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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사]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황혼의 영광(부제: 야르무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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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ovisionnew.tistory.com/384

 

[중동사] 초기 이슬람에서 무함마드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승리(~634년)

https://neovisionnew.tistory.com/59 [전쟁사]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악연(Main: 530년의 다라 전투) 1.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476년, 오토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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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썼던 글에서 계속 이어지는 글입니다.

 

배교 전쟁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X자 표시로 된 곳이 모두 전투지입니다.

 

  1. 배교 전쟁(릿다 전쟁, Ridda wars)

 

  634년 다마스쿠스 공성전 도중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사망하고 우마르가 다음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우마르는 지도자에 오르자 마자 바로 할리드의 총사령관 직책을 박탈했습니다. 정황을 살펴보면 우마르가 할리드를 개인적으로 싫어했다는 설이 유력하고 필자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 잠깐 몇 년 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과거 무함마드가 죽고 아라비아 반도는 이전처럼 분열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무함마드가 지도자 활동을 하기 전 수십 개 부족이 난립하여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들지 못했죠. 유목생활을 했던 그들은 서로 다른 신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메디나와 메카 같이 몇 안 되는 도시들이야 산업이 발달되어 있었지만, 다른 부족들은 떠돌아다니며 서로를 약탈했습니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열심히 포교했고, 한 때 적대적이었던 2대 칼리프 우마르와 명장 할리드도 무함마드를 따랐죠. 하지만 무함마드가 죽을 당시에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아라비아 부족들과 전쟁을 벌여서 진압하거나 반강제적으로 개종시켰기에, 기존 부족들은 복수심을 가질만 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만 무함마드를 따랐죠. 무함마드가 죽고 이 때다 싶어 여러 부족들이 봉기했는데 이를 '배교 전쟁'이라고 합니다.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반란이 일어났고 그들은 메디나까지 위협했습니다.

 

 

  아부 바크르는 직접 두키사를 점령하고 할리드에게 출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할리드는 부자하에 도착했는데, 자신이 가진 6,000명의 군사에 비해 상대 병력이 15,000명이나 되자 묘책을 내어 상대 지도자 툴라이하와 일기토를 벌입니다. 가볍게 승리한 뒤 사기가 떨어진 적들을 향해 전투를 벌여 부자하를 회복했습니다. 그는 죽지세로 자파르까지 도달했고, 다음은 부타였습니다.

 

  부타에 몇몇 부족들 중 '말리크'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무함마드가 신뢰했던 인재 중 하나로 지금으로 치면 국세청장의 직책에 있었습니다. 말리크는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세금을 성실하게 메디나로 운송했는데 그가 죽고나자 부족들에게 세금을 돌려준 뒤 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할리드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싸우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시 세금을 징수하여 메디나로 보냈고, 본인은 동쪽의 사막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할리드에게 사로잡혀서 처형당했습니다.

 

  아부 바크르는 반역을 했더라도 이슬람의 율법에 따른다면 관용을 베풀라고 당부했습니다. 말리크는 여전히 본인은 이슬람 신자이며 주변의 적대적인 세력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고 호소하지만 할리드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도 열지 않고 말리크를 죽이고 심지어 그의 아내였던 라일라 빈트 알 민할과 바로 결혼했습니다. 메디나의 주요 인사들은 이것 때문에 말리크를 죽였냐며 그를 비난했습니다. 우마르도 할리드를 쫓아내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아부 바크르는 처벌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할리드는 야마마까지 진군하여 하니파 부족 지도자인 무사일리마까지 물리쳤습니다. 이 야마마 전투에서 적들이 4만 명이나 될 만큼 최대 고비였는데 할리드는 3분의 1도 안 되는 병력으로 승리했습니다. 이렇게 할리드는 반 년도 안 되어 온전한 아라비아 통일을 이루었고, 배교 전쟁의 일등공신이었습니다. 다만 우마르 눈 밖에 나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2. 북진하는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

 

