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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며,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을 접하길 원하는 1인입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며 주기적으로 헌혈하는 헌혈자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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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3)
명나라가 한 세기도 안 되어 무너질 뻔한 역사, 토목의 변과 북경 공성전(14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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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이라트와 북원

 

   오이라트는 알타이산맥 근처에 살던 부족이었습니다. 몽골 서북쪽 끝에 살던 산림 부족이었죠. '오이라트'라는 단어가 몽골어로 '숲의 사람들'을 뜻하기도 합니다.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세우자 13세기 초 그에게 복종했습니다. 오이라트의 지도자들은 몽골 제국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4세기 후반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과 서달과 상우춘의 북벌로 원나라가 무너지고 명나라가 비상했습니다. 오이라트의 족장들은 새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명나라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1368년 수도가 명나라에게 넘어가자 원나라의 11대 황제 혜종(토곤테무르)가 이끄는 잔존 세력은 북쪽 몽골 고원으로 피해서 북원으로 존속했습니다. 북원은 세력이 축소되었지만 계속 명나라와 다투었습니다. 1388년 북원의 3대 황제 천원제(토구스 테무르)는 명나라에게 패퇴하고 수도 카라코룸으로 오다가 예수데르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예수데르는 '조리그투 칸'이라는 이름으로 북원 대칸의 직위에 올랐지만 북원 황제의 칭호까지 이어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대칸과 황제, 두 칭호 중 대칸의 이름은 남았지만 북원 황제의 계보는 20년 만에 끝난 것입니다.

 

오이라트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북원의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과 울제이 테무르 칸의 초상화

   오이라트와 북원은 장기간 대립했습니다. 조리그투 칸이 막 대칸에 올랐을 때 오이라트는 내부에서 권력 이양이 진행 중이라 그를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북원의 내부 사정은 뒤죽박죽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상 부족 연맹이 되어서 내부에서도 죽고 죽인 것이죠. 북원의 대칸들 중 조리그투 칸부터 델베그 칸까지 7명의 대칸이 즉위했지만 평균 재위 기간은 4년도 안 될 정도로 혼란했습니다. 북원의 엘베크 칸 부터 북원과 오이라트는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1399년 엘베크 니굴세그치 칸은 오이라트와의 전쟁에서 전사했고, 1412년 울제이 테무르 칸도 오이라트의 지도자 마흐무드에게 붙잡혀서 살해당했습니다. 오이라트는 서쪽 몽골 고원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2. 비상하는 오이라트 부족

   오이라트 부족들과 동쪽 몽골 부족들은 계속 대립했습니다. 명나라는 둘 사이를 이간질하고 분열시킴으로써 이이제이의 방향을 취했습니다. 오이라트는 울제이 테무르 칸을 생포하여 처형했던 마흐무드라는 부족 지도자 시대에 본격적으로 비상했습니다. 그는 델베그 칸을 꼭두각시 칸으로 만들기도 했죠. 1416년 마흐무드가 죽고 아들 토곤이 오이라트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토곤은 오이라트의 4부족을 연합시켜서 스스로 타이시라는 사령관의 이름을 칭했습니다. 토곤 타이시 시대에 오이라트는 몽골 초원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북원의 아다이 칸과의 대결에서 완승하면서 남은 북원의 보르지긴 왕가 세력을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었죠. 토곤 타이시의 아들 에센에 이르러서 오이라트는 최전성기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1439년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고 아버지가 진행했던 영토 확장 사업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몽골 초원을 완전히 통합시켰고, 서쪽으로는 발하시 호수를 끼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만주, 북쪽으로는 바이칼 호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 영토의 일부를 빼앗는 위업도 달성했습니다.

 

에센 타이시 초상화

 

   3. 토목의 변 발발

   이제 주변국들 중 오이라트를 이길 수 있는 건 남쪽의 명나라뿐이었습니다.

   시작점은 무역 문제였습니다. 영락제는 1406년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을 통한 무역을 허용했습니다. 명나라는 마시(馬市), 즉 말을 파는 시장을 만들고 말과 가축 등을 수입하면서, 대신 비단을 필두로 한 의류와 식량 등을 수출하였습니다. 하지만 영락제 시절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정통제 시대에 조공 사절단 규모가 60배 가까이 커지면서(50명 -> 3,000명) 부작용이 심각해졌습니다. 오이라트 상인들은 말을 팔면서 말 숫자와 금액을 속였고 주변 위구르의 상인들까지 가세해서 밀무역도 벌어졌습니다.

