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년 11월 벌어진 비수대전은 전진의 100만 대군과 동진의 8만 명이 맞선 전투였죠. 심지어 서역으로도 10만명의 원정군을 더 보냈다고 합니다. 물론 이건 기록상에 나오는 기록이고, 실제 전진의 병력은 3분의 1도 안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4세기 후반 전진의 군주 부견은 대륙 통일을 거의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370년 전연을 정복하고, 북벌로 전진과 맞섰던 환온이 죽자 역공을 가해서 한중을 비롯한 서쪽의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378년에도 동진이 가진 양양 영토를 가져갔죠. 핵심이었던 화북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과거 삼국지의 촉나라 땅까지 손에 넣으면서 전진과 동진의 격차는 압도적이었습니다. 반면 동진이 가진 남쪽 영토는 개발이 아직 안 된 곳이 너무 많았죠. 당시 두 나라의 국력 격차는 삼국지의 위나라와 오나라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비수대전이 벌어진 강력한 원인은 위대한 재상이었던 왕맹이 375년 죽은 게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군대를 이끌고 전연을 평정하고, 부견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호족들을 정리하면서 최전성기 동진을 이끌었던 대단한 인물이었죠. 내정도 탄탄했고요. 왕맹은 죽기 직전 "동진을 도모하지 말고, 내치에 집중하시고 선비족과 강족을 멀리하고 때가 되면 제거하십시오"는 유언을 남깁니다. 왕맹이 죽자 부견은 하늘이 왜 그를 이렇게 빨리 데려가냐고 원통해했습니다. 왕맹은 부견 휘하의 선비족의 모용수와 강족의 요장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맹이 죽고 대략 7년이 지나자 부견은 거대한 병력을 동원할 마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회수 정벌에서 동진의 군대에게 막히는 일도 일어나고, 더 이상 소규모의 병력을 통한 점진적인 정복에 싫증이 난 것인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내와 아들들, 신하들과 스승으로 모시던 스님들까지 부견을 말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맹이 멀리한 다음 숙청하라고 간언했던, 선비족 출신의 명장이었던 모용수가 찬성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전진의 기세가 막강했습니다. 운성이 모용수에게 떨어지고, 수양성이 부융에게 떨어지고, 수춘성 근처까지 전진의 군대가 들이닥쳤죠. 그 다음 비수를 사이에 두고 거대한 전진의 대군과 한참 적은 동진의 군대가 맞섰습니다. 동진의 총사령관 사현은 대군을 조금 뒤로 후퇴시킨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부견은 의심했지만 우선 제의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후퇴시켰습니다. 설사 동진의 거짓말이었고 뒤를 공격한다고 해도 바로 역습해서 섬멸시키겠다고 계획했죠.
그러나 부견의 몰락은 시작되었습니다. 부견이 군대를 뒤로 이동시켰는데 후속 부대에게 그 이유를 제대로 명령내리지 않았습니다. 전진의 대군은 혼란에 빠졌고, 심지어 겉으로는 전진에 항복했으나 부견을 제대로 섬길 마음이 없었던 주서라는 지휘관이 "전진이 패배했고 동진이 이겼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서 대군이 순식간에 붕괴되었습니다.
그 때 동진의 기병이 비수를 도하해서 뒤를 급습했습니다. 지리멸렬한 대군으로 부견의 계획은 실행할 수 업섰고, 전진의 병사들은 살 길을 찾아 도망갔습니다. 부융은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사망했고, 부견도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남은 전진의 병력도 동진군의 공격에 패퇴했습니다. 호위병도 없이 혼자 도망간 부견은 모용수의 군대와 접촉해서 전진으로 돌아갔습니다. 부견이 직접 비수대전에서 거느리던 87만의 원정군 병력 중 제대로 수습할 수 있었던 병력은 10만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비수대전은 부견의 입장에서 참담하게 끝났습니다. 역사에 남을 참패 이후 전진은 분열의 길로 추락하죠. 왕맹이 경고했던 이민족 출신의 모용수는 후연을 건국하고, 요장은 후진을 건국하고, 모용홍도 서연을 건국했습니다. 중국 역사는 또다시 분열의 역사와 마주했습니다. 다만 모용홍은 오래 가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죽고 그의 동생 모용충이 서연을 이어받았습니다.
서연의 군대는 장안성을 포위했고, 부견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서쪽으로 도주했으나 요장에게 잡혀서 포로가 되어버립니다. 과거 신하였던 요장에게 부견은 385년 살해되고, 전진도 394년 멸망했습니다. 비수대전이 벌어지고 2년 만에 부견이 죽고, 11년 만에 사방의 반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망한 것입니다.
부견이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게 패인이고, 너무 많은 병력을 잃은 것도 컸습니다. 부견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이 전쟁은 재상 왕맹만 살아있어서 말렸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참사였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계속 소규모 병력으로 손해를 크게 줄일 수도 있었겠죠. 이 말년의 큰 실책만 아니었어도 부견의 이름은 더욱 위대하게 남았을 것입니다. 만약 통일에 성공했다면 6세기 후반 수나라의 통일을 200년 정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진은 세계사의 위대한 제국이자 패권국으로 엄청난 칭송을 받았을 것입니다. 4세기가 끝나길 시기라면 로마가 동서로 갈라졌을 때라 동시대 중국 통일 왕조는 당대 압도적인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는 의의가 있었죠. 사산 왕조와 굽타 왕조도 만만치 않은 국가였지만 통일 중국 왕조의 국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겠죠.
물론 당시 전진이 통일했으면 고구려가 위험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한국인으로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전쟁이라는 역사가, 잘하다가 한 번의 실패만으로도 몰락하거나 시대의 패배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삼국지의 원소도 관도대전 이전까지 전쟁에서 전승이었고 조조보다 훨씬 강한 세력을 구축했으나 관도대전의 대패로 이미지가 너무 평가절하 되어있는 것처럼요. 왕맹 같은 훌륭한 신하의 존재가 군주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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