  그렇게 할리드는 다마스쿠스 공성전 - 마라즈 알 데바르 전투 이후 해임 소식을 들었습니다. 총사령관 직책은 다음 계급 순서이자 공성전에 참여한 아부 우바이다에게 넘어갔습니다. 할리드에 비해 우바이다는 온건파에 속하는 인물이라, 정복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하지만 우바이다도 할리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뛰어난 인물이라 이슬람의 연전연승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성향이 달라도 우바이다는 할리드를 존경하고 있었고, 전쟁터에서 항상 그의 조언을 들으면서 정복했습니다. 우마르도 할리드를 아예 물러나게하거나 처형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할리드는 예전 만큼은 아니지만 계속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었고 기병대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생소한 도시 이름과 위치는 이 지도에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636년 5월까지 할리드를 비롯한 이슬람 장군들의 진격로입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 입장에서는 과거 사산조와의 전쟁처럼 시리아를 상실하는 목전에 놓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할리드는 635년 1월 펠라(Pella)라는 도시를 손에 넣고 이슬람 군대는 양쪽으로 나뉘었습니다. 아므르와 슈르하빌이라는 장군들은 남쪽의 팔레스타인으로, 할리드와 우바이다는 북쪽의 에메사로 진군했습니다.

 

  이 때 헤라클리우스는 안티오크에 있었습니다. 적들이 다마스쿠스를 벗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테오도라스라는 장군에게 다마스쿠스를 되찾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테오도라스는 휘하 군대를 둘로 나누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을 먼저 보내고 후속 병력을 추가하는 식으로 편성했습니다. 후속병력은 샤나쉬라는 부하에게 맡기고 본인은 선봉대와 함께 달렸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할리드의 대처가 더 빨랐습니다. 그는 우바이다에게 허락을 받아 친위 기병대를 이끌어 다마스쿠스에 가장 먼저 도착했습니다.

 

  심지어 할리드는 비잔티움 측에 스파이를 심어서 적들이 어느 방향으로 오는지 간파했고, 적들이 다마스쿠스 성 수비대 가까이 오자 후방을 급습하여 또다시 승리했습니다. 테오도라스는 전사했으며, 한편 우바이다도 똑같이 샤나쉬를 죽이고 추가로 오는 적 병력을 격파했습니다. 오히려 할리드와 우바이다는 다시 병력을 합쳐서 북쪽의 바알벡을 점령했습니다.

 

 

  3. 에메사 공성전(Siege of Emesa)

 

  헤라클리우스는 에메사로 전령을 보내 이슬람과 휴전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는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는데 병력을 모으고 있었고 우선 수비부터 신경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바이다는 제의를 받아들이고 1년 동안 휴전을 맺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에메사의 시장을 이용하는 등 조용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증원군이 칼키스, 즉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우바이다는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즉시 에메사를 공격했습니다.

 

  635년 12월, 에메사 공성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할리드는 성 밖의 병력을 공격했고 우바이다는 4개의 성문에 모두 병력을 배치하여 에메사를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해자로 둘러싸인데다 공성무기도 변변치 않아 서로 화살로 공격할 뿐 포위전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추운 겨울이 끝나고 에메사를 지키던 하비스(Harbees)라는 장수는 636년 3월 5,000명의 병력으로 이슬람 군의 한 쪽을 공격했습니다. 포위망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지만 할리드가 기병을 이끌고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그 다음날 회의에서 우바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할리드에게 의견을 구합니다. 할리드는 거짓 후퇴를 제안했고 우바이다는 실행에 옮깁니다. 다시 하루가 지나 새벽에 이슬람군은 남쪽으로 도망쳤습니다. 하비스는 다시 기병이 주력인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슬람군의 뒤를 쳤습니다. 그 순간 할리드는 기병을 둘로 나누어 추격해온 적들의 양쪽 측면으로 역공했습니다. 하비스는 전사했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려던 비잔티움군의 패잔병도 대부분 살아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남아 있던 에메사의 시민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항복했습니다. 이 공성전 과정에서 비잔티움군은 4,9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이슬람군은 200명 ~ 300명 남짓이었습니다.

 

  4.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반격

 

지금도 시리아 지역의 저 강(Yarmuk)은 야르무크 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헤라클리우스는 10만 대군이 넘는 병력을 보냈습니다. 이 때 이슬람군은 우바이다와 할리드, 슈르하빌, 아므르, 야지드 등 여러 장수들의 휘하 병력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각개격파를 꾀한 것입니다. 하지만 할리드가 포로로 잡은 비잔티움 보급 부대를 심문해서 이 소식을 들었고, 그는 우바이다에게 하루빨리 주변의 모든 병력을 집결시켜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다마스쿠스와 에메사를 빼앗기는 출혈을 감수하고 이슬람 군대는 하나로 뭉쳤습니다.

