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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사] 7세기 이슬람의 이집트와 페르시아 정복, 우마이야 왕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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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ovisionnew.tistory.com/501

 

[중동사]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황혼의 영광(부제: 야르무크 전투)

https://neovisionnew.tistory.com/384 [중동사] 초기 이슬람에서 무함마드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승리(~634년) https://neovisionnew.tistory.com/59 [전쟁사]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악연(Main: 5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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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1. 양면전쟁

 

  634년, 할리드가 피라즈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이하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을 때 계획대로라면 페르시아를 계속 공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전선에서도 이슬람군이 싸우고 있었고, 여기서 아부 우바이다 등이 밀리자 아부 바크르는 할리드에게 서쪽으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페르시아도 가만히만 있지 않았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이슬람 군대를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내부 사정이 엉망이라 그 이상으로 깊게 진격하지는 못했고, 2년 가까이 대치 상황만 지속했습니다.

 

  2. 알 카디시야 전투(Battle of al-Qadisiyyah, 636년)

 

  우마르는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라는 장수에게 4천 명의 지원 병력을 주고 페르시아에게 밀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는 7번째로 이슬람에 귀이한 인물이고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위협당할 때부터 함께 싸운 인물이었습니다. 사드는 우마르의 말대로 계속 협상하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귀이하라고 계속 회의했죠.

 

  페르시아군을 이끄는 사령관 루스담도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했습니다. 636년 8월, 이슬람 군대가 야르무크 전투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고 비잔티움 전선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우마르는 동쪽과 서쪽의 전선에게 모두 전령을 보냅니다.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에게 동쪽으로 지원군을 보내라고 명령했고, 사드에게는 지원군이 도착하면 행동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5천 명의 지원군이 카디시야 근처에 도착하자, 사드는 전투를 개시합니다.

 

  페르시아 군대의 병력은 5만, 이슬람 군대의 병력은 3만 5천 정도로 병력은 전자의 우위였습니다. 양쪽 군대 모두 기병이 4분의 1, 나머지가 대부분 보병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은 2년 ~ 3년 전 할리드에게 왈라자, 울라이스, 피라즈 전투 등에서 정예병을 대부분 상실했기에 경험이 전무한 병사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루스담은 병력을 4개로 나누고 각각 코끼리를 8마리씩 배치했습니다. 사드 역시 보병과 기병을 4개로 분리해서 맞대응했습니다.

 

 

  636년 11월 16일부터 나흘 동안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첫 날 페르시아 궁병의 공격과 코끼리의 돌격으로 기세가 매서웠습니다. 사드는 용맹한 기병들로 하여금 코끼리 가까이 진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코끼리 위 안장을 고정시킨 줄을 끊어버리거나 탑승한 페르시아 병사들을 화살로 저격했습니다. 사드는 바로 반격을 개시했지만 종결짓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병력의 일부는 상대 측 사령관 루스담을 노렸으나 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루스담은 이 기습으로 몸 여러 군데에 잔부상을 꽤 입었습니다.

 

  둘째 날에 '알 카카 이븐 암르 알 타미미(이하 카카)'라는 이름의 장수가 천 명의 지원군을 추가로 이끌고 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도착하기 직전 한 덩어리로 오는 게 아니라 지원군을 여러 갈래로 나누었습니다. 나누어진 모든 병력에게 흔히 말하는 '장사진' 진형으로, 길게 줄을 지어서 오도록 지시했습니다. 페르시아는 적들의 병력이 훨씬 더 많이 불어났구나 라고 착각했고, 그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이슬람의 선제공격이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전투를 종결짓지는 못했지만, 3배 ~ 4배에 달하는 전투교환비 이득을 봤습니다.

 

 

  셋째 날, 이슬람군의 눈앞에는 재정비를 마친 코끼리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슬람 진영 가까이까지 페르시아의 기병과 보병은 코끼리를 호위했고, 코끼리들이 이슬람군을 밟을 때가 되자 코끼리 앞에 있던 병력은 길을 비켜주었습니다. 무자비한 전투 코끼리들로 인해 이슬람 진형은 계속 뒤로 밀려났고,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사드는 싸울 수 있는 기병들에게 측면으로 파고 들어가 코끼리를 한두 마리씩 차례로 제압하도록 했습니다. 기병은 다시 한 번 코끼리 궁수들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었고 코끼리의 눈을 멀게했습니다. 서로 수천 명의 병사들을 또다시 잃었습니다.

