배교 전쟁(릿다 전쟁, Ridda wars)

 

  634년 다마스쿠스 공성전 도중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사망하고 우마르가 다음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우마르는 지도자에 오르자 마자 바로 할리드의 총사령관 직책을 박탈했습니다. 정황을 살펴보면 우마르가 할리드를 개인적으로 싫어했다는 설이 유력하고 필자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 잠깐 몇 년 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과거 무함마드가 죽고 아라비아 반도는 이전처럼 분열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무함마드가 지도자 활동을 하기 전 수십 개 부족이 난립하여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들지 못했죠. 유목생활을 했던 그들은 서로 다른 신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메디나와 메카 같이 몇 안 되는 도시들이야 산업이 발달되어 있었지만, 다른 부족들은 떠돌아다니며 서로를 약탈했습니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열심히 포교했고, 한 때 적대적이었던 2대 칼리프 우마르와 명장 할리드도 무함마드를 따랐죠. 하지만 무함마드가 죽을 당시에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아라비아 부족들과 전쟁을 벌여서 진압하거나 반강제적으로 개종시켰기에, 기존 부족들은 복수심을 가질만 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만 무함마드를 따랐죠. 무함마드가 죽고 이 때다 싶어 여러 부족들이 봉기했는데 이를 '배교 전쟁'이라고 합니다.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반란이 일어났고 그들은 메디나까지 위협했습니다.

 

 

  아부 바크르는 직접 두키사를 점령하고 할리드에게 출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할리드는 부자하에 도착했는데, 자신이 가진 6,000명의 군사에 비해 상대 병력이 15,000명이나 되자 묘책을 내어 상대 지도자 툴라이하와 일기토를 벌입니다. 가볍게 승리한 뒤 사기가 떨어진 적들을 향해 전투를 벌여 부자하를 회복했습니다. 그는 죽지세로 자파르까지 도달했고, 다음은 부타였습니다.

 

  부타에 몇몇 부족들 중 '말리크'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무함마드가 신뢰했던 인재 중 하나로 지금으로 치면 국세청장의 직책에 있었습니다. 말리크는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세금을 성실하게 메디나로 운송했는데 그가 죽고나자 부족들에게 세금을 돌려준 뒤 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할리드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싸우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시 세금을 징수하여 메디나로 보냈고, 본인은 동쪽의 사막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할리드에게 사로잡혀서 처형당했습니다.

 

  아부 바크르는 반역을 했더라도 이슬람의 율법에 따른다면 관용을 베풀라고 당부했습니다. 말리크는 여전히 본인은 이슬람 신자이며 주변의 적대적인 세력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고 호소하지만 할리드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도 열지 않고 말리크를 죽이고 심지어 그의 아내였던 라일라 빈트 알 민할과 바로 결혼했습니다. 메디나의 주요 인사들은 이것 때문에 말리크를 죽였냐며 그를 비난했습니다. 우마르도 할리드를 쫓아내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아부 바크르는 처벌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할리드는 야마마까지 진군하여 하니파 부족 지도자인 무사일리마까지 물리쳤습니다. 이 야마마 전투에서 적들이 4만 명이나 될 만큼 최대 고비였는데 할리드는 3분의 1도 안 되는 병력으로 승리했습니다. 이렇게 할리드는 반 년도 안 되어 온전한 아라비아 통일을 이루었고, 배교 전쟁의 일등공신이었습니다. 다만 우마르 눈 밖에 나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2. 북진하는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

 

  그렇게 할리드는 다마스쿠스 공성전 - 마라즈 알 데바르 전투 이후 해임 소식을 들었습니다. 총사령관 직책은 다음 계급 순서이자 공성전에 참여한 아부 우바이다에게 넘어갔습니다. 할리드에 비해 우바이다는 온건파에 속하는 인물이라, 정복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하지만 우바이다도 할리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뛰어난 인물이라 이슬람의 연전연승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성향이 달라도 우바이다는 할리드를 존경하고 있었고, 전쟁터에서 항상 그의 조언을 들으면서 정복했습니다. 우마르도 할리드를 아예 물러나게하거나 처형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할리드는 예전 만큼은 아니지만 계속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었고 기병대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생소한 도시 이름과 위치는 이 지도에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636년 5월까지 할리드를 비롯한 이슬람 장군들의 진격로입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 입장에서는 과거 사산조와의 전쟁처럼 시리아를 상실하는 목전에 놓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할리드는 635년 1월 펠라(Pella)라는 도시를 손에 넣고 이슬람 군대는 양쪽으로 나뉘었습니다. 아므르와 슈르하빌이라는 장군들은 남쪽의 팔레스타인으로, 할리드와 우바이다는 북쪽의 에메사로 진군했습니다.

 

  이 때 헤라클리우스는 안티오크에 있었습니다. 적들이 다마스쿠스를 벗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테오도라스라는 장군에게 다마스쿠스를 되찾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테오도라스는 휘하 군대를 둘로 나누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을 먼저 보내고 후속 병력을 추가하는 식으로 편성했습니다. 후속병력은 샤나쉬라는 부하에게 맡기고 본인은 선봉대와 함께 달렸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할리드의 대처가 더 빨랐습니다. 그는 우바이다에게 허락을 받아 친위 기병대를 이끌어 다마스쿠스에 가장 먼저 도착했습니다.

 

  심지어 할리드는 비잔티움 측에 스파이를 심어서 적들이 어느 방향으로 오는지 간파했고, 적들이 다마스쿠스 성 수비대 가까이 오자 후방을 급습하여 또다시 승리했습니다. 테오도라스는 전사했으며, 한편 우바이다도 똑같이 샤나쉬를 죽이고 추가로 오는 적 병력을 격파했습니다. 오히려 할리드와 우바이다는 다시 병력을 합쳐서 북쪽의 바알벡을 점령했습니다.

 

 

  3. 에메사 공성전(Siege of Emesa)

 

  헤라클리우스는 에메사로 전령을 보내 이슬람과 휴전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는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는데 병력을 모으고 있었고 우선 수비부터 신경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바이다는 제의를 받아들이고 1년 동안 휴전을 맺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에메사의 시장을 이용하는 등 조용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증원군이 칼키스, 즉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우바이다는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즉시 에메사를 공격했습니다.

 

  635년 12월, 에메사 공성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할리드는 성 밖의 병력을 공격했고 우바이다는 4개의 성문에 모두 병력을 배치하여 에메사를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해자로 둘러싸인데다 공성무기도 변변치 않아 서로 화살로 공격할 뿐 포위전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추운 겨울이 끝나고 에메사를 지키던 하비스(Harbees)라는 장수는 636년 3월 5,000명의 병력으로 이슬람 군의 한 쪽을 공격했습니다. 포위망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지만 할리드가 기병을 이끌고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그 다음날 회의에서 우바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할리드에게 의견을 구합니다. 할리드는 거짓 후퇴를 제안했고 우바이다는 실행에 옮깁니다. 다시 하루가 지나 새벽에 이슬람군은 남쪽으로 도망쳤습니다. 하비스는 다시 기병이 주력인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슬람군의 뒤를 쳤습니다. 그 순간 할리드는 기병을 둘로 나누어 추격해온 적들의 양쪽 측면으로 역공했습니다. 하비스는 전사했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려던 비잔티움군의 패잔병도 대부분 살아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남아 있던 에메사의 시민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항복했습니다. 이 공성전 과정에서 비잔티움군은 4,9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이슬람군은 200명 ~ 300명 남짓이었습니다.

 

  4.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반격

 

지금도 시리아 지역의 저 강(Yarmuk)은 야르무크 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헤라클리우스는 10만 대군이 넘는 병력을 보냈습니다. 이 때 이슬람군은 우바이다와 할리드, 슈르하빌, 아므르, 야지드 등 여러 장수들의 휘하 병력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각개격파를 꾀한 것입니다. 하지만 할리드가 포로로 잡은 비잔티움 보급 부대를 심문해서 이 소식을 들었고, 그는 우바이다에게 하루빨리 주변의 모든 병력을 집결시켜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다마스쿠스와 에메사를 빼앗기는 출혈을 감수하고 이슬람 군대는 하나로 뭉쳤습니다.

 

  늦지 않게 이슬람의 유능한 장수들이 자비야(Jabiyah) 지역에 모일 수 있었고, 우바이다는 할리드에게 임시로 총사령관 직책을 돌려줍니다. 우마르도 6,000명의 지원군을 보내서 힘을 실어줍니다. 할리드는 고민 끝에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야르무크 강과 가까이 있는 동쪽 평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전투 도중 우마르의 지원을 더욱 신속하게 받을 수 있었고, 할리드가 자랑하는 기병 활용도 근처에 흐르는 강들이 자연적으로 장벽을 형성해 동로마 군을 몰아넣기 용이한 구조였고 할리드의 장기인 기병을 활용하기에도 괜찮은 조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 야르무크 전투(Battle of the Yarmuk)

 

  636년 8월 15일, 서아시아의 패권을 결정짓는 역사적인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노년의 나이라 안티오크에서 대기했고 그의 동생이자 장군인 테오도르 트리티리우스가 총지휘를 맡았습니다. 비잔티움 편으로 가산 왕국의 잔당, 슬라브족, 아르메니아군이 함께했습니다.

 

이슬람군은 좌익 -> 우익까지 야지드 -> 아부 우바이다 -> 슈르하빌 -> 아므르 이 순서로 주요 지휘관이 있었고, 비잔티움 군은 우익 -> 좌익까지 그레고리 -> 다이르잔 -> 자발라 -> 카나티르 순서입니다.

 

 

  이슬람을 총괄하는 건 할리드였고 세부적으로 중앙은 아부 우바이다와 슈르하빌, 좌익은 야지드, 우익은 아므르가 맡았습니다. 3만 ~ 4만의 이슬람 군대는 10만에 달하는 비잔티움 대군과 마주했습니다. 비잔티움의 총사령관은 테오도르였고 좌익에 슬라브족 지휘관 카나티르, 우익에 부사령관 중 하나인 그레고리, 중앙에 아르메니아 사령관 바한과 부사령관 다이르잔, 가산 왕국의 왕인 자발라가 있었습니다. 또 비잔티움의 진열은 10km에 달할만큼 길었습니다.

 

  비잔티움 총사령관은 테오도르였지만 기록을 보니 2인자인 바한이 부하들에게 직접적인 지시는 더 많이 내린 것 같습니다. 양군 휘하 지휘관들의 대진표는 야지드 vs 그레고리 / 아부 우바이다 vs 다이르잔 / 슈르하빌 vs 자발라 / 아므르 vs 카나티르 이렇게 됩니다.

 

 

  양군 모두 보병 뒤에 기병을 배치했습니다. 당연히 비잔티움은 중기병을, 이슬람은 경기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다만, 할리드는 유격으로 움직이는 기병대를 따로 편성해서 최후방에 배치했습니다. 이들은 할리드가 이끌던 정예 경기병 병력인 '모바일 가드'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할리드는 바한과 만나 대화했습니다. 바한은 거만한 태도로 할리드를 맞았습니다.

 

  바한: "음식과 황금을 줄테니 이 땅에서 물러가라"

 

  할리드: "우리는 배고프지 않고 필요한 것도 없다. 너희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평화로울 것이다. 이를 거절한다면 전쟁 뿐이다."

 

  바한: "우리의 땅을 차지하려는 자들은 모두 패배했다."

 

  바한은 비잔티움 군대는 사산조를 이겼다는 걸 암시했습니다. 협상은 간단히 결렬되었고 남은 건 살육이었습니다.

 

  전투 첫째 날은 무력이 강한 장수들의 일기토와 소규모 교전으로 서로 큰 피해 없이 끝났습니다.

 

 

회색으로 칠해진 기병대가 할리드가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유격 기병대입니다. 아므르의 병력을 지원합니다.
할리드는 바로 좌익의 야지드를 구원합니다.

 

  둘째 날, 테오도르와 바한은 이슬람군이 아침에 기도하는 시간을 노려서 아침에 적들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할리드는 첫째 날 밤 전방에 작은 초소 기지를 만들어서 기습에 잘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은 양쪽 측면에 거센 공격을 가했고, 중앙은 충분히 묶어둘 수 있는 정도의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슬람군의 중앙군이 측면에 신경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잔티움 좌익을 맡은 카나티르는 이슬람군 우익에 있던 아므르의 군대를 상대했습니다. 아므르는 보병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하고 뒤에 있는 기병대에게 반격을 지시했습니다. 할리드는 늦지 않게 아므르의 기병에게 카나티르의 왼쪽을, 자신의 유격 기병대에게 카나티르의 오른쪽을 타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카나티르가 이끄는 비잔티움 좌익 군대는 후퇴했습니다. 이렇게 할리드는 우익의 위기를 수습했지만, 반대쪽 형세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그레고리의 비잔티움 우익은 야지드의 이슬람 좌익을 그들의 베이스캠프까지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베이스캠프에 있던 병사들의 부인들이 갑자기 천막을 해체했습니다. 천막을 지탱한 나무 막대로 무장하면서 당신들은 불명예와 파멸을 맞을 것이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야지드와 병사들은 잃어버린 사기를 되찾고 다시 비잔티움에게 달려갔습니다.

 

  한편 할리드는 기병 유격대의 일부를 빼내어 비잔티움 중앙을 기습했고, 이 결과로 비잔티움의 우익 중앙을 맡았던 다이르잔이 전사했습니다. 그는 남은 기병대로 야지드와 함께 좌익의 위기도 수습했습니다.

 

  셋째 날 전투 역시 비잔티움의 공세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좌익에 힘을 실어서 이슬람의 우익 군대부터 붕괴시킨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병력차로 비잔티움이 밀어붙이는 듯 했지만, 이번에도 할리드는 큰 피해없이 후퇴하면서 유격 기병대로 하여금 따라오는 적들에게 측면 공격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번에도 테오도르와 바한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할리드는 비잔티움의 좌익 중앙이 들어오자 3방향에서 공격하여 상황을 반전시켰습니다.

 

  전투 넷째 날이자 636년 8월 18일, 바한은 어제의 방식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카나티르와 자발라에게 병력을 더욱 실어주면서 반드시 이슬람의 우익을 붕괴시키도록 했습니다. 할리드는 아부 아부이다와 야지드에게 각각 맡은 전선에서 전선이 합쳐지거나 길어지지 않도록 신경쓰라고 당부했습니다.