 

  늦지 않게 이슬람의 유능한 장수들이 자비야(Jabiyah) 지역에 모일 수 있었고, 우바이다는 할리드에게 임시로 총사령관 직책을 돌려줍니다. 우마르도 6,000명의 지원군을 보내서 힘을 실어줍니다. 할리드는 고민 끝에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야르무크 강과 가까이 있는 동쪽 평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전투 도중 우마르의 지원을 더욱 신속하게 받을 수 있었고, 할리드가 자랑하는 기병 활용도 근처에 흐르는 강들이 자연적으로 장벽을 형성해 동로마 군을 몰아넣기 용이한 구조였고 할리드의 장기인 기병을 활용하기에도 괜찮은 조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 야르무크 전투(Battle of the Yarmuk)

 

  636년 8월 15일, 서아시아의 패권을 결정짓는 역사적인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노년의 나이라 안티오크에서 대기했고 그의 동생이자 장군인 테오도르 트리티리우스가 총지휘를 맡았습니다. 비잔티움 편으로 가산 왕국의 잔당, 슬라브족, 아르메니아군이 함께했습니다.

 

이슬람군은 좌익 -> 우익까지 야지드 -> 아부 우바이다 -> 슈르하빌 -> 아므르 이 순서로 주요 지휘관이 있었고, 비잔티움 군은 우익 -> 좌익까지 그레고리 -> 다이르잔 -> 자발라 -> 카나티르 순서입니다.

 

 

  이슬람을 총괄하는 건 할리드였고 세부적으로 중앙은 아부 우바이다와 슈르하빌, 좌익은 야지드, 우익은 아므르가 맡았습니다. 3만 ~ 4만의 이슬람 군대는 10만에 달하는 비잔티움 대군과 마주했습니다. 비잔티움의 총사령관은 테오도르였고 좌익에 슬라브족 지휘관 카나티르, 우익에 부사령관 중 하나인 그레고리, 중앙에 아르메니아 사령관 바한과 부사령관 다이르잔, 가산 왕국의 왕인 자발라가 있었습니다. 또 비잔티움의 진열은 10km에 달할만큼 길었습니다.

 

  비잔티움 총사령관은 테오도르였지만 기록을 보니 2인자인 바한이 부하들에게 직접적인 지시는 더 많이 내린 것 같습니다. 양군 휘하 지휘관들의 대진표는 야지드 vs 그레고리 / 아부 우바이다 vs 다이르잔 / 슈르하빌 vs 자발라 / 아므르 vs 카나티르 이렇게 됩니다.

 

 

  양군 모두 보병 뒤에 기병을 배치했습니다. 당연히 비잔티움은 중기병을, 이슬람은 경기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다만, 할리드는 유격으로 움직이는 기병대를 따로 편성해서 최후방에 배치했습니다. 이들은 할리드가 이끌던 정예 경기병 병력인 '모바일 가드'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할리드는 바한과 만나 대화했습니다. 바한은 거만한 태도로 할리드를 맞았습니다.

 

  바한: "음식과 황금을 줄테니 이 땅에서 물러가라"

 

  할리드: "우리는 배고프지 않고 필요한 것도 없다. 너희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평화로울 것이다. 이를 거절한다면 전쟁 뿐이다."

 

  바한: "우리의 땅을 차지하려는 자들은 모두 패배했다."

 

  바한은 비잔티움 군대는 사산조를 이겼다는 걸 암시했습니다. 협상은 간단히 결렬되었고 남은 건 살육이었습니다.

 

  전투 첫째 날은 무력이 강한 장수들의 일기토와 소규모 교전으로 서로 큰 피해 없이 끝났습니다.

 

 

회색으로 칠해진 기병대가 할리드가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유격 기병대입니다. 아므르의 병력을 지원합니다.
할리드는 바로 좌익의 야지드를 구원합니다.

