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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마지막 일전(2)(611년 ~ 628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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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계속 땅을 집어삼키는 사산조 페르시아

 

  헤라클리우스는 지존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포카스가 망쳐놓아도 너무나 망쳐놓아서 제국은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습니다. 즉위하기 전에 이미 에데사(현재 터키 남동부의 샨르우르파)가 넘어가서 만딜리온을 사산조에게 뺏겼습니다. 만딜리온은 성스러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기독교의 성유물입니다. 614년에는 성지 예루살렘마저 함락됩니다.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고 전해지는 성십자가의 일부 조각입니다.

 

  성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박히셨다고 알려진 십자가입니다. '참 십자가'라고 부르기도 하고, 기독교에서 아주 중요한 성유물입니다. 이 성십자가가 예루살렘 점령과 함께 성십자가와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인 사산조 군대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성십자가는 사산조의 기록보관소에 만딜리온과 함께 놓였습니다.

 

  예루살렘 정복과 함께 가까이 있던 가산 왕국도 꼭두각시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산조를 따랐던 라흠 왕국은 아예 흡수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헤라클리우스는 우선 금이나 비단 등 값나가는 것들을 내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상을 시도합니다. 사산조라는 거대한 불길이 비잔티움의 인구와 농지를 계속 잠식하는 걸 진화시키는 게 먼저였습니다.

 

619년경 사산조 제국의 영역은 최대로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호스로 2세는 더 요구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거절합니다.

 

  "우리와 같은 태양을 섬기기 전까지, 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을 포기하기 전까지, 내가 자비를 베푸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자신감이 있을만 했던 게 사산조는 영토를 넓혀나가는 도중 607년 ~ 608년에 있었던 서돌궐의 30만 대군을 재차 막아냈습니다. 그만큼 사산조 페르시아는 양면 전쟁에도 끄떡없을 만큼 당대 최강국이었습니다.

 

 2. 헤라클리우스의 호적수, 샤흐르바라즈

 

예루살렘을 공략하는 샤흐르바라즈와 사산조 군대입니다.

  사산조 진영에는 '샤흐르바라즈'라는 명장이 군대를 탄탄대로로 이끌었습니다. 사실 헤라클리우스라고 더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적들이 시리아 일대와 에데사를 장악했고 다마스쿠스까지 빼앗기자 구원병 6만 8천 명을 이끌고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4만의 사산조 군대와 맞섭니다. 613년 안티오크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사산조의 완승으로 끝났고, 사산조는 건국 400여년 만에 지중해에 처음으로 닿게 됩니다. 이는 비잔티움에게는 이집트에서 터키로 가는 육로가 끊겼다는 걸 의미합니다. 

 

지도에서 빨간색으로 표시한 곳이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카이사레아, 칼케돈 같은 주요 도시입니다. 개전 초기 사산조는 이를 모조리 차지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루살렘 함락과 성십자가가 이제 없다는 소식에 백성들이 침울해하고 있었습니다. 안티오크의 대주교는 살해당하고 예루살렘의 대주교는 포로가 됩니다. 칼케돈에서도 헤라클리우스는 또다시 샤흐르바라즈의 군대를 막지 못했습니다. 사산조의 파상공세가 콘스탄티노플 코앞까지 왔습니다.

 

  샤흐르바라즈는 멈추지 않고 618년 이집트를 공격합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강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합니다. 나일 강이 사산조의 소유가 되면서 비잔티움의 식량 공급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3. 절망적인 상황, 그러나 시작되는 역전의 시나리오

 

  헤라클리우스는 총독 시절 근거지였던 카르타고로 수도 이전을 시도합니다. 비밀리에 콘스탄티노플의 주요 보물을 배에 실어서 카르타고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배는 폭풍우 때문에 부서져서 진실이 세상에 퍼졌습니다. 시민들의 원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세르기우스는 황제를 말립니다.

