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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며,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을 접하길 원하는 1인입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며 주기적으로 헌혈하는 헌혈자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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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리우스 (3)
[중동사]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황혼의 영광(부제: 야르무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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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ovisionnew.tistory.com/384

 

[중동사] 초기 이슬람에서 무함마드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승리(~634년)

https://neovisionnew.tistory.com/59 [전쟁사]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악연(Main: 530년의 다라 전투) 1.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476년, 오토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

neovisionnew.tistory.com

  예전에 썼던 글에서 계속 이어지는 글입니다.

 

배교 전쟁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X자 표시로 된 곳이 모두 전투지입니다.

 

  1. 배교 전쟁(릿다 전쟁, Ridda wars)

 

  634년 다마스쿠스 공성전 도중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사망하고 우마르가 다음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우마르는 지도자에 오르자 마자 바로 할리드의 총사령관 직책을 박탈했습니다. 정황을 살펴보면 우마르가 할리드를 개인적으로 싫어했다는 설이 유력하고 필자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 잠깐 몇 년 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과거 무함마드가 죽고 아라비아 반도는 이전처럼 분열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무함마드가 지도자 활동을 하기 전 수십 개 부족이 난립하여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들지 못했죠. 유목생활을 했던 그들은 서로 다른 신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메디나와 메카 같이 몇 안 되는 도시들이야 산업이 발달되어 있었지만, 다른 부족들은 떠돌아다니며 서로를 약탈했습니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열심히 포교했고, 한 때 적대적이었던 2대 칼리프 우마르와 명장 할리드도 무함마드를 따랐죠. 하지만 무함마드가 죽을 당시에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아라비아 부족들과 전쟁을 벌여서 진압하거나 반강제적으로 개종시켰기에, 기존 부족들은 복수심을 가질만 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만 무함마드를 따랐죠. 무함마드가 죽고 이 때다 싶어 여러 부족들이 봉기했는데 이를 '배교 전쟁'이라고 합니다.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반란이 일어났고 그들은 메디나까지 위협했습니다.

 

 

  아부 바크르는 직접 두키사를 점령하고 할리드에게 출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할리드는 부자하에 도착했는데, 자신이 가진 6,000명의 군사에 비해 상대 병력이 15,000명이나 되자 묘책을 내어 상대 지도자 툴라이하와 일기토를 벌입니다. 가볍게 승리한 뒤 사기가 떨어진 적들을 향해 전투를 벌여 부자하를 회복했습니다. 그는 죽지세로 자파르까지 도달했고, 다음은 부타였습니다.

 

  부타에 몇몇 부족들 중 '말리크'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무함마드가 신뢰했던 인재 중 하나로 지금으로 치면 국세청장의 직책에 있었습니다. 말리크는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세금을 성실하게 메디나로 운송했는데 그가 죽고나자 부족들에게 세금을 돌려준 뒤 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할리드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싸우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시 세금을 징수하여 메디나로 보냈고, 본인은 동쪽의 사막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할리드에게 사로잡혀서 처형당했습니다.

 

  아부 바크르는 반역을 했더라도 이슬람의 율법에 따른다면 관용을 베풀라고 당부했습니다. 말리크는 여전히 본인은 이슬람 신자이며 주변의 적대적인 세력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고 호소하지만 할리드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도 열지 않고 말리크를 죽이고 심지어 그의 아내였던 라일라 빈트 알 민할과 바로 결혼했습니다. 메디나의 주요 인사들은 이것 때문에 말리크를 죽였냐며 그를 비난했습니다. 우마르도 할리드를 쫓아내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아부 바크르는 처벌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할리드는 야마마까지 진군하여 하니파 부족 지도자인 무사일리마까지 물리쳤습니다. 이 야마마 전투에서 적들이 4만 명이나 될 만큼 최대 고비였는데 할리드는 3분의 1도 안 되는 병력으로 승리했습니다. 이렇게 할리드는 반 년도 안 되어 온전한 아라비아 통일을 이루었고, 배교 전쟁의 일등공신이었습니다. 다만 우마르 눈 밖에 나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2. 북진하는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

 

  그렇게 할리드는 다마스쿠스 공성전 - 마라즈 알 데바르 전투 이후 해임 소식을 들었습니다. 총사령관 직책은 다음 계급 순서이자 공성전에 참여한 아부 우바이다에게 넘어갔습니다. 할리드에 비해 우바이다는 온건파에 속하는 인물이라, 정복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하지만 우바이다도 할리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뛰어난 인물이라 이슬람의 연전연승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성향이 달라도 우바이다는 할리드를 존경하고 있었고, 전쟁터에서 항상 그의 조언을 들으면서 정복했습니다. 우마르도 할리드를 아예 물러나게하거나 처형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할리드는 예전 만큼은 아니지만 계속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었고 기병대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생소한 도시 이름과 위치는 이 지도에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636년 5월까지 할리드를 비롯한 이슬람 장군들의 진격로입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 입장에서는 과거 사산조와의 전쟁처럼 시리아를 상실하는 목전에 놓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할리드는 635년 1월 펠라(Pella)라는 도시를 손에 넣고 이슬람 군대는 양쪽으로 나뉘었습니다. 아므르와 슈르하빌이라는 장군들은 남쪽의 팔레스타인으로, 할리드와 우바이다는 북쪽의 에메사로 진군했습니다.

 

  이 때 헤라클리우스는 안티오크에 있었습니다. 적들이 다마스쿠스를 벗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테오도라스라는 장군에게 다마스쿠스를 되찾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테오도라스는 휘하 군대를 둘로 나누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을 먼저 보내고 후속 병력을 추가하는 식으로 편성했습니다. 후속병력은 샤나쉬라는 부하에게 맡기고 본인은 선봉대와 함께 달렸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할리드의 대처가 더 빨랐습니다. 그는 우바이다에게 허락을 받아 친위 기병대를 이끌어 다마스쿠스에 가장 먼저 도착했습니다.