 

  좌익 중앙에 있던 자발라의 병력이 깊숙히 들어오고, 자발라와 카나티르의 병력이 서로 약간 멀어졌습니다. 이 때 할리드는 유격 기병대를 둘로 나누어서 자발라의 양쪽 측면을 동시에 공격했습니다. 아부 우바이다도 호응해서 정면을 공격했고, 이렇게 이슬람의 우측 상황은 안정되었습니다. 다른 이슬람 장군들도 끈질기게 버티면서 불리한 상황을 이겨냈습니다.

 

다섯째 날, 바한은 할리드에게 휴전 서신을 보내고 이슬람 장군들이 모여서 회의했습니다.

  이제 다섯째 날입니다. 비잔티움이 압도적인 병력차에도 누적된 피해는 오히려 훨씬 더 많았고, 바한은 할리드에게 사자를 보내서 며칠 동안 휴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할리드는 회의에서 몇몇 장군들이 휴전을 받아들이자는 건의를 물리쳤습니다. 지금이 바로 결정적인 타격을 줄 때라면서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할리드는 기병대를 집결시켜서 8천 명의 기병을 한 부대로 모았습니다. 그 중 500명을 한 장수에게 맡깁니다. 야르무크 강의 다리이며, 적들이 퇴각할 것으로 예측되는 경로를 끊으라고 지시했죠. 그 장수는 밤에 귀신같이 이동해서 다리를 점령했습니다.(위 지도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

 

  여섯째 날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할리드는 모든 병력에게 총공세를 퍼부으라고 명령했고 본인은 어제 모은 8천의 기병대를 이끌었습니다.

 

 

  우선 카나디르가 이끄는 좌익 적들부터 무너뜨렸습니다. 기병을 둘로 나누어서 적들의 보병과 기병을 신속하게 소멸시켰습니다.

 

 

  비잔티움이 다급하게 남은 기병을 집중시켰습니다. 할리드는 적 기병이 재정비하기 전에 기병과 기병 맞대결을 벌였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패배한 비잔티움의 기병대는 북쪽으로 도망쳤고 자발라의 병력도 포위당해서 무너졌습니다.

 

 

  더 이상 비잔티움은 전투를 지속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할리드는 북쪽을 차단했고 남은 비잔티움 보병들은 서쪽으로 황급히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줄 알았던 다리 퇴각로에는 500기의 이슬람 기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잔티움군은 포위되자 다리 아래의 절벽으로 몸을 던지다가 바위에 부딪혀서 사망하고,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다가 이슬람 기병의 추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만 전장이 워낙 광활해서 도주에 성공하는 병사도 많았지만, 이 전투 끝에 비잔티움은 10만 중 5만의 병사를 상실했습니다.

 

  테오도르, 바한, 그레고리는 전사했고, 자발라만 간신히 살아남아서 도망쳤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참패 소식을 듣자 몹시 침통했습니다. 많은 자금을 썼음에도 돌아온 건 정예병을 거의 잃는 대참사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성십자가 등 중요한 유물을 빼내라고 지시했습니다.

 

  6. 할리드의 마지막 원정

 

 

  할리드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637년 4월, 몇 달 동안의 공성전 끝에 기독교의 성지이자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한 이 도시를 손에 넣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소프로니우스 주교의 항복 문서는 우마르가 직접 와서 전달받았습니다. 우마르는 세금을 내는 대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겠다고 서명했습니다.

 

  우마르는 예루살렘에서 기도를 올리고, 다섯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므르와 슈르하빌은 이집트로, 야지드는 카이세리아로,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는 북쪽으로 나아가라고 임무를 나누었습니다.

 

  할리드는 다마스쿠스를 다시 회복했고, 6월에는 7천 명의 적 수비대를 물리치고 칼키스를 점령했습니다.(하지르 전투, 637년 6월) 이 때 할리드의 망치와 모루 전술과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후방을 타격하여 속전속결로 마무리했습니다. 이 보고를 듣고 평소에 할리드를 싫어하던 우마르도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할리드는 진정한 군사 사령관이다. 알라께서 아부 바크르를 축북해주시길. 그는 나보다 위대한 재판관이었다."

 

  과거 배교 전쟁에서 할리드를 감쌌던 아부 바크르의 판단이 옳았다고 인정한 것이죠.

 

알레포 중심에 있는 거대한 성채입니다. 기원전 16세기 아시리아 때부터 지어진 역사적인 건축물입니다. 다만 시리아 내전 이후로 상당히 파괴되었습니다.

  4개월 뒤 알레포까지 점령했습니다. 알레포는 비잔티움이 차지한 레반트 지역의 주요 도시였고, 알레프를 지키던 비잔티움 지휘관도 야전에서 할리드에게 패배하자 백기를 들었습니다. 그 뒤 우바이다와 함께 아자즈를 점령했고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있는 안티오크로 향했습니다.

필자가 화살표로 표시한 강이 오론테스 강입니다.

 

  이 때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남은 2만 ~ 3만의 병력을 모아서 불구대천의 원수와 직접 승부를 벌였습니다. 오론테스 강을 두고 벌어진 전투였는데 자세한 과정은 찾아보기 힘들어서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9개의 아치형 돌다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전투라고 해서 '철다리 전투(Battle of the Iron Bridge)'라고 전해집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만 명의 병력만 잃고 안티오크에서 물러났습니다. 반면 할리드는 1만 7천의 병력이 거의 온전했습니다. 알레포와 안티오크, 두 도시에 깃발을 꽂을 때 수비대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을 보장해서 큰 병력 소모 없이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의 수비대는 콘스탄티노플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할리드는 멈추지 않고 터키 중부의 키질이르마크 강으로 이동했습니다. 심지어 아르메니아도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머지 않아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위험해질 판국이었습니다. 결국, 황제는 레반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7. 퇴장하는 알라의 검

 

  헤라클리우스는 타르수스 등 중요한 요새에 병력을 철수시켜 비무장지대로 두었고, 우마르도 이 완충지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마르는 아부 우바이다에게 시리아 총독 자리를 주고 점령한 지역의 통치를 굳건하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후 한동안 이슬람 세력의 확장은 터키가 아닌 동쪽과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방향이 되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배를 타고 시리아에서 물러나면서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잘 있거라. 나의 속주, 시리아에 긴 작별을 고한다. 그대는 이제 이교도의 땅이 되었구나. 오 시리아여, 그대에게 평화가 함께하거라. 원수의 손에 그대가 얼마나 아름다운 땅이 될 수 있을까."

 

  그는 641년 2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리드의 이야기는 638년에 끝났습니다. 우마르가 할리드를 해임한 것인데, 명분으로 삼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할리드가 말년에 터키 원정에서 페르시아 출신의 한 시인을 만났습니다. '아쉬아'라는 시인에게 1만 디르함(대략 은 30kg)를 줬는데 우마르는 그것이 국고에서 나온 돈이 아닌가 조사했습니다. 할리드는 내 개인 돈이라고 주장했고 곁에 있던 우바이다도 그를 변호했습니다. 여담이지만 할리드의 마지막 원정에서 이슬람이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고, 이 때 원정군 모두가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끝내 우마르는 이걸 명분 삼아 할리드를 메디나로 불러들였습니다.

 

  할리드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런데 우마르는 그대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수긍했고 할리드를 인정했습니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 너는 해냈다. 그 누구도 네가 해낸 것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위업은 인간이 성취한 게 아니다. 모두 알라의 뜻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할리드가 해고당한 것에 분개했고 실제로 몇몇 장수들은 할리드에게 우마르에게 반기를 들어야 합니다라는 강력한 주장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할리드는 우마르와 이슬람에게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우마르는 주위에서 반발하는 여론이 많자 그 누구도 우상화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해명했습니다.

 

  "나는 할리드를 원망하거나 그가 흠결이 있어서 해고한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할리드를 미화하고 잘못된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승리를 위해 위대한 알라보다 그에게 의지할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사람들이 모든 승리를 만드는 건 알라라는 사실을 인지했으면 한다. 이 땅에 그릇된 예언자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4년 뒤 할리드는 자신이 공성전으로 승리한 에메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기 직전 그는 전장에서 죽지 못한 걸 한탄했습니다. 같은 해 사산 왕조 전역에서 우마르는 할리드를 다시 사령관으로 임명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에메사, 현재 홈스인 시리아의 도시에는 할리드를 기념하는 모스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름도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모스크'.

 

 

  할리드가 이슬람 편에 서서 활동한 건 10년이 안 되지만 그 길지 않은 시기의 강렬함은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무함마드 사후 반짝으로 끝날 뻔한 이슬람을 반석 위에 세우고, 이제 막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이슬람 세력으로 거대 제국인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을 상대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사산조 정벌에 나서는 633년부터 비잔티움 전역이 끝나는 638년까지 6년이 채 안 되는 역사에서 못해도 30번이 넘는 전투에서 언제나 승리했습니다.

 

  중요한 전투 때마다 열세의 전력일 때도 많았고, 거의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전투를 치렀을 때도 있었고, 사막 수백 km를 원정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은 할리드에게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포위전, 수공, 공성전, 기습, 공성전, 일기토 등 다양한 방식으로 승리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비잔티움과 사산조 간의 오래 지속된 전쟁도 훗날 이슬람이 승리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특히 사산조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죠. 그리고 할리드와 함께한 아부 우바이다, 아므르 이븐 알 아스 같은 훌륭한 이슬람 장군들의 조력도 빼놓을 수 없겠죠.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생 이슬람과 두 제국 사이의 국력(특히 비잔티움)은 까마득했다고 생각합니다. 할리드와 맞선 적들이 전쟁 경험도 많았다는 점도 그를 높이 평가할 수 있고, 특히 할리드는 그 대단한 헤라클리우스마저 꺾었습니다.

 

  저명한 미국 군사학자 조지 나프지거는 할리드의 대표적인 영광인 야르무크 전투를 역사의 분기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야르무크 전투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전투임에도 인류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이며, 비잔티움의 군대가 승리했다면 현대 세계는 인식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변화했을 것이다."

 

  8. 출처

도서

버나드 루이스, 『이슬람 1400년』, 까치글방(2010)

김승철, 『포용의 정복자 이슬람』, 좋은땅(2014)

아이라 M. 라피두스, 『이슬람의 세계사 1』, 이산(2008)

 

유튜브

<Battle of Yarmouk, 636 AD (Part 1/2) Storm gathers in the

Middle East> (https://www.youtube.com/watch?v=vL33R5F2Pkg)

<Battle of Yarmouk, 636 AD (Part 2/2) Storm gathers in the

Middle East> (https://www.youtube.com/watch?v=_4YePBWh0-w)

 

영문위키

<Siege of Emesa>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Emesa

<Battle of the Yarmuk>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Yarmuk

<Siege of Jerusalem (636–637)>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Jerusalem_(636%E2%80%93637)

<Siege of Aleppo (637)>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Aleppo_(637)

<Battle of the Iron Bridg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Iron_Bridge

<Siege of Germanicia>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Germanicia

 

728x90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한 레딧유저의 세계사 육군/해군/공군 명장 순위를 보고(칭기즈칸, 알렉산더, 나폴레옹 포디움)
728x90
반응형

https://www.inven.co.kr/board/webzine/2097/1853559?iskin=black

 

서양 레딧에 올라왔던 전세계 육/해/공 명장 순위. - 오픈이슈갤러리

https://www.reddit.com/r/history/comments/7n4c7f/the_greatest_commanders_of_history_take_three/ 군사 사학 전공한 레딧의 양덕이 정리한 명지휘관(명장) 순위임. 처음에는 육해공 통합이었는데 비판이 있어서 육/해/

www.inven.co.kr

 

 

  몇몇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레딧에 올라온 전세게 명장들 순위가 올라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밀덕이나 역덕들이 토론하기도 했었죠. 대단히 흥미로운 자료였고 전쟁사를 좋아하는 필자 입장에서도 이런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쟁사 명장들은 스포츠 선수와는 다릅니다. 모든 인물들이 처해진 환경이 각기 다르고, 소속된 나라의 국력이나 병력, 질적인 차이나 경제력 등 다양한 요소가 있어서 평가하기 애매한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스포츠에서도 소속된 팀이 약팀이거나 운영이 막장인 암울한 팀이면 그 선수가 손해보는 부분이 많죠. 하지만 정해진 시즌, 정해진 대회가 있으며 원한다면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도 있는 것이 스포츠입니다. 언더독을 캐리한 선수라면 그에 따른 '약팀 보정'도 있고요. 그에 비해 역사에서는 통제 불가능한 변수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타고난 군사 지략가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런 저런 이유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못한 경우는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태어난 국가가 보잘 것 없어서 누가 와도 역전시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거나, 차별 등의 이유로 높은 직책에 머물지 못했거나, 질병 등의 이유 등도 제시할 수 있겠죠.

 

https://www.reddit.com/r/history/comments/7n4c7f/the_greatest_commanders_of_history_take_three/

 

The Greatest Commanders of History: Take Three (this time with a chart!)

Happy new year, first of all. I've posted on here twice in the past year, to show off the latest incarnations of my "leader list", my slightly...

www.reddit.com

 

이 레딧 이외에도 한 명의 덕후가 웬만한 전문가들에 못지 않은 사례를 봤습니다.

 

http://xtrahistory.blogspot.com/2013/01/Competition-Level.html

 

The Footballers Evaluation Result

** Update for complete 2021 - 2022 season I.   Introduction and Historical Ranking Review       The football game is the sports ...

xtrahistory.blogspot.com

http://xtrahistory.blogspot.com/2013/01/Annual-Best-Player.html

 

World Annual Awards of The Century

*Update for 2021 - 2022 season with newly adjusted criteria I. Introduction         The First Official World Player of the Year awa...

xtrahistory.blogspot.com

 

  축구에서도 이런 사이트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는데 레딧 사이트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느끼네요. 재야의 고수를 보면 필자의 내공은 한참 멀었다는 생각만 듭니다.

 

  이 레딧의 글을 쓴 서구 사람은 군사 사학을 전공했다고 하고, 몇 년 전부터 레딧에 계속 명장 순위를 업데이트 했습니다. 처음에는 육군 명장, 해군 명장, 공군 명장 합쳐서 순위를 매겼는데 비판이 있어서 각각 따로 분류했습니다. 순위도 계속 변동되었고요.

 

https://www.reddit.com/r/history/comments/5ykj3a/the_top_100_commanders_of_history_my_list_a_long/

 

The Top 100 Commanders of History: My List, a Long Work In Progress. I want to hear your thoughts.