  이 문에 경제적으로 막심한 손해를 입은 명나라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정통제가 총애하는 환관 왕진이 앞장서서 오이라트와의 무역을 제한시켰고 말 가격도 오이라트가 제시한 가격의 20%만 지급했습니다. 화가 난 에센은 병력 2만 명을 이끌고 1449년 지금의 산시 성을 침공했습니다.

 

옛날 에센 타이시가 공격한 산시 성 지역입니다. 수도 북경과의 거리도 가까웠죠.

 

토목의 변을 기록한 지도입니다. 파란색이 오이라트(+북원) 공격 방향이고 붉은색 방향은 당나라입니다.

   명나라의 방어선은 오이라트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오이라트군은 군사적 요충지인 대동(위에서 오른쪽 지도의 DATONG)을 손에 넣고 동쪽으로 빠르게 진군했습니다. 이에 정통제는 기록상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을 나와서 에센 타이시와 맞섰습니다. 그러나 고작 2만의 군대에게 명나라의 대군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했습니다.

   명나라의 졸전은 이 50만 대군이 형편없는 오합지졸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애당초 병력이 과장되었을 게 뻔하고, 물론 정예군도 꽤 포함되었지만 잡병이나 귀족과 문신들까지 포함된 거품이 가득한 병력이었습니다. 심지어 황제 다음의 지휘관이라는 자가 앞에서 말한 환관 왕진이었습니다. 애당초 정통제는 주변에서 직접 진군하지 말아달라고 간언했는데 왕진이 부추겨서 나선 것이었습니다.

   무능한 지휘관이 이끄는 병력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오이라트의 기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도망쳐서 토목보라는 요새(지금의 허베이 성 장자커우 시)에 도망치긴 했지만 금방 포위당했습니다. 토목보에는 물이 부족해서 버틸 수도 없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시켰고, 결국 정통제는 포로로 잡혔습니다. 대륙을 통일한 제국의 황제가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힌 끔찍한 일이라는 의미로 이 사건을 '토목의 변'이라고 부릅니다. 오이라트의 시각에서 보면 대첩이고 대승이겠지만요.

   4. 북경 공성전

  명나라 조정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황제는 물론 상당수의 조정 대신들도 죽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패닉 상태에 빠진 많은 대신들이 남경으로 천도해야 산다고 주장했지만 병부시랑 우겸은 강력한 반대 의견으로 이를 막았습니다. 그는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송나라의 예를 못보았느냐!", "수도는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을 버리고 어찌 살길 바라는가?", "북경은 천리이므로 반드시 사수하여야 한다!"라는 말로 간신히 뜯어 말렸습니다.

 

새롭게 황제가 된 경태제
포로로 사로잡힌 정통제

   남아 있는 우겸과 조정 대신들은 정통제를 태황제로 부르고 그의 동생 주기옥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이렇게 경태제가 즉위했습니다. 그리고 남경과 각 도시로부터 엄청난 숫자의 병력과 군수물자를 북경으로 집중시키고 요새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명나라의 존속 걸린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한편 에센 타이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만큼 엄청난 야망을 품었습니다. 명나라를 손에 넣을 생각으로 정통제를 앞세워서 항복하라는 언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우리는 이미 황제를 새로 추대했다는 강경한 태도와 함께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분노한 에센 타이시는 각 유목민족을 총동원한 10만 대군으로 북경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22만의 대군이 북경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9개의 성문에는 수많은 진지가 건설되어 있었고, 우겸과 지휘관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겸은 "선봉이 물러서면 후위가 선봉을 참수할 것이요, 병졸이 장군을 버리고 도망치면 그 역시 참수할 것이요, 장군이 병졸을 버리고 도망친다면 그 또한 참수할 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북경 공성전에 나선 명나라 지휘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덕승문(德勝門) : 병부시랑 우겸, 무청백 석향(石享), 부총병 범광(范廣), 무흥(武興) 등