 

헤라클리우스가 수도를 수호하겠다고 신께 맹세한 성 소피아 성당의 제단 사진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나 다름없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일은 하늘이 황제께 부여한 신성한 의무입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마음을 고쳐먹고 성 소피아(현재 아야 소피아) 성당의 재단에서 다시는 콘스탄티노플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합니다.

 

  한편 샤흐르바라즈가 이집트를 정리하면서 패기만만한 호스로 2세는 헤라클리우스에게 오히려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가장 위대한 신이자 세계의 주인인 호스로가 사악하고 어리석은 노예 헤라클리우스에게 보낸다. 왜 아직도 우리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를 왕이라고 부르는가? 내가 그리스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너는 너의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내 손에서 카이사레아와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를 가져가지 아니한 것이냐? 세상의 대지와 바다는 모두 내가 만든 법에서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이런 내가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파괴하지 못할 것 같은가? 그러나 네가 내게 복종하고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여기로 오면 네 죄를 용서하겠다. 나는 너에게 땅과 포도원과 감람원을 주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너를 바라보겠다. ~~ . 바다 깊은 곳으로 도망갈지라도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손으로 너를 찾아내리라. 신이 너를 구원해주리라는 헛된 소망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요약하면 "이미 대세는 기울었으니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라"라는 메시지입니다. 이런 거 보면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말이 떠오릅니다. 과거에 내전이 벌어졌을 때 마우리키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의 사위가 되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졌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 편지가 반격의 실마리가 됩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사산조가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백성들에게 알리고, 자극을 받은 비잔티움의 시민들은 결사항전에 나섭니다. 이렇게 헤라클리우스는 사산조를 물리치기 위한 세금도 높일 수 있었고, 특히 교회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위에서 나온 세르기우스도 황제에게 교회의 보물을 군자금으로 쓰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부패한 관리들의 봉급을 절반으로 줄이고, 그 중에서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면 막대한 벌금을 매겼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칼케돈의 적들을 노리지 않고 멀리 돌아가서 상륙합니다.

 

  622년 헤라클리우스는 부활절 미사를 끝내고 전면에 나섰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칼케돈의 사산조군과 정면승부하지 않고 일부러 빙 돌아가서 토로스 산맥 근처에 진지를 구축합니다. 여름에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가을에 북동쪽 방향으로 공격해서 사산조의 허리를 끊으려고 합니다. 칼케돈에 있던 사산조군은 많은 병력을 동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집니다. 적들이 매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일부러 후퇴하고 매복한 적들이 가까이 오자 신속하게 정예병과 맞닥끄려서 격퇴시킵니다. 이렇게 헤라클리우스가 샤흐르바라즈를 상대로 첫 복수에 성공합니다.

 

  4. 623년 ~ 626년까지의 비잔티움의 반격

 

헤라클리우스와 대립했던 아바르족 카간의 자세한 이름은 기록이 소실되었는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이 승전을 기점으로 반격의 물꼬가 뚫렸지만, 623년 헤라클리우스는 북쪽의 아바르족이라는 숙제를 풀어야 했습니다. 그는 아바르족의 카간(지도자)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칠테니 다뉴브강 북쪽으로 군대를 물려달라고 부탁했죠. 카간은 직접 만나자고 제안하고 헤라클리우스는 약속된 장소로 향합니다. 하지만 이는 함정이었습니다. 카간은 기병을 동원하여 그를 포로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로서는 다행히 급습에 탈출했지만 협상단의 많은 인원이 아바르족에게 죽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참고 또 참으면서 노미스마 금화 20만 개(자그마치 900kg)과 사생아를 볼모로 보내면서 오로지 사산조와의 전쟁에 칼날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622년부터 헤라클리우스는 미친듯이 서아시아를 휩쓸고 다닙니다.
제가 표시한 1. 카이사레아, 2. 간자크, 3. 티그라노세르타, 4. 사루스 강 전역이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대표적으로 활약한 전장입니다.