Hello all, For a long time now I've been working on a Top 100 Commanders of history list, something I hope turns into a book. (As a dedicated...

www.reddit.com

 

  어느 분야나 평가 기준은 주관적이겠지만 예전 글에서 필자가 나열한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직접 예로 나열한 명장도 들어줬네요.

 

1. 개인적인 리더쉽(개인적인 예, 군인들의 존경 및 선망의 부분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2. 전술적인 능력 (전장에서 계획하고, 행동하고, 반응하고 성공하는 능력):

한니발 바르카

 

3. 작전술 (전투의 기술, 책략적인 움직임의 성공, 더 넓은 규모의 전투):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이탈리아 전역, 울름 전투, 예나 아우어슈타트 전투 등

 

4. 전략적인 계획 (광범위한 전선에서 전쟁에서 승리하는 기술 - 근대 이전 장군에게는 정복으로, 현대 군인에게는 대전략으로 비유):

전자는 징기스 칸, 후자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게오르기 주코프, 헬무트 폰 몰트케가 해당됩니다.

 

5. 물류 및 조직 관리(각종 위기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군대에 식량과 공급 유지):

아서 웰즐리, 헬무트 폰 몰트케

 

6. 전술 및 전략의 혁신과 창의력(새로운 전투 방식, 새로운 혁신 및 대응 방법):

육지의 얀 지슈카가 보여준 농민병 훈련법과 화약 무기, 바다의 호레이쇼 넬슨의 해군 숙련도를 살린 전술적인 활용

 

7. 조직/이론의 혁신과 창의성(군대 개편, 전쟁의 새로운 아이디어, 지적인 측면):

군제 개혁을 보여준 가이우스 마리우스, 기갑부대를 활용한 구데리안

 

8. 처한 상황의 난이도(적들의 힘과 기술, 본토에서의 한계, 동맹 세력의 배신, 지휘관의 제약)(+필자가 대놓고 8번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스칸데르베그, 벨리사리우스

 

9. 성공(말 그대로 결과물 그 자체):

나폴레옹이 1위가 아니라 3위로 가는 이유, 키루스 대제가 20위 안에 들어가는 이유입니다.

 

10. 영향력(개혁과 혁신이 역사에 영향을 미쳤는지, 대제국을 건설 했는지, 후대 명장들이 얼마나 경외했고 칭송했는지)

후대 중국인이 한신에게서 배웠고, 나폴레옹이 외젠과 튀렌을 높게 평가한 것

 

-----------------------------------------------------------------------------------------------------------------------------------------------------------------

 

 

  여기까지가 기준이고 그 다음은 연구와 조사 끝에 목록을 나열했다고 레딧의 필자는 말했습니다. 다만 주관적인 부분을 인정했고 다른 유저들의 자유로운 의견 개진을 환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몇몇 부분은 강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계속 업데이트라도 하는 것인지, 필자가 레딧에 여러 글을 쓰면서 순위가 계속 바뀝니다. 가장 최근 기준으로 작성자가 올린 순위를 가져오겠습니다. 300명이나 될만큼 목록이 많아서 육군은 30위까지, 해군과 공군은 15위까지만 퍼오겠습니다. 몇몇 명장들에 대한 부연설명은 타 사이트나 필자가 아는 선에서 조금 가져왔습니다.

 

 

 


 

육군 명장

 

1. 칭기스 칸

 

2. 알렉산더 대왕

 

3.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4. 한니발 바르카

 

5. 율리우스 카이사르

 

6.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 초기 이슬람에서 활약한 불패의 명장. 신생 이슬람으로 당대 최강국인 비잔티움과 사산조를 격파.

 

7. 수부타이

 

8.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9. 프리드리히 대왕

 

10. 구스타프 2세 아돌프

 

11. 존 처칠 말버러 - 기동력의 천재.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영국에게 사실상 승리를 안겨준 일등공신.

 

12. 벨리사리우스

 

13. 얀 지슈카 - 농민 무지렁이를 훈련시켜서 황제의 기사와 용병의 뚝배기를 깨버린 불패의 명장.

 

14. 필리포스 2세 - 그리스를 통일한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15. 오다 노부나가

 

16. 키루스 대제

 

17.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 러시아 전쟁사의 상징 같은 인물로 40년 넘게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은 초역대급 명장.

 

18. 아서 웰즐리(웰링턴)

 

19. 한신

 

20. 티무르

 

21. 헤라클리우스 - 포카스가 망쳐놓은 비잔티움을 부흥시키고 사산조와의 최종 결전에서 승리한 위대한 황제.

 

22. 튀렌(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 30년 전쟁과 그 이후 스페인 전역에서 활약한 프랑스의 영웅 .

 

23. 나디르 샤 - 야프사르 왕조를 만들고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괴물 같은 폭군.

 

24. 프랑수아 외젠 - 오스트리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명장.

 

25. 헬무트 폰 몰트케

 

26.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27. 티글라트 필레세르 2세 - 기원전 10세기 고대 아시리아의 왕

 

28. 도요토미 히데요시

 

29. 곤살로 데 코르도바

 

30. 모리스 드 삭스(마우리츠 공작) -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활약한 명장.

 


 

해군 명장

 

1. 이순신

 

2. 호레이쇼 넬슨

 

3. 미힐 더라위티르 - 영란전쟁의 영웅으로 이순신 넬슨보다 위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은 제독.

 

4. 로버트 블레이크 - 1차 영란전쟁에서 활약하고 말년에 해적들을 소탕한 명장.

 

5. 도고 헤이하치로 - 러일전쟁으로 유명한 일본의 제독.

 

6. 체스터 니미츠

 

7. 데미스토클레스

 

8. 닐스 쥬엘

 

9. 알바로 데 바잔

 

10. 하이르 앗 딘 - 오스만 제국이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명장.(프레베자 해전 등을 참고)

 

11. 로저 오브 로리아

 

12.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

 

13. 마르턴 트롬프

 

14. 포르미오

 

15. 에드워드 호크 남작

 


 

공군 명장

 

1. 아서 해리스

 

2. 지미 둘리틀 - 태평양 전쟁 둘리틀 공습 지휘로 유명한 미국의 군인.

 

3. 휴 다우딩 - 영국 본토 항공전 승리로 서부전선 반격을 창출.

 

4. 칼 스파츠 -

 

5.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 - 나치 독일 공군 원수.

 

6. 알렉산드르 노비코프 - 2차 대전 소련 공군의 총사령관.

 

7. 빌리 미첼 - 공군의 가능성을 본 장교

 

8. 모르데하이 호드 - 이스라엘의 선제타격론 교리를 만든 사람. 3차 중동전쟁에서 속전속결로 이집트 공군을 무효화 시킴.

 

9. 굴리오 두헤 - 공군의 가능성을 본 장교 2

 

10. 커티스 르메이 - 도쿄 대공습 참고.

 

11. 마리나 라스코바

 

12. 아서 태더 남작

 

13. 조지 케니

 

14. 헨리 아놀드

 

15. 로베르트 폰 그라임

 


  이순신 장군 이외에 한국사 명장은 광개토대왕 178위, 을지문덕 201위가 있습니다.

 

  순위를 보고 공군 쪽은 거의 모르니 차치하고 해군 쪽에서 역시 이순신 장군이 1위로 뽑혔다는 게 흐뭇하네요. 라위터르랑 넬슨 제치고 1위했다는 게 실로 세계적인 명장이라고 할 만 합니다. 해군 명장 쪽에서 살짝 마음에 안 드는 건 하이르 앗 딘 순위가 낮다는 점과 소련 해군의 신화인 니콜라이 쿠즈네초프가 50위 안에도 없는 게 의아하네요.

 

  사실상 전쟁사는 육군사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최상위 순위에서 카이사르가 일단 저 순위인 게 고평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역대급 명장이야 맞지만 할리드와 수부타이를 제낀다는 건 납득이 안 가네요. 사실 로마 명장들 사이에서도 스키피오가 카이사르보다 위라고 보고요.

 

  13위 얀 지슈카에 대해서는 자세히 살펴봐야 겠네요. 저정도로 엄청난 명장인지...

 

  다른 순위는 그럭저럭 끄덕일만 하고, 중국 명장들이 우리나라 세간의 평가보다 아래로 가는 건 작성자가 댓글에서 '중국 명장들은 기록이 없어서 평가하기 곤란하다'고 말했습니다. 누군가 몇몇 명장들이 순위에 올라가야 한다 내지는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대충 번역하자면

 

  "(그 명장들에 대한) 좋은 영어 출처가 있습니까? 제 경험에 따르면 그들에 대한 심각한 기록 부족이 있기 때문에 중국인의 순위를 매기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일리파 전투에서 스키피오,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사용했던 전술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지만 저들은 자세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백기가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 항우가 사용한 전술을 말하기 어렵습니다. 백기가 얀 지슈카, 수부타이, 카이사르, 구스타프보다 앞에 설 수 있도록 높일 수 있습니까? --- 기록의 부족과 질 적인 면을 감안할 때 그들(중국 명장들)이 누구이며 왜 높이 평가받아야 하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외에 일본 명장들이 후하게 평가 받았네요. 15위 오다 노부나가와 28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시작으로 72위에 다케다 신겐, 133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151위에 우에스기 겐신, 164위에 미나모토 요시츠네, 206위에 모리 모토나리 등등... 300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인데 오다와 도요토미 둘다 40위 아래로 내려갔으면 합니다.

 

  이런 순위야 취향 차겠지만 딱 하나 수정하고 싶은 건, 300명 안에 가르친링이 꼭 들어갔으면 하네요. 아무리 Ctrl + F로 찾아봐도 가르친링이 없는데 레딧 가입해야 하나 고민됩니다.

 

728x90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세계사]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마지막 일전(2)(611년 ~ 628년 상황)
728x90
반응형

    1. 계속 땅을 집어삼키는 사산조 페르시아

 

  헤라클리우스는 지존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포카스가 망쳐놓아도 너무나 망쳐놓아서 제국은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습니다. 즉위하기 전에 이미 에데사(현재 터키 남동부의 샨르우르파)가 넘어가서 만딜리온을 사산조에게 뺏겼습니다. 만딜리온은 성스러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기독교의 성유물입니다. 614년에는 성지 예루살렘마저 함락됩니다.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고 전해지는 성십자가의 일부 조각입니다.

 

  성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박히셨다고 알려진 십자가입니다. '참 십자가'라고 부르기도 하고, 기독교에서 아주 중요한 성유물입니다. 이 성십자가가 예루살렘 점령과 함께 성십자가와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인 사산조 군대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성십자가는 사산조의 기록보관소에 만딜리온과 함께 놓였습니다.

 

  예루살렘 정복과 함께 가까이 있던 가산 왕국도 꼭두각시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산조를 따랐던 라흠 왕국은 아예 흡수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헤라클리우스는 우선 금이나 비단 등 값나가는 것들을 내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상을 시도합니다. 사산조라는 거대한 불길이 비잔티움의 인구와 농지를 계속 잠식하는 걸 진화시키는 게 먼저였습니다.

 

619년경 사산조 제국의 영역은 최대로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호스로 2세는 더 요구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거절합니다.

 

  "우리와 같은 태양을 섬기기 전까지, 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을 포기하기 전까지, 내가 자비를 베푸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자신감이 있을만 했던 게 사산조는 영토를 넓혀나가는 도중 607년 ~ 608년에 있었던 서돌궐의 30만 대군을 재차 막아냈습니다. 그만큼 사산조 페르시아는 양면 전쟁에도 끄떡없을 만큼 당대 최강국이었습니다.

 

 2. 헤라클리우스의 호적수, 샤흐르바라즈

 

예루살렘을 공략하는 샤흐르바라즈와 사산조 군대입니다.

  사산조 진영에는 '샤흐르바라즈'라는 명장이 군대를 탄탄대로로 이끌었습니다. 사실 헤라클리우스라고 더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적들이 시리아 일대와 에데사를 장악했고 다마스쿠스까지 빼앗기자 구원병 6만 8천 명을 이끌고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4만의 사산조 군대와 맞섭니다. 613년 안티오크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사산조의 완승으로 끝났고, 사산조는 건국 400여년 만에 지중해에 처음으로 닿게 됩니다. 이는 비잔티움에게는 이집트에서 터키로 가는 육로가 끊겼다는 걸 의미합니다. 

 

지도에서 빨간색으로 표시한 곳이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카이사레아, 칼케돈 같은 주요 도시입니다. 개전 초기 사산조는 이를 모조리 차지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루살렘 함락과 성십자가가 이제 없다는 소식에 백성들이 침울해하고 있었습니다. 안티오크의 대주교는 살해당하고 예루살렘의 대주교는 포로가 됩니다. 칼케돈에서도 헤라클리우스는 또다시 샤흐르바라즈의 군대를 막지 못했습니다. 사산조의 파상공세가 콘스탄티노플 코앞까지 왔습니다.

 

  샤흐르바라즈는 멈추지 않고 618년 이집트를 공격합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강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합니다. 나일 강이 사산조의 소유가 되면서 비잔티움의 식량 공급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3. 절망적인 상황, 그러나 시작되는 역전의 시나리오

 

  헤라클리우스는 총독 시절 근거지였던 카르타고로 수도 이전을 시도합니다. 비밀리에 콘스탄티노플의 주요 보물을 배에 실어서 카르타고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배는 폭풍우 때문에 부서져서 진실이 세상에 퍼졌습니다. 시민들의 원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세르기우스는 황제를 말립니다.

 

헤라클리우스가 수도를 수호하겠다고 신께 맹세한 성 소피아 성당의 제단 사진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나 다름없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일은 하늘이 황제께 부여한 신성한 의무입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마음을 고쳐먹고 성 소피아(현재 아야 소피아) 성당의 재단에서 다시는 콘스탄티노플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합니다.