안정문(安定門) : 도독 도근(陶瑾)

동직문(同直門) : 광녕백 유안(劉安)

조양문(朝陽門) : 무진백 주영(朱瑛)

서직문(西直門) : 도독 유취(劉聚)

부성문(阜成門) : 진원후 고흥조(顧興祖)

정양문(正陽門) : 도지휘 이단(李端)

숭문문(崇文門) : 도독 유득신(劉得新)

선무문(宣武門) : 도지휘 양절(楊節)

   여기에 남쪽 외성인 중도성(中都城)의 창의문(彰義門)에는 우첨도어사 왕횡(王竑)이 이끄는 도독 모복수(毛福壽), 고례(高禮)의 군대가 수비했고, 북경성 내부에는 도독첨사 왕통(王通), 좌부도어사 양선(楊善), 병료급사중 정신(程信)이 배치되었습니다.

   1449년 10월 11일, 오이라트의 공격으로 공성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우선 창의문을 노렸지만 선봉대만 수백명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오이라트군의 앞에은 지난 번 토목의 변과 차원이 다른 우주방어선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명나라는 강력한 대포와 화약을 배치했습니다.

 

   명나라의 화력에 놀란 에센 타이시는 잠깐 공격을 중단했습니다. 이틀 뒤에 화기를 쓸 수 없을 것만큼 비가 내리자, 만 명의 병력으로 덕승문 쪽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우겸은 진지 지붕이 있는 곳에 이미 포병대를 배치시켰고. 오히려 에센의 동생을 포함한 오이라트의 지휘관들까지 잃는 패배만 입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격노해서 여러 성문을 계속 공격했지만 포탄과 화살만 날아왔습니다. 명나라 지원군이 속속들이 북경에 도착했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10월 15일에 퇴각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오이라트로 돌아온 뒤에도 정통제를 송환하는 대가로 뭔가 얻어내려고 했지만 명나라는 협상에서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무 대가 없이 1450년 정통제를 명나라로 돌려보냈습니다.

   5. 그 이후 정치상황과 북경 공성전의 의의

   경태제는 돌아온 형 정통제를 남궁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경태제 파와 정통제 파로 나뉘었고, 경태제는 더욱 강경하게 나가기 위해 1452년 황태자였던 정통제의 아들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을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했습니다. 그러나 경태제의 아들은 다음 해에 병으로 사망하고 경태제 본인까지 몇 년 뒤 병에 걸려 끙끙 앓고 말았습니다.

   기회를 노린 정통제 파는 1457년 쿠데타를 일으켜 경태제를 폐위시키고 옛 황제 정통제를 재차 황제의 자리로 올렸습니다. 이 사건을 '탈문의 변'이라고 부릅니다. 경태제는 병이 악화되어 얼마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복위한 황제는 예전처럼 '정통'이라는 연호를 버리고 '천순'이라는 연호를 썼습니다. 천순제는 지난날 경태제를 세운 우겸을 처형시켰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유였죠. 우겸은 담담하게 처형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문무에 밝았고 청빈한 인물이라 재산을 몰수했는데도 가진 보물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겸을 처형한 건 쿠데타를 일으킨 장수들이 부추긴 것이 컸고, 천순제도 우겸을 죽인 걸 크게 후회했습니다.

명나라를 구했으나 숙청당한 병부시랑 우겸

   한편 에센 타이시는 1452년 동몽골의 황족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 타이순 칸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자신을 공격하자 바로 진압하여 살해했고, 황족들 중 어머니가 오이라트 출신이 아니라면 모조리 죽였습니다. 그는 동몽골의 기록, 문서, 족보까지 거의 대부분 불태웠습니다. 이듬해 그는 타이순 칸의 뒤를 이은 아크바르진 칸까지 죽인 다음 스스로 대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타이시라는 칭호에 만족하지 못한 에센은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몽골 부족들은 칭기즈 칸의 직계 후손 만이 대칸에 오를 수 있었던 규율을 깨뜨린 에센을 향해 대대적인 반란을 개시했죠. 대혼란 상태에서 그는 재위한지 1년 만에 부하의 손에 죽었습니다.