 

  이듬해 황제는 사산조와의 캠페인을 재개합니다. 원정 이전에 또다시 호스로 2세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샤한샤는 이제 페르시아 심장부가 공격당할거라는 헤라클리우스의 말에도 콧방귀만 뀝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는 언행일치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위 지도에서 번호로 나타냈지만 우선 카이사레아를 수복하고, 다음으로 사산조 영토로 깊숙하게 들어가 'Ganzak(간자크)'라는 도시에서 호스로 2세의 4만 적군을 상대로 승리합니다.

 

 

현재 잔해로나마 남아있는 아두르 구쉬나스프(Adur Gushnasp) 사원의 잔해입니다.

 

  여기서 십여년 전 기독교의 성지가 더럽혀진 것에 대한 되갚음인 것인지, 조로아스터교의 중요한 사원인 아두르 구시나스프(Adur Gushnasp)를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분노한 호스로 2세는 부하 장군들인 샤힌, 샤라플라칸, 그리고 샤흐르바라즈에게 헤라클리우스를 포위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는 세 방향의 적들이 합치기 전에 샤라플라칸과 샤힌을 차례로 물리쳤습니다. 숙적 샤흐르바라즈가 다른 두 장군의 패장병들과 함께 추격하자 사루스 강에서 조우합니다.

 

현재 터키의 'Saros(영어로 Seyhan)'이라는 강을 두고 625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무승부에 가까운 결과를 냅니다. 이번에는 샤흐르바라즈가 거짓으로 후퇴했고 적들이 다리를 통해 추격해오자 역공으로 비잔티움군의 선봉대를 꺾어버립니다. 하지만 뒷심 부족으로 다리까지는 장악하지 못했고 후위의 군대와 함께 반격해오는 헤라클리우스 상대로 큰 이득을 거두지 못합니다. 전투 끝에 서로 물러났고, 비잔티움군은 북쪽으로 가서 흑해 아래의 트레비존드(Trebizond, 현재 터키의 트라브존)이라는 도시에서 휴식합니다.

 

  5.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성전과 제 3차 사산조 vs 서돌궐 전쟁

 

  시간이 지나 626년 여름이 되었습니다. 호스로 2세는 결정적인 승리만이 비잔티움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바르족에게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자고 제안했고, 그들은 예전의 협약을 깨고 남쪽으로 진군합니다. 여기에 아바르족과 사이가 좋지 않은 슬라브족까지 돈으로 회유해서 포위 작전에 끌어들입니다. 이 와중에 헤라클리우스와 정예군은 아직 소아시아쪽에 있었고, 몰려드는 적들을 막아내는 건 세르기우스 대주교와 수도를 지키던 보누스 장군의 몫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의 위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8만 명 이상의 아바르족 + 슬라브족 + 사산조 군대는 1만 5천 명의 비잔티움군이 있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을 둘러쌌습니다. 하지만 성벽을 공략하려는 궁수들은 성 내부의 투석기에 녹아내렸고, 사산조의 해군은 비잔티움의 해군에 막혀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지 못했습니다. 사산조는 동맹군에게 공성 무기를 지원해줄 수 없었고, 결국 공성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여기서 호스로 2세가 공성전의 패인은 샤흐르바라즈가 못 싸운 탓이라고 판단했는지 '카르다리안(Kardarigan)'이라는 장군에게 샤흐르바라즈를 죽이고 그의 군대를 크테시폰으로 돌려보내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비잔티움군이 가로채고, 헤라클리우스가 샤흐르바라즈에게 이 사실을 전달합니다. 고민 끝에 샤흐르바라즈는 전쟁에서 이탈하여 시리아 북부에 주둔합니다.

 

서돌궐은 비잔티움과의 협공을 감안했는지 캅카스 산맥으로 침공합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호스로 2세가 정치적인 그림을 그렸다면, 이제는 헤라클리우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627년 서돌궐이 사산조를 상대로 3차 침공을 감행합니다. 지난 1차, 2차는 모두 사산조의 승리였고 이란 방면으로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캅카스 지역으로 방향을 다르게 설정합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이미 625년 서돌궐에게 군사적으로 협공을 해준다면 많은 재물을 주겠다고 사신을 보냈습니다. 서돌궐도 사산조 때문에 막힌 비잔티움과 당나라 사이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다시 열고 주도할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지도자 통엽호가한도 "나는 당신의 적들에게 복수할 것이고 당신의 요청에 호응하기 위해 용감한 군대와 함께 올 것입니다"라는 동의의 서신을 보냅니다.