 

  한편 샤흐르바라즈가 이집트를 정리하면서 패기만만한 호스로 2세는 헤라클리우스에게 오히려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가장 위대한 신이자 세계의 주인인 호스로가 사악하고 어리석은 노예 헤라클리우스에게 보낸다. 왜 아직도 우리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를 왕이라고 부르는가? 내가 그리스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너는 너의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내 손에서 카이사레아와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를 가져가지 아니한 것이냐? 세상의 대지와 바다는 모두 내가 만든 법에서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이런 내가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파괴하지 못할 것 같은가? 그러나 네가 내게 복종하고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여기로 오면 네 죄를 용서하겠다. 나는 너에게 땅과 포도원과 감람원을 주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너를 바라보겠다. ~~ . 바다 깊은 곳으로 도망갈지라도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손으로 너를 찾아내리라. 신이 너를 구원해주리라는 헛된 소망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요약하면 "이미 대세는 기울었으니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라"라는 메시지입니다. 이런 거 보면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말이 떠오릅니다. 과거에 내전이 벌어졌을 때 마우리키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의 사위가 되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졌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 편지가 반격의 실마리가 됩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사산조가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백성들에게 알리고, 자극을 받은 비잔티움의 시민들은 결사항전에 나섭니다. 이렇게 헤라클리우스는 사산조를 물리치기 위한 세금도 높일 수 있었고, 특히 교회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위에서 나온 세르기우스도 황제에게 교회의 보물을 군자금으로 쓰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부패한 관리들의 봉급을 절반으로 줄이고, 그 중에서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면 막대한 벌금을 매겼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칼케돈의 적들을 노리지 않고 멀리 돌아가서 상륙합니다.

 

  622년 헤라클리우스는 부활절 미사를 끝내고 전면에 나섰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칼케돈의 사산조군과 정면승부하지 않고 일부러 빙 돌아가서 토로스 산맥 근처에 진지를 구축합니다. 여름에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가을에 북동쪽 방향으로 공격해서 사산조의 허리를 끊으려고 합니다. 칼케돈에 있던 사산조군은 많은 병력을 동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집니다. 적들이 매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일부러 후퇴하고 매복한 적들이 가까이 오자 신속하게 정예병과 맞닥끄려서 격퇴시킵니다. 이렇게 헤라클리우스가 샤흐르바라즈를 상대로 첫 복수에 성공합니다.

 

  4. 623년 ~ 626년까지의 비잔티움의 반격

 

헤라클리우스와 대립했던 아바르족 카간의 자세한 이름은 기록이 소실되었는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이 승전을 기점으로 반격의 물꼬가 뚫렸지만, 623년 헤라클리우스는 북쪽의 아바르족이라는 숙제를 풀어야 했습니다. 그는 아바르족의 카간(지도자)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칠테니 다뉴브강 북쪽으로 군대를 물려달라고 부탁했죠. 카간은 직접 만나자고 제안하고 헤라클리우스는 약속된 장소로 향합니다. 하지만 이는 함정이었습니다. 카간은 기병을 동원하여 그를 포로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로서는 다행히 급습에 탈출했지만 협상단의 많은 인원이 아바르족에게 죽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참고 또 참으면서 노미스마 금화 20만 개(자그마치 900kg)과 사생아를 볼모로 보내면서 오로지 사산조와의 전쟁에 칼날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622년부터 헤라클리우스는 미친듯이 서아시아를 휩쓸고 다닙니다.
제가 표시한 1. 카이사레아, 2. 간자크, 3. 티그라노세르타, 4. 사루스 강 전역이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대표적으로 활약한 전장입니다.

 

  이듬해 황제는 사산조와의 캠페인을 재개합니다. 원정 이전에 또다시 호스로 2세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샤한샤는 이제 페르시아 심장부가 공격당할거라는 헤라클리우스의 말에도 콧방귀만 뀝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는 언행일치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위 지도에서 번호로 나타냈지만 우선 카이사레아를 수복하고, 다음으로 사산조 영토로 깊숙하게 들어가 'Ganzak(간자크)'라는 도시에서 호스로 2세의 4만 적군을 상대로 승리합니다.

 

 

현재 잔해로나마 남아있는 아두르 구쉬나스프(Adur Gushnasp) 사원의 잔해입니다.

 

  여기서 십여년 전 기독교의 성지가 더럽혀진 것에 대한 되갚음인 것인지, 조로아스터교의 중요한 사원인 아두르 구시나스프(Adur Gushnasp)를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분노한 호스로 2세는 부하 장군들인 샤힌, 샤라플라칸, 그리고 샤흐르바라즈에게 헤라클리우스를 포위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는 세 방향의 적들이 합치기 전에 샤라플라칸과 샤힌을 차례로 물리쳤습니다. 숙적 샤흐르바라즈가 다른 두 장군의 패장병들과 함께 추격하자 사루스 강에서 조우합니다.

 

현재 터키의 'Saros(영어로 Seyhan)'이라는 강을 두고 625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무승부에 가까운 결과를 냅니다. 이번에는 샤흐르바라즈가 거짓으로 후퇴했고 적들이 다리를 통해 추격해오자 역공으로 비잔티움군의 선봉대를 꺾어버립니다. 하지만 뒷심 부족으로 다리까지는 장악하지 못했고 후위의 군대와 함께 반격해오는 헤라클리우스 상대로 큰 이득을 거두지 못합니다. 전투 끝에 서로 물러났고, 비잔티움군은 북쪽으로 가서 흑해 아래의 트레비존드(Trebizond, 현재 터키의 트라브존)이라는 도시에서 휴식합니다.

 

  5.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성전과 제 3차 사산조 vs 서돌궐 전쟁

 

  시간이 지나 626년 여름이 되었습니다. 호스로 2세는 결정적인 승리만이 비잔티움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바르족에게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자고 제안했고, 그들은 예전의 협약을 깨고 남쪽으로 진군합니다. 여기에 아바르족과 사이가 좋지 않은 슬라브족까지 돈으로 회유해서 포위 작전에 끌어들입니다. 이 와중에 헤라클리우스와 정예군은 아직 소아시아쪽에 있었고, 몰려드는 적들을 막아내는 건 세르기우스 대주교와 수도를 지키던 보누스 장군의 몫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의 위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8만 명 이상의 아바르족 + 슬라브족 + 사산조 군대는 1만 5천 명의 비잔티움군이 있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을 둘러쌌습니다. 하지만 성벽을 공략하려는 궁수들은 성 내부의 투석기에 녹아내렸고, 사산조의 해군은 비잔티움의 해군에 막혀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지 못했습니다. 사산조는 동맹군에게 공성 무기를 지원해줄 수 없었고, 결국 공성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여기서 호스로 2세가 공성전의 패인은 샤흐르바라즈가 못 싸운 탓이라고 판단했는지 '카르다리안(Kardarigan)'이라는 장군에게 샤흐르바라즈를 죽이고 그의 군대를 크테시폰으로 돌려보내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비잔티움군이 가로채고, 헤라클리우스가 샤흐르바라즈에게 이 사실을 전달합니다. 고민 끝에 샤흐르바라즈는 전쟁에서 이탈하여 시리아 북부에 주둔합니다.

 

서돌궐은 비잔티움과의 협공을 감안했는지 캅카스 산맥으로 침공합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호스로 2세가 정치적인 그림을 그렸다면, 이제는 헤라클리우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627년 서돌궐이 사산조를 상대로 3차 침공을 감행합니다. 지난 1차, 2차는 모두 사산조의 승리였고 이란 방면으로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캅카스 지역으로 방향을 다르게 설정합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이미 625년 서돌궐에게 군사적으로 협공을 해준다면 많은 재물을 주겠다고 사신을 보냈습니다. 서돌궐도 사산조 때문에 막힌 비잔티움과 당나라 사이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다시 열고 주도할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지도자 통엽호가한도 "나는 당신의 적들에게 복수할 것이고 당신의 요청에 호응하기 위해 용감한 군대와 함께 올 것입니다"라는 동의의 서신을 보냅니다.

 

  6. 니네베 전투(Battle of Nineveh), 전쟁의 종결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이 니네베 전투 지역이고, 위의 하늘색 화살표는 서돌궐이 남하한 곳입니다.

 

 

  서돌궐군은 캅카스 산맥의 사산조 요새들을 차례로 점령합니다. 여기서 통엽호가한과 헤라클리우스가 만나는데, 기록으로는 통엽호가한이 스스로 절을 하고 헤라클리우스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고 합니다. 기뻐한 헤라클리우스는 비잔티움의 왕관을 그에게 씌워주기도 하며 서로 얼싸안고 동맹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입니다. 또 서돌궐의 지휘관들은 비잔티움에게 비단옷과 보석을 선물받습니다. 잠깐의 합동 작전 이후 헤라클리우스는 서돌궐에게 요새 포위 작전을 맡기고 자신은 남하합니다.

 

니네베 전투에서 승리한 헤라클리우스에 대한 그림입니다. 비잔티움 병사가 들고 있는 목은 아무래도 적 장수 라하자드일 것 같네요.

 

  그는 2만 5천 명 ~ 5만 명의 정병을 이끌고 현재 이라크 쪽으로 공세를 펴립니다. 기원전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니네베'라는 역사적인 도시에서 회전이 일어납니다. 호스로 2세는 라하자드(Rhahzadh)라는 장군에게 막으라고 명령했지만, 병력은 겨우 1만 2천 명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캅카스 쪽 전황도 시원찮았기에 사산조는 니네베에서 전력을 동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라하자드가 평야에서 싸우도록 유도했고, 8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적들의 절반을 죽였습니다. 그는 직접 결투에서 라하자드를 전사시킵니다. 남은 사산조의 병력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다스타기르드를 점령하고 사산조 수도인 크테시폰(Ctesiphon)에 더욱 근접합니다.

 

  비잔티움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티그리스강 동쪽 도시인 다스타기르드(Dastagerd)로 향합니다. 호스로 2세는 손도 못 쓰고 도망쳤고, 비잔티움군은 무난히 입성하여 사산조의 왕궁을 약탈하고 태워버립니다. 다음 목표는 사산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이었지만 사실 헤라클리우스로서도 모험이었고, 그는 사신을 보내 평화를 촉구합니다.

 

  "나는 평화를 쫓고 쫓는다. 나는 페르시아를 불태우는 걸 바라지 않았지만 네가 그걸 강요하게 만들었다. 즉시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를 선택하자. 모든 것을 태우기 전에 이 불길을 끄도록 하자."

 

  이 와중에 사산조의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서 호스로 2세를 몰아내고 그의 아들을 제위에 앉힙니다. 새로운 샤한샤가 된 카바드 2세는 먼저 화친을 요청하고 이라클리오스는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비잔티움은 빼앗은 땅을 돌려받는다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덧붙여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고 포로로 잡힌 군인들을 되찾습니다. 무엇보다 성십자가 등 성유물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7. 에필로그

 

 

개선식에서 헤라클리우스가 직접 성십자가를 들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 그림은 그걸 묘사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630년 3월 21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십자가를 만천하에 보여주는 승리의 개선식을 벌입니다. 시민들은 성십자가를 되찾았다는 기쁨에 기뻐했습니다. 성 소피아 성당에서 성십자가를 안치하는 의식을 벌이고, 훗날 예루살렘에 반환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이 때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도 돌려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샤흐르바라즈가 사산조의 중앙 조정과 따로 놀았기에 명령도 거부합니다. 카바드 2세가 즉위 몇 개월 만에 죽자 헤라클리우스는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페르시아의 왕이 죽었고, 왕좌와 왕국은 너에게 다가왔다. 내가 그걸 너와 네 후손들에게 수여하겠다. 만약 군대가 필요하다면, 네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얼마든지 도움을 주겠다."

 

  샤흐르바라즈는 2년 동안 내부의 몇몇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630년 충성스러운 병사 6,000명과 함께 크테스폰으로 돌격합니다. 아르다시르 3세를 죽이고 스스로 샤한샤에 등극했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헤라클리우스에게 돌려줍니다. 그러나 서돌궐이 마지막으로 약탈하는 과정에서 파견한 10,000명의 병력이 궤멸되는 일이 벌어져서 위신이 추락합니다. 2개월도 안 되어 암살당하고 호스로 2세의 딸인 푸란도흐트가 즉위합니다.

 

 

나무위키에서 퍼온 호스로 2세부터의 샤한샤 계보입니다. 630년 ~ 632년 상황을 보면...

 

  그 뒤로 사산조에는 암살과 반역이 계속됩니다. 샤흐르바라즈의 아들이 즉위하기도 하고, 호스로 2세의 또다른 딸이 즉위하기도 하고, 아예 스스로 샤한샤라고 자칭하는 경우도 있었죠. 이 시기 사산조는 그 옛날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보다도 더한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사산조는 빼앗은 땅을 모두 상실하고 전쟁 이전보다 심각한 상황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병사가 희생되고 막대한 돈만 잃었을 뿐입니다. 632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유일한 샤한샤로 정립이 이루어지지만 추락할 대로 추락한 권위는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사산조에는 호스로 2세를 끝으로 강력한 전제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고, 내부적으로 온전히 단합하지 못한 형편은 나중에 이슬람군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됩니다.

 

샤흐르바라즈에게서 이집트와 시리아를 돌려받고 비잔티움은 포카스 등장 이전의 땅을 대부분 회복했습니다.

 

  사산조에 비해 위기를 극복한 비잔티움은 헤라클리우스 황제에 대한 칭송이 높아졌습니다. 원로원은 그에게 '새로운 스키피오'라는 칭호를 수여했고,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도 "스키피오-한니발 시대 이후로 헤라클리우스가 제국을 구원하기 위해서 달성한 것보다 더 진취적인 시도는 없었다"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헤라클리우스는 진정으로 위대한 황제였습니다. 하지만 말년을 편하게 보내지 못하고 몇 년 뒤 이슬람 세력, 특히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라는 악몽이 그에게는 천추의 한이 되었습니다.

