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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며,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을 접하길 원하는 1인입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며 주기적으로 헌혈하는 헌혈자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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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크래프트1e스포츠 (3)
유튜브에 스타1판 역사에 대해 좋은 영상이 있어서 공유합니다.(당시 승부조작, 지적재산권 파동에 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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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o54-hTT7UTw

 

  유튜브 채널 중에 구독자 25만 명 가까이 되는 '펭귄몬스터'라는 채널에서 정말 훌륭한 영상이 있어서 포스팅합니다. 예전 스타크래프트1 E스포츠 판에 대해 한 번 얘기하고 싶네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스타크래프트1판(이하 스타1판, 스타판)은 수명이 다 끝나서 무너진 것입니다. 블리자드 책임은 1g도 없고, 조작 사건으로 인한 악영향도 세간에서 과대평가되었다고 보고요. 스폰서가 잡히지 않아 자연스럽게 문을 닫은 것이지 강제로 끝난 건 더더욱 아니고요.

 

  2010년 당시 스타1판은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과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그 이전에도 2007년에 스폰서 없이 스타리그가 진행되기도 했었죠. 또 이제동과 이영호의 네이트 MSL 결승 다음 대회에서도 스폰서 없이 MSL이 진행되다가 대회 중간에야 스폰서가 들어왔죠.

 

 

https://www.youtube.com/watch?v=oNOXjTKrdUs

 

 

  사실 스타1의 세계적인 인기는 몇 년 못 갔고(잘해야 2001년까지 이려나요?) 그래도 2000년대 중반까지는 꽤 인기가 있었는데, 리니지나 스페셜포스나 서든어택 같은 다른 게임들을 압도할만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2004년부터 집계된 PC방 점유율 순위에서 스타크래프트는 꾸준히 5위 안에 들었지만, 그들에게 밀려 월별 1위를 차지한 적은 없었죠. 현재의 LOL 같은 절대적인 인기를 스타1은 오래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스타1에 비견될만큼 인기가 있던 게임이 없지 않았는데, 당시 게임 채널이 스타1판이 살아있던 시절 너무 스타1 컨텐츠에만 의존한 것도 문제였습니다. 현재의 LOL처럼 절대적인 1강 인기였다면 이해하는데 그런 것도 아니었죠.

 

  2010시즌이 끝나고 2011시즌에는 개인리그가 6개에서 4개로 축소되었습니다. 테니스로 비유하면 그랜드슬램 중 1대회와 파이널스가 폐지되고, ATP 대회도 3분의 1이 문을 닫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뒤로 2012시즌에는 그냥 대회 하나 열리고 끝났죠. 프로팀들도 줄줄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스타2로 전환하는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스포츠든, 회사든 뭔가 지속되려면 자본이나 인재의 유입이 계속 있어야 합니다. 

 

 

  그 방면에서 스타1은 시한부 상태였어요. 지역연고가 있는 스포츠야 그 지역에서 태어난 팬들이 유입되기 마련이지만, 스타1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승부조작 사건이 있기는 했지만, 온전히 이 것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타2에도 조작 사건이 터졌지만 여전히 GSL 유지되고 있고, LOL판도 ahq Korea 사건 터졌지만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두 E스포츠 판 모두 조작 사건이 터졌는데 스타1보다 더 오래, 현재진행형으로 지속되고 있지 않습니까. 조작 사건과 관계없이 시청자가 많고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판이라면 기업이 돈을 대기 마련입니다. 축구, 야구, 농구 같은 일선 스포츠들이 그렇고요.

 

https://namu.wiki/w/CCB

 

CCB - 나무위키

2차 리그도 ANA가 전승 우승을 차지. 이때까지가 ANA 클랜의 전성기였다. 14차 시즌에서 오그솔의 파훼법에 대한 칼럼 중, 탈론 카드의 활용이 있었는데, 탈론의 급격한 상향으로 인해 탈론은 너무

namu.wiki

 

  이건 진짜 여담이지만 CCB리그(카오스리그)도 6차리그 때 대리게임 사건 터졌는데도 17차리그 까지 유지되기도 했고요.

 

  승부조작 사건이 작지 않았고 망하는데 어느정도 가속화되기는 했지만, 조작 없었다고 4년 ~ 5년 더 갔을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승부조작 사태 터지자마자 스폰서가 대거 빠져나갔다고 하는데, 바로 대한항공 스폰서 연장되고 빅파일 스폰서 새로 구해졌다는 점에서 이 점도 갸우뚱합니다.