 

  6. 니네베 전투(Battle of Nineveh), 전쟁의 종결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이 니네베 전투 지역이고, 위의 하늘색 화살표는 서돌궐이 남하한 곳입니다.

 

 

  서돌궐군은 캅카스 산맥의 사산조 요새들을 차례로 점령합니다. 여기서 통엽호가한과 헤라클리우스가 만나는데, 기록으로는 통엽호가한이 스스로 절을 하고 헤라클리우스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고 합니다. 기뻐한 헤라클리우스는 비잔티움의 왕관을 그에게 씌워주기도 하며 서로 얼싸안고 동맹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입니다. 또 서돌궐의 지휘관들은 비잔티움에게 비단옷과 보석을 선물받습니다. 잠깐의 합동 작전 이후 헤라클리우스는 서돌궐에게 요새 포위 작전을 맡기고 자신은 남하합니다.

 

니네베 전투에서 승리한 헤라클리우스에 대한 그림입니다. 비잔티움 병사가 들고 있는 목은 아무래도 적 장수 라하자드일 것 같네요.

 

  그는 2만 5천 명 ~ 5만 명의 정병을 이끌고 현재 이라크 쪽으로 공세를 펴립니다. 기원전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니네베'라는 역사적인 도시에서 회전이 일어납니다. 호스로 2세는 라하자드(Rhahzadh)라는 장군에게 막으라고 명령했지만, 병력은 겨우 1만 2천 명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캅카스 쪽 전황도 시원찮았기에 사산조는 니네베에서 전력을 동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라하자드가 평야에서 싸우도록 유도했고, 8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적들의 절반을 죽였습니다. 그는 직접 결투에서 라하자드를 전사시킵니다. 남은 사산조의 병력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다스타기르드를 점령하고 사산조 수도인 크테시폰(Ctesiphon)에 더욱 근접합니다.

 

  비잔티움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티그리스강 동쪽 도시인 다스타기르드(Dastagerd)로 향합니다. 호스로 2세는 손도 못 쓰고 도망쳤고, 비잔티움군은 무난히 입성하여 사산조의 왕궁을 약탈하고 태워버립니다. 다음 목표는 사산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이었지만 사실 헤라클리우스로서도 모험이었고, 그는 사신을 보내 평화를 촉구합니다.

 

  "나는 평화를 쫓고 쫓는다. 나는 페르시아를 불태우는 걸 바라지 않았지만 네가 그걸 강요하게 만들었다. 즉시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를 선택하자. 모든 것을 태우기 전에 이 불길을 끄도록 하자."

 

  이 와중에 사산조의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서 호스로 2세를 몰아내고 그의 아들을 제위에 앉힙니다. 새로운 샤한샤가 된 카바드 2세는 먼저 화친을 요청하고 이라클리오스는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비잔티움은 빼앗은 땅을 돌려받는다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덧붙여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고 포로로 잡힌 군인들을 되찾습니다. 무엇보다 성십자가 등 성유물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7. 에필로그

 

 

개선식에서 헤라클리우스가 직접 성십자가를 들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 그림은 그걸 묘사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630년 3월 21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십자가를 만천하에 보여주는 승리의 개선식을 벌입니다. 시민들은 성십자가를 되찾았다는 기쁨에 기뻐했습니다. 성 소피아 성당에서 성십자가를 안치하는 의식을 벌이고, 훗날 예루살렘에 반환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이 때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도 돌려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샤흐르바라즈가 사산조의 중앙 조정과 따로 놀았기에 명령도 거부합니다. 카바드 2세가 즉위 몇 개월 만에 죽자 헤라클리우스는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페르시아의 왕이 죽었고, 왕좌와 왕국은 너에게 다가왔다. 내가 그걸 너와 네 후손들에게 수여하겠다. 만약 군대가 필요하다면, 네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얼마든지 도움을 주겠다."