   에센의 죽음 이후 오이라트 부족도 분열되었고, 동몽골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났습니다. 오이라트는 부족으로서 존속했지만 한때나마 강성했던 오이라트 제국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북경 공성전에서 에센 타이시가 승리했다면 명나라는 건국한지 80년 만에 남북으로 분열되거나 멸망하는 결과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또다시 유목민족이 중국 대륙의 중원을 정복했을 것이고, 동아시아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우겸의 업적을 통해 리더 한 사람에게 모든 걸 기대하는 맹신은 착각이겠지만, 뛰어난 리더로 인해 크게 발전하는 경우는 미래에도 계속 나올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영문위키 토목의 변( https://en.wikipedia.org/wiki/Tumu_Crisis )

나무위키 토목의 변( https://namu.wiki/w/%ED%86%A0%EB%AA%A9%EC%9D%98%20%EB%B3%80 )

도서 <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

위키백과 오이라트부 (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9D%B4%EB%9D%BC%ED%8A%B8%EB%B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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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대전은 확실히 세계사 흐름을 바꿔놓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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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 사진에서 파란색이 전진이고 노란색이 동진입니다.

  383년 11월 벌어진 비수대전은 전진의 100만 대군과 동진의 8만 명이 맞선 전투였죠. 심지어 서역으로도 10만명의 원정군을 더 보냈다고 합니다. 물론 이건 기록상에 나오는 기록이고, 실제 전진의 병력은 3분의 1도 안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4세기 후반 전진의 군주 부견은 대륙 통일을 거의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370년 전연을 정복하고, 북벌로 전진과 맞섰던 환온이 죽자 역공을 가해서 한중을 비롯한 서쪽의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378년에도 동진이 가진 양양 영토를 가져갔죠. 핵심이었던 화북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과거 삼국지의 촉나라 땅까지 손에 넣으면서 전진과 동진의 격차는 압도적이었습니다. 반면 동진이 가진 남쪽 영토는 개발이 아직 안 된 곳이 너무 많았죠. 당시 두 나라의 국력 격차는 삼국지의 위나라와 오나라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비수대전이 벌어진 강력한 원인은 위대한 재상이었던 왕맹이 375년 죽은 게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군대를 이끌고 전연을 평정하고, 부견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호족들을 정리하면서 최전성기 동진을 이끌었던 대단한 인물이었죠. 내정도 탄탄했고요. 왕맹은 죽기 직전 "동진을 도모하지 말고, 내치에 집중하시고 선비족과 강족을 멀리하고 때가 되면 제거하십시오"는 유언을 남깁니다. 왕맹이 죽자 부견은 하늘이 왜 그를 이렇게 빨리 데려가냐고 원통해했습니다. 왕맹은 부견 휘하의 선비족의 모용수와 강족의 요장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맹이 죽고 대략 7년이 지나자 부견은 거대한 병력을 동원할 마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회수 정벌에서 동진의 군대에게 막히는 일도 일어나고, 더 이상 소규모의 병력을 통한 점진적인 정복에 싫증이 난 것인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내와 아들들, 신하들과 스승으로 모시던 스님들까지 부견을 말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맹이 멀리한 다음 숙청하라고 간언했던, 선비족 출신의 명장이었던 모용수가 찬성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전진의 기세가 막강했습니다. 운성이 모용수에게 떨어지고, 수양성이 부융에게 떨어지고, 수춘성 근처까지 전진의 군대가 들이닥쳤죠. 그 다음 비수를 사이에 두고 거대한 전진의 대군과 한참 적은 동진의 군대가 맞섰습니다. 동진의 총사령관 사현은 대군을 조금 뒤로 후퇴시킨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부견은 의심했지만 우선 제의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후퇴시켰습니다. 설사 동진의 거짓말이었고 뒤를 공격한다고 해도 바로 역습해서 섬멸시키겠다고 계획했죠.

   그러나 부견의 몰락은 시작되었습니다. 부견이 군대를 뒤로 이동시켰는데 후속 부대에게 그 이유를 제대로 명령내리지 않았습니다. 전진의 대군은 혼란에 빠졌고, 심지어 겉으로는 전진에 항복했으나 부견을 제대로 섬길 마음이 없었던 주서라는 지휘관이 "전진이 패배했고 동진이 이겼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서 대군이 순식간에 붕괴되었습니다.

