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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며,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을 접하길 원하는 1인입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며 주기적으로 헌혈하는 헌혈자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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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2)
교류와 전쟁의 역사, 747년~751년의 고선지의 서역 원정과 아바스vs당나라의 탈라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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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를 간략하게 그린 지도

  1. 8세기 초반 실크로드 무역과 서역 세력

  중국 왕조는 한나라 때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서쪽과 무역을 해왔습니다. 중국 - 타클라마칸 사막 - 파미르 고원 - 중앙아시아 초원 - 현재 이란 지역 - 지중해까지 닿는 어마어마한 무역로였습니다. 중국에서 만든 비단, 도자기 등의 물품과 양잠업, 제지술 등의 기술이 서방으로 넘어갈 만큼 동서양의 경제와 문화가 오고 가는 통로였습니다.

  그러나 실크로드 무역은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파미르 고원은 험준했고 타클라마칸 사막 은 너무 넓어서 관리하기에 극악의 난이도였습니다. 주변의 사막, 초원, 산지로 둘러싸인 그 길에 여러 세력이 있었습니다. 당나라로서는 상인들이 문제없이 무역에 종사하도록 저들을 억제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중국 왕조를 적대하는 거대한 강대국이 무역로를 가로막으면 실크로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죠.

  740년대 당나라는 실크로드의 무역이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토번 제국은 사방으로 세력을 넓혀나갔고 중앙아시아의 서역 통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파미르 고원 주위에는 수십 개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토번은 그들 중 실크로드의 심장부에 있는 ‘소발율’이라는 나라의 국왕에게 토번 공주를 왕비로 맞이함으로써 동맹을 맺었고, 파미르 고원에 있는 나라들 대부분이 토번에게 귀속되었다고 합니다.

  당나라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개가운, 정인완 같은 여러 절도사를 보내서 소발율과 주변 국가들을 당나라의 영향력에 두려고 했지만 토번이 그들을 지원하는 바람에 모두 실패했죠. 하지만 당나라 현종은 실크로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선지의 원정로

  2. 고선지의 서역 원정

  747년, 당나라의 고선지는 왕에게서 1만 명의 병사를 받아서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는 토번의 기습을 피해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기점으로 더욱 북쪽에 위치한 천산산맥을 가로지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긴 행군에 대비하기 위해 1만의 병사들은 각각 말에 타면서 식량과 무기를 운반했습니다. 그렇게 병사 1만 명과 말 1만 필은 목이 타들어 가는 사막과 얼음이 가득한 고원을 넘어가며 힘든 원정을 계속했습니다.

  고선지와 당나라군은 100일간의 원정을 이겨내고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동쪽에 도착했습니다. 병사들에게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하게 한 뒤, 고선지 파미르 고원의 험한 산맥 안에 있는 ‘연운보’라는 토번의 요새의 공략에 착수했습니다.

  고선지는 부대를 4천, 4천, 3천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서 세 방향으로 연운보를 점령하기로 계획했습니다. 높은 언덕을 끼고 있는 연운보에 토번군 1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선지가 토번이 예상하지 못한 원정길로 오는 바람에 토번군은 당나라군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한 나절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연운보 기습에 성공하고, 토번군 5천명을 죽이고 1천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말 1천 필과 의복, 식량, 병기 등의 전리품도 획득했죠. 고선지는 소발율국의 수도 아노월성을 향해 원정을 계속했습니다.

  고선지는 재차 소발율과 토번이 예상하지 못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힌두쿠시 산맥에 위치한 탄구령을 넘기로 결정한 것인데, 여기도 항상 얼음이 있을 만큼 춥고 산소가 희박한 고지대였습니다. 탄구령은 지금의 파키스탄 북부의 다르코트 고개로 자그마치 해발 4,700m가 넘었습니다. 절벽을 오르는 상행길도 목숨을 건 행군이었지만 하행길 역시 너무 험했습니다. 고개를 내려가는 도중 몇몇 병사와 말이 떨어져 죽는 사고가 빈번해지자 병사들은 더이상은 못 간다고 고선지에게 호소했습니다. 이 때 소발율국의 주민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나라군이었습니다. 고선지는 진즉에 20여 명의 병사들을 미리 앞으로 보내서 아노월성 주민으로 꾸미도록 명령했고, 지금 나타나도록 꾸민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주민들이 눈에 보이자 목적지가 멀지 않다며 사기가 올랐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덮인 내리막길을 통과했습니다.