 

  샤흐르바라즈는 2년 동안 내부의 몇몇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630년 충성스러운 병사 6,000명과 함께 크테스폰으로 돌격합니다. 아르다시르 3세를 죽이고 스스로 샤한샤에 등극했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헤라클리우스에게 돌려줍니다. 그러나 서돌궐이 마지막으로 약탈하는 과정에서 파견한 10,000명의 병력이 궤멸되는 일이 벌어져서 위신이 추락합니다. 2개월도 안 되어 암살당하고 호스로 2세의 딸인 푸란도흐트가 즉위합니다.

 

 

나무위키에서 퍼온 호스로 2세부터의 샤한샤 계보입니다. 630년 ~ 632년 상황을 보면...

 

  그 뒤로 사산조에는 암살과 반역이 계속됩니다. 샤흐르바라즈의 아들이 즉위하기도 하고, 호스로 2세의 또다른 딸이 즉위하기도 하고, 아예 스스로 샤한샤라고 자칭하는 경우도 있었죠. 이 시기 사산조는 그 옛날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보다도 더한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사산조는 빼앗은 땅을 모두 상실하고 전쟁 이전보다 심각한 상황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병사가 희생되고 막대한 돈만 잃었을 뿐입니다. 632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유일한 샤한샤로 정립이 이루어지지만 추락할 대로 추락한 권위는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사산조에는 호스로 2세를 끝으로 강력한 전제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고, 내부적으로 온전히 단합하지 못한 형편은 나중에 이슬람군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됩니다.

 

샤흐르바라즈에게서 이집트와 시리아를 돌려받고 비잔티움은 포카스 등장 이전의 땅을 대부분 회복했습니다.

 

  사산조에 비해 위기를 극복한 비잔티움은 헤라클리우스 황제에 대한 칭송이 높아졌습니다. 원로원은 그에게 '새로운 스키피오'라는 칭호를 수여했고,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도 "스키피오-한니발 시대 이후로 헤라클리우스가 제국을 구원하기 위해서 달성한 것보다 더 진취적인 시도는 없었다"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헤라클리우스는 진정으로 위대한 황제였습니다. 하지만 말년을 편하게 보내지 못하고 몇 년 뒤 이슬람 세력, 특히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라는 악몽이 그에게는 천추의 한이 되었습니다.

 

  8. 출처

 

  도현신,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서해문집(2019)

 

  수잔 와이즈 바우어,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권』, 부키(2010)

 

  유튜브 <Avar-Slav-Persian Siege of Constantinople 626 (DOCUMENTARY)> (https://www.youtube.com/watch?v=dvKehRDnATM)

 

영문위키 <Heraclius> (https://en.wikipedia.org/wiki/Heraclius)

 

<Shahrbaraz> (https://en.wikipedia.org/wiki/Shahrbaraz)

 

<Byzantine–Sasanian War of 602–628>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E2%80%93Sasanian_War_of_602%E2%80%93628)

 

<Battle of Antioch (613)>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ntioch_(613))

 

<Sasanian conquest of Jerusalem> (https://en.wikipedia.org/wiki/Sasanian_conquest_of_Jerusalem)

 

<Sasanian conquest of Egypt> (https://en.wikipedia.org/wiki/Sasanian_conquest_of_Egypt)

 

<Heraclius' campaign of 622> (https://en.wikipedia.org/wiki/Heraclius%27_campaign_of_622)

 

<Battle of Saru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arus)

 

<Third Perso-Turkic War> (https://en.wikipedia.org/wiki/Third_Perso-Turkic_War)

 

<Siege of Constantinople (626)>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Constantinople_(626))

 

<Battle of Nineveh (627)>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Nineveh_(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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