 

  심지어 할리드는 비잔티움 측에 스파이를 심어서 적들이 어느 방향으로 오는지 간파했고, 적들이 다마스쿠스 성 수비대 가까이 오자 후방을 급습하여 또다시 승리했습니다. 테오도라스는 전사했으며, 한편 우바이다도 똑같이 샤나쉬를 죽이고 추가로 오는 적 병력을 격파했습니다. 오히려 할리드와 우바이다는 다시 병력을 합쳐서 북쪽의 바알벡을 점령했습니다.

 

 

  3. 에메사 공성전(Siege of Emesa)

 

  헤라클리우스는 에메사로 전령을 보내 이슬람과 휴전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는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는데 병력을 모으고 있었고 우선 수비부터 신경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바이다는 제의를 받아들이고 1년 동안 휴전을 맺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에메사의 시장을 이용하는 등 조용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증원군이 칼키스, 즉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우바이다는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즉시 에메사를 공격했습니다.

 

  635년 12월, 에메사 공성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할리드는 성 밖의 병력을 공격했고 우바이다는 4개의 성문에 모두 병력을 배치하여 에메사를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해자로 둘러싸인데다 공성무기도 변변치 않아 서로 화살로 공격할 뿐 포위전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추운 겨울이 끝나고 에메사를 지키던 하비스(Harbees)라는 장수는 636년 3월 5,000명의 병력으로 이슬람 군의 한 쪽을 공격했습니다. 포위망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지만 할리드가 기병을 이끌고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그 다음날 회의에서 우바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할리드에게 의견을 구합니다. 할리드는 거짓 후퇴를 제안했고 우바이다는 실행에 옮깁니다. 다시 하루가 지나 새벽에 이슬람군은 남쪽으로 도망쳤습니다. 하비스는 다시 기병이 주력인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슬람군의 뒤를 쳤습니다. 그 순간 할리드는 기병을 둘로 나누어 추격해온 적들의 양쪽 측면으로 역공했습니다. 하비스는 전사했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려던 비잔티움군의 패잔병도 대부분 살아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남아 있던 에메사의 시민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항복했습니다. 이 공성전 과정에서 비잔티움군은 4,9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이슬람군은 200명 ~ 300명 남짓이었습니다.

 

  4.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반격

 

지금도 시리아 지역의 저 강(Yarmuk)은 야르무크 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헤라클리우스는 10만 대군이 넘는 병력을 보냈습니다. 이 때 이슬람군은 우바이다와 할리드, 슈르하빌, 아므르, 야지드 등 여러 장수들의 휘하 병력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각개격파를 꾀한 것입니다. 하지만 할리드가 포로로 잡은 비잔티움 보급 부대를 심문해서 이 소식을 들었고, 그는 우바이다에게 하루빨리 주변의 모든 병력을 집결시켜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다마스쿠스와 에메사를 빼앗기는 출혈을 감수하고 이슬람 군대는 하나로 뭉쳤습니다.

 

  늦지 않게 이슬람의 유능한 장수들이 자비야(Jabiyah) 지역에 모일 수 있었고, 우바이다는 할리드에게 임시로 총사령관 직책을 돌려줍니다. 우마르도 6,000명의 지원군을 보내서 힘을 실어줍니다. 할리드는 고민 끝에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야르무크 강과 가까이 있는 동쪽 평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전투 도중 우마르의 지원을 더욱 신속하게 받을 수 있었고, 할리드가 자랑하는 기병 활용도 근처에 흐르는 강들이 자연적으로 장벽을 형성해 동로마 군을 몰아넣기 용이한 구조였고 할리드의 장기인 기병을 활용하기에도 괜찮은 조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 야르무크 전투(Battle of the Yarmuk)

 

  636년 8월 15일, 서아시아의 패권을 결정짓는 역사적인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노년의 나이라 안티오크에서 대기했고 그의 동생이자 장군인 테오도르 트리티리우스가 총지휘를 맡았습니다. 비잔티움 편으로 가산 왕국의 잔당, 슬라브족, 아르메니아군이 함께했습니다.

 

이슬람군은 좌익 -> 우익까지 야지드 -> 아부 우바이다 -> 슈르하빌 -> 아므르 이 순서로 주요 지휘관이 있었고, 비잔티움 군은 우익 -> 좌익까지 그레고리 -> 다이르잔 -> 자발라 -> 카나티르 순서입니다.

 

 

  이슬람을 총괄하는 건 할리드였고 세부적으로 중앙은 아부 우바이다와 슈르하빌, 좌익은 야지드, 우익은 아므르가 맡았습니다. 3만 ~ 4만의 이슬람 군대는 10만에 달하는 비잔티움 대군과 마주했습니다. 비잔티움의 총사령관은 테오도르였고 좌익에 슬라브족 지휘관 카나티르, 우익에 부사령관 중 하나인 그레고리, 중앙에 아르메니아 사령관 바한과 부사령관 다이르잔, 가산 왕국의 왕인 자발라가 있었습니다. 또 비잔티움의 진열은 10km에 달할만큼 길었습니다.

 

  비잔티움 총사령관은 테오도르였지만 기록을 보니 2인자인 바한이 부하들에게 직접적인 지시는 더 많이 내린 것 같습니다. 양군 휘하 지휘관들의 대진표는 야지드 vs 그레고리 / 아부 우바이다 vs 다이르잔 / 슈르하빌 vs 자발라 / 아므르 vs 카나티르 이렇게 됩니다.