  한편 소발율국의 왕은 동맹국 토번의 힘만 믿고 당나라군을 피해서 아노월성 안에만 있었습니다. 고선지는 토번 편에 있는 추장들을 죽이고, 병사들에게 토번과 서역을 잇는 등나무로 만든 절벽다리를 끊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긴 절벽다리를...

 

당나라군이 파괴해서 토번군의 길이 끊겼습니다.

  그때 마침 토번의 구원군도 동맹을 구하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아슬아슬한 시간에 당나라군은 다리를 끊는데 성공했고, 토번군의 길은 막혔습니다.

 

서기 750년경 아시아 세력 지도, 황색이 당나라고 녹색이 아바스입니다.

 

   3. 원정에서의 연승, 그러나......

   이렇게 고선지의 원정은 성공했습니다. 병력을 크게 잃지 않고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북부, 우즈베키스탄까지 당나라의 영향 아래에 두었습니다. 기록상으로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72개국이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선지는 소발율국 점령 이외에도 몇 년 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던 당시 석국이라는 나라도 정벌했습니다. 서쪽의 이슬람 왕조와 동쪽의 당나라 중 어느 쪽에 붙을까 고민하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점점 당나라로 향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석국 정벌에서 터졌습니다. 고선지는 석국의 수도에 있는 청년들을 모두 노예로 삼고 노약자들을 학살했습니다. 왕궁은 물론 백성들의 집까지 철저하게 약탈했습니다. 심지어 당나라로 압송된 석국의 왕은 현종에게 처형당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국가들은 왕이 항복했는데도 살해당했다는 사실과 고선지가 죄없는 백성들을 잔혹하게 억압한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아바스와 당나라 사이에 벌어졌던 탈라스 전투

  4. 탈라스 전투(751년, Battle of Talas)

  아바스 왕조는 분노한 중앙아시아의 국가들과 연합해서 당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지하드 이븐 살리흐라는 장군이 아바스군을 이끌었고, 탈라스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고선지는 아바스 제국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군과 ‘카를룩’이라는 유목민족의 부대와 함께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751년의 이 전투에서 양측의 병력 규모는 확답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우선 수십 만을 동원했다는 설은 과장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견입니다만 고선지의 병력은 3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살리흐의 아바스군은 이와 비슷할 것으로 보이나 연합한 중앙아시아 병력까지 연합하면 3만 몇천 명 정도로 약간 앞설 것으로

  전투는 5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양측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도중 당나라 편에 있었던 카를룩의 군대가 배신하면서 아바스군으로 돌아서는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내부가 분열되고, 외부에 살리흐가 이끄는 연합군이 함께 공격해오자 고선지는 병사들 태반을 잃었습니다. 퇴각하는 길에도 지형 때문에 험난해서 이동이 더뎠고, 쫓아온 연합군에 의해 또다시 많은 병사가 죽었습니다. 고선지는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탈라스 전투의 진형. 노란색이 당나라, 파란색이 당나라->아바스로 전향한 유목민족 카를룩, 초록색이 아바스 병사들입니다. 아바스와 카를룩이 당나라를 협공하는 모양새입니다.

 

  5. 이후 고선지의 최후와 탈라스 전투의 의의

  패전 이후 고선지는 절도사 직책에서 물러나고 다시는 원정을 이끌지 못합니다. 다른 군사 작위는 유지한 채로 조정에서 계속 일했습니다. 예전에 토번의 가르친링에게 패배한 당나라 장수들은 신분 자체가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인 일로 여겨집니다. 이는 고선지가 세웠던 공로가 커서 현종이 용서해준 것이나, 탈라스 전투가 총력전까지는 아닌 만큼 조정에서 피해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훗날 고선지는 안사의 난 시기 안록산에 맞서서 당나라 정부군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감군 변영성이 고선지는 군자금을 착복하고 있다며 모함했고, 분노한 현종은 고선지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고선지는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혼란의 시대에 더 이상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고, 끝내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고선지의 석국 원정에서 벌어진 끔찍한 억압 행동은 명백히 실책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서역 국가들이 당나라에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케를룩 군대의 전향도 고선지의 끔찍한 행동이 다소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고선지는 전쟁의 안목은 밝았지만, 정치에서는 까막눈이었습니다. 탈라스 전투 이후 실크로드 주변의 국가들이 이슬람 왕조의 편이 되었습니다. 종교와 문화도 이슬람의 영향을 받게 되죠.