 

  물론 승부조작범들이야 영구제명이 마땅하고 다시는 선수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되는 인간들입니다. 되돌릴 수 없는 큰 죄를 지었고 이 판에 얼씬 거려서도 안 되고요. 예전에 스타1 조작범들 중 1명이 아프리카tv에서 사설리그를 여는 시도를 했을 때 필자도 분노했습니다.

 

  유튜브 영상에도 나와있지만, 위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악재가 겹쳐서 지적재산권(=지재권, 중계권) 파동도 일어나서 스타1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나락으로 추락했죠.(사실 2007년에 지재권 파동이 1차로 먼저 일어났습니다.) '스타크래프트1'이라는 게임이 공공재라는 망언이 여기서 나왔죠. 명백이 스타1이라는 게임이 있고, 그 저작자와 저작권이 있는데 무관한 사람이 중계권료로 팔아먹는데 블리자드가 가만히 있으면 그게 이상한 것이죠. 아무튼 이 사건으로 저작권도 무시하는 이미지가 생겨서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필자도 블리자드 안 좋아합니다. 스타2도 공허의 유산 이후부터 실망스러워서 접었고, 워크래프트3 리포지드 엉망으로 낸 것도 있어서 블리자드에 대해 학을 뗀 지 오래되었고요. 하지만 블리자드는 지재권 분쟁 내지는 말년 스타1 상황에서 피해만 입은 쪽이고 스타1에 악영향을 전혀 입히지 않았습니다.

 

 

  인벤 사이트에서 명문이 있어서 첨부합니다. 심하게 말씀드려서 망한 이유를 100% 조작범들만 탓하는 건 숲이 아니라 나무만 보는 격이고, 지나친 핑계를 댄다고 생각합니다. 확대해석도 아니고 죄인이 A라는 죄를 저질렀어도 제대로 된 근거 없이 B, C까지 죄목을 추가해도 되는 건 아니니까요. 초기 스타판이랑 망할 때 스타판 인기는 천지차이였어요. 설마 임요환 홍진호 이윤열 시대와 김택용 송병구 이제동 시대와 인기가 같다고 생각하는 분은 없으시겠죠?

 

  관계자들은 스타크래프트1 E스포츠가 오래 전부터 사상누각의 상태가 되었는데 책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지... 막말로 만약 야구판이 내후년 쯤 망할 때 야구 팬들이 최근에 승부조작한 윤모씨가 원인이라고 하면 필자는 그 때도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무튼 여기에 2011년에 정치권에서 셧다운제 도입하는 등 그 시절 게임에 대한 사회적인 분위기도 암울했고, 그 직전 스타2가 출시되면서 다른 게임과 경쟁하기도 힘든 스타1은 부실공사의 상태에서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타1 연습생들이 받았던 열악한 환경도 있었고요.

 

  그래서 현재 LOL 판에서 2군에도 최저연봉(2천만원) 생기는 등 옛날 스타판에 비해 선수들 대접이 좋아진 건 정말 다행입니다. 물론 최근 LOL 판에도 그리핀 사건이 터지고, 지금도 지원이 부족한 팀이 있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거에 식사마저도 열악했던 스파키즈, 이스트로 같은 팀들보다야 설마 낫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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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1] 예전 양대 개인리그에서 종족 비율이 무너진 리그들 정리(MS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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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스타리그 종족 구성의 밸런스가 깨졌던 대회들을 정리했는데, 이번에는 MSL로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예시는,

 

1. 4강에서 한 종족이 3명 이상 차지했거나,

2. 16강에서 한 종족이 2명 밖에 없거나,

3. 16강에서 한 종족이 10명 이상(두 자릿수 숫자에 16강 인원 중 반이 넘죠) 차지한 대회를 정리했습니다.

 

 

  1. 2002년 KPGA 1차리그(우승자 임요환 / 준우승자 홍진호)

 

  * 16강에서 프로토스가 2명 밖에 없었던 대회였습니다. 임성춘과 기욤이 토스의 보루를 지키고 있었는데, 기욤은 일찍 떨어졌지만 임성춘은 4강에서 홍진호에게 패배했지만 3, 4위전에서 최인규에게 승리하며 3위를 확정지었습니다.