 

 

  양군 모두 보병 뒤에 기병을 배치했습니다. 당연히 비잔티움은 중기병을, 이슬람은 경기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다만, 할리드는 유격으로 움직이는 기병대를 따로 편성해서 최후방에 배치했습니다. 이들은 할리드가 이끌던 정예 경기병 병력인 '모바일 가드'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할리드는 바한과 만나 대화했습니다. 바한은 거만한 태도로 할리드를 맞았습니다.

 

  바한: "음식과 황금을 줄테니 이 땅에서 물러가라"

 

  할리드: "우리는 배고프지 않고 필요한 것도 없다. 너희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평화로울 것이다. 이를 거절한다면 전쟁 뿐이다."

 

  바한: "우리의 땅을 차지하려는 자들은 모두 패배했다."

 

  바한은 비잔티움 군대는 사산조를 이겼다는 걸 암시했습니다. 협상은 간단히 결렬되었고 남은 건 살육이었습니다.

 

  전투 첫째 날은 무력이 강한 장수들의 일기토와 소규모 교전으로 서로 큰 피해 없이 끝났습니다.

 

 

회색으로 칠해진 기병대가 할리드가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유격 기병대입니다. 아므르의 병력을 지원합니다.
할리드는 바로 좌익의 야지드를 구원합니다.

 

  둘째 날, 테오도르와 바한은 이슬람군이 아침에 기도하는 시간을 노려서 아침에 적들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할리드는 첫째 날 밤 전방에 작은 초소 기지를 만들어서 기습에 잘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은 양쪽 측면에 거센 공격을 가했고, 중앙은 충분히 묶어둘 수 있는 정도의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슬람군의 중앙군이 측면에 신경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잔티움 좌익을 맡은 카나티르는 이슬람군 우익에 있던 아므르의 군대를 상대했습니다. 아므르는 보병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하고 뒤에 있는 기병대에게 반격을 지시했습니다. 할리드는 늦지 않게 아므르의 기병에게 카나티르의 왼쪽을, 자신의 유격 기병대에게 카나티르의 오른쪽을 타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카나티르가 이끄는 비잔티움 좌익 군대는 후퇴했습니다. 이렇게 할리드는 우익의 위기를 수습했지만, 반대쪽 형세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그레고리의 비잔티움 우익은 야지드의 이슬람 좌익을 그들의 베이스캠프까지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베이스캠프에 있던 병사들의 부인들이 갑자기 천막을 해체했습니다. 천막을 지탱한 나무 막대로 무장하면서 당신들은 불명예와 파멸을 맞을 것이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야지드와 병사들은 잃어버린 사기를 되찾고 다시 비잔티움에게 달려갔습니다.

 

  한편 할리드는 기병 유격대의 일부를 빼내어 비잔티움 중앙을 기습했고, 이 결과로 비잔티움의 우익 중앙을 맡았던 다이르잔이 전사했습니다. 그는 남은 기병대로 야지드와 함께 좌익의 위기도 수습했습니다.

 

  셋째 날 전투 역시 비잔티움의 공세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좌익에 힘을 실어서 이슬람의 우익 군대부터 붕괴시킨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병력차로 비잔티움이 밀어붙이는 듯 했지만, 이번에도 할리드는 큰 피해없이 후퇴하면서 유격 기병대로 하여금 따라오는 적들에게 측면 공격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번에도 테오도르와 바한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할리드는 비잔티움의 좌익 중앙이 들어오자 3방향에서 공격하여 상황을 반전시켰습니다.

 

  전투 넷째 날이자 636년 8월 18일, 바한은 어제의 방식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카나티르와 자발라에게 병력을 더욱 실어주면서 반드시 이슬람의 우익을 붕괴시키도록 했습니다. 할리드는 아부 아부이다와 야지드에게 각각 맡은 전선에서 전선이 합쳐지거나 길어지지 않도록 신경쓰라고 당부했습니다.

 

  좌익 중앙에 있던 자발라의 병력이 깊숙히 들어오고, 자발라와 카나티르의 병력이 서로 약간 멀어졌습니다. 이 때 할리드는 유격 기병대를 둘로 나누어서 자발라의 양쪽 측면을 동시에 공격했습니다. 아부 우바이다도 호응해서 정면을 공격했고, 이렇게 이슬람의 우측 상황은 안정되었습니다. 다른 이슬람 장군들도 끈질기게 버티면서 불리한 상황을 이겨냈습니다.

 

다섯째 날, 바한은 할리드에게 휴전 서신을 보내고 이슬람 장군들이 모여서 회의했습니다.

  이제 다섯째 날입니다. 비잔티움이 압도적인 병력차에도 누적된 피해는 오히려 훨씬 더 많았고, 바한은 할리드에게 사자를 보내서 며칠 동안 휴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할리드는 회의에서 몇몇 장군들이 휴전을 받아들이자는 건의를 물리쳤습니다. 지금이 바로 결정적인 타격을 줄 때라면서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할리드는 기병대를 집결시켜서 8천 명의 기병을 한 부대로 모았습니다. 그 중 500명을 한 장수에게 맡깁니다. 야르무크 강의 다리이며, 적들이 퇴각할 것으로 예측되는 경로를 끊으라고 지시했죠. 그 장수는 밤에 귀신같이 이동해서 다리를 점령했습니다.(위 지도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

 

  여섯째 날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할리드는 모든 병력에게 총공세를 퍼부으라고 명령했고 본인은 어제 모은 8천의 기병대를 이끌었습니다.

