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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남은 전쟁사, 페르시아-그리스 전쟁(~기원전 479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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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세기~6세기 후반의 오리엔트 4대 강국, 메디아, 리디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키루스 대제는 저 국가들을 아케메네스 제국으로 통합하고, 다리우스 대제 시기 페르시아 제국은 최대 세력을 이룩합니다

 

  1. 세계사 최초의 대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기원전 6세기 중반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는 장기간 압도적인 세계 최강의 대제국으로 군림했습니다. 키루스 대제가 메디아와 리디아를 차례로 평정하고, 바빌론의 높은 성벽을 공략해서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나머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을 제국의 영향권에 두었습니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해서 오리엔트 4대 강국이 모두 아케메네스 제국에 복속되었습니다. 캄비세스 2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도 역시나 인도와 마케도니아를 정복했습니다. 그는 샤한샤(왕 중의 왕)라는 대왕의 직위에서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제국을 ‘사트라피’라는 20여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습니다. 거기에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렸으나, ‘왕의 눈’과 ‘왕의 귀’라고 하는 감찰관을 통해 세금을 제대로 내는지 등을 감시시켰습니다. ‘왕의 길’이라는 역참 시스템도 강화했는데 감찰관이 2400km의 길을 7일 만에 주파하여 다리우스에게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앙집권화가 갖춰진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리스 보병이 양익 포위로 승리한 마라톤 전투, 빨간색이 페르시아군이고 파란색이 그리스군입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사방에 영향권을 넓혔습니다. 그리스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죠. 다리우스 1세는 사신을 보내서 복종하라는 의미로 흙과 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거절했습니다. 기원전 499년부터 494년까지 페르시아가 이오니아의 반란을 진압했을 때 아테네는 지원군을 보내 이오니아 도시를 도왔습니다. 페르시아는 반란을 진압하고 아테네를 정복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기원전 490년,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군은 다리우스 1세가 보낸 페르시아 원정군의 양익을 노리는 전술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페르시아군 중앙이 아테네군 중앙을 공략하여 파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군 양익 보병이 페르시아군 양익을 무너뜨려서 일방적인 아테네군 승리로 끝났습니다. 페르시아군은 뒤에 있는 함대로 후퇴해서 38km 정도 떨어진 아테네로 상륙을 노렸지만 이미 방비를 끝낸 아테네군을 보며 페르시아군은 후퇴했습니다.

  2.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의 시작

  몇 년 뒤 다리우스 1세는 세상을 떠나고,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새로운 샤한샤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르다넬즈 해협에 부교를 놓아서 육군의 통로를 만들었고, 지난 원정에서 페르시아 해군이 풍랑에 직면했던 곳에 운하를 뚫어서 배가 더 원활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치밀한 원정 계획을 세웠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최소 10만명이 넘는 병력과 600척~1200척의 함대를 이끌고 공격했습니다. 아테네는 육지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리스티데스를 쫓아내고 함대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에 대항하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함선의 대부분은 ‘트라이림(Trireme)’이라는 3단 노선이었습니다. 3단 노선은 말그대로 노잡이들이 3단으로 앉은 함선을 뜻합니다. 가장 위에 있는 노잡이가 가장 긴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이 함선은 폭이 5.5m, 길이는 36m~39m 정도였고, 200명의 선원이 탈 수 있었습니다. 뱃머리 끝에 충각이 있어서 충돌을 통해 적군의 함선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해군의 주력도 트라이림이었지만, 일부 병력은 크기가 작고 쾌속선인 ‘바이림(Bireme)’이라는 2단 노선을 통해 전장에 투입했습니다. 바이림의 목표는 보병들을 빠르게 적선에 침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그리스 해전의 핵심이었던 트라이림
 지도 중간에 있는 '아르테미시움'이 전쟁 초기에 해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육군과 수군이 한꺼번에 진군해오는 페르시아군에 맞서서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은 아르테미시움이라는 항구에 함선을 집중시켰습니다. 기원전 480년 8월 셋째 주, 아르테미시움 항구에 모인 아테네, 코린트, 메가라, 칼키스 등의 도시국가들의 연합 해군은 371척에 달했습니다. 반면 북동쪽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페르시아의 해군은 1,207척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 트라이림의 항로 앞에 폭풍이 나타나 대략 200척이 침몰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르테미시움에서 그리스 해군과 페르시아 해군 사이의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선제공격을 선택했습니다. 앞선 그리스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의 횡대 중 느슨한 곳을 노렸습니다. 그들의 함선 측면을 충각으로 부딪히고 빠르게 뒤로 빠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트라이림의 핵심인 충각입니다. 뱃머리 아래에 돌출되어서 적선에 충돌시켜 침돌시킬 수 있었습니다.

 

  몇 차례의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충분한 전공을 올렸습니다. 첫 전투에서 페르시아 함선 30척을 나포하는 승리를 거두는 등 지속적인 손실을 입혔고, 또다시 폭풍우가 페르시아 함선 200여 척을 좌초시켰습니다. 하지만 전투 마지막 날에는 페르시아군도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았고, 그리스 연합군도 아테네에서 온 함선의 절반을 상실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영문위키에서는 3일 간의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100척을, 페르시아군은 400척의 함대를 잃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양쪽 함대는 재정비 상태로 들어가 시신을 수습하고 난파된 함선 중 쓸만한 게 있는지 돌아봤습니다.