   그 때 동진의 기병이 비수를 도하해서 뒤를 급습했습니다. 지리멸렬한 대군으로 부견의 계획은 실행할 수 업섰고, 전진의 병사들은 살 길을 찾아 도망갔습니다. 부융은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사망했고, 부견도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남은 전진의 병력도 동진군의 공격에 패퇴했습니다. 호위병도 없이 혼자 도망간 부견은 모용수의 군대와 접촉해서 전진으로 돌아갔습니다. 부견이 직접 비수대전에서 거느리던 87만의 원정군 병력 중 제대로 수습할 수 있었던 병력은 10만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비수대전은 부견의 입장에서 참담하게 끝났습니다. 역사에 남을 참패 이후 전진은 분열의 길로 추락하죠. 왕맹이 경고했던 이민족 출신의 모용수는 후연을 건국하고, 요장은 후진을 건국하고, 모용홍도 서연을 건국했습니다. 중국 역사는 또다시 분열의 역사와 마주했습니다. 다만 모용홍은 오래 가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죽고 그의 동생 모용충이 서연을 이어받았습니다.

 

   서연의 군대는 장안성을 포위했고, 부견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서쪽으로 도주했으나 요장에게 잡혀서 포로가 되어버립니다. 과거 신하였던 요장에게 부견은 385년 살해되고, 전진도 394년 멸망했습니다. 비수대전이 벌어지고 2년 만에 부견이 죽고, 11년 만에 사방의 반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망한 것입니다.

   부견이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게 패인이고, 너무 많은 병력을 잃은 것도 컸습니다. 부견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이 전쟁은 재상 왕맹만 살아있어서 말렸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참사였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계속 소규모 병력으로 손해를 크게 줄일 수도 있었겠죠. 이 말년의 큰 실책만 아니었어도 부견의 이름은 더욱 위대하게 남았을 것입니다. 만약 통일에 성공했다면 6세기 후반 수나라의 통일을 200년 정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진은 세계사의 위대한 제국이자 패권국으로 엄청난 칭송을 받았을 것입니다. 4세기가 끝나길 시기라면 로마가 동서로 갈라졌을 때라 동시대 중국 통일 왕조는 당대 압도적인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는 의의가 있었죠. 사산 왕조와 굽타 왕조도 만만치 않은 국가였지만 통일 중국 왕조의 국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겠죠.

   물론 당시 전진이 통일했으면 고구려가 위험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한국인으로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전쟁이라는 역사가, 잘하다가 한 번의 실패만으로도 몰락하거나 시대의 패배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삼국지의 원소도 관도대전 이전까지 전쟁에서 전승이었고 조조보다 훨씬 강한 세력을 구축했으나 관도대전의 대패로 이미지가 너무 평가절하 되어있는 것처럼요. 왕맹 같은 훌륭한 신하의 존재가 군주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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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와 전쟁의 역사, 747년~751년의 고선지의 서역 원정과 아바스vs당나라의 탈라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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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를 간략하게 그린 지도

  1. 8세기 초반 실크로드 무역과 서역 세력

  중국 왕조는 한나라 때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서쪽과 무역을 해왔습니다. 중국 - 타클라마칸 사막 - 파미르 고원 - 중앙아시아 초원 - 현재 이란 지역 - 지중해까지 닿는 어마어마한 무역로였습니다. 중국에서 만든 비단, 도자기 등의 물품과 양잠업, 제지술 등의 기술이 서방으로 넘어갈 만큼 동서양의 경제와 문화가 오고 가는 통로였습니다.

  그러나 실크로드 무역은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파미르 고원은 험준했고 타클라마칸 사막 은 너무 넓어서 관리하기에 극악의 난이도였습니다. 주변의 사막, 초원, 산지로 둘러싸인 그 길에 여러 세력이 있었습니다. 당나라로서는 상인들이 문제없이 무역에 종사하도록 저들을 억제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중국 왕조를 적대하는 거대한 강대국이 무역로를 가로막으면 실크로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죠.