 

  2. 2002년 KPGA 2차리그(우승자 이윤열 / 준우승자 홍진호)

 

  * 의외로 4강에서 3저그(홍진호, 조용호, 박신영)인 대회였습니다. 16강 6저그 - 8강 5저그였던 걸 감안하면 이 때 저그 인재풀이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담이지만 결승전에서 이윤열이 홍진호를 패패승승승으로 역스윕했는데, 스타1 E스포츠 5전제에서 최초의 역스윕으로 알고 있습니다.

 

  3. 2002년 KPGA 3차리그(우승자 이윤열 / 준우승자 박정석)

 

  * 이번에는 이윤열, 임요환, 최인규가 4강 3테란을 구성했습니다. 4강의 다른 1명인 박정석은 4강에서 임요환을 잡아냈지만 이윤열에게 3:0 완패를 당했습니다. 이후로도 박정석은 이윤열을 상대로 이긴 적보다 진 적이 훨씬 많죠.

 

  4. 2003년 TG삼보 MSL(우승자 최연성 / 준우승자 홍진호)

 

  * 이 때는 MSL이 더블 엘리미네이션 방식으로 치러졌지만, 승자조 결승 + 패자조 준결승에 있었던 4명의 프로게이머가 4강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서 써보겠습니다. 승자조에서는 홍진호가 이윤열을 이기고 최종 결승전에 진출했고, 패자조 준결승, 결승에는 최연성이 이병민과 이윤열을 차례로 이기고 최종전에서 홍진호까지 셧아웃시키면서 자신의 시대를 알렸습니다. 결승전 3경기인 유보트 맵에서는 스타팬이라면 다들 아는 명경기죠.

 

  5. 2004년 하나포스 센게임 MSL(우승자 최연성 / 준우승자 이윤열)

 

  * 역시 4강 3테란(최연성, 이윤열, 김정민) 대회였습니다. 문제는 16강에서 프로토스 게이머가 1명(강민)뿐이었다는 점입니다. 이윤열은 패자조 준결승과 결승에서 강민과 김정민을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5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6. 2005-2006년 CYON MSL(우승자 조용호 / 준우승자 마재윤)

 

  * 준우승자가 영구제명 당해서 쓰기가 좀 그렇지만, 그래도 경우에 해당되니 쓰겠습니다. 승자조 결승이 조용호 vs 마재윤이었고 패자조 준결승이 최연성 vs 성학승이라 4강 3저그 MSL이었습니다. 패자조 결승에서 최연성 vs 마재윤의 대결은 압도적인 마재윤의 승리로 새로운 최강자가 전대 최강자를 누르는 다전제였죠. 하지만 조용호가 결승에서는 마재윤을 잡아내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7. 2006년 프링글스 MSL 시즌2(우승자 마재윤 / 준우승자 심소명)

 

  * 이번에도 4강 3저그가 만들어졌습니다. MSL이 프링글스 시즌1 대회부터 다시 조별리그 -> 토너먼트라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4강에서 마재윤, 심소명, 변은종이 3저그를 구성했고 남은 한 자리는 프로토스의 희망인 강민이었습니다. 마재윤과 강민의 맞대결은 마재윤이 승리했고 결승은 저저전이 만들어졌죠.

 

  8. 2008년 아레나 MSL(우승자 박지수 / 준우승자 이제동)

 

  * 16강에서 이제동, 한상봉 2저그만 살아남았고, 그나마 8강에서는 저그에서 이제동 홀로 남았습니다. 진영수, 박영민 등을 잡고 결승까지 올라갔지만 같은 프로리그 팀이었던 박지수에게 패배했습니다. 이 대회에서 맵이 지나치게 상성을 타거나, 오델로와 아테나 같이 테란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맵이 있어서 16강 2저그와 이제동의 준우승은 거의 어쩔 수 없었습니다.

 

 

  9. 2008년 클럽데이 MSL(우승자 김택용 / 준우승자 허영무)

 

  * 4강 4토스(김택용 - 허영무 - 윤용태 - 김구현)로 일시적인 프로토스의 황금기가 도래한 MSL이었습니다. 김택용은 허영무를 잡고 MSL 3회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10. 2009년 아발론 MSL(우승자 김윤환 / 준우승자 한상봉)

 

  * 4강에서 김윤환과 이제동이, 한상봉과 변형태가 맞붙었던 MSL이라 3저그가 있었습니다. 1년 전 아레나 MSL처럼 결승전 흥행이 영 좋지 않았죠. 이제동은 2인자 저그였던 김윤환에게 패배하면서 지나친 평가 절하를 받습니다.