 

 

  누구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넷째 날 전장에 모래 폭풍이 불었고, 서로 시야를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카카가 이끄는 이슬람 결사대는 페르시아가 정신을 못 차리는 시간을 틈타 중앙으로 파고 들어 루스담을 살해했습니다. 사드는 루스담이 희소식을 듣고,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반면 페르시아 군대는 우리들의 총지휘관이 죽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고, 혼비백산 상태에 처해졌고 도망쳤습니다.

 

  전투의 승리로 전리품이 산처럼 쌓이자 우마르는 병영 도시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쿠파'라는 도시가 만들어졌는데, 오늘날 이라크 도시 나자프의 시초였습니다. 이슬람군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바빌론에 도달했습니다. 바빌론을 지키던 페르시아의 장수들은 겁을 먹고 도망치고, 오히려 바빌론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슬람의 편에 서서 첩보원 역할을 하거나 건설 사업에 뛰어드는 등 협조적이었습니다. 심지어 공성 무기를 생산해주기까지 했습니다.

 

  3. 크테시폰 공성전(Siege of Ctesiphon, 637년)

 

  이제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은 풍전등화의 신세에 처했습니다. 637년 1월, 이슬람 군대는 크테시폰 옆에 있는 바르시르를 포위했니다. 티그리스 강 바로 동쪽에 크테시폰이, 서쪽에 바르시르가 있었습니다. 샤한샤(페르시아의 황제, 왕중의 왕) 야즈데게르드 3세는 바르시르 주위에 해자를 파면서 버텼습니다.

 

지도 속 Ktesiphon이 크테시폰, Veh-Ardashir가 바르시르입니다.

 

  수성 도중 크테시폰에서 바르시르로 가는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2개월 뒤 3월이 되자 바르시르 내부의 물자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페르시아는 포위망을 깨기 위해 훈련된 사자까지 동원했지만, 하심이라는 이슬람 장수가 명궁이었는지 화살을 쏴서 사자가 날뛰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페르시아는 주흐람이라는 이슬람 장수 1명이 전사하는 공적만 달성하고 전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고민 끝에 사신을 보냅니다.

 

  "우리 황제께서는 티그리스 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동쪽은 우리 페르시아의 것으로 남고, 서쪽은 당신들의 것으로 된 후에 평화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조건이 당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당신들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사드는 전혀 만족하지 않았고, 페르시아가 이슬람에 복종하고 세금을 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전쟁이라고 콧방귀를 뀌었죠.

 

  역시나 바르시르는 더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습니다. 다만 바르시르에 있던 페르시아군이 탈출하면서 티그리스 강에 있는 다리를 끊었습니다. 배는 강의 동쪽 기슭의 페르시아 진영 가까이 두었습니다. 마침 티그리스 강이 불어났고, 페르시아는 도랑을 파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슬람에 귀이한 페르시아인들이 강이 얕은 지점을 알려줬고, 덕분에 이슬람 기병대는 활로를 통해 강을 건넜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배로 대부분의 군대가 크테시폰으로 진입했습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왕궁의 보물을 갖고 동쪽의 '훌완'이라는 도시로 도망쳤습니다. 그럼에도 황궁 창고에 은화만 90억냥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사드는 크테시폰에 있던 페르시아인들에게 공물을 내는 조건으로 목숨을 살려두었지만, 도망친 난민들을 쫓아서 학살하고 약탈했습니다.

 

 

빨간색 화살표는 사드가 이끄는 이슬람군의 진격로고, 노란색 화살표는  야즈데게르드 3세가 도망친 퇴각로입니다.

 

  4. 잘룰라 전투(Battle of Jalula, 637년)

 

  남은 페르시아 군대는 북쪽의 모술, 티그리트, 잘룰라 등으로 흩어졌습니다. 태반 이상이 잘룰라에 있었는데, 이곳은 티그리스 강의 지류인 디얄라 강을 끼고 있는 곳이자 아제르바이잔으로 가는 길목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크테시폰 공성전에서 화살로 활약을 한 하심이라는 장수가 1만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라자드와 미흐란이 이끄는 페르시아 2만 군대와 싸웠습니다. 프라자드와 미흐란은 크테시폰 공성전에서도 페르시아 사령관으로 있었고, 프라자드는 알 카디시야 전투에서 전사한 루스담의 형제이기도 했습니다. 637년 4월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미흐란은 적들이 돌아서 공격하지 못하도록 자그로스 산맥과 디얄라 강 사이에 자리 잡았고, 앞에 마름쇠를 설치하고 참호를 팠습니다. 전투가 벌어지자 페르시아 궁수들이 전과를 올리고 이슬람군은 후퇴했습니다. 전황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미흐람은 참호에 다리를 놓고 페르시아군을 진격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심의 계산대로였습니다. 카디시야 전투에서 활약한 카카라는 장수에게 기병을 맡겨서 참호에 놓인 다리를 점령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역시나 이슬람의 승리로 끝났지만 수천 명의 페르시아군이 방어 요새로 다시 들어가는 것까지 막지 못했고, 이슬람 쪽 피해도 적지 않아서 몇 개월 간 포위전이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공물을 바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이슬람에 항복했습니다. 미흐람은 동쪽으로 도망치다가 추격병에 붙잡혀서 전사했고, 프라자드는 남동쪽으로 피신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뒤이어 모술도 무난하게 이슬람의 깃발이 꽂혔고, 638년이 되어서 이슬람은 이라크 일대를 완젆히 장악했습니다.