  740년대 당나라는 실크로드의 무역이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토번 제국은 사방으로 세력을 넓혀나갔고 중앙아시아의 서역 통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파미르 고원 주위에는 수십 개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토번은 그들 중 실크로드의 심장부에 있는 ‘소발율’이라는 나라의 국왕에게 토번 공주를 왕비로 맞이함으로써 동맹을 맺었고, 파미르 고원에 있는 나라들 대부분이 토번에게 귀속되었다고 합니다.

  당나라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개가운, 정인완 같은 여러 절도사를 보내서 소발율과 주변 국가들을 당나라의 영향력에 두려고 했지만 토번이 그들을 지원하는 바람에 모두 실패했죠. 하지만 당나라 현종은 실크로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선지의 원정로

  2. 고선지의 서역 원정

  747년, 당나라의 고선지는 왕에게서 1만 명의 병사를 받아서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는 토번의 기습을 피해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기점으로 더욱 북쪽에 위치한 천산산맥을 가로지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긴 행군에 대비하기 위해 1만의 병사들은 각각 말에 타면서 식량과 무기를 운반했습니다. 그렇게 병사 1만 명과 말 1만 필은 목이 타들어 가는 사막과 얼음이 가득한 고원을 넘어가며 힘든 원정을 계속했습니다.

  고선지와 당나라군은 100일간의 원정을 이겨내고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동쪽에 도착했습니다. 병사들에게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하게 한 뒤, 고선지 파미르 고원의 험한 산맥 안에 있는 ‘연운보’라는 토번의 요새의 공략에 착수했습니다.

  고선지는 부대를 4천, 4천, 3천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서 세 방향으로 연운보를 점령하기로 계획했습니다. 높은 언덕을 끼고 있는 연운보에 토번군 1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선지가 토번이 예상하지 못한 원정길로 오는 바람에 토번군은 당나라군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한 나절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연운보 기습에 성공하고, 토번군 5천명을 죽이고 1천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말 1천 필과 의복, 식량, 병기 등의 전리품도 획득했죠. 고선지는 소발율국의 수도 아노월성을 향해 원정을 계속했습니다.

  고선지는 재차 소발율과 토번이 예상하지 못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힌두쿠시 산맥에 위치한 탄구령을 넘기로 결정한 것인데, 여기도 항상 얼음이 있을 만큼 춥고 산소가 희박한 고지대였습니다. 탄구령은 지금의 파키스탄 북부의 다르코트 고개로 자그마치 해발 4,700m가 넘었습니다. 절벽을 오르는 상행길도 목숨을 건 행군이었지만 하행길 역시 너무 험했습니다. 고개를 내려가는 도중 몇몇 병사와 말이 떨어져 죽는 사고가 빈번해지자 병사들은 더이상은 못 간다고 고선지에게 호소했습니다. 이 때 소발율국의 주민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나라군이었습니다. 고선지는 진즉에 20여 명의 병사들을 미리 앞으로 보내서 아노월성 주민으로 꾸미도록 명령했고, 지금 나타나도록 꾸민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주민들이 눈에 보이자 목적지가 멀지 않다며 사기가 올랐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덮인 내리막길을 통과했습니다.

  한편 소발율국의 왕은 동맹국 토번의 힘만 믿고 당나라군을 피해서 아노월성 안에만 있었습니다. 고선지는 토번 편에 있는 추장들을 죽이고, 병사들에게 토번과 서역을 잇는 등나무로 만든 절벽다리를 끊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긴 절벽다리를...

 

당나라군이 파괴해서 토번군의 길이 끊겼습니다.

  그때 마침 토번의 구원군도 동맹을 구하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아슬아슬한 시간에 당나라군은 다리를 끊는데 성공했고, 토번군의 길은 막혔습니다.

 

서기 750년경 아시아 세력 지도, 황색이 당나라고 녹색이 아바스입니다.

 

   3. 원정에서의 연승, 그러나......