 

 

  우선 카나디르가 이끄는 좌익 적들부터 무너뜨렸습니다. 기병을 둘로 나누어서 적들의 보병과 기병을 신속하게 소멸시켰습니다.

 

 

  비잔티움이 다급하게 남은 기병을 집중시켰습니다. 할리드는 적 기병이 재정비하기 전에 기병과 기병 맞대결을 벌였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패배한 비잔티움의 기병대는 북쪽으로 도망쳤고 자발라의 병력도 포위당해서 무너졌습니다.

 

 

  더 이상 비잔티움은 전투를 지속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할리드는 북쪽을 차단했고 남은 비잔티움 보병들은 서쪽으로 황급히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줄 알았던 다리 퇴각로에는 500기의 이슬람 기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잔티움군은 포위되자 다리 아래의 절벽으로 몸을 던지다가 바위에 부딪혀서 사망하고,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다가 이슬람 기병의 추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만 전장이 워낙 광활해서 도주에 성공하는 병사도 많았지만, 이 전투 끝에 비잔티움은 10만 중 5만의 병사를 상실했습니다.

 

  테오도르, 바한, 그레고리는 전사했고, 자발라만 간신히 살아남아서 도망쳤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참패 소식을 듣자 몹시 침통했습니다. 많은 자금을 썼음에도 돌아온 건 정예병을 거의 잃는 대참사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성십자가 등 중요한 유물을 빼내라고 지시했습니다.

 

  6. 할리드의 마지막 원정

 

 

  할리드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637년 4월, 몇 달 동안의 공성전 끝에 기독교의 성지이자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한 이 도시를 손에 넣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소프로니우스 주교의 항복 문서는 우마르가 직접 와서 전달받았습니다. 우마르는 세금을 내는 대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겠다고 서명했습니다.

 

  우마르는 예루살렘에서 기도를 올리고, 다섯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므르와 슈르하빌은 이집트로, 야지드는 카이세리아로,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는 북쪽으로 나아가라고 임무를 나누었습니다.

 

  할리드는 다마스쿠스를 다시 회복했고, 6월에는 7천 명의 적 수비대를 물리치고 칼키스를 점령했습니다.(하지르 전투, 637년 6월) 이 때 할리드의 망치와 모루 전술과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후방을 타격하여 속전속결로 마무리했습니다. 이 보고를 듣고 평소에 할리드를 싫어하던 우마르도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할리드는 진정한 군사 사령관이다. 알라께서 아부 바크르를 축북해주시길. 그는 나보다 위대한 재판관이었다."

 

  과거 배교 전쟁에서 할리드를 감쌌던 아부 바크르의 판단이 옳았다고 인정한 것이죠.

 

알레포 중심에 있는 거대한 성채입니다. 기원전 16세기 아시리아 때부터 지어진 역사적인 건축물입니다. 다만 시리아 내전 이후로 상당히 파괴되었습니다.

  4개월 뒤 알레포까지 점령했습니다. 알레포는 비잔티움이 차지한 레반트 지역의 주요 도시였고, 알레프를 지키던 비잔티움 지휘관도 야전에서 할리드에게 패배하자 백기를 들었습니다. 그 뒤 우바이다와 함께 아자즈를 점령했고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있는 안티오크로 향했습니다.

필자가 화살표로 표시한 강이 오론테스 강입니다.

 

  이 때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남은 2만 ~ 3만의 병력을 모아서 불구대천의 원수와 직접 승부를 벌였습니다. 오론테스 강을 두고 벌어진 전투였는데 자세한 과정은 찾아보기 힘들어서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9개의 아치형 돌다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전투라고 해서 '철다리 전투(Battle of the Iron Bridge)'라고 전해집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만 명의 병력만 잃고 안티오크에서 물러났습니다. 반면 할리드는 1만 7천의 병력이 거의 온전했습니다. 알레포와 안티오크, 두 도시에 깃발을 꽂을 때 수비대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을 보장해서 큰 병력 소모 없이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의 수비대는 콘스탄티노플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할리드는 멈추지 않고 터키 중부의 키질이르마크 강으로 이동했습니다. 심지어 아르메니아도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머지 않아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위험해질 판국이었습니다. 결국, 황제는 레반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7. 퇴장하는 알라의 검

 

  헤라클리우스는 타르수스 등 중요한 요새에 병력을 철수시켜 비무장지대로 두었고, 우마르도 이 완충지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마르는 아부 우바이다에게 시리아 총독 자리를 주고 점령한 지역의 통치를 굳건하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후 한동안 이슬람 세력의 확장은 터키가 아닌 동쪽과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방향이 되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배를 타고 시리아에서 물러나면서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잘 있거라. 나의 속주, 시리아에 긴 작별을 고한다. 그대는 이제 이교도의 땅이 되었구나. 오 시리아여, 그대에게 평화가 함께하거라. 원수의 손에 그대가 얼마나 아름다운 땅이 될 수 있을까."

 

  그는 641년 2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리드의 이야기는 638년에 끝났습니다. 우마르가 할리드를 해임한 것인데, 명분으로 삼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할리드가 말년에 터키 원정에서 페르시아 출신의 한 시인을 만났습니다. '아쉬아'라는 시인에게 1만 디르함(대략 은 30kg)를 줬는데 우마르는 그것이 국고에서 나온 돈이 아닌가 조사했습니다. 할리드는 내 개인 돈이라고 주장했고 곁에 있던 우바이다도 그를 변호했습니다. 여담이지만 할리드의 마지막 원정에서 이슬람이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고, 이 때 원정군 모두가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끝내 우마르는 이걸 명분 삼아 할리드를 메디나로 불러들였습니다.