 

http://msl.bigfile.co.kr/register/notice.php

 

 

  11. 2010년 빅파일 MSL(우승자 이영호 / 준우승자 이제동)

 

  * 오드아이, 폴라리스랩소디 같이 테란이 저그를 잡아먹을 수 있는 맵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4강에서 이영호 - 정명훈 - 이재호라는 3테란과 이제동이라는 최후의 저그가 대결구도를 형성했죠. 이제동은 8강부터 결승까지 염보성, 이재호, 이영호와 연이어 싸웠지만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습니다. 이영호와 정명훈의 4강 테테전은 아직도 회자되죠. 여담이지만 빅파일 MSL로 검색해보니 위의 링크처럼 사이트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네요.

 

  12. 2010-2011년 피디팝 MSL(우승자 신동원 / 준우승자 차명환)

 

  * 클럽데이 MSL의 리버스 버전. 4강에서 신동원 - 이제동, 차명환 - 김명운이라는 4강 4저그 대진이 완성되었죠. 흥행카드 이제동이 결승에 올라갔으면 나았겠지만 충격적으로 신동원이 올라갔고 반대쪽도 더 네임밸류 있었던 김명운이 떨어지며 또다시 MSL은 흥행에 참패했습니다.

 

  13. 2011년 ABC마트 MSL(우승자 이영호 / 준우승자 김명운)

 

  * 지난 대회 4강 진출자인 이제동 - 김명운 - 신동원이 이번에도 4강 대진을 구성해서 3저그가 완성되었습니다. 남은 1명은 잠깐의 부진을 이겨낸 테란 이영호였죠. 32강 D조에서 이제동 - 염보성 - 김택용 - 이영호라는 죽음의 조가 대회의 백미였습니다. 이 대회는 마지막 MSL로, 이영호가 김명운을 잡아내면서 최후의 MSL 3회 우승자로 등극했습니다.

 

  따라서 필자가 정한 조건에서 역대 27회의 MSL 가운데 13회의 MSL이 해당됩니다. 역대로 살펴보니 4강 선수들 중 세 선수가 같은 종족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네요. 1강에서 한 종족이 한 명 ~ 두 명 뿐이면 그 대회는 맵이나 당시 종족 밸런스에서 확실히 문제가 많았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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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스포츠, 스타1] 스타크래프트1 프로 초창기와 전성기 기욤패트리에 대한 글과 사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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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artnerplus&logNo=10144414544&proxyReferer=

 

[기욤패트리] 프로게이머 - 기욤 패트리

기욤패트리 뭐하나 했더니, HON 중계자로 복귀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인 기욤 패트리가 '히어로...

blog.naver.com

99년 공식적인 세계최강으로 등극한 이후 2001년 6월까지 2년 6개월동안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있었던 플레이어.

전설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칼리와 오리지널 시대부터 시작하여 브루드 워, 그리고 프로게이머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일하게 각 시대별 최강자로 등극하였고 또한 아마추어. 베틀넷, 오프라인 프로게이머 리그까지 유일하게 최강자의 자리에 올라선 사나이.

그렇다. 바로 '세계 최강'이라는 닉네임을 가졌고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하던 프로게이머. '기욤 패트리'가 이번 글의 주인공이다.

기욤 패트리의 커리어에 있어 단연 빛나는 부분은 '블리자드 월드 챔피언쉽' 우승이다. 이 대회는 기존에 열렸던 '블리자드 레더 토너먼트'와도 비교를 거부하며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온게임넷 대회건 MBC MSL 등 어떠한 대회도 대적할 수 없는 최고의 대회다.

쉽게 말해 이 대회는 레더 토너먼트에서 온갖 말이 오고 가자 블리자드가 작정하고 '그래! 어디 한번 공인 세계 최강을 공식으로 가려보자!' 취지로 블리자드가 내건 최후의 스타 크래프트 대회였다.