 

  둘째 날, 테오도르와 바한은 이슬람군이 아침에 기도하는 시간을 노려서 아침에 적들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할리드는 첫째 날 밤 전방에 작은 초소 기지를 만들어서 기습에 잘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은 양쪽 측면에 거센 공격을 가했고, 중앙은 충분히 묶어둘 수 있는 정도의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슬람군의 중앙군이 측면에 신경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잔티움 좌익을 맡은 카나티르는 이슬람군 우익에 있던 아므르의 군대를 상대했습니다. 아므르는 보병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하고 뒤에 있는 기병대에게 반격을 지시했습니다. 할리드는 늦지 않게 아므르의 기병에게 카나티르의 왼쪽을, 자신의 유격 기병대에게 카나티르의 오른쪽을 타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카나티르가 이끄는 비잔티움 좌익 군대는 후퇴했습니다. 이렇게 할리드는 우익의 위기를 수습했지만, 반대쪽 형세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그레고리의 비잔티움 우익은 야지드의 이슬람 좌익을 그들의 베이스캠프까지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베이스캠프에 있던 병사들의 부인들이 갑자기 천막을 해체했습니다. 천막을 지탱한 나무 막대로 무장하면서 당신들은 불명예와 파멸을 맞을 것이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야지드와 병사들은 잃어버린 사기를 되찾고 다시 비잔티움에게 달려갔습니다.

 

  한편 할리드는 기병 유격대의 일부를 빼내어 비잔티움 중앙을 기습했고, 이 결과로 비잔티움의 우익 중앙을 맡았던 다이르잔이 전사했습니다. 그는 남은 기병대로 야지드와 함께 좌익의 위기도 수습했습니다.

 

  셋째 날 전투 역시 비잔티움의 공세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좌익에 힘을 실어서 이슬람의 우익 군대부터 붕괴시킨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병력차로 비잔티움이 밀어붙이는 듯 했지만, 이번에도 할리드는 큰 피해없이 후퇴하면서 유격 기병대로 하여금 따라오는 적들에게 측면 공격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번에도 테오도르와 바한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할리드는 비잔티움의 좌익 중앙이 들어오자 3방향에서 공격하여 상황을 반전시켰습니다.

 

  전투 넷째 날이자 636년 8월 18일, 바한은 어제의 방식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카나티르와 자발라에게 병력을 더욱 실어주면서 반드시 이슬람의 우익을 붕괴시키도록 했습니다. 할리드는 아부 아부이다와 야지드에게 각각 맡은 전선에서 전선이 합쳐지거나 길어지지 않도록 신경쓰라고 당부했습니다.

 

  좌익 중앙에 있던 자발라의 병력이 깊숙히 들어오고, 자발라와 카나티르의 병력이 서로 약간 멀어졌습니다. 이 때 할리드는 유격 기병대를 둘로 나누어서 자발라의 양쪽 측면을 동시에 공격했습니다. 아부 우바이다도 호응해서 정면을 공격했고, 이렇게 이슬람의 우측 상황은 안정되었습니다. 다른 이슬람 장군들도 끈질기게 버티면서 불리한 상황을 이겨냈습니다.

 

다섯째 날, 바한은 할리드에게 휴전 서신을 보내고 이슬람 장군들이 모여서 회의했습니다.

  이제 다섯째 날입니다. 비잔티움이 압도적인 병력차에도 누적된 피해는 오히려 훨씬 더 많았고, 바한은 할리드에게 사자를 보내서 며칠 동안 휴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할리드는 회의에서 몇몇 장군들이 휴전을 받아들이자는 건의를 물리쳤습니다. 지금이 바로 결정적인 타격을 줄 때라면서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할리드는 기병대를 집결시켜서 8천 명의 기병을 한 부대로 모았습니다. 그 중 500명을 한 장수에게 맡깁니다. 야르무크 강의 다리이며, 적들이 퇴각할 것으로 예측되는 경로를 끊으라고 지시했죠. 그 장수는 밤에 귀신같이 이동해서 다리를 점령했습니다.(위 지도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

 

  여섯째 날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할리드는 모든 병력에게 총공세를 퍼부으라고 명령했고 본인은 어제 모은 8천의 기병대를 이끌었습니다.

 

 

  우선 카나디르가 이끄는 좌익 적들부터 무너뜨렸습니다. 기병을 둘로 나누어서 적들의 보병과 기병을 신속하게 소멸시켰습니다.

 

 

  비잔티움이 다급하게 남은 기병을 집중시켰습니다. 할리드는 적 기병이 재정비하기 전에 기병과 기병 맞대결을 벌였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패배한 비잔티움의 기병대는 북쪽으로 도망쳤고 자발라의 병력도 포위당해서 무너졌습니다.