 

  할리드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런데 우마르는 그대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수긍했고 할리드를 인정했습니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 너는 해냈다. 그 누구도 네가 해낸 것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위업은 인간이 성취한 게 아니다. 모두 알라의 뜻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할리드가 해고당한 것에 분개했고 실제로 몇몇 장수들은 할리드에게 우마르에게 반기를 들어야 합니다라는 강력한 주장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할리드는 우마르와 이슬람에게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우마르는 주위에서 반발하는 여론이 많자 그 누구도 우상화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해명했습니다.

 

  "나는 할리드를 원망하거나 그가 흠결이 있어서 해고한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할리드를 미화하고 잘못된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승리를 위해 위대한 알라보다 그에게 의지할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사람들이 모든 승리를 만드는 건 알라라는 사실을 인지했으면 한다. 이 땅에 그릇된 예언자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4년 뒤 할리드는 자신이 공성전으로 승리한 에메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기 직전 그는 전장에서 죽지 못한 걸 한탄했습니다. 같은 해 사산 왕조 전역에서 우마르는 할리드를 다시 사령관으로 임명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에메사, 현재 홈스인 시리아의 도시에는 할리드를 기념하는 모스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름도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모스크'.

 

 

  할리드가 이슬람 편에 서서 활동한 건 10년이 안 되지만 그 길지 않은 시기의 강렬함은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무함마드 사후 반짝으로 끝날 뻔한 이슬람을 반석 위에 세우고, 이제 막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이슬람 세력으로 거대 제국인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을 상대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사산조 정벌에 나서는 633년부터 비잔티움 전역이 끝나는 638년까지 6년이 채 안 되는 역사에서 못해도 30번이 넘는 전투에서 언제나 승리했습니다.

 

  중요한 전투 때마다 열세의 전력일 때도 많았고, 거의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전투를 치렀을 때도 있었고, 사막 수백 km를 원정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은 할리드에게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포위전, 수공, 공성전, 기습, 공성전, 일기토 등 다양한 방식으로 승리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비잔티움과 사산조 간의 오래 지속된 전쟁도 훗날 이슬람이 승리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특히 사산조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죠. 그리고 할리드와 함께한 아부 우바이다, 아므르 이븐 알 아스 같은 훌륭한 이슬람 장군들의 조력도 빼놓을 수 없겠죠.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생 이슬람과 두 제국 사이의 국력(특히 비잔티움)은 까마득했다고 생각합니다. 할리드와 맞선 적들이 전쟁 경험도 많았다는 점도 그를 높이 평가할 수 있고, 특히 할리드는 그 대단한 헤라클리우스마저 꺾었습니다.

 

  저명한 미국 군사학자 조지 나프지거는 할리드의 대표적인 영광인 야르무크 전투를 역사의 분기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야르무크 전투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전투임에도 인류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이며, 비잔티움의 군대가 승리했다면 현대 세계는 인식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변화했을 것이다."

 

  8. 출처

도서

버나드 루이스, 『이슬람 1400년』, 까치글방(2010)

김승철, 『포용의 정복자 이슬람』, 좋은땅(2014)

아이라 M. 라피두스, 『이슬람의 세계사 1』, 이산(2008)

 

유튜브

<Battle of Yarmouk, 636 AD (Part 1/2) Storm gathers in the

Middle East> (https://www.youtube.com/watch?v=vL33R5F2Pkg)

<Battle of Yarmouk, 636 AD (Part 2/2) Storm gathers in the

Middle East> (https://www.youtube.com/watch?v=_4YePBWh0-w)

 

영문위키

<Siege of Emesa>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Emesa

<Battle of the Yarmuk>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Yarmuk

<Siege of Jerusalem (636–637)>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Jerusalem_(636%E2%80%93637)

<Siege of Aleppo (637)>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Aleppo_(637)

<Battle of the Iron Bridg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Iron_Bridge

<Siege of Germanicia>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Germani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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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마지막 일전(2)(611년 ~ 628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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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계속 땅을 집어삼키는 사산조 페르시아

 

  헤라클리우스는 지존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포카스가 망쳐놓아도 너무나 망쳐놓아서 제국은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습니다. 즉위하기 전에 이미 에데사(현재 터키 남동부의 샨르우르파)가 넘어가서 만딜리온을 사산조에게 뺏겼습니다. 만딜리온은 성스러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기독교의 성유물입니다. 614년에는 성지 예루살렘마저 함락됩니다.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고 전해지는 성십자가의 일부 조각입니다.

 

  성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박히셨다고 알려진 십자가입니다. '참 십자가'라고 부르기도 하고, 기독교에서 아주 중요한 성유물입니다. 이 성십자가가 예루살렘 점령과 함께 성십자가와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인 사산조 군대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성십자가는 사산조의 기록보관소에 만딜리온과 함께 놓였습니다.

 

  예루살렘 정복과 함께 가까이 있던 가산 왕국도 꼭두각시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산조를 따랐던 라흠 왕국은 아예 흡수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헤라클리우스는 우선 금이나 비단 등 값나가는 것들을 내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상을 시도합니다. 사산조라는 거대한 불길이 비잔티움의 인구와 농지를 계속 잠식하는 걸 진화시키는 게 먼저였습니다.

 

619년경 사산조 제국의 영역은 최대로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호스로 2세는 더 요구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거절합니다.

 

  "우리와 같은 태양을 섬기기 전까지, 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을 포기하기 전까지, 내가 자비를 베푸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자신감이 있을만 했던 게 사산조는 영토를 넓혀나가는 도중 607년 ~ 608년에 있었던 서돌궐의 30만 대군을 재차 막아냈습니다. 그만큼 사산조 페르시아는 양면 전쟁에도 끄떡없을 만큼 당대 최강국이었습니다.