 

  다만 아라비아와 시리아에 가뭄과 전염병 사태가 심각해져서 몇 년 동안 정복전이 멈췄고, 당분간 이슬람은 페르시아의 역공을 막아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메디나로 몰렸고, 우마르는 식량을 배급하고 세금을 면제해주면서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5.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이집트를 정벌하다.

 

  637년 말 전염병 사태가 가라앉고 시간이 지나 식량 사정도 점차 개선되었습니다. 지난 글의 야르무크 전투에서 할리드 바로 밑의 부하 장수들 중 아므르 이븐 알 아스(아므르)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집트를 공격할 때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마르는 시리아 안정화가 우선이라며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므르는 지금이야말로 기회라고 간곡하게 호소했습니다. 우마르는 우선 기병 4천의 병력을 주긴 했지만 경거망동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메디나로 돌아가서 잘 의논하고 확답하겠다. 전령을 보낼테니, 그대가 이집트 국경에 도착하기 전에 허락하지 않는다는 서신을 열었다면 바로 회군하라. 그러나 그대가 이집트 땅에 침입한 뒤라면 알라에게 기도를 올리고 신의 뜻에 맡겨라."

 

  아므르가 이집트 삼각주로 진격할 동안, 메디나의 회의 끝에 우마르는 공격을 중단하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전령은 아므르가 이집트 국경을 넘어가기 전 만났습니다. 하지만 아므르는 눈치를 챘는지 일부러 이집트 국경 너머로 들어간 다음에야 우마르가 보낸 서신의 겉봉을 뜯었습니다. 639년 12월, 이슬람의 아프리카 팽창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음해 아므르는 이집트의 펠루시움과 발바이스 요새를 점령하고 바빌론 요새를 포위했습니다.(페르시아의 바빌론 요새과 이름만 같고 다른 장소입니다.) 우마르도 병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4천 명의 병력으로 아므르의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병력으로 바빌론을 함락시키는 건 무리였습니다. 시간이 지연되자 우마르는 주바이르라는 장수에게 다시 4천 명을 맡겨서 보냈습니다. 이렇게 1만 2천 명의 이슬람군은 동쪽의 헬리오폴리스라는 거점을 손에 넣었습니다. 2만 명의 비잔티움군은 늦은 대응으로 격퇴 당했고 바빌론은 다시 포위되었습니다. 바빌론은 이번에는 견디지 못했습니다.

 

  다음은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무역의 중심지이자 비잔티움에게 있어서 2번째로 큰 도시라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곳을 빼앗기면 이집트도 이슬람에게 내주게 되는 셈이었죠. 헤라클리우스는 대규모 지원군을 모아서 알렉산드리아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비잔티움으로서도 해볼만 했던 게, 해상 도시라 지중해를 통해 보급하면 당시 해군이 전무했던 이슬람은 그걸 저지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641년 2월 헤라클리우스는 세상을 떠나고 지원 계획은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여러 겹의 요새와 성벽이 축조된 알렉산드리아였지만, 반 년 가까이 자력으로 싸우다가 함락되었습니다. 얼마나 부유한 도시였는지 아므르는 우마르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우리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습니다. 이 곳에는 4천 개의 대궐과 4백 개의 유흥 시설, 헤아릴 수 없는 재산이 있습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므르는 나일강을 따라 계속 내려가서 누비아 지역을 점령했고 현재 리비아 북부까지 진격했습니다.

 

  6. 니하완드 전투(Battle of Nahavand, 642년), 그리고 페르시아의 멸망

 

니하완드 요새의 그림입니다.