  패배한 당나라나 승리한 아바스나 탈라스 전투로 국력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바스 왕조도 탈라스 전투를 '몰락한 왕조(우마이야)의 지지자들이 당나라의 원조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한 전투'라고 기록할 만큼 그저그런 규모의 전투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당나라가 이겼다고 가정해도 병력과 보급 문제로 아바스에게 결정타를 먹이는 건 불가능했고, 뒤에 벌어진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가 서역의 영향력을 유지할 가능성도 낮았습니다.

  다만 동서 문명이 교류하는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당나라의 제지기술자들이 아바스의 포로가 되어서 제지기술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제지기술로 아바스의 영토 곳곳에 제지 공장이 세워져서 이슬람 문명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술은 훗날 유럽에까지 전해졌습니다. 또한 탈라스 전투는 중국 왕조와 이슬람 왕조의 최초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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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천적, 영광과 비운의 명장 가르친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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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르친링(Gartrinring, ???~699).

 

  토번의 장군이자 재상으로서, 7세기 최강국이었던 당나라를 상대로 연이어 대승을 거둔 인물입니다. 7세기 당나라는 사방으로 영토를 넓혀가던 시기였습니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도 복속시려 했고, 돌궐도 수십 년 동안 장악했었죠. 이런 당나라를 상대로 가르친링은 대비천 전투, 승풍령 전투, 인식가 전투, 소라한산 전투에서 역사에 남을 전공을 취합니다.

 

  그는 토번의 명재상 가르통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7세기 중후반, 토번의 국력은 신장하고 있었습니다. 663년, 가르통첸은 토욕혼이라는 유목민족을 멸망시킵니다. 4년 뒤 가르통첸이 사망하고 그가 갖고 있던 재상직은 첫째 아들 가르친네에게, 군권은 둘째 아들 가르친링에게 주어집니다. 군권을 잡고 가르친링은 강주를 침범하는 등 당나라를 상대로 자신감을 드러냈습니다. 도저히 토번을 용납할 수 없었던 당고종은 설인귀와 곽대봉에게 토번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대비천 전투(Dafeichuan Battle, 670년)

  구당서에 따르면 설인귀는 토번 원정이 멀고 땅이 험해서 수레가 오고가기 어렵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빠르게 정예군으로 속전속결로 끝내야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곽대봉에게 후방의 군수물자를 맡기고 그 중 수레와 말에 실은 물자는 후방의 요충지에 보관하라고 알렸습니다. 그는 직접 선봉을 이끌었으며, 하구에서 토번군을 격퇴하고 양 1만마리를 전리품으로 취했습니다. 그는 기세를 몰아 오해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곽대봉은 설인귀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자신의 병력을 이끌 때 수레와 말에 군수품을 실어서 간 것이지요. 그는 신속하게 설인귀와 합류하지도 못했고, 토번군의 기습에 참패하고 포로로 잡힙니다. 군수물자도 빼앗긴 상황에서 설인귀는 대비천까지 후퇴하지만 가르친링에게 괴멸당하고 역시 포로로 잡힙니다.

 

  심지어 당군의 초반의 승리는 가르친링의 계획대로였습니다. 가르친링은 곽대봉의 당군이 설인귀의 당군과는 달리 진군이 느리게 진군하는 정보를 획득합니다. 그는 동생 가르찬파에게 병력과 양들을 내어준 뒤 당군 선봉대와 만나면 싸우는 척만 하고 퇴각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설인귀가 토번군 잔당과의 승리에 고무되어 앞으로 나아갈 동안, 가르친링은 동생과 함께 곽대봉을 격파하고 있었습니다. 오해성 앞에 있던 설인귀는 그제서야 다급히 기병대를 보내지만 가르친링이 계획한 매복에 괴멸당했고, 가르친링은 후퇴하던 설인귀의 남은 병력도 섬멸했습니다.