 

  8. 출처

 

  도현신,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서해문집(2019)

 

  수잔 와이즈 바우어,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권』, 부키(2010)

 

  유튜브 <Avar-Slav-Persian Siege of Constantinople 626 (DOCUMENTARY)> (https://www.youtube.com/watch?v=dvKehRDnATM)

 

영문위키 <Heraclius> (https://en.wikipedia.org/wiki/Heraclius)

 

<Shahrbaraz> (https://en.wikipedia.org/wiki/Shahrbaraz)

 

<Byzantine–Sasanian War of 602–628>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E2%80%93Sasanian_War_of_602%E2%80%93628)

 

<Battle of Antioch (613)>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ntioch_(613))

 

<Sasanian conquest of Jerusalem> (https://en.wikipedia.org/wiki/Sasanian_conquest_of_Jerusalem)

 

<Sasanian conquest of Egypt> (https://en.wikipedia.org/wiki/Sasanian_conquest_of_Egypt)

 

<Heraclius' campaign of 622> (https://en.wikipedia.org/wiki/Heraclius%27_campaign_of_622)

 

<Battle of Saru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arus)

 

<Third Perso-Turkic War> (https://en.wikipedia.org/wiki/Third_Perso-Turkic_War)

 

<Siege of Constantinople (626)>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Constantinople_(626))

 

<Battle of Nineveh (627)>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Nineveh_(627))

 

728x90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시사] 현재까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상황(포위전, 시가전, 푸틴의 오판, 핵무기 사용?)
728x90
반응형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227500123

 

“우크라 침공 계획보다 더뎌… 푸틴, 노발대발”

英교수 “푸틴의 정치적 승리 어려운 전쟁될 듯” 시가전 확대로 러시아군 사기 저하 가능성 지적 에스토니아 전 사령관 “러 자금·무기 고갈 중” 푸틴이 4일 내 승전 예상하고 있었다는 주장

www.seoul.co.kr

https://newsis.com/view/?id=NISX20220228_0001776076

 

[속보]우크라 사령관 "수도 키예프에서 러시아군 후퇴"

[서울=뉴시스] 이현미 기자 = 우크라 사령관 "수도 키예프에서 러시아군 후퇴" ◎공감언론 뉴시스 always@newsis

www.newsis.com

 

  러시아의 침략 전쟁은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러시아는 병력 수십만 대군을 우크라이나 전역에 투입했지만 우크라이나의 결사항전에 그들 생각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서방이 병력 제공은 못하지만 정보 제공과 물자 제공과 자본 제공은 넉넉하게 하고 있으며, 악몽 높은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걸 보니 1차 러시아-체첸 전쟁에서 러시아가 고생했던 게 떠오르네요. 필자도 러시아군을 지나치게 고평가한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과거 1차 러시아-체첸 전쟁에서 그로즈니(체첸 수도)를 점령하는데 러시아가 어마어마한 출혈을 감수했고, 이게 원인이 되어 1차 체첸 전쟁은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심지어 키예프는 그로즈니 면적의 2.5배가 넘고 인구는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현대 시가전은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 군대라도 못할 짓입니다. 아파트 등 고층 빌딩 하나하나가 요새나 다름없는데 건물 사이와 각 층에 숨어서 치고 빠지면 공격하는 쪽에서는 한숨이 나오죠.

 

  키예프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이자 9세기에 건국되고 11세기에 황금기를 누린 '키예프 루스'(키예프 공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역사적인 도시입니다. 러시아의 역사와도 연결되는 도시라 푸틴으로서도 무자비하게 파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재 각종 뉴스를 보면 일단 서쪽과 동쪽의 진격로를 연결해 포위 작전을 시도하려는 듯 합니다.

https://namu.wiki/w/%EB%9D%BC%EC%8A%A4%ED%91%B8%ED%8B%B0%EC%B0%A8

 

  하지만 포위전도 절대 좋은 묘책이 아닙니다. 이제 3월으로, 얼음이 놓고 곳곳에 진흙탕이 많아지는 '라스푸티차' 현상이 우크라이나 땅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포위망을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지연되고, 완성한 후 러시아군의 보급의 지속력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도 애매합니다. 그리고 키예프 인구가 300만이라 러시아가 포위로 조여 온다고 해도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https://news.v.daum.net/v/20220227160308361

 

[우크라 침공] 러 안방여론에 시선집중.."벌써 전쟁비용 체감" 관측도

(서울=연합뉴스) 이의진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국을 위기로 인도하고 있다." 2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 결정에 내놓은 평가다.

news.v.daum.net

 

 

  러시아 내부에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세계가 러시아에게 강한 경제 제재를 가하는 중입니다. 루블화의 가치가 폭락하고,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러시아에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야당 등 푸틴에 반대하는 세력은 기회를 잡았습니다. 러시아 경제가 악화될수록 푸틴의 몰락도 급속도로 가까워질 것입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힘겹게 싸우고 있지만 세계에서 지원받는 물자는 날이 갈수록 쌓이고 훈련 안 된 신병까지 강하게 무장될 것입니다.

  지난날 소련 vs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소련의 경제가 치명타를 입었듯이,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러시아 경제는 나락으로 추락할 것입니다.

  이건 필자 생각이지만 일선의 러시아군의 사기도 그리 높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 등의 정보 제공으로 러시아의 움직임은 우크라이나가 읽고 있으며, 내부에서도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인식하는 군인들이 꽤 있을 테고요. 적들이 무슨 서방의 사주를 받아 러시아에 선제 공격한 것도 아니고 우크라이나가 무슨 대량 살상 무기로 러시아를 위협한 것도 아니니까요.

  지금부터 속전속결로 우크라이나 동부를 러시아가 장악해도 푸틴은 실패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안에서 러시아를 좋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상당수 등을 돌려 우크라이나라는 깃발 아래 결사항전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드네프르 강(위 지도의 키예프를 끼고 우크라이나를 반으로 가르는 강)과 동쪽 땅을 모조리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두어야 푸틴이 그 자리를 지킬 명분이 설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크라이나는 최근 협상에서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에서도 러시아군을 철수시켜라라고 하는 걸 보면 그런 꼴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설령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를 장악한다고 해도 수천 만명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계속 저항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이러면 러시아가 전쟁 이후에도 군대를 주둔 안 시킬 수가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계속 전비가 소모될 거라 이 역시로 러시아의 최선의 시나리오는 아닙니다.

  진짜 전쟁을 시작하면 우크라이나 수뇌부는 도망가고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도 혼란이 생겨 며칠 만에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푸틴이 전쟁 전후로 쿠데타를 일으키라는 메시지를 우크라이나 쪽에 보냈던 게 잊히지 않습니다.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마무리 될지 예측하기 힘듭니다만, 이 전쟁은 역사책에 독재자가 전쟁을 왜 일으킨 건지 모를 어리석은 선택으로 기록될 거라 확신합니다.

https://apnews.com/article/russia-ukraine-kyiv-business-europe-moscow-2e4e1cf784f22b6afbe5a2f936725550

 

Putin puts nuclear forces on high alert, escalating tensions

KYIV, Ukraine (AP) — President Vladimir Putin dramatically escalated East-West tensions by ordering Russian nuclear forces put on high alert Sunday, while Ukraine's embattled leader agreed to talks with Moscow as Putin's troops and tanks drove deeper int

apnews.com

 

  여기저기서 핵무기 사용이 언급되는 걸 보면 진짜 무섭습니다. 계산적으로 생각하면 방사능 낙진, 민간인 피해, 키예프라는 도시의 절대적인 파괴와 주변국에게 가는 피해를 생각하면 쓰지 않는 게 정답이죠. 하지만 푸틴이 더욱 궁지에 몰려서 미쳐버린다면 진짜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렵습니다. 진짜 2차 대전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벌어진 사망자 숫자보다 더한 사망 피해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일은... 정말 없기를 바랍니다.

  러시아 테니스 선수이자 TOP 랭커이기도 한 루블레프가 최근 테니스 대회에서 'No war Please'라는 메시지를 카메라에 썼네요.

 

이 비극의 역사가 하루빨리 끝나기를 기도합니다.

728x90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펌][장문]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대국민연설 전문 해석 및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한 사견
728x90
반응형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hm&sid1=104&oid=020&aid=0003412507

 

푸틴, 우크라에 軍 진입 명령…돈바스 친러 공화국 독립 승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진입을 공식적으로 명령했다. 이 지역 내 친러시아 분리주의 반군 세력이 세운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

news.naver.com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및 개입으로 세계 정세가 시끄럽습니다. 필자 주변에도 주식이나 코인 투자하는 사람들이 이 이슈로 난리이기도 하고요. 푸틴이 본격적인 명령을 내리기 전에 대국민 연설을 했는데 디시인사이드 군사 갤러리에서 찾을 수 있어서 공유합니다.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2234012&search_head=110&page=1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설 전문 해석 - 1편 - 군사 갤러리

 친애하는 러시아 국민 여러분. 오늘 나는 최근 벌어진 우크라이나에서의 사건과, 그것이 러시아에게 있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또한 우크라이나에 있는 우리 친구들에게

gall.dcinside.com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2234348&page=1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설 전문 해석 - 마지막 - 군사 갤러리

[시리즈] 22년 2월 21일 푸틴 대통령 연설 ·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설 전문 해석 - 1편 ·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설 전문 해석 - 2편 ·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연설 전문 해석 - 3편 · 푸틴 러시아 대통령

gall.dcinside.com

 

친애하는 러시아 국민 여러분.

오늘 나는 최근 벌어진 우크라이나에서의 사건과, 그것이 러시아에게 있어 왜 중요한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또한 우크라이나에 있는 우리 친구들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돈바스의 상황은 다시 첨예한 성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현재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평가할 뿐 아니라, 내린 결정에 대해 여러분께 알리고 나타날 수 있는 추가 단계에 대해서 여러분께 직접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나는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에게 우크라이나는 단순한 이웃 나라가 아닙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역사, 문화, 종교의 필수적인 일부 중 하나였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친구이며 혈연 관계로 이루어진 친척이나 다름없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남서부의 슬라브 주민들은 스스로를 '러시아인' 그리고 '정교회 신자'라고 불렀습니다. 이 영토의 일부가 러시아 제국으로 편입된 17세기까지 그랬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해 알고 있으며 나는 잘 알려진 팩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고, 우리 나라의 행동 동기와 목표를 설명하려면 역사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현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더 정확히는 볼셰비키, 그러니까 소련에 의해 완전히 창조되었다는 사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 과정은 1917년의 혁명 직후에 시작되었으며, 레닌과 그의 친구들은 러시아의 입장을 존중하지 않는 방식으로, 러시아 역사적 영토의 일부를 떼어 내어 분리했습니다. 물론 그 곳에 사는 수 백만 명의 주민들에게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죠.

그 다음, 대조국전쟁이 끝나고 스탈린은 폴란드, 루마니아, 헝가리에 속한 일부 땅을 우크라이나에 편입시켰습니다. 동시에 스탈린은 보상책으로서 폴란드에 동부 독일 땅을 주었으며, 1954년 흐루쇼프는 러시아로부터 크림 반도를 빼앗아 우크라이나에게 주었습니다. 실제로 이것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만들어진 일련의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소련 창설 초기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러시아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멀리 보아야 합니다.

10월 혁명과 러시아 내전 이후로, 볼셰비키가 소련을 건설했고 그들 사이에서 의견 충돌이 있었다는 점을 시사시켜 드리겠습니다. 1922년에 중앙위원회 총서기와 민족 인민위원회 위원장의 직위를 동시에 가지게 된 스탈린은 자치주의의 원칙, 즉 각각의 소비에트 공화국에 미래의 행정 구역을 주는 국가 건설을 제안했습니다.

레닌은 이러한 계획을 반대했고, 민족주의자들을 '독립주의자'라고 부르며 양보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소련의 기초를 형성한 것은 사실 이러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과 동맹 국가와 분리에 이르는 민족 자결권에 대한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리고 레닌 사후 1924년의 소련 헌법에서, 많은 질문이 바로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 중 첫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왜 중앙정부는 각 민족의 민족주의적 욕구를 충족시킬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러한 욕구는 결국 자의적으로 형성된 새 행정 구역이 만들어지게 합니다. 바로 '공화국 연방'입니다.

더욱이 이러한 행정 구역은 새 국가 형성의 지위와 형태를 부여받았습니다. 다시 한 번 스스로 묻겠습니다. 가장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들조차 꿈도 꾸지 못 했던 보상책을 내놓고, 공화국들에게 조건 없이 통일 국가에서 탈퇴할 권리를 부여한 이유는 대체 무엇입니까?

단순히 보면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광기입니다. 하지만 볼셰비키에게는 혁명 후 정1권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정말 모든 것을 했습니다. 독일 제국과 그 동맹국이 핀치에 몰려 있을 때의 굴욕적인 브레스트 조약과 제 1차 세계대전의 결과는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와 러시아인의 역사적 운명의 관점에서 볼 때, 레닌주의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실수보다 명명백백히 더 나쁜 것으로 판명됐습니다. 1991년의 소련 붕괴 이후, 이것은 다시 한 번 증명됐습니다.

물론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정치적인 확증편향 없이 직설적이고 정직하게 이야기해야 합니다. 나는 현재 정치적 상황에 대한 원인이 특정 순간에 결말을 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국가 기본 원칙의 기초가 되어서는 안 되며 받아들여져서도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지금은 누구의 탓도 하면 안 됩니다. 당시와 내전 직후의 나라 꼴은 개판이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내가 말했듯 공산당 정책의 결과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가 생겨났기에 이것을 '우크라이나 이몌니 레니나'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역주 : 러시아는 대학이나 공공기관 등에 위인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있다.] 그는 작가이자 건축가인 셈입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우크라이나로 강제된 돈바스에 대한 레닌의 가혹한 명령을 포함한 아카이브에 의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tHaNkInG dEsCeNdAnT' 이 우크라이나에서 레닌 동상을 철거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반공주의라고 부릅니다.

반공주의를 원하십니까? 그건 우리의 전문 영역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했듯, 중간에 그것을 멈출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에게 진정한 반공주의가 무엇인지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문제의 역사로 돌아갑시다. 나는 1922년에 러시아 제국의 땅에 소련이 형성되었음을 다시 알립니다. 그러나 국가의 생명과 연속성과 거대하고 복잡한 영토는, 소련 원칙에 따라 관리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즉시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현실과 역사에서 완전히 분리되었습니다.'

적색테러와 스탈린주의 독재로의 이행. 공산주의 지배와 공산당 독재, 국유화와 계획경제체제, 이 모든 것이 그저 단순한 선언이었습니다. 소련 헌법에서 선언된 원칙들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았죠. 연방 내 공화국들은 주권이 없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실제로는 엄격히 중앙화되고 절대적으로 단합한 하나의 국가만 남았을 뿐입니다.

실제로 스탈린은 국가 체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구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헌법을 변경하지 않았고, 소련 건설의 핵심이던 래닌주의를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이게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았겠죠. 전체주의 정1권에서는 어쨌든 모든 것이 작동했고, 외부적으로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유토피아적 혁명에 모두가 취한 나머지 정상적인 국가에 대한 환상아 절대적으로 파괴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무도 미래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우리에게 자주 일어났던 일입니다.

공산당 정부는 강력한 정부 체제를 구축하는데 성공했으며 그들의 정책을 통해 국가적 문제를 해결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러나 대중 의식은 쉽게 사라지지 않죠. 민족주의는 사라지지 않았고, 국가 체제의 위협은 날개를 달고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러한 위협은 소련에서 탈퇴할 수 있는 마지막 무기와도 같았습니다.