 

 

  더 이상 비잔티움은 전투를 지속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할리드는 북쪽을 차단했고 남은 비잔티움 보병들은 서쪽으로 황급히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줄 알았던 다리 퇴각로에는 500기의 이슬람 기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잔티움군은 포위되자 다리 아래의 절벽으로 몸을 던지다가 바위에 부딪혀서 사망하고,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다가 이슬람 기병의 추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만 전장이 워낙 광활해서 도주에 성공하는 병사도 많았지만, 이 전투 끝에 비잔티움은 10만 중 5만의 병사를 상실했습니다.

 

  테오도르, 바한, 그레고리는 전사했고, 자발라만 간신히 살아남아서 도망쳤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참패 소식을 듣자 몹시 침통했습니다. 많은 자금을 썼음에도 돌아온 건 정예병을 거의 잃는 대참사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성십자가 등 중요한 유물을 빼내라고 지시했습니다.

 

  6. 할리드의 마지막 원정

 

 

  할리드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637년 4월, 몇 달 동안의 공성전 끝에 기독교의 성지이자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한 이 도시를 손에 넣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소프로니우스 주교의 항복 문서는 우마르가 직접 와서 전달받았습니다. 우마르는 세금을 내는 대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겠다고 서명했습니다.

 

  우마르는 예루살렘에서 기도를 올리고, 다섯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므르와 슈르하빌은 이집트로, 야지드는 카이세리아로,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는 북쪽으로 나아가라고 임무를 나누었습니다.

 

  할리드는 다마스쿠스를 다시 회복했고, 6월에는 7천 명의 적 수비대를 물리치고 칼키스를 점령했습니다.(하지르 전투, 637년 6월) 이 때 할리드의 망치와 모루 전술과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후방을 타격하여 속전속결로 마무리했습니다. 이 보고를 듣고 평소에 할리드를 싫어하던 우마르도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할리드는 진정한 군사 사령관이다. 알라께서 아부 바크르를 축북해주시길. 그는 나보다 위대한 재판관이었다."

 

  과거 배교 전쟁에서 할리드를 감쌌던 아부 바크르의 판단이 옳았다고 인정한 것이죠.

 

알레포 중심에 있는 거대한 성채입니다. 기원전 16세기 아시리아 때부터 지어진 역사적인 건축물입니다. 다만 시리아 내전 이후로 상당히 파괴되었습니다.

  4개월 뒤 알레포까지 점령했습니다. 알레포는 비잔티움이 차지한 레반트 지역의 주요 도시였고, 알레프를 지키던 비잔티움 지휘관도 야전에서 할리드에게 패배하자 백기를 들었습니다. 그 뒤 우바이다와 함께 아자즈를 점령했고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있는 안티오크로 향했습니다.

필자가 화살표로 표시한 강이 오론테스 강입니다.

 

  이 때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남은 2만 ~ 3만의 병력을 모아서 불구대천의 원수와 직접 승부를 벌였습니다. 오론테스 강을 두고 벌어진 전투였는데 자세한 과정은 찾아보기 힘들어서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9개의 아치형 돌다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전투라고 해서 '철다리 전투(Battle of the Iron Bridge)'라고 전해집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만 명의 병력만 잃고 안티오크에서 물러났습니다. 반면 할리드는 1만 7천의 병력이 거의 온전했습니다. 알레포와 안티오크, 두 도시에 깃발을 꽂을 때 수비대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을 보장해서 큰 병력 소모 없이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의 수비대는 콘스탄티노플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할리드는 멈추지 않고 터키 중부의 키질이르마크 강으로 이동했습니다. 심지어 아르메니아도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머지 않아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위험해질 판국이었습니다. 결국, 황제는 레반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7. 퇴장하는 알라의 검

 

  헤라클리우스는 타르수스 등 중요한 요새에 병력을 철수시켜 비무장지대로 두었고, 우마르도 이 완충지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마르는 아부 우바이다에게 시리아 총독 자리를 주고 점령한 지역의 통치를 굳건하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후 한동안 이슬람 세력의 확장은 터키가 아닌 동쪽과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방향이 되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배를 타고 시리아에서 물러나면서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잘 있거라. 나의 속주, 시리아에 긴 작별을 고한다. 그대는 이제 이교도의 땅이 되었구나. 오 시리아여, 그대에게 평화가 함께하거라. 원수의 손에 그대가 얼마나 아름다운 땅이 될 수 있을까."