 

 2. 헤라클리우스의 호적수, 샤흐르바라즈

 

예루살렘을 공략하는 샤흐르바라즈와 사산조 군대입니다.

  사산조 진영에는 '샤흐르바라즈'라는 명장이 군대를 탄탄대로로 이끌었습니다. 사실 헤라클리우스라고 더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적들이 시리아 일대와 에데사를 장악했고 다마스쿠스까지 빼앗기자 구원병 6만 8천 명을 이끌고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4만의 사산조 군대와 맞섭니다. 613년 안티오크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사산조의 완승으로 끝났고, 사산조는 건국 400여년 만에 지중해에 처음으로 닿게 됩니다. 이는 비잔티움에게는 이집트에서 터키로 가는 육로가 끊겼다는 걸 의미합니다. 

 

지도에서 빨간색으로 표시한 곳이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카이사레아, 칼케돈 같은 주요 도시입니다. 개전 초기 사산조는 이를 모조리 차지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루살렘 함락과 성십자가가 이제 없다는 소식에 백성들이 침울해하고 있었습니다. 안티오크의 대주교는 살해당하고 예루살렘의 대주교는 포로가 됩니다. 칼케돈에서도 헤라클리우스는 또다시 샤흐르바라즈의 군대를 막지 못했습니다. 사산조의 파상공세가 콘스탄티노플 코앞까지 왔습니다.

 

  샤흐르바라즈는 멈추지 않고 618년 이집트를 공격합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강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합니다. 나일 강이 사산조의 소유가 되면서 비잔티움의 식량 공급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3. 절망적인 상황, 그러나 시작되는 역전의 시나리오

 

  헤라클리우스는 총독 시절 근거지였던 카르타고로 수도 이전을 시도합니다. 비밀리에 콘스탄티노플의 주요 보물을 배에 실어서 카르타고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배는 폭풍우 때문에 부서져서 진실이 세상에 퍼졌습니다. 시민들의 원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세르기우스는 황제를 말립니다.

 

헤라클리우스가 수도를 수호하겠다고 신께 맹세한 성 소피아 성당의 제단 사진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나 다름없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일은 하늘이 황제께 부여한 신성한 의무입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마음을 고쳐먹고 성 소피아(현재 아야 소피아) 성당의 재단에서 다시는 콘스탄티노플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합니다.

 

  한편 샤흐르바라즈가 이집트를 정리하면서 패기만만한 호스로 2세는 헤라클리우스에게 오히려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가장 위대한 신이자 세계의 주인인 호스로가 사악하고 어리석은 노예 헤라클리우스에게 보낸다. 왜 아직도 우리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를 왕이라고 부르는가? 내가 그리스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너는 너의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내 손에서 카이사레아와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를 가져가지 아니한 것이냐? 세상의 대지와 바다는 모두 내가 만든 법에서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이런 내가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파괴하지 못할 것 같은가? 그러나 네가 내게 복종하고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여기로 오면 네 죄를 용서하겠다. 나는 너에게 땅과 포도원과 감람원을 주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너를 바라보겠다. ~~ . 바다 깊은 곳으로 도망갈지라도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손으로 너를 찾아내리라. 신이 너를 구원해주리라는 헛된 소망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요약하면 "이미 대세는 기울었으니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라"라는 메시지입니다. 이런 거 보면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말이 떠오릅니다. 과거에 내전이 벌어졌을 때 마우리키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의 사위가 되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졌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 편지가 반격의 실마리가 됩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사산조가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백성들에게 알리고, 자극을 받은 비잔티움의 시민들은 결사항전에 나섭니다. 이렇게 헤라클리우스는 사산조를 물리치기 위한 세금도 높일 수 있었고, 특히 교회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위에서 나온 세르기우스도 황제에게 교회의 보물을 군자금으로 쓰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부패한 관리들의 봉급을 절반으로 줄이고, 그 중에서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면 막대한 벌금을 매겼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칼케돈의 적들을 노리지 않고 멀리 돌아가서 상륙합니다.

 

  622년 헤라클리우스는 부활절 미사를 끝내고 전면에 나섰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칼케돈의 사산조군과 정면승부하지 않고 일부러 빙 돌아가서 토로스 산맥 근처에 진지를 구축합니다. 여름에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가을에 북동쪽 방향으로 공격해서 사산조의 허리를 끊으려고 합니다. 칼케돈에 있던 사산조군은 많은 병력을 동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집니다. 적들이 매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일부러 후퇴하고 매복한 적들이 가까이 오자 신속하게 정예병과 맞닥끄려서 격퇴시킵니다. 이렇게 헤라클리우스가 샤흐르바라즈를 상대로 첫 복수에 성공합니다.

 

  4. 623년 ~ 626년까지의 비잔티움의 반격

 

헤라클리우스와 대립했던 아바르족 카간의 자세한 이름은 기록이 소실되었는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이 승전을 기점으로 반격의 물꼬가 뚫렸지만, 623년 헤라클리우스는 북쪽의 아바르족이라는 숙제를 풀어야 했습니다. 그는 아바르족의 카간(지도자)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칠테니 다뉴브강 북쪽으로 군대를 물려달라고 부탁했죠. 카간은 직접 만나자고 제안하고 헤라클리우스는 약속된 장소로 향합니다. 하지만 이는 함정이었습니다. 카간은 기병을 동원하여 그를 포로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로서는 다행히 급습에 탈출했지만 협상단의 많은 인원이 아바르족에게 죽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참고 또 참으면서 노미스마 금화 20만 개(자그마치 900kg)과 사생아를 볼모로 보내면서 오로지 사산조와의 전쟁에 칼날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622년부터 헤라클리우스는 미친듯이 서아시아를 휩쓸고 다닙니다.
제가 표시한 1. 카이사레아, 2. 간자크, 3. 티그라노세르타, 4. 사루스 강 전역이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대표적으로 활약한 전장입니다.