1980년대 중반, 사회/경제적 문제가 증가하고 계획 경제의 모순점, 국가 문제는 국민들의 요구를 충분히 충족시켜주지 못했습니다. 지역 공산당들의 권력은 점차 약화되었구요.

하지만 중앙당은 경제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대신, 민족 자결에 대해 '레닌주의 원칙'을 내세우며 엄격히 제한했습니다.

더욱이 공산당 내부에서의 권력 투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각 파벌은 지지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무분별하게 민족주의 정서를 자극하고 조장하며 잠재적 지지자들에게 공수표를 날려댔습니다. 민주주의나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포퓰리즘적 미래를 바탕으로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결국 국가에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989년 9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치명적인 안건이 채택되었습니다. 이른바 현대화 강령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이 있습니다. "모든 연방 내 공화국은 사회주의 주권 국가로서 지위에 상응하는 모든 권리가 존재한다.'

이러한 결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지금은 주법이나 헌법에 관한 문제를 제기할 때가 아닙니다. 그저 명백한 사실만 남아 있습니다. 왜 이미 어려운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나라를 더 어렵게 만듭니까?

소련이 붕괴되기 2년 전, 그 붕괴는 이미 예고된 결론이었습니다. 이제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여러 급진민족주의자들이 독립의 공로를 스스로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저지른 공산당 지도자들의 역사적, 전략적 실수는 결국 소련 붕괴로 이어졌습니다. 소련이라는 이름 아래의 러시아의 붕괴는 그들의 양심에 달려 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모든 불의와 기만질, 노골적인 강도질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민, 즉 국민은 소련 붕괴 이후 발생한 새로운 지정학적 현실을 인정하고 새 독립 국가들을 인정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포함해 여러 CIS(독립국가연합)의 회원국을 도왔습니다. 우리 나라는 우크라이나의 존엄성과 자주권을 존중하는, 그런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우리의 자원 덤핑이나 대출 등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경제 및 무역의 특혜는 1991년부터 2013년까지만 해도 약 2500억 달러에 이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1991년 말, 소련의 부채는 약 1천억 달러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부채를 GDP에 비례해 구 소련의 모든 공화국들이 연대해 함께 갚아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소련의 모든 빚을 스스로 상환했으며 2017년에 전액을 상환했습니다.

그 대가로서 새로 독립한 국가들은 소련의 해외 자산을 포기하는 협정을 1994 년 12월에 맺었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이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구 소련의 재산뿐 아니라 다이아몬드 광산이나 금 등에 대한 청구를 제기했습니다.

이러한 얌체짓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항상 공개적으로, 또 정직하게 우크라이나와 협력해 왔으며, 러시아의 이익을 존중하는 선에서 여러 분야의 양국 관계가 발전해 왔습니다. 2011년에 양국 교역액은 500억 달러를 초과했습니다. 나는 2019년의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모든 EU국가와 우크라이나의 무역량이 500억 달러 아래라는 점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아무튼, 우크라이나 당국은 러시아와 관련하여 모든 권리와 이점을 가졌지만 의무를 부담하지는 않았습니다.

협력보다는 착취성이 강한 관계가 지속되게 되었으며 우크라이나는 때때로 무례히 행동했습니다. 가스 운송의 협박과 절도를 상기시켜 드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의 대화를 서방과의 협상을 위한 카드로 사용했고, 모스크바와 의도적으로 화해하면서 이것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당국은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했던 첫 단계부터 역사를 왜곡하려 했습니다. 수천만의 사람이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고, 당연히 우크라이나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에 직면했습니다. 이는 빠르게 공격적인 공러증과 네오나치즘의 형태를 가졌습니다. 북캅카스의 테러 집단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 네오나치들이 발견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사실 우크라이나는 '국가'로 인정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1991년부터 우크라이나는 역사와 현실에서 단절된 다른 국가들의 모델을 기계적으로 카피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국가 기관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이익과는 무관하게, 정치 권력자들을 위해 재형성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 '과두정' 정부의 이른바 친서방 선택은 국민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 더 나은 조건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의 지정학적 경쟁자들에게 모호한 옵션들을 제공해 수십억 달러를 절약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인에게서 훔친 돈들은, 과두 정치인들이 서방 은행에 잘 모셔두고 있죠.

결과적으로 급진파들은 뻔뻔스러워졌고 그들의 주장은 해가 갈수록 커져만 갔습니다. 민족주의와 부패에 감염되어 국민의 사회적 이익과 주권을 무시한 허약한 정부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었죠.

우크라이나에서 안정적인 정부는 발전할 수가 없었으며, 그들에게 선거 제도란 과두제 파벌간의 권력과 재산 재분배를 위한 역할을 할 뿐입니다.

급진파는 사람들의 합리적인 불만을 이용하여 시위에 안장을 얹고 유로마이단을 쿠데타로 이끌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외부로부터 직접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미국 대사관이 하루에 100만 달러씩 송금해 주었죠. 또 많은 금액들이 야당 지도자들의 은행 계좌로 뻔뻔스럽게 이체되었구요. 약 수천만 달러가요. 그 돈의 대가는 무엇이었습니까? 키예프나 다른 도시의 광장에서 누가 죽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급진파는 권력을 장악했고 박해를 조직했습니다. 반헌법적 행동을 반대하던 사람들에게는 공포 정치였죠. 정치인과 언론인들은 조롱과 공개적인 모욕을 당했으며, 우크라이나 도시들은 학살과 폭력, 그리고 명예 살인에 휩싸였습니다. 오데사의 평화로운 시위 참가자들이 잔인히 학살되고 의회에서 산 채로 불에 탔던 끔찍한 비극을 기억하는 것은 소름끼치는 일입니다. 이 만행을 저지른 범죄자들은 처벌받지 않았으며 아무도 그들을 찾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알고 있으며 그들을 처벌하고 찾아내기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유로마이단은 우크라이나를 민주주의에 더 가깝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킨 정치세력은 우크라이나를 내전의 나락으로 몰아넣었고 8년 후, 나라는 분열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현재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국제 기구에 따르면 거의 60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실업 상태에 놓여있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국가 전체 인구의 15%입니다. 또 2020년 이후로 6만 명 이상의 의사가 우크라이나를 떠났죠.

2014년 이후로 수도 요금은 세 배, 전기 요금은 수 배, 가스 요금은 수십 배 인상되었습니다. 시민들은 더 이상 공공 요금을 지불한 돈이 없으며 말 그대로 '생존'해야 합니다.

무슨 일일까요? 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대답은 분명합니다. 소련 시대, 러시아 제국 시대에서 받은 '보너스'가 낭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수십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으며 기계 공학, 계측공학, 전자, 조선, 항공과 같은 산업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실제로 일부는 우크라이나 뿐 아니라 소련 전체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2021년,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조선소 체르노모르스키 조선소가 청산되었습니다. 그 유명한 안토노프는 2016년 이후 단발 항공기를 생산하지 않고 있고, 로켓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유즈마쉬는 크례몐추그 철강 공장처럼 파산 직전이었습니다.

소련이 만든 가스 파이프 시스템은 운영이 곧 위험과 환경 비용의 급상승으로 이어질 정도로 노후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문제가 발생합니다. 빈곤과 절망의 존재, 산업과 기술의 상실입니다. 이것이 수년간 국민을 속이고 낙원을 약속해 온 친서방 문명적 선택입니까?

우크라이나에는 독립 법원조차 없습니다. 서방의 요청에 따라 키예프 당국은 국제기구 대표에게 최고 사법 기관의 구성원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습니다.

또한 주우크라이나미국대사관은 국가 부패 방지국, 반부패 검찰, 반부패 법원을 직접 관할하고 있습니다. 이는 부패와의 전쟁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디 있습니까? 부패는 점점 늘어만 가고 있고 최대치를 찍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인들이여, 당신들도 알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들의 나라가 정치/경제적 보호국 수준이 아니라 괴뢰정1권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사실 말입니다.

탈러시아화와 강제 동화를 위한 과정은 계속됩니다. 베르호나 라바는 계속해서 차별 정책을 발표하고 있으며, '원주민'에 대한 법률은 이미 시행 중입니다. 자신을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에서 이방인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교육용언어 및 국어로서의 러시아어는 모든 공공기관에서 없어졌습니다. 권력의 '청소'에 의한 법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공무원들을 합법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가능케 했습니다.

별도로 나는 크림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크림 반도의 주민들은 러시아와 함께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선택을 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이 명확한 의지를 반박할 수 없기에, 테러 공격을 저지르는 공작에 의존하고 러시아 시민을 납치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공격적인 행보가 외국 정보 기관의 지원을 받아 수행되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2021년 3월, 우크라이나는 새 군사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이 전략은 전적으로 대 러시아에 전념하고 있으며 외국을 러시아와 충돌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전략은 러시아의 크림 반도와 돈바스에서 지하 테러리스트들의 조직을 제안합니다. "국제 사회의 도움으로, 우크라이나에 유리한 조건으로서 전쟁이 종료되어야 한다." 해당 전략 문서를 좀 더 인용하겠습니다. "러시아와의 지정학적 대결에서 세계 공동체의 군사적 지원을 이용한다". 충격적인 사실은, 이것은 러시아에 대한 적대 행위의 준비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가 자체 핵무기를 만들 것이라는 성명이 이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블러핑이 아닙니다.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소련이 설계한 100km 이상의 사거리를 가진 핵 기술과 토치카-U 미사일을 포함한 무기를 운반하는 수단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혁명의 유산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획득하는 것이 다른 국가들보다 훨씬 쉬울 것입니다. 실제로 특정 국가를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해외에서 기술 지원을 해 준다면 더 쉽겠죠.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배제해선 안 됩니다.

우크라이나에 대량 살상 무기가 등장함에 따라서 세계와 유럽, 특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가장 급진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실질적 위협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서방의 후원자들이 우크라이나에 또 다른 파란을 일으키기 위해 그러한 무기가 등장할 수 있게 하는데 기여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합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수행되고 있는가 봅시다. 미국에서만 2014년부터 무기, 장비 등으로 수십억 달러가 지원되었습니다. 최근 몇 달 동안에는 서방 무기가 전 세계의 언론 앞에서 지속적으로 우크라이나에 도착하고 있죠. 우크라이나의 군대 활동과 특수부대들은 외국 고문들에 의해 활동하며 우리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훈련을 구실로 나토군은 우크라이나에 지속적으로 존재했습니다. 우크라이나 군대의 명령 체제는 사실상 나토군과 통합되어 있습니다. 이는 개별 부대나 소대를 포함하여 모든 우크라이나 군대의 지휘권을 나토 본부에서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미국과 나토는 잠재적 군사 작전의 전선으로서 우크라이나 영토의 뻔뻔한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장기적인 합동 훈련은 분명히 러시아를 겨냥하고 있습니다. 작년에만 2만3천명의 군인이 참여했습니다.

타국의 군대가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영토에 입국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 2022년에 채택되었습니다. 이는 당연히 나토군임이 분명합니다. 적어도 10개 이상의 합동 훈련이 내년에 기획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훈련이 우크라이나 영토에서의 나토군의 구축을 위한 은폐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 보리스필, 이바노프란키브스크, 추위브, 오데사 등 미군의 도움으로 현대화 된 비행장들은 최단시간의 군대 이동을 가능케 합니다. 우크라이나 영공은 미군 정찰기의 비행이 허가되죠. 러시아 영토를 모니터링하는데 쓰는 무인기 말입니다.

또 나는 미군이 건설한 오차코브의 해군 작전 기지를 통해 러시아 흑해 함대에 대한 나토 함대의 행동을 보장할 수 있다고 덧붙이겠습니다.

한 때 미국은 크림 반도에도 비슷한 기지를 만드려고 했지만 세바스토폴 당국이 이 계획을 무산시켰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언제나 기억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오늘날 저러한 기지가 이미 건설되었으며 오차코브에 존재합니다. 18세기에 알렉산더 수보로프의 병사들이 저 도시를 위해 싸웠다는 것을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들의 용기와 희생 덕분에 오차코브는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 18세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후 러시아에 합병된 흑해 지역의 땅을 노보로시야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그들은 역사의 이정표와 러시아 제국의 위인을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의 군사적 작전이 없었다면, 현대 우크라이나에는 많은 대도시와 항구가 없었을 것입니다.

최근 알렉산더 수보로프의 기념비가 폴타바에서 철거되었습니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과거를 포기하는 것입니까? 소위 말하는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 유산'을 포기하는 것입니까? 그럼 제발 일관성을 유지하십시오.

더 나아가, 나는 우크라이나 헌법 제 17조가 외국 군사 기지의 배치를 허용치 않는 점을 주목합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헌법은 다시 한 번 종이쪼가리에 불과함이 증명되었습니다.

나토군의 군사 교관과 고문들은 우크라이나에 배치되었습니다. 실제로 이들은 사실상의 외국 기지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단지 기지를 '임무'라고 부르고 있을 뿐이며 그게 전부입니다.

우크라이나는 오래도록 나토 가입을 위한 전략적 절차를 선언했습니다. 네. 물론 모든 국가는 자체적인 안보 체제와 동맹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국제법에는 잘 알려진바와 같이 다른 국가의 안보를 희생하여 자신의 안보를 강화하지 않을 의무가 포함된, 평등하고 불가분적인 안보의 원칙이 엄밀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나는 여기서 이스탄불에서 채택된 1999년의 유럽 안보 협력 기구의 헌장과 2010년 아스타나 선언을 인용하겠습니다.

즉,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선택이 다른 국가에 위협이 되어서는 아니 되며,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은 러시아에 직접적으로 위협이 됩니다.

2008년 4월, 나토의 부큐레슈티 정상회담에서 미국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가 나토 회원국이 될 것이라는 결정을 밀어붙였다는 점을 상기시켜 드리겠습니다. 미국의 많은 동맹국들은 그 정책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지만, 미국의 의지에 반할 수는 없었죠. 미국인들은 동맹국을 '사용'하여 반러시아 정책을 수행할 분이었습니다.

나토의 많은 회원국들은 여전히 나토에서 우크라이나의 출현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나토의 기준을 충족하고 부패를 없앨 수만 있다면 동부 우크라이나에서의 적대행위가,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미국 정부의 입장과 언행을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나토가 평화를 사랑하고 방어적 동맹이라는 걸 확신시키려 합니다. 러시아에 대한 위협은 없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말에 대한 가치를 알고 있습니다. 1990년 독일 통일 문제가 논의될 때, 소련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나토의 확장이나 동쪽으로부터 1인치도 군사 주둔이 없을 거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니까 독일 통일이 나토를 동쪽으로 퍼트리는 것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했죠.