 

  그는 641년 2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리드의 이야기는 638년에 끝났습니다. 우마르가 할리드를 해임한 것인데, 명분으로 삼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할리드가 말년에 터키 원정에서 페르시아 출신의 한 시인을 만났습니다. '아쉬아'라는 시인에게 1만 디르함(대략 은 30kg)를 줬는데 우마르는 그것이 국고에서 나온 돈이 아닌가 조사했습니다. 할리드는 내 개인 돈이라고 주장했고 곁에 있던 우바이다도 그를 변호했습니다. 여담이지만 할리드의 마지막 원정에서 이슬람이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고, 이 때 원정군 모두가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끝내 우마르는 이걸 명분 삼아 할리드를 메디나로 불러들였습니다.

 

  할리드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런데 우마르는 그대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수긍했고 할리드를 인정했습니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 너는 해냈다. 그 누구도 네가 해낸 것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위업은 인간이 성취한 게 아니다. 모두 알라의 뜻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할리드가 해고당한 것에 분개했고 실제로 몇몇 장수들은 할리드에게 우마르에게 반기를 들어야 합니다라는 강력한 주장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할리드는 우마르와 이슬람에게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우마르는 주위에서 반발하는 여론이 많자 그 누구도 우상화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해명했습니다.

 

  "나는 할리드를 원망하거나 그가 흠결이 있어서 해고한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할리드를 미화하고 잘못된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승리를 위해 위대한 알라보다 그에게 의지할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사람들이 모든 승리를 만드는 건 알라라는 사실을 인지했으면 한다. 이 땅에 그릇된 예언자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4년 뒤 할리드는 자신이 공성전으로 승리한 에메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기 직전 그는 전장에서 죽지 못한 걸 한탄했습니다. 같은 해 사산 왕조 전역에서 우마르는 할리드를 다시 사령관으로 임명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에메사, 현재 홈스인 시리아의 도시에는 할리드를 기념하는 모스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름도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모스크'.

 

 

  할리드가 이슬람 편에 서서 활동한 건 10년이 안 되지만 그 길지 않은 시기의 강렬함은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무함마드 사후 반짝으로 끝날 뻔한 이슬람을 반석 위에 세우고, 이제 막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이슬람 세력으로 거대 제국인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을 상대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사산조 정벌에 나서는 633년부터 비잔티움 전역이 끝나는 638년까지 6년이 채 안 되는 역사에서 못해도 30번이 넘는 전투에서 언제나 승리했습니다.

 

  중요한 전투 때마다 열세의 전력일 때도 많았고, 거의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전투를 치렀을 때도 있었고, 사막 수백 km를 원정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은 할리드에게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포위전, 수공, 공성전, 기습, 공성전, 일기토 등 다양한 방식으로 승리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비잔티움과 사산조 간의 오래 지속된 전쟁도 훗날 이슬람이 승리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특히 사산조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죠. 그리고 할리드와 함께한 아부 우바이다, 아므르 이븐 알 아스 같은 훌륭한 이슬람 장군들의 조력도 빼놓을 수 없겠죠.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생 이슬람과 두 제국 사이의 국력(특히 비잔티움)은 까마득했다고 생각합니다. 할리드와 맞선 적들이 전쟁 경험도 많았다는 점도 그를 높이 평가할 수 있고, 특히 할리드는 그 대단한 헤라클리우스마저 꺾었습니다.

 

  저명한 미국 군사학자 조지 나프지거는 할리드의 대표적인 영광인 야르무크 전투를 역사의 분기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야르무크 전투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전투임에도 인류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이며, 비잔티움의 군대가 승리했다면 현대 세계는 인식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변화했을 것이다."

 

  8. 출처

도서

버나드 루이스, 『이슬람 1400년』, 까치글방(2010)

김승철, 『포용의 정복자 이슬람』, 좋은땅(2014)

아이라 M. 라피두스, 『이슬람의 세계사 1』, 이산(2008)

 

유튜브

<Battle of Yarmouk, 636 AD (Part 1/2) Storm gathers in the

Middle East> (https://www.youtube.com/watch?v=vL33R5F2Pkg)

<Battle of Yarmouk, 636 AD (Part 2/2) Storm gathers in the

Middle East> (https://www.youtube.com/watch?v=_4YePBWh0-w)

 

영문위키

<Siege of Emesa>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Emesa

<Battle of the Yarmuk>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Yarmuk

<Siege of Jerusalem (636–637)>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Jerusalem_(636%E2%80%93637)

<Siege of Aleppo (637)>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Aleppo_(637)

<Battle of the Iron Bridg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Iron_Bridge

<Siege of Germanicia>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Germani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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