 

  한편, 크테시폰을 빼앗기고 야즈데게르드 3세는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에 위치한 메르브로 저멀리 천도했습니다. 4년 가까이 힘을 기르고 각지를 돌면서 5만 명이라는 군대를 모았습니다. 이슬람을 공격하기 위해 니하완드 성에서 병력이 집결했습니다.

 

  우마르는 그 때까지 페르시아 정복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이슬람 수뇌부들은 부유한 시리아와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을 평정한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우마르 본인도 잘룰라 전투이후 동진하려는 장수들에게 그만 가라고 저지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자꾸 옛 땅을 노리는 페르시아의 태도에 칼을 뽑았습니다.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등 여러 이슬람 지휘관들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었습니다. 이 전투의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번에도 이슬람의 승리였고, 페르시아는 니하완드 성을 뺏겼습니다.

 

 

  니하완드 전투의 패배로 페르시아 사람들은 왕중의 왕이라고 불리는 야즈데게르드 3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페르시아는 더욱 분열되었고,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각 지역의 군벌이 난립했고, 백성들은 세금을 거부하기까지 했습니다. 다시 군대를 모집하려고 해봤자 허사였습니다.

 

  이슬람은 거침없이 페르시아의 남은 땅을 흡수했습니다. 오늘날 캅카스 산맥, 이란 전체, 투르크메니스탄과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아무다리야 강(당시 명칭은 옥수스 강)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였지만, 전쟁의 신이 와도 더 이상의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영토는 없었습니다.

 

 

지도 속 Nahavand가 니하완드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보라색으로 표시한 곳이 페르시아가 마지막으로 저항한 메르브입니다.

 

  651년,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렇게 멸망했습니다. 3세기 초반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400년 가까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지속된 나라가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 이후 야즈데게르드 3세는 방랑하다가 메르브의 한 방앗간 주인에게 죽었고, 황태자 페로즈는 당나라 장안으로 도망쳐 당나라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사실 당태종 때부터 야즈데게르드 3세가 당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공물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당나라라도 고구려쪽 정세를 먼저 신경써야했고, 그 머나먼 이란까지 원정군을 보내는 건 무리라 제대로 도울 수 없었습니다. 당고종은 도망친 페르시아 황족과 난민들을 받아들였고, 명목 상의 직책이지만 페르시아 총독 자리를 주었습니다.

 

  7. 우마르와 우스만의 죽음

 

  이슬람군이 한창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나가는 644년, 칼리프 우마르가 암살당하고 우스만 이븐 아판(이하 우스만)이 3대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사위였고 메카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습니다. 우스만의 부는 초기 이슬람의 군자금이며 오아시스와도 같았습니다.

 

  우스만은 우마르 사망 직후 각자의 반란을 진압했고, 영토확장을 이어나가 리비아와 아르메니아를 점령했습니다. 무엇보다 이슬람의 교리인 '쿠란'을 대대적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는 우마르와 다르게 창고의 돈을 아끼지 않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습니다. 수로를 파서 물을 공급했고 수천 개의 모스크를 건설했습니다. 상인 출신이라 상인들을 위한 도시와 시장도 대폭 늘어났습니다. 곳곳에 도로가 건설되었습니다.

 

  하지만 우스만은 지나치게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본인 가문(우마이야)에게 나눠주고, 다른 사람이 주는 선물을 마음껏 챙겼습니다. 사적으로 선물을 받지 않았고 가족에게도 금기시켰던 우마르와 대비되는 부분입니다. 또 규정을 변경해서 정복지의 매매를 허용했고, 장군과 병사들에게 중앙 정부의 돈을 마음껏 빌려주어서 그들이 땅을 사게 장려했습니다. 정복지의 이슬람 총독은 부를 축적하게 위해 세금을 크게 올렸습니다. 심지어 우스만은 일가친척을 정복지의 총독으로 보냈습니다.

 

  우스만과 우마이야 가문을 향한 피정복민의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메디나에 있는 우스만의 집 주위로 시위대가 모여들었고 우스만을 호위하는 사람들과 시위대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그는 담을 넘어 침입한 폭도들에게 656년 살해당했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 읽었던 쿠란은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하자티 이맘 모스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우스만의 쿠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쿠란이라고 일컬어지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위 사진은 타슈켄트에 있는 하자티 이맘 모스크고 아래 사진은 모스크 내부에 안치된 우스만이 죽기 직전 읽었다고 전해지는 쿠란입니다. 굉장히 낡은 쿠란으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8. 알리의 즉위, 그러나...