'기욤 패트리'는 이 대회에서는 순항을 거듭하고 결승에서 '김창선' (현 온게임넷 해설자) 에게 3:0이라는 일방적인 스코어로 1시간여 만에 우승 확정지으면서 블리자드가 인증한 공인 세계 최강 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PGL. 일치감치 프로게이머라는 것을 탄생시킨 북미에서는 협회까지 있었는데 여기서 주관한 북미 프로게이머 대회. 즉 지금으로 치면 온게임넷 스타리그 혹은 MSL 라고 생각하면 된다. 여기서 기욤 패트리는 우승하면서 아메리카 대륙 제패.

그리고 유럽의 최정상의 플레이어들이 참가했었고 역시 전 세계의 상위랭커들이 모조리 참가한 '유럽 오픈' 우승으로 유럽 대륙 제패.

그리고 역시전 세계 상위랭커들을 초청하여 벌인 세계대전 l2e2 세계 대회 우승.

그리고 한국에 와서 이룬 하나로 통신배 스타리그 우승으로 한국 제패.

딱 여기서 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가? 바로 '세계 정복' 혹은 세계 제패. 그렇다. 최초의 그랜드 슬래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도 당시 전 세계적으로 스타 크래프트가 인기를 끌고있던 그 시절. 각 대륙을 접수한 것이다. 이런 큰 대회 말고도 99년 당시 기욤 패트리는 전 세계 각지의 대회를 모조리 쓸어담으면서 최악의 상금 사냥꾼으로 악명을 떨친바가 있다.

2000년 초에 열린 <하나로 통신배 스타리그>. 공식적으로 기욤패트리가 참여한 첫 대회다. 기욤 패트리가 한국에 오게 된 사정은 레더 토너먼트의 종료. 그리고 북미 프로게임리그 PGL의 종료 등 세계각지에서 스타 크래프트의 인기가 식어간 탓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여전히 최고의 인기를 끌고있다는 소식을 듣고 짐을 싸들고 한국에 정착할 목적으로 강림을 하였던 것이다. 자 여기서부터 베일에 쌓여있던 '기욤 패트리'의 플레이가 공개되기 시작하였는데 엄재경 해설위원이 평가하는대로 하나의 컬쳐쇼크 수준이었다고 말 할수 있었다.

당시 한국 프로게이머들의 플레이는 전형적인 빌드싸움. 교과서적인 플레이. 틀에 박혀있는 모습등으로 평가하는데 (이기석 선수가 초창기에 전술의 기초를 보여주긴 했었다.) 기욤 패트리는 현재의 스타 크래프트처럼 실시간으로 변하는 플레이. 심리전. 전략, 전술, 그리고 컨트롤 부분에서 지금의 스타 크래프트 경기체제를 보여주면서 순식간에 한국을 장악하였다.

즉 당시 기욤의 플레이는 신 문명의 혜택을 받지못한 한국 유저들에게 신 문물을 전도하는듯한 모습이라고 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부분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쉽게 말해 스타 크래프트는 고정된 게임이 아니라 언제든지 변 할 수 있고 전술과 지형에 활용에 따라 판도가 달라지는 전략 게임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가르쳐준 모습이라고 할까?

그렇기에 현재 전략가의 계보를 따질 때 '기욤 패트리'가 최초의 전략, 전술가로 지칭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당시같은 시대의 프로게이머이자 전 KTF 매직엔스의 코치였던 박현준님의 언급을 보면 더욱 쉽게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박현준의 언급 -

다른건 몰라도 기욤선수는 정말 대단했죠. 그 어느시대의 최고의 게이머들보다 월등한 실력을 보여줬었습니다. 지금 프로게이머 랭킹 1위와 2위는 비슷한 실력이라고 보면 되지만 그 당시 기욤과 열판해서 두세판 이길 선수는 없었습니다. 그 당시 나름대로 그 누구보다 잘한다고 생각했던 저도, 기욤에게 대부분의 스킬을 배웠습니다.

당시 분명히 세계적인 한축을 담당했던 한국 프로게이머들이 결국 '기욤 패트리'의 벽을 넘지 못한 이유가 있었던것이다. 그렇기에 숱한 경쟁자들을 따돌리며 '세계 최강'으로 올라섰던것이다. 당시 국내 프로게이머와의 역량은 정말 너무도 크게 차이가 났던 것이다.

하지만 천부적인 센스와 천재적인 감각.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기욤 패트리에게도 몰락은 찾아왔다. 여타 이유보다 당시 기욤 패트리의 시대를 경험한 유저였다면 공감할 이유. 바로 '극도의 게으름' 덕분이다. 당시 모든 부분에서 최고의 역량을 보여준 기욤 패트리 였지만 연습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게으른 천재의 대명사이기도 했다.