   이렇게 고선지의 원정은 성공했습니다. 병력을 크게 잃지 않고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북부, 우즈베키스탄까지 당나라의 영향 아래에 두었습니다. 기록상으로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72개국이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선지는 소발율국 점령 이외에도 몇 년 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던 당시 석국이라는 나라도 정벌했습니다. 서쪽의 이슬람 왕조와 동쪽의 당나라 중 어느 쪽에 붙을까 고민하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점점 당나라로 향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석국 정벌에서 터졌습니다. 고선지는 석국의 수도에 있는 청년들을 모두 노예로 삼고 노약자들을 학살했습니다. 왕궁은 물론 백성들의 집까지 철저하게 약탈했습니다. 심지어 당나라로 압송된 석국의 왕은 현종에게 처형당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국가들은 왕이 항복했는데도 살해당했다는 사실과 고선지가 죄없는 백성들을 잔혹하게 억압한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아바스와 당나라 사이에 벌어졌던 탈라스 전투

  4. 탈라스 전투(751년, Battle of Talas)

  아바스 왕조는 분노한 중앙아시아의 국가들과 연합해서 당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지하드 이븐 살리흐라는 장군이 아바스군을 이끌었고, 탈라스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고선지는 아바스 제국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군과 ‘카를룩’이라는 유목민족의 부대와 함께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751년의 이 전투에서 양측의 병력 규모는 확답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우선 수십 만을 동원했다는 설은 과장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견입니다만 고선지의 병력은 3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살리흐의 아바스군은 이와 비슷할 것으로 보이나 연합한 중앙아시아 병력까지 연합하면 3만 몇천 명 정도로 약간 앞설 것으로

  전투는 5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양측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도중 당나라 편에 있었던 카를룩의 군대가 배신하면서 아바스군으로 돌아서는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내부가 분열되고, 외부에 살리흐가 이끄는 연합군이 함께 공격해오자 고선지는 병사들 태반을 잃었습니다. 퇴각하는 길에도 지형 때문에 험난해서 이동이 더뎠고, 쫓아온 연합군에 의해 또다시 많은 병사가 죽었습니다. 고선지는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탈라스 전투의 진형. 노란색이 당나라, 파란색이 당나라->아바스로 전향한 유목민족 카를룩, 초록색이 아바스 병사들입니다. 아바스와 카를룩이 당나라를 협공하는 모양새입니다.

 

  5. 이후 고선지의 최후와 탈라스 전투의 의의

  패전 이후 고선지는 절도사 직책에서 물러나고 다시는 원정을 이끌지 못합니다. 다른 군사 작위는 유지한 채로 조정에서 계속 일했습니다. 예전에 토번의 가르친링에게 패배한 당나라 장수들은 신분 자체가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인 일로 여겨집니다. 이는 고선지가 세웠던 공로가 커서 현종이 용서해준 것이나, 탈라스 전투가 총력전까지는 아닌 만큼 조정에서 피해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훗날 고선지는 안사의 난 시기 안록산에 맞서서 당나라 정부군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감군 변영성이 고선지는 군자금을 착복하고 있다며 모함했고, 분노한 현종은 고선지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고선지는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혼란의 시대에 더 이상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고, 끝내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고선지의 석국 원정에서 벌어진 끔찍한 억압 행동은 명백히 실책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서역 국가들이 당나라에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케를룩 군대의 전향도 고선지의 끔찍한 행동이 다소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고선지는 전쟁의 안목은 밝았지만, 정치에서는 까막눈이었습니다. 탈라스 전투 이후 실크로드 주변의 국가들이 이슬람 왕조의 편이 되었습니다. 종교와 문화도 이슬람의 영향을 받게 되죠.

  패배한 당나라나 승리한 아바스나 탈라스 전투로 국력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바스 왕조도 탈라스 전투를 '몰락한 왕조(우마이야)의 지지자들이 당나라의 원조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한 전투'라고 기록할 만큼 그저그런 규모의 전투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당나라가 이겼다고 가정해도 병력과 보급 문제로 아바스에게 결정타를 먹이는 건 불가능했고, 뒤에 벌어진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가 서역의 영향력을 유지할 가능성도 낮았습니다.

  다만 동서 문명이 교류하는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당나라의 제지기술자들이 아바스의 포로가 되어서 제지기술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제지기술로 아바스의 영토 곳곳에 제지 공장이 세워져서 이슬람 문명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술은 훗날 유럽에까지 전해졌습니다. 또한 탈라스 전투는 중국 왕조와 이슬람 왕조의 최초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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