그들은 말했죠. 구두로서 말했고,. 모든 게 공허한 공수표임이 판명되었습니다. 우리는 중유럽과 동유럽의 나토가입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또 무거운 역사적 유산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면서 러시아에 우호적인 국가 간 벨트를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정반대로 밝혀졌죠. 공러증에 걸린 동유럽 나라들은 집단적인 방위를 주장했습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 말이죠. 이 당시에는 우리의 선의와 개방성 덕분에, 러시아와 서방 간 관계가 굉장히 좋은 수준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독일과 중/동유럽 국가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등 모든 의무를 다하며 냉전의 유산을 없애고 극복하는데 있어 큰 기여를 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나토 이사회 및 유럽 안전 보장 이사회 회의를 포함하여 다양한 협력을 지속적으로 제안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았던 것을 처음으로 말하겠습니다. 2000년에 퇴임했던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대 나는 그에게 "러시아가 나토에 가입한다면, 미국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 대화의 세부 내역을 모두 공개하지는 않겠지만 내 질문에 대한 그의 반응은 굉장히 절제되었고 미국인들이 이 기회에 실제로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우리나라를 향한 실질적 조치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북캅카스의 테러리스트에 대한 공개적 지원, 나토 확장에 대한 우리 요구와 안보 위협에 대한 무시, 탄도탄요격유도탄조약 탈퇴 등입니다. 나는 묻고 싶습니다. 이 모든 것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대체 왜 우리를 적으로 만드려고 하는 겁니까? 왜?

답은 하나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치 체제에 관한 것도, 다른 것에 관한 것도 아니며 그저 러시아와 같은 거대한 독립 국가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이것은 러시아에 대한 전통적인 미국 정책입니다.

지도를 한 번만 보십시오. 서방이 나토가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지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속았습니다. 폴란드,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북마케도니아.

나토는 이제 러시아 국경에 직접 도달했습니다. 이게 유럽 안보 위기를 촉발했으며, 상호 신뢰의 상실로 이어져버리고 말았죠.

상황은 계속 악회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루마니아와 폴란드에서 미사일 요격기지를 배치하고 있으며, 이 발사대는 토마호크 순항 미사일, 즉 공격 시스템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또 미국은 대공 방어 및 미사일 요격을 하는 것과 함께 지상 타격도 할 수 있는 스탠다드-6 범용 미사일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방어적이라고 하는 미국의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 확장되고 있다는 것이고, 이는 사실상 공격능력의 확장과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정보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및 이후의 나토 기지 배치가 이미 예측된 미래이며 시간 문제라고 믿을 수 있는 모든 근거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시나리오 속에서 러시아에 대한 위협이 몇 배나 증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전략계획 문서. 그러니까 실제 문서에 우리 미사일 시스템에 대한 선제공격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겠습니다. 그리고 누가 미국과 나토의 주적인지 우리도 압니다. 바로 러시아입니다. 나토 문서에서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안보의 주요 위협으로 선언되었습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그 전진 발판 역할을 하겠죠. 우리 조상들이 이 소식을 들으면 과연 믿을까요? 적어도 우리는 믿고 싶지 않아도 사실이 되어버렸습니다.

많은 우크라이나 비행장이 우리 국경 근처에 있죠. 여기에 배치된 나토군 비행기는 볼고그라드, 카잔, 사마라, 아스트라한 선까지 우리 영토를 폭격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레이더를 설치하면 우랄 산맥까지 영공을 통제할 수 있고요.

마지막으로 미국이 중거리 핵전력 조약을 파기한 후 펜타곤은 이미 5500km의 목표물에 도달할 수 있는 탄도 미사일을 포함한 모든 범위의 지상 공격 무기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이게 우크라이나에 배치되면 우랄 너머는 물론이고 유럽 러시아 전역이 공격권입니다. 목구멍에 칼이 들어왔다는 겁니다. 나토를 동쪽으로 확장하고, 우리 국경으로 기지를 배치하고, 우리 우려를 개무시하고, 우리한테 침뱉고! (감정이 격해짐) 죄송합니다. 그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모든 걸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이 속담에 따라 행동하겠죠. "개는 짖어도 열차는 간다" 나는 러시아가 이에 동의하지 않았으며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즉시 말할 것입니다. 러시아는 이 어려운 문제가 협상으로서 정치적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항상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는 지역과 세계의 평화를 위한 막중한 책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2008년에 러시아는 유럽 안보 조약을 위한 발안제를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유럽과 대서양의 하나의 국가나 하나의 국제 기구가 다른 국가의 안보를 희생하면서 안보를 강화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제안은 즉시 거부되었습니다. 러시아가 나토의 활동을 제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나토 회원만이 법적 구속력이 있는 안보 보장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요.

지난 12월, 우리는 러시아와 미국 간의 안보 보장에 관한 조약 초안과, 러시아와 나토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에 관한 조약 초안을 서방에 넘겼습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적절하게 대응하여 협상의 길을 갈 용의가 있다고 밝혔지만, 모든 문제를 러시아의 기저문제와 분리하지 않고 전체로, 하나의 문제로 보는 걸 전제로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세 가지 핵심 사항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나토 확장을 방지하는 것입니다.

둘째. 러시아 국경에 타격 무기 체계의 배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셋째. 유럽에서의 군사적 기반 시설이나 잠재력을 러시아-나토 건국법이 서명된 1997년 상태로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무시된 것은 바로 우리의 이러한 근본적 제안입니다. 다시 말하겠습니다. 서방은 각 국가가 안보를 보장하고 군사 동맹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말만 계속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장은 아무것도 바뀐 게 없으며 제국주의의 '문호 개방' 정책으로 들립니다. 우리를 다시 협박하고, 또 제재로서 위협하고 있는데, 우리 군대의 힘이 커지고 러시아의 주권에 강화됨에 따라 제제와 협박은 늘어만 갈 것입니다. 또 다른 제제의 구실? 그것은 우크라이나의 상황과 관계 없습니다. 어딘가에서 항상 찾거나 단순히 날조되겠죠. 그들에게는 단순히 하나의 목표가 있으며. 그것은 바로 러시아의 발전 억제입니다. 구실 그딴거 없이도 그렇게 하겠죠.

솔직히 말해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평등한 대화를 위한 우리 제안이 미국, 그리고 나토에 의해 대답되지 않은 지금, 우리 나라에 대한 위협 수준이 최고도로 증가되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는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자신의 안전 보장을 위해 보복 조치를 취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할 일입니다.

돈바스 상황에 대해 우리는 키예프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민스크 협정을 이행할 의사가 없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평화적 해결에 관심이 전혀 없음을 확인합니다. 오히려 그들은 2014년과 2015년처럼 돈바스에서 전격전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그 사태가 어떻게 끝났는지 우리 모두는 기억하죠.

이제 돈바스는 매일 포격당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군은 무인항공기, 중화기, 로켓, 야포, 다연장로켓포 등을 지속적으로 사욯아고 있습니다. 민간인 학살이나 도시 봉쇄, 어린이 여성 노인을 포함한 사람들에 대한 학대는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했듯이 이것은 멈춰지지 않습니다.

이 비극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만 합니까? 얼마나 더 견뎌야만 합니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영토 보전을 위해 모든 노력을 최선을 다해 기울였습니다. 지난 몇 년간 어떻게든 상황을 봉합하기 위해 2015년 2월 17일 유엔 안보리 결의 2202호의 이행을 위해 돈바스에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된 것이었습니다. 대통령과 의회 수장은 변할 수 있어도 키예프에 집권한 정l권의 공격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전히 2014년 쿠데타의 산물이며, 폭력과 유혈, 무법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돈바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알아채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와 관련해 도네츠크 인민 공화국과 루한스크 인민 공화국의 독립과 자주권을 인정하기 위한, 내가 오래도록 미루어둔 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러시아 연방 의회가 이 결정을 지지하고 두 공화국들과의 우호 및 협력 조약을 비준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 문서들은 근시일 내 준비되고 서명될 것입니다.

그리고 키예프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적대 행위의 즉각적 중단을 요구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앞으로 일어날 유혈 사태의 모든 책임은 전적으로 당신들의 양심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내린 결정을 발표하면서 저는 러시아의 국민들과 모든 애국자들의 지지를 확신합니다.

감사합니다.

2022년 2월 21일

블라디미르 V(블라디미로비치). 푸틴.

-----------------------------------------------------------------------------------------------------------------------------------

 

  그냥 전쟁사 조금 파는 아마추어의 입장에서 현재 우크라이나 vs 러시아 사태를 예상해보겠습니다.

  러시아가 대놓고 자국 이름으로 돈바스 지역과 같은 우크라이나 동부를 합병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군대 주둔이라는 것도 전부 비용이 들고, 아예 점령한다면 국제적인 명분에도 문제가 생기니 영구히 장악하지는 못할 것으로 봅니다. 물론 군대를 움직인 만큼 얻을 열매는 넉넉하게 챙기겠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허수아비로 만들 것입니다. 진즉에 우크라이나 내부에 친러 세력이 창궐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서 사태 이후에도 러시아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의 주요 인사들을 포로로 잡거나 암살할 것으로 보입니다. 필요하다면 우크라이나의 주요 기반을 폭파하고, 그들의 군사력을 철저히 약화시킬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군사기지는 남아나지 않을 게 뻔합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POD&mid=sec&oid=001&aid=0013011760&isYeonhapFlash=Y&rc=N

 

[우크라 침공] 러, 동·남·북 3면으로 공격…지상군 진입(종합2보)

개전 선언 동시에 우크라 주요 도시 미사일 피격…"8명 이상 사망" 러 "우크라 군 시설 정밀타격…민간인 위협은 없어" 주장 (서울=연합뉴스) 황철환 박의래 기자 = 러시아가 24일(현지시간) 새벽

news.naver.com

 

  넓게 잡아서 러시아군이 완전히 철수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대략 15일 ~ 20일이 걸릴 것으로 예측합니다. 물론 전투가 종료되는 날은 그보다 훨씬 빠를 테고요. 우크라이나 동부에는 친러 정권이나 괴뢰 정권이 들어설 것입니다. 최소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이고, 최대는 우크라이나 전역이고요.  외부에는 군사명령을 받은 러시아군이 침입하고 내부에는 러시아의 말을 듣는 스파이들이 주요 시설을 타격하고 있으니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희망이 없습니다. 러시아에 반대하는 세력을 말살하기 위해 스파이들은 계속해서 활동할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다스리는 건 러시아도 껄끄럽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합니다. 그저 러시아의 말을 듣는 세력이 말뚝 박으면 됩니다. 유사시에 우크라이나 동부가 언제든지 러시아에 흡수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는 시나리오가 그려집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력은 군사적인 개입을 하지 못할 것으로 봅니다. 특히 미국은 한 여론조사에서 국민 70% 이상이 우크라이나 개입에 반대한다고 합니다. 내부 여론도 신경써야하는 입장이고, 상대가 러시아니 발을 담글 엄두가 안 날테고요.

  그저 러시아를 상대로 하는 경제 제재로 끝날 것입니다. 물론 그 정도로 칼을 칼집에 넣을 러시아가 아니고, 국력이 산산조각날 우크라이나가 안타깝네요. 흑해와 맞닿은 땅을 모조리 러시아가 가져가면 내륙국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미국과 러시아는 내부 선전으로 이용이 될 만한 게 무엇인지만 찾을 것입니다. 결국 러시아군이 철수하면 미국은 "어쨌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흡수되지는 않았다. NATO의 맞불이 무서워서 러시아가 기어코 포기했다."면서 눈 가리고 아웅을 시전할테고, 러시아는 "러시아군의 강력함을 입증했다. 우크라이나를 철저히 혼내줬다." 면서 내부 의식을 고취시키겠죠.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군대를 투입시키기 전에는 내부 친러 세력을 이용해서 각종 뒷공작을 펼칠 것으로 예측했는데, 푸틴은 거리낌이 없습니다.

  러시아군과 우크라이나 안의 친러세력이 전쟁범죄를 유례 없이 저지르지는 않을테고, 저지른다고 해도 노출되는 건 막을 것입니다. 아무리 러시아라도 국제 여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으니 대놓고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착취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총알과 폭탄이 사방에 가득한 전쟁이니 발생하고 있는 민간인의 피해는 적지 않을 것입니다. 죄없는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건 언제 생각해도 슬프네요.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제 3차 세계대전의 시작점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러시아가 목표를 달성한 뒤 과거 구소련을 구성했던 국가들과 동유럽은 '우리도 우크라이나처럼 될 수 있다'라는 불안감에 휩싸이고, 미국과 NATO의 신뢰도는 크게 하락하겠죠. 결과적으로 이번 일은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도 악재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역사는 UN 상임이사국과 같은 강대국들이 국제적인 인증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국가라고 인정하거나, A국가의 땅을 떼어서 B국가에게 주는 등 영토를 자르고 붙이는 것도 강대국들의 입김이 절대적이죠. 머지 않아 러시아 등 강대국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하도록 핵무장을 고려하는 국가들이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을텐데, 기존 강대국들은 이를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80억에 달하는 세계 인구와 세계 정세를 떠올려보면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게 축복받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뽕은 필자도 싫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세계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국력을 가진 나라가 대한민국이니까요.

 

728x90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세계사]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최후의 일전(1)(572년 ~ 610년 상황)
728x90
반응형

  

  * 우선 참수를 묘사한 다소 끔찍한 그림이 글 후반부에 나오니 마음의 준비를 부탁드립니다.

  * 할리드와 이슬람의 팽창에 대해 글을 이어나가려다가 비잔티움과 사산조 대립 과정을 빼놓으면 섭섭할 것 같아서 글을 씁니다.

 

572년 소아시아를 기준으로 지도를 공유합니다.(출처: Geacron)

 

  1.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572년 ~ 591년 전쟁

 

  572년부터 591년까지 로마와 페르시아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입니다. 시작점은 사산조가 차지하고 있던 아르메니아 지역의 반란이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이 이 반란을 지원하고 있었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 사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사산조에 충성하는 쪽과 비잔티움에 충성하는 쪽 이렇게 둘로 분열되었습니다.

 

노미스마(다른 이름으로 솔리두스)라는 금화입니다. 순금은 아니지만 금의 함량이 95% 이상이었고 하나에 4.5g의 금이 들어갔습니다.