하루 연습 시간이 많아야 1~2시간에 불과하며 결승전같이 중요한 날에도 연습은 커녕 나이트에서 놀다가 와서 하는 등 극도의 게으름이 뭔지 잘 보여주는 일화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본인 스스로 자초했다고 할까? 물론 이 같은 게으름을 보인 이유도 있다. 역시 당시 프로게이머였던 박현준님의 언급을 한번 들어보자.

박현준의 언급 -

기욤이 한국에 와서 보여준 모습들 대부분의 경기들은 거의 준비가 되지 않은것들이었습니다. 한국 생활에 재미를 느끼면서, 2년여를 거의 연습하지 않았죠. 한국게이머들이 기욤을 따라 잡은것은 기욤이 스타에 손을 놓은 약 1~2년 후입니다.

자 여기서 알 수 있는것. 실질적으로 기욤 패트리는 스타를 하긴 했지만 진지하게 생각한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재능은 너무나 아쉬웠지 않는가? 박현준님의 언급에서조차 한국게이머들이 기욤을 따라잡았던 것은 스타크래프트를 사실상 거의 그만두다시피한 시기부터였다고 한다. 기욤 패트리 역시 2년전쯤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그때는 스타 크래프트가 이토록 오래가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갈 줄 알았다면 열심히 했었을것이다.

기욤 패트리의 인터뷰 내용 中

하지만 여기서 필자는 아무리 이유가 그렇다고 하더라고 이런 부분에서는 옹호해줄 생각은 없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프로의 세계에서 치열한 승부근성이 반드시 필요하고 노력 역시 반드시 따라와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스스로 자초한것은 기욤 패트리의 명백한 잘못이다. 그리고 2001년 6월 대망의 LAST 1.07이 열린다.

이 대회는 온게임넷 역사상 유일하게 유료 입장을 받았으며 동시에 슈퍼 파이트 형식으로 연 최초이자 마지막 매치였다. 매치는 기욤 패트리 VS 임요환. 이 대회가 있기 전에 한빛 소프트배 스타리그에서 초 대박 결승 매치로 기대되었던 기욤 VS 임요환의 매치가 기욤의 4강 탈락으로 좌절되자 마련한 매치였다.

이 대회에서 임요환은 기욤패트리에게 3:0의 압승을 거두면서 공식적으로 자신의 시대가 열렸음을 알린다. 이렇게 LAST 1.07을 끝으로 2년 6개월간의 기욤패트리의 시대는 마무리되었으며 임요환이 또 다른 전설의 행보를 시작한다.

하지만 처참하게 기욤 패트리의 왕조는 그렇게 끝이 났지만 당시에 세계를 석권한 유일한 프로게이머였고 아마추어, 오프라인, 배틀넷, 프로게이머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일하게 최강자를 증명하였고 세계 최강이라는 타이틀 달 수 있는 유일한 프로게이머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프로게이머의 수준을 확실하게 올려둔 공로는 정말 무시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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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전성기 스타크래프트1 게이머였던 기욤 패트리에 대한 글입니다.

스타1은 1998년 발매되어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게임입니다. 2001년에도 인기가 있었지만 그 전보다는 못했고, 그 이후부터는 거의 한국에서만 한정된 인기였지만 국민게임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하나의 문화였습니다. 다만 2007년부터는 스타 자체의 인기도 줄고 2011년에 팀들이 해체되고 리그도 축소되면서 2012년에 프로 E스포츠로서는 문을 닫게 되죠. 물론 이후에도 아프리카tv에서 ASL이 계속 열리고 있지만 공식 리그로 쳐주지는 않습니다. 엄연히 롤이 현재 최고 인기 게임이고요.