 

  그 해 가르친링은 당나라가 서역에 설치한 안서사진(귀자도독부, 비사도독부, 소륵도독부, 언기도독) 영토를 빼앗았습니다. 여담이지만 이 전투에서 동원된 당나라의 병력은 최소 10만 대군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승풍령 전투(678년)

  당고종은 678년 이경현, 유심례 등에게 18만 대군을 주어서 토번을 침공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선봉을 이룬 유심례의 당군은 대비천 전투와 비슷하게 기세를 타서 청해호(지도의 칭하의호)에 이르렀습니다. 가르친링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청해호에서 유심례를 죽이고 당군 수만 명을 괴멸시킵니다.

 

  가르친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승풍령으로 퇴각하던 이경현의 본대를 쫓았습니다. 그는 대군을 이끌고 고지대에서 당군을 기습하여 포위했으며, 선봉장 발지설에게 기병 부대를 주어서 포위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 때 백제 출신의 당나라 부하 장수 흑치상지가 결사대 500명을 이끌고 발지설의 토번군 부대를 습격했습니다. 포위망은 뚫렸고, 가르친링은 이경현과 당나라 몇몇 장수들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승풍령에서의 대승으로 당나라는 재차 많은 병력을 잃었고, 청해성 일대를 토번의 영토로 포함시켰습니다. 그는 2년 뒤 사천성 지역의 안융성을 점령했습니다. 계속 총력적인 원정을 벌이지 않는 대신 당나라 서쪽 지역을 계속 약탈했습니다. 685년 그의 형이자 토번의 재상인 가르친네가 죽고 군권과 함께 재상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인식가 전투(689년)

   영문위키에 따르면 이 전투는 지금의 키르기스스탄에 있는 인식쿨 호수와 가까운 강에서 벌어졌다고 합니다.(위 지도의 회색으로 체크된 부분의 호수가 인식쿨 호수입니다.) 689년, 측천무후는 위대가와 염온고에게 10만 대군을 이끌고 토번을 정복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가르친링이 이끄는 토번군은 강을 사이에 두고 당군과 대치했습니다.

 

  겨울인 시기라 매서운 추위가 창궐했습니다. 사나운 바람과 함께 폭설이 내려서 당군은 시야 확보가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가르친링은 강이 꽁꽁 얼고 폭설이 내리자 당군을 기습했습니다. 당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지리멸렬했습니다. 대병력을 잃고 남는 당군도 퇴각하는 도중 상당수가 추위에 얼어죽었습니다. 측천무후는 패전에 화가 나서 위대가를 유배시키고 염온고를 참수했습니다.

 

  하지만 692년 측천무후는 왕효걸에게 30만 대군을 주어서 총력전으로 안서사진을 회복하게끔 합니다. 가르친링의 동생인 가르다고리가 15만 대군을 이끌고 안서사진을 지키고 있었지만 왕효걸에게 참패를 당해서 안서사진을 내주게 됩니다. 동맹이었던 서돌궐의 장수 아사나뇌자가 10만 대군으로 구원하러 오지만 태반이 소멸당하고 말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가르친링은 당나라를 상대로 강경하게 나섰습니다. 695년 당나라의 임조를 공격해서 약탈하자, 측천무후는 임사덕에게 10만 대군을 더 주어서 기존의 왕효걸의 대군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토번 내부에서는 당나라와 강화하자는 신하들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소라한산 전투(696년)

  소라한산 전투는 현재 중국의 우웨이 시 주위의 산맥에서 벌어졌습니다. 최소 10만, 최대 40만 대군이라는 압도적인 전력의 당군에 비해 전력이 한참 부족하고 심지어 연패하기까지 한 자국의 군대로 맞서기 전 가르친링은 이런 시를 지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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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pa'o gTsug-lag phreng-ba 연대기, Lhobrag판, 목판본에 기록된 가르친링의 시 -