 

  우스만 사후 무함마드의 사촌인 알리가 4대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의 단결은 이미 퇴색되었고, 알리는 반대 세력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우스만과 가까웠던 우마이야 가문과 특히 주요 도시의 총독은 알리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알리는 그들을 해임했지만 요지부동이었고 예멘 총독은 국고의 돈을 모조리 털어서 달아났습니다.

 

  우스만의 친척이자 다마스쿠스 총독인 무아위야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비군을 자주 훈련시키고 투석기를 늘리는 등 무력으로 알리와 맞먹었습니다. 무아위야는 알리의 해임 명령에 반란을 일으켰고, 아므르 이븐 알 아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여기에 이집트 원정에서 후발대 역할을 맡았던 주바이르, 메카의 권력자 중 하나인 탈하, 셋째 부인인 아이샤 등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예멘 총독은 빼돌린 돈으로 그들을 지원했습니다.

 

 

  알리는 656년 12월 이라크 남부 외곽의 바스라(Barsa)에서 그들을 제압했습니다. 주바이르와 탈하는 죽고 알리는 아이샤를 포로로 잡아 메디나로 보냈습니다. 다음은 무아위야였습니다. 서로 우스만의 죽음에 대해 책임 공방을 벌였지만 결렬되었고 657년 7월 유프라테스 강의 라카(Raqqa)에서 알리와 무아위야는 '시핀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투는 알리 측의 우세였지만 아므르가 꾀를 발휘했습니다. 그의 조언대로 무아위야의 병사들은 창 끝에 쿠란 구절을 적은 종이를 꽂고 쿠란을 암송하면서 걸었습니다. 알리의 병사들은 쿠란을 찢으면서 싸우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였고 다시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내부 분열로 알리는 다시 동쪽으로 군대를 물릴 수밖에 없었고, 무아위야는 세력을 계속 넓혔습니다. 몇 년 동안의 내전 끝에 알리는 반대파의 자객에게 661년 목숨을 잃었습니다. 알리의 아들 하산이 다섯 번째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기충천한 무아위야군에 비해 하산 측의 병력은 싸울 의지를 잃었습니다. 병력 12,000명 중 8,000명이 무아위야 쪽으로 탈영하고 배신자가 나와서 하산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그는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하고 칼리프에서 물러났습니다.

 

  자연스럽게 무아위야가 6대 칼리프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1차 피트나(내전을 의미하는 아랍어)가 종결되었고, 그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다마스쿠스로 옮겼습니다. 680년 무아위야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깨고 죽기 전 아들 야지드에게 권력을 세습했습니다. 그로 인해 반발이 시작되는 2차 피트나에서, 훗날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는 3차 피트나에서 알리 지지자들은 계속 잔존하고 저항했습니다. 알리 지지자들은 시아파가 되어 이슬람에서 두번째로 많은 종파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슬람 신자 중 시아파는 10% ~ 20%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수니파입니다.

 

  (여기까지 글을 마치고 8세기 이슬람 정복 전쟁은 시간이 나면 다뤄보겠습니다.)

 

  9. 출처

도서

버나드 루이스, 『이슬람의 세계사. 1』, 이산(2009)

김승철, 『포용의 정복자 이슬람』, 좋은땅(2014)

허진모, 『전쟁사 문명사 세계사 2』, 미래문화사(2020)

 

유네스코 세계디지털도서관 (https://unesdoc.unesco.org/home)

B. A. 리트빈스키 외 2인, The Arab conquest

 

유튜브

<Early Muslim Expansion - Khalid, Yarmouk, al-Qadisiyyah ...(초기 무슬림 제국 팽창사 - 시리아 및 이라크 정복 602-636)> (https://www.youtube.com/watch?v=r2cEIDZwG5M)

<Early Muslim Expansion - Arab Conquest of Iran and Egypt> (https://www.youtube.com/watch?v=baHT2nR5Wr4)

영문위키

<Battle of al-Qadisiyyah>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l-Qadisiyyah

<Siege of Ctesiphon (637)>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Ctesiphon_(637)

<Battle of Jalula>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Jalula

<Batle of Nahavand>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Nahavand

<Amr ibn al-As> https://en.wikipedia.org/wiki/Amr_ibn_al-As

<Muslim conquest of Egypt> https://en.wikipedia.org/wiki/Muslim_conquest_of_Egypt

<Siege of Alexandria (641)>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Alexandria_(641)

<Yazdegerd III> https://en.wikipedia.org/wiki/Yazdegerd_III

<First Fitna>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Fit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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