하지만 스타1은 게임방송이 스폰서가 붙고 돈이 된다는 점을 보여준 게임 중 하나입니다. 프로게이머 상금 자료 홈페이지인 ' https://www.esportsearnings.com/ ' 를 통해 상금 기준으로 스타1과 퀘이크라는 FPS 게임이 초창기 E스포츠 시장에 최고점을 기록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흔히 임요환을 스타1 초대 강자로 알고 있지만 기욤 패트리라는 이전 최강자가 있었습니다. 스타1이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있었을 때 최강으로 군림했고, 임요환이 그를 꺾으면서 최강자로 등극하게 되었죠. 임요환의 상징성과 해외 평가가 높은 게 스타1의 제패를 한국으로 가져오면서 E스포츠 최강국의 이미지를 각인시켰다는 점일 것입니다. 이는 페이커와 SKK 멤버들(임팩트, 벵기, 피글렛, 푸만두)가 시즌3 롤드컵에서 우승하면서 한국 롤의 시대를 열은 것과 비슷하죠.

임요환도 양대리그 체제가 늦게 갖춰져서 손해를 본 경우지만 기욤은 그보다도 더할 것입니다. 임요환은 그래도 양대리그 기준 3번 우승을 경험했지만 기욤은 전성기 끝자락에 생긴 스타리그 우승 1회만 공식 우승만 인정받고 있죠. 심지어 기욤은 E스포츠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에 등록되어있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기욤의 커리어는 절대 무시받을 수 있는 레벨이 아닙니다.

 

리퀴피디아에서는 북미 게임 대회였던 1998년의 PGL 시즌3를 최초의 스타크래프트1 대회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래더 토너먼트도 있지만 어뷰징 논란이 심각하고 상금 규모도 현격한 차이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인정해주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 대회에서 기욤은 시즌3 3위를 기록합니다.

그리고 1999년 기욤은 PGL 시즌4 우승 등으로 본격적으로 최강자의 길을 걷습니다. 그 해 상금 1위를 기록하죠. 당시 스타1판이 상금 헌터 식으로 진행되었기에 더더욱 가치가 높습니다.

위에서 보면 1999년 E스포츠 대회가 나열되어 있는데 CPL이나 Desecent 대회는 스타1이 다른 게임 대회고, KBK 마스터즈는 당시 한국 게이머들만 참여했었던 대회로 추정되고, 래더 토너먼트는 어뷰징 논란이 심했습니다. 나머지 대회들 중 기욤은 PGL 시즌 4 우승, 스포츠 서울 컵 준우승, 블리자드 월드 챔피언십 우승, l2e2 인비테이셔널 대회 우승을 기록했습니다. 스타리그 전신 대회인 99 PKO 대회에는 참여하지 않았고요. 그야말로 출전한 대회에 대부분 우승, 적어도 준우승을 기록했습니다. 더군다나 기욤은 유럽 파리 오픈 대회에서도 우승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저 사이트에는 누락되어 있어서 미처 기록되지 않은 커리어도 꽤 될 것입니다.

다음 해 그는 하나로통신배 스타리그에서 강도경을 누르고 우승을 기록했습니다. 프리첼배 스타리그에서는 8강에서 떨어졌지만 스타리그 왕중왕전에서도 국기봉을 이기면서 우승했습니다. 그러나 WCG 2000에서는 조기에 탈락하고, 다음해 스타리그에는 장진남에게 4강에서 떨어져서 3위를 기록했습니다. 2002년에도 겜tv 대회 준우승, 2003년 WCG에 3위를 기록하지만 그는 임요환에게 패권을 넘겨준 다음부터 최강자의 자리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명백히 최강자 위치에 있었음은 물론, 당시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4차례나 거머쥐었습니다. 잡대회를 빼더라도 PGL 시즌 4 우승, 스포츠 서울 컵 준우승, 블리자드 월드 챔피언십 우승, l2e2 인비테이셔널 대회 우승, 하나로통신배 스타리그 우승은 분명히 수십 명의 내로라하는 게이머들이 경쟁했었고 높은 상금이 걸린 대회에서 기록한 커리어였습니다. 여기에 홍진호가 인정 못 받아서 지나치게 평가 절하되는 스타리그 왕중왕전 우승과 포디움 커리어인 PGL 시즌 3 3위, 한빛소프트배 스타리그 3위도 있습니다. 당시 기록이 남지 않았던 대회도 있을 거라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실로 어마어마한 커리어 보유자입니다. 물론 임이최나 후대의 이제동, 이영호에 비하면 부족하겠지만 그 이외의 선수들과 비교해볼만은 합니다. 단순 1회 우승자들과는 확실히 격이 다르고요. 사견으로는 역대 스타1 게이머 중 양대리그 3회 우승자 라인인 김택용과 박성준 다음 가는 선수였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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