많은 작은 새가 한 마리 매에 의해 살해되며

많은 작은 물고기가 한 마리의 수달피에 의해 죽임을 당하네

크게 자란 뿔에도 불구하고

수사슴은 짦은 뿔을 가진 야크를 당하지 못하네

백년된 소나무도 하나의 도끼에 베어지며

강은 작은 배로 건널 수 있다네

평야전체에서 자라나는 대맥과 쌀은 하나의 물방아로 빻아지고

뭇별들은 하나의 태양에 의해 빛을 잃네

계곡 밑에서 발화된 불이 산을 태우고

한 샘물의 물이 산과 평원의 모든 나무를 운반하네

하나의 돌이 평원에 있는 단단한 돌을 흙으로 만들고

풀전체는 버려진 철조각 보다 빨리 썩네

솥에 가득 찬 물도 소금을 넣으면 짜게 되고

무수한 풀도 낫 하나로 베여지며

가느다란 화살로 여러마리 야크가 죽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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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를 곱씹어보면 적은 수의 군대일지언정 당나라의 몇 배의 대병력을 반드시 격퇴하겠다는 의지를 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696년 3월, 산악지대에서 양쪽 모두 물러설 수 없는 전투 끝에 가르친링은 또다시 적들의 공세를 막아내고 당나라에게 참혹한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아쉽게도 전투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아서 가르친링이 어떻게 역전시켰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기적적인 전공을 세웠습니다. 이는 해하 전투에서 항우가 승리한 것과 같은,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가 승리한 것과 비견될 믿기지 않는 역사적 승리였습니다. 당군의 총사령관 왕효걸은 평민으로 강등되었습니다.

  한스러운 몰락

  소라한산 전투 이후 가르친링은 측천무후에게 안서사진에서의 철수와 서돌궐 지역의 영토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측천무후는 가르친링의 정권이 사상누각이라는 걸 알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전투 이전 토번의 많은 귀족들이 가르친링을 눈엣가시로 여겼고, 토번의 군주 치둑송첸은 왕권 강화를 위해 많은 권력을 차지한 가르 가문의 시대를 끝장냈습니다.

 

  699년, 가르친링이 토번 병력과 함께 멀리 있을 때 치둑송첸은 사냥을 이유로 병사를 모아 가르 일족과 가르친링을 따르던 부하들 2천 명을 몰살시키고, 가르친링에게 수도 라싸로 오라고 압박합니다. 가르친링은 왕명을 거부하고 남은 가신들과 부하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지만, 명분이 없어서 대다수 군사들이 가르친링의 곁을 떠나버립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가르친링은 백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자살을 선택합니다. 그렇게 가르친링은 죽고, 그의 동생과 아들은 당나라로 귀순합니다.

 

 

  가르친링에 대해

  가르친링의 대표적인 전투들은 모두 방어전이었지만, 그는 소규모의 선제공격을 계속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수비에 빛나면서도 점진적으로 토번의 영토를 넓힌 공수겸장의 명장이었습니다. 당나라와의 국경지대를 야금야금 빼앗고 약탈함으로써 참지 못한 대규모 정벌군을 파견할 때를 기다렸습니다. 당나라의 대군이 올 때면그도 대군으로 상대했습니다. 각개격파로 승리했고, 계절을 이용해 기습으로 승리했으며, 마지막에는 초대형 회전에도 승리했습니다.

 

  토번의 위세는 8세기까지 이어졌습니다. 승풍령 전투 이후 신당서 토번열전에는 토번의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당시 토번(吐蕃)은 양동(羊同), 당항(党項) 및 여러 강족(羌族)의 땅을 모두 점령했으니, 동쪽으로는 양주(涼州), 송주(松州), 무주(茂州), 휴주(巂州) 등지와 서로 접했고, 남쪽으로는 파라문(婆羅門, 인도)에 이르렀으며, 서쪽으로 또한 구자(龜茲), 소륵(疏勒) 등 4개의 진(鎭)을 점령했고, 북쪽으로 돌궐(突厥)과 맞닿아, 땅이 만여 리에 이르니, 한(漢), 위(魏) 이래 서융(西戎)의 번성함이 이와 같은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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