 

  한편, 멀리 지상에서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지휘하는 그리스 연합군이 테르모필레에서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대군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스군은 좁은 계곡에서 적은 병력으로도 목숨을 걸고 저항했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도 아르테미시움 해전처럼 3일 전투로 끝났는데, 둘째 날까지는 그리스군이 압도적인 전투교환비를 거두었지만, 크세르크세스는 에피알테스로부터 산길에 협로가 있다는 정보를 듣자마자 페르시아군의 병력을 나누어 우회시켰습니다. 셋째 날 그리스군은 일방적으로 포위되었고, 결국 레오니다스 왕은 전사했습니다.

 

영화 <300>에도 묘사되었던 테르모필레 전투, 빨간색이 페르시아군인데 우회해서 파란색 그리스군의 뒤를 공격해서 승리했습니다.

  그리스 수군은 테르모필레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고 바로 아르테미시움을 떠났습니다. 페르시아 대군이 아테네까지 일사천리로 내려올 것은 뻔했고, 아테네보다도 북쪽에 있는 아르테미시움을 방어할 수는 없었습니다. 테베는 진즉에 페르시아의 편에 섰습니다. 9월 초 아테네인들은 아테네를 소개(疏開)했고 페르시아군은 텅 빈 아테네에 입성했습니다. 살라미스 섬은 아테네에서 피난 온 사람들로 북적였고, 그리스 지휘관들은 어디에서 일전을 벌일지 논의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회의에서 코린토스 지협을 지키자는 다른 지휘관들의 의견을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공간이 넓은 코린토스보다 좁은 해협이 있는 살라미스에서 싸워야 한다고 간신히 설득했습니다.

 

  그는 동시에 시킨노스라는 첩자를 적군에게 보내서 페르시아에 복종하겠다는 거짓 항복을 알렸습니다. 또한 그리스 연합군은 서로 분열되어있고 일부는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리스 쪽 지휘관들은 소속이 달라서 뜻이 쉽게 맞지 않았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대왕 회의에서 살라미스 해협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살라미스 해전 지도
책 <살라미스 해전>에 그려진 해전 지도

 

  3. 전황이 뒤바뀐 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480년 9월, 살라미스 해협에 남은 함선을 모두 모은 그리스 해군은 370여척이었지만, 페르시아 해군은 적게 잡아도 700척이 넘었습니다. 심지어 그 이외의 페르시아 함대 200척이 살라미스 섬 서쪽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해전이 벌어지고 그리스 함대 40척이 뒤로 후퇴했습니다. 후퇴하는 그리스 해군을 타격하려고 페르시아 해군은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습니다. 비좁은 해협에 페르시아 편으로 참전한 페니키아인의 해군 부대, 이오니아인의 해군 부대 등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 순간,

 

 

  바람이 강하게 불고 높은 파도가 살라미스 해협을 뒤덮었습니다. 페르시아 함선들은 크게 흔들렸고 서로 부딪혔죠. 테미스토클레스는 즉시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스 함선은 페르시아 함선에 가까워질 때 젓던 노를 위로 들어 올렸습니다. 그 뒤 뱃머리로 페르시아 함선의 노를 집중적으로 파괴하고 충각으로 파괴시키는 방식을 썼습니다. 페르시아 함대는 구조가 높아서 그리스 파도보다 상대적으로 더욱 크게 흔들렸고, 잘 훈련된 그리스 해군은 함대를 더 빠르게 진격시켰습니다. 전투가 지속되고, 좁은 해협에서 양군의 함대가 콩나물시루처럼 서로 오도 가도 못하자 양군은 직접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4. 전투 결과 및 전쟁의 종결과 의의

  전투는 하루종일 지속되었고, 날이 저물자 그리스 해군의 피해량이 40척인데 반해 페르시아 해군은 200척이었습니다. 특히 페르시아 정예 해군인 페니키아인들의 함선이 거의 전멸했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패배하는 전황을 지켜보면서 분노했지만, 퇴각로를 아테네 해군이 끊을 것을 우려해서 원정을 포기했습니다. 부하 마르도니우스에게 그리스의 점령지를 맡겼고, 자신은 페르시아로 돌아갔습니다. 이듬해 그리스 연합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마르도니우스를 죽이고, 미칼레 전투의 연승으로 페르시아를 그리스 땅에서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장기간 지속되었던 페르시아-그리스 전쟁

 

  이 전쟁의 패배로 페르시아는 에게해 일대에 다시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내부의 정치적 혼란으로 페르시아는 재차 공세를 펼치지 못했고, 그리스 연합군은 에게해에 델로스 해상 동맹을 결성하여 섬을 점령하는 등 동쪽으로 세력을 뻗어 나갔습니다. 물론 페르시아 제국의 국력이 세계 최강 제국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고,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은 역사를 크게 바꿨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중동 제국이 서양 세력을 복속시켰을 수도 있는 전쟁에서 그리스는 오히려 승전했고, 국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패전이 짙어진 상황에서 대승을 거둔 살라미스 전쟁은 간혹 역대 4대 해전이라고 불릴 만큼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역사철학』이라는 저서에서 살라미스 해전의 역사적 의의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역사상 정신의 힘이 물질의 양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이 이렇게 명백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그만큼 그리스 사령관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의 역량(속임수와 지형 선택 등)이 빛났던 전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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