 

  이듬해 황제는 사산조와의 캠페인을 재개합니다. 원정 이전에 또다시 호스로 2세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샤한샤는 이제 페르시아 심장부가 공격당할거라는 헤라클리우스의 말에도 콧방귀만 뀝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는 언행일치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위 지도에서 번호로 나타냈지만 우선 카이사레아를 수복하고, 다음으로 사산조 영토로 깊숙하게 들어가 'Ganzak(간자크)'라는 도시에서 호스로 2세의 4만 적군을 상대로 승리합니다.

 

 

현재 잔해로나마 남아있는 아두르 구쉬나스프(Adur Gushnasp) 사원의 잔해입니다.

 

  여기서 십여년 전 기독교의 성지가 더럽혀진 것에 대한 되갚음인 것인지, 조로아스터교의 중요한 사원인 아두르 구시나스프(Adur Gushnasp)를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분노한 호스로 2세는 부하 장군들인 샤힌, 샤라플라칸, 그리고 샤흐르바라즈에게 헤라클리우스를 포위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는 세 방향의 적들이 합치기 전에 샤라플라칸과 샤힌을 차례로 물리쳤습니다. 숙적 샤흐르바라즈가 다른 두 장군의 패장병들과 함께 추격하자 사루스 강에서 조우합니다.

 

현재 터키의 'Saros(영어로 Seyhan)'이라는 강을 두고 625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무승부에 가까운 결과를 냅니다. 이번에는 샤흐르바라즈가 거짓으로 후퇴했고 적들이 다리를 통해 추격해오자 역공으로 비잔티움군의 선봉대를 꺾어버립니다. 하지만 뒷심 부족으로 다리까지는 장악하지 못했고 후위의 군대와 함께 반격해오는 헤라클리우스 상대로 큰 이득을 거두지 못합니다. 전투 끝에 서로 물러났고, 비잔티움군은 북쪽으로 가서 흑해 아래의 트레비존드(Trebizond, 현재 터키의 트라브존)이라는 도시에서 휴식합니다.

 

  5.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성전과 제 3차 사산조 vs 서돌궐 전쟁

 

  시간이 지나 626년 여름이 되었습니다. 호스로 2세는 결정적인 승리만이 비잔티움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바르족에게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자고 제안했고, 그들은 예전의 협약을 깨고 남쪽으로 진군합니다. 여기에 아바르족과 사이가 좋지 않은 슬라브족까지 돈으로 회유해서 포위 작전에 끌어들입니다. 이 와중에 헤라클리우스와 정예군은 아직 소아시아쪽에 있었고, 몰려드는 적들을 막아내는 건 세르기우스 대주교와 수도를 지키던 보누스 장군의 몫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의 위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8만 명 이상의 아바르족 + 슬라브족 + 사산조 군대는 1만 5천 명의 비잔티움군이 있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을 둘러쌌습니다. 하지만 성벽을 공략하려는 궁수들은 성 내부의 투석기에 녹아내렸고, 사산조의 해군은 비잔티움의 해군에 막혀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지 못했습니다. 사산조는 동맹군에게 공성 무기를 지원해줄 수 없었고, 결국 공성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여기서 호스로 2세가 공성전의 패인은 샤흐르바라즈가 못 싸운 탓이라고 판단했는지 '카르다리안(Kardarigan)'이라는 장군에게 샤흐르바라즈를 죽이고 그의 군대를 크테시폰으로 돌려보내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비잔티움군이 가로채고, 헤라클리우스가 샤흐르바라즈에게 이 사실을 전달합니다. 고민 끝에 샤흐르바라즈는 전쟁에서 이탈하여 시리아 북부에 주둔합니다.

 

서돌궐은 비잔티움과의 협공을 감안했는지 캅카스 산맥으로 침공합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호스로 2세가 정치적인 그림을 그렸다면, 이제는 헤라클리우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627년 서돌궐이 사산조를 상대로 3차 침공을 감행합니다. 지난 1차, 2차는 모두 사산조의 승리였고 이란 방면으로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캅카스 지역으로 방향을 다르게 설정합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이미 625년 서돌궐에게 군사적으로 협공을 해준다면 많은 재물을 주겠다고 사신을 보냈습니다. 서돌궐도 사산조 때문에 막힌 비잔티움과 당나라 사이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다시 열고 주도할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지도자 통엽호가한도 "나는 당신의 적들에게 복수할 것이고 당신의 요청에 호응하기 위해 용감한 군대와 함께 올 것입니다"라는 동의의 서신을 보냅니다.

 

  6. 니네베 전투(Battle of Nineveh), 전쟁의 종결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이 니네베 전투 지역이고, 위의 하늘색 화살표는 서돌궐이 남하한 곳입니다.

 

 

  서돌궐군은 캅카스 산맥의 사산조 요새들을 차례로 점령합니다. 여기서 통엽호가한과 헤라클리우스가 만나는데, 기록으로는 통엽호가한이 스스로 절을 하고 헤라클리우스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고 합니다. 기뻐한 헤라클리우스는 비잔티움의 왕관을 그에게 씌워주기도 하며 서로 얼싸안고 동맹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입니다. 또 서돌궐의 지휘관들은 비잔티움에게 비단옷과 보석을 선물받습니다. 잠깐의 합동 작전 이후 헤라클리우스는 서돌궐에게 요새 포위 작전을 맡기고 자신은 남하합니다.

 

니네베 전투에서 승리한 헤라클리우스에 대한 그림입니다. 비잔티움 병사가 들고 있는 목은 아무래도 적 장수 라하자드일 것 같네요.

 

  그는 2만 5천 명 ~ 5만 명의 정병을 이끌고 현재 이라크 쪽으로 공세를 펴립니다. 기원전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니네베'라는 역사적인 도시에서 회전이 일어납니다. 호스로 2세는 라하자드(Rhahzadh)라는 장군에게 막으라고 명령했지만, 병력은 겨우 1만 2천 명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캅카스 쪽 전황도 시원찮았기에 사산조는 니네베에서 전력을 동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라하자드가 평야에서 싸우도록 유도했고, 8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적들의 절반을 죽였습니다. 그는 직접 결투에서 라하자드를 전사시킵니다. 남은 사산조의 병력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다스타기르드를 점령하고 사산조 수도인 크테시폰(Ctesiphon)에 더욱 근접합니다.

 

  비잔티움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티그리스강 동쪽 도시인 다스타기르드(Dastagerd)로 향합니다. 호스로 2세는 손도 못 쓰고 도망쳤고, 비잔티움군은 무난히 입성하여 사산조의 왕궁을 약탈하고 태워버립니다. 다음 목표는 사산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이었지만 사실 헤라클리우스로서도 모험이었고, 그는 사신을 보내 평화를 촉구합니다.

 

  "나는 평화를 쫓고 쫓는다. 나는 페르시아를 불태우는 걸 바라지 않았지만 네가 그걸 강요하게 만들었다. 즉시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를 선택하자. 모든 것을 태우기 전에 이 불길을 끄도록 하자."

 

  이 와중에 사산조의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서 호스로 2세를 몰아내고 그의 아들을 제위에 앉힙니다. 새로운 샤한샤가 된 카바드 2세는 먼저 화친을 요청하고 이라클리오스는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비잔티움은 빼앗은 땅을 돌려받는다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덧붙여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고 포로로 잡힌 군인들을 되찾습니다. 무엇보다 성십자가 등 성유물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7. 에필로그

 

 

개선식에서 헤라클리우스가 직접 성십자가를 들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 그림은 그걸 묘사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630년 3월 21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십자가를 만천하에 보여주는 승리의 개선식을 벌입니다. 시민들은 성십자가를 되찾았다는 기쁨에 기뻐했습니다. 성 소피아 성당에서 성십자가를 안치하는 의식을 벌이고, 훗날 예루살렘에 반환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이 때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도 돌려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샤흐르바라즈가 사산조의 중앙 조정과 따로 놀았기에 명령도 거부합니다. 카바드 2세가 즉위 몇 개월 만에 죽자 헤라클리우스는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페르시아의 왕이 죽었고, 왕좌와 왕국은 너에게 다가왔다. 내가 그걸 너와 네 후손들에게 수여하겠다. 만약 군대가 필요하다면, 네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얼마든지 도움을 주겠다."

 

  샤흐르바라즈는 2년 동안 내부의 몇몇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630년 충성스러운 병사 6,000명과 함께 크테스폰으로 돌격합니다. 아르다시르 3세를 죽이고 스스로 샤한샤에 등극했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헤라클리우스에게 돌려줍니다. 그러나 서돌궐이 마지막으로 약탈하는 과정에서 파견한 10,000명의 병력이 궤멸되는 일이 벌어져서 위신이 추락합니다. 2개월도 안 되어 암살당하고 호스로 2세의 딸인 푸란도흐트가 즉위합니다.

 

 

나무위키에서 퍼온 호스로 2세부터의 샤한샤 계보입니다. 630년 ~ 632년 상황을 보면...

 

  그 뒤로 사산조에는 암살과 반역이 계속됩니다. 샤흐르바라즈의 아들이 즉위하기도 하고, 호스로 2세의 또다른 딸이 즉위하기도 하고, 아예 스스로 샤한샤라고 자칭하는 경우도 있었죠. 이 시기 사산조는 그 옛날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보다도 더한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사산조는 빼앗은 땅을 모두 상실하고 전쟁 이전보다 심각한 상황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병사가 희생되고 막대한 돈만 잃었을 뿐입니다. 632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유일한 샤한샤로 정립이 이루어지지만 추락할 대로 추락한 권위는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사산조에는 호스로 2세를 끝으로 강력한 전제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고, 내부적으로 온전히 단합하지 못한 형편은 나중에 이슬람군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됩니다.

 

샤흐르바라즈에게서 이집트와 시리아를 돌려받고 비잔티움은 포카스 등장 이전의 땅을 대부분 회복했습니다.

 

  사산조에 비해 위기를 극복한 비잔티움은 헤라클리우스 황제에 대한 칭송이 높아졌습니다. 원로원은 그에게 '새로운 스키피오'라는 칭호를 수여했고,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도 "스키피오-한니발 시대 이후로 헤라클리우스가 제국을 구원하기 위해서 달성한 것보다 더 진취적인 시도는 없었다"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헤라클리우스는 진정으로 위대한 황제였습니다. 하지만 말년을 편하게 보내지 못하고 몇 년 뒤 이슬람 세력, 특히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라는 악몽이 그에게는 천추의 한이 되었습니다.

 

  8. 출처

 

  도현신,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서해문집(2019)

 

  수잔 와이즈 바우어,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권』, 부키(2010)

 

  유튜브 <Avar-Slav-Persian Siege of Constantinople 626 (DOCUMENTARY)> (https://www.youtube.com/watch?v=dvKehRDnATM)

 

영문위키 <Heraclius> (https://en.