 

  이 때 예전에 말씀드린 호스로 1세, 즉 사산조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향해서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과거에 벨리사리우스가 활약한 다라 지역을 포위 끝에 점령하고(573년), 시리아에서 비잔티움의 것을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결국 5년 동안 휴전을 맺는 대신에 비잔티움 쪽에서 '노미스마'라는 금화 30,000개(대략 135kg)를 연간 지불하기로 합의를 맺었습니다.

 

호스로 1세의 당시 퇴각로를 지도로 설정해봤습니다.

 

  하지만 이는 터키 남부와 시리아 지역에 한해서 이루어지는 협정이었고, 북부 방면에서는 계속 교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는 비잔티움이 가산 왕국과 동맹을 맺어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었습니다. 호스로 1세의 원정은 터키 전역에서 막히고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잔티움 장군인 유스티니아누스(옛 황제와 동명이인)는 퇴각하는 곳을 끊으려고 했고 그 와중에도 호스로 1세는 현재의 터키 도시인 카이세리(당시 도시 이름 세바스티아)를 공략했다고 합니다.

 

좀 더 넓은 지도로 퇴각로(Caesarea -&gt; Melitene)를 그려봤습니다. 장소는 비잔티움 영토 한복판이었습니다.

 

  약탈하면서 후퇴하는 도중 호스로 1세는 위 지도 상의 말라티아 도시 근처에서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필 유스티니아누스의 비잔티움 군대에게 따라잡혀서 패배해서 말년의 옥의 티를 남깁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576년 12월에 사산조의 영토 안쪽의 캅카스 지역까지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호스로 1세는 이번에는 자신이 불리한 쪽으로 평화협정을 맺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면의 '탐호스로'라는 사산조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가 유스티니아누스의 비잔티움 군대를 패퇴시켜서 영토를 보전합니다. 한숨 돌린 호스로 1세는 다시 남쪽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2. 새로운 샤한샤(사산조의 황제), 호르미즈드 4세의 즉위

 

  578년, 남부 전선에서 약속한 5년 간의 휴전이 끝나자 양쪽은 다시 전쟁을 벌입니다. 그런데 이듬해 호스로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호르미즈드 4세가 즉위합니다. 사망하기 직전 호스로 1세는 재개된 전쟁 초기에 신통치 않자 이를 중단하려고 협상했습니다. 비잔티움은 기나긴 전쟁으로 국고가 거덜나고 있었고, 사산조 역시 지쳐 있었고 백성들과 귀족들 모두가 지쳐있었습니다. 그러나 패기만만한 호르미즈드 4세가 합의에 도달할 뻔한 협상을 중단했고, 비잔티움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전쟁은 비잔티움과 사산조라는 코끼리들의 싸움에 가산 왕국(위 지도의 주황색 영토, Ghassanid)과 라흠 왕국(위 지도의 연한 파랑색 영토, Lakhmid)이라는 늑대들이 각각 보조하고 있었습니다. 580년 가산 왕국이 라흠 왕국에게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다음 해에 비잔티움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티그리스 강까지 도달합니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에 함대까지 만들어서 수륙 양공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어찌된 이유인지 잘만 지원하던 가산 왕국의 지도자 알 문디르 3세가 비잔티움군의 진군 경로를 사산조에게 누설합니다. 이 배신이 원인이 되어 비잔티움의 진격이 막혔고, 사산조와 라흠 왕국이 오히려 공격 태세로 나섭니다. 이상하게도 알 문디르 3세는 적들이 올 때는 다시 마우리키우스와 함께 적들을 막아내고, 그가 후퇴하는 시간을 벌어줍니다. 마우리키우스는 비잔티움 영토 근처까지 가서 병력을 추스리는듯 했지만 국경에 대기하던 페르시아 군대에게 한 차례 패배합니다.

 

  마우리키우스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비잔티움의 황제 티베리우스 2세는 격노하여 알 문디르 3세를 처형시킵니다. 정작 알 문디르 3세는 패배한 건 마우리키우스가 못싸운 책임이라고 반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기록이 간략하게 써져있어 알 문디르 3세가 왜 누설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전의 계획이 틀어지거나(예시 - 정보 누설을 역이용한다거나) 서로 소통이 안 된 모양입니다. 아니면 사산조나 라흠 왕국이 이미 정보를 입수했는데 그가 배신한 것으로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가산 왕국은 미래에 이슬람 세력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비잔티움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산조는 이 기회를 삼아 582년 '콘스탄티나'라는 지역을 공격하지만 마우리키우스가 재정비에 성공했는지 막아내고, 5년 전 호스로 1세를 도와준 탐호스로를 전사시킵니다. 마우리키우스는 그 해에 티베리우스 2세의 사위가 되고 후계자 지명을 받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베리우스 2세가 사망하고 그가 새로운 황제가 됩니다.

 

사산조와 서돌궐(보라색)은 6세기 초반까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릅니다. 비잔티움이나 사산조나 1대1로 싸우는 건 무리였고 다른 적들도 신경써야 했습니다.

 

  3. 사산조의 내전

 

  580년대의 상황은 서로 결정적인 승리 없이 이기고 지는 싸움을 반복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사산조의 '바흐람 추빈'이라는 장군에게서 전환됩니다. 바흐람 추빈은 588년 아무 다리야(Amu Darya) 강을 침범한 서돌궐의 30만 ~ 40만 대군(기록상)을 1만 2천 명의 기병으로 막아낸 명장입니다. 사산조는 호스로 1세 치기에 에프탈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돌궐과 연합한 적이 있었으나 서로 적대 관계로 돌아섰고, 서쪽의 비잔티움까지 수십 년간 양면 전쟁을 치르는 입장에 놓입니다. 다음해 바흐람 추빈은 비잔티움 전선으로 나가서 공격해오는 비잔티움과 승패를 한 번씩 주고 받습니다.

 

바흐람 추빈을 새긴 은화입니다.

 

  바흐람의 패배를 트집잡은 호르미즈드 4세는 평상복을 보내며 지휘관 자리를 박탈한다는 친서를 보냅니다. 그러나 바흐람은 해고 명령에도 버티고 있었고, 격노한 황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한 군대를 보냅니다. 하지만 파견한 군대도 바흐람을 따랐고, 그는 수도 크테시폰으로 돌격합니다. 하지만 600명에 달하는 귀족들 호르미즈드 4세를 폐위시키고 아들이자 새로운 군주인 호스로 2세가 제위에 오릅니다. 전쟁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군주에게 질렸던 귀족들은 앞장서서 반역하여 호르미즈드 4세의 눈을 뽑아버립니다.

 

  야심에 넘쳤던 바흐람은 호스로 2세를 위협하여 샤한샤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위협했습니다. 휘하에 있는 군대에 있는 군대는 바흐람이 훨씬 많았기에, 호스로 2세는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과 함께 수도를 빠져나오고, 비잔티움으로 향합니다. 국경 근처에 도달하자 편지를 보내서 마우리키우스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마우리키우스의 얼굴을 새긴 동전입니다.

  마우리키우스는 끝나지 않는 전쟁을 종결할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호스로 2세에게 비잔티움 군대를 보냈고 크테시폰에서 찬탈자 바흐람을 몰아냅니다. 내전은 2년을 끌었고 바흐람은 서돌궐로 망명을 갔지만 금방 암살당합니다. 

 

지도 속 'ARMENIA'가 구원의 대가로 비잔티움이 가져간 땅입니다.

 

  여기서 비잔티움이 맨입으로 호스로 2세를 도와줬을 리가 없겠죠? 사산조 기준으로 북서쪽의 수많은 변경 도시가 비잔티움으로 넘어갑니다. 또 호스로 2세는 마우리키우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평화 협정과 함께 양국은 실로 오랜만에 전쟁을 멈췄습니다.

 

  4. 없는 살림에 처한 마우리키우스

 

마우리키우스는 다뉴브 강에 긴 전선을 구축했습니다.

 

  사산조 방면의 정세를 매듭 지은 마우리키우스는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을 막아내는데 집중합니다. 그들은 이미 580년대부터 다뉴브 강을 넘어서 제국을 무한정 괴롭혔습니다. 이에 마우리키우스는 강을 따라 견고한 방어선을 형성했습니다. 발칸에 군대가 집중되고 성과가 미미하자 아바르족은 596년경에 서쪽의 프랑크 왕국으로 공격 방향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프랑크도 쉽게 볼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아바르족의 공격은 1년 뒤 재개되었습니다. 비잔티움의 군대는 지쳐 있었고 마우리키우스의 대중적인 인기도 떨어져 갔습니다. 599년에 아바르 족이 비잔티움군 12,000명을 포로로 잡아서 몸값을 요구한 적이 있었는데, 마우리키우스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아바르족은 그들을 모두 죽입니다. 이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는 낮아졌고 백성들의 성토는 높아져 갔습니다. 마우리키우스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는데 전임자 티베리우스 2세가 돈을 펑펑쓰는 사치스러운 생활 등으로 제국의 재정의 국고가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588년에도 병사들의 임금을 4분의 1로 줄인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철회한 적도 있었습니다. 바닥난 군자금 사정으로 마우리키우스는 돈이 드는 적극적인 계획을 실행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602년 11월에 일이 터집니다. 우선 겉으로 비잔티움의 전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보였습니다. 아바스조과 슬라브족은 거의 들어오지 못했고, 마우리키우스는 다뉴브 강 북쪽에 군대를 주둔시킵니다. 이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본래 겨울이면 병사들이 고향으로 귀향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보급품과 여비를 아끼라고 강 건너편에 진지를 짓고 여기서 겨울을 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지도 속의 '콘스탄티노플', '칼케돈', '니케아'라는 도시 위치에 주목하시면 됩니다.

 

  적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추운 나날을 보내라는 요구에 병사들은 들고 있어났습니다. 포카스라는 장군이 병사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병사들을 고무시켰습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반란에 마우리키우스는 가족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칩니다. 마르마라 해를 건너서 '칼케돈'이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호스로 2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10여 년전 나는 페르시아를 도운 일이 있었소. 이참에 이에 대한 보답으로 여기고 비잔티움의 황태자를 보호해 주시오."

 

  황태자 테오도시우스에게 직접 사산조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라고 다급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이미 포카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추대를 끝냈고 장교들과 병사들을 칼케돈으로 보냅니다. 마우리키우스와 네 아들 모두 살해당합니다. 멀리 도망치지 못한 황태자도 니케아에 자객의 습격을 받아서 아버지와 형제들 곁으로 끌려옵니다.

 

마우리키우스(왼쪽)가 처형당하기 직전의 그림입니다. 오른쪽에는 포카스가 있고, 중앙의 목 없는 시체는 마우리키우스의 다섯 아들들인 것 같습니다.
포카스를 따르는 군인들이 마우리키우스와 아들들의 머리를 잘라 효수하는 걸 묘사한 그림입니다.

 

  5. 새로운 전쟁(603년 ~ 628년)

 

  전 황제와 다섯 아들의 머리는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에 효시됩니다. 호스로 2세는 즉시 군대를 일으키고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침입합니다. 심지어 테오도시우스 황태자는 살아있으며 내 군대가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효시된 머리는 가짜라고 말한 것이죠. 실제로 테오도시우스의 머리는 고문에 손상되어 대중들이 판별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지도 수정합니다.) 위 지도는 602년 사산조와 610년 사산조를 나타낸 것입니다. 개전되자마자 밀리기 시작하는 비잔티움을 알 수 있습니다.

 

  포카스는 사악한 폭군이면서도 무능한 군주였습니다. 사산조의 공격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면서 주변의 유능한 장수들을 의심하여 자꾸 숙청했습니다. 특히 나르세스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역사가 테오파네스는 '페르시아 어린이들까지 나르세스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포카스를 인정하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동쪽 국경에서 사산조를 상대로 계속 이겨낸 장군을 회유하지 않고 화형시킵니다.

 

   그 와중에 사산조는 전쟁의 승기를 잡아 아르메니아, 에데사, 카이사레아를 손에 넣습니다. 비잔티움은 외부에는 사산조라는 쓰나미를 맞았고 내부에는 내전 상황에 돌입합니다. 포카스는 정신을 못 차리고 학살과 고문을 계속합니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건 이런 경우를 놓고 하는 말이겠죠.

 

  6. 암군 포카스의 말로, 그러나 풍전등화에 처한 비잔티움 제국

 

  마침내 카르타고의 총독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 사령관 등 포카스에게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합류합니다. 610년 10월 4일 마르마라 해를 통해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도착하는데, 시민들이 포카스를 잡아서 헤라클리우스 앞으로 끌고 옵니다.

 

"그래, 그대가 제국을 이 따위로 다스린 자인가?"라는 헤라클리우스의 질문을 "너가 더 잘 통치하게 해주겠나?"라고 포카스가 대답합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분노했고,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면서도 참회하지 않는 포카스를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화형을 선고하는 헤라클리우스(오른쪽)과 잡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포카스(왼쪽), 그리고 중앙에 화형 처형대가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포카스의 최후는 의견이 다른 것인지 나무위키에서는 오체가 분해되었다고 나오는데, 제가 읽은 책에서는 도시 한복판에서 화형에 처해졌다고 나옵니다. 사로잡힌 포카스와 화형을 선고하는 헤라클리우스의 사진을 올립니다.

 

  막장 지도자는 죽었고 새 시대가 열렸지만 동쪽에는 해일처럼 몰려오는 사산조가, 북쪽에는 아바르족이 있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즉위했지만 경제, 군사, 외교, 안보 모든 면에서 망조가 든 제국을 되살려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7. 출처

 

도현신,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서해문집(2019)

 

수잔 와이즈 바우어,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권』, 부키(2010)

 

유튜브 <The Rise and Fall of the Sassanid Empire>

(https://www.youtube.com/watch?v=Qf2Hm2AP8D8)

 

디비언트아트 <End of Antiquity> (https://www.deviantart.com/amelianvs/art/End-of-Antiquity-451118475)

 

영문위키 <byzantine–sasanian war="" of="" 602–628="">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E2%80%93Sasanian_War_of_602%E2%80%93628)</byzantine–sasanian>

<byzantine–sasanian war="" of="" 572–591="">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Sasanian_War_of_572–591)</byzantine–sasanian>

(https://en.wikipedia.org/wiki/Sasanian_civil_war_of_589–591)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Perso-Turkic_War)

(https://en.wikipedia.org/wiki/Heraclian_revolt)

 

728x90
반응형
  Comments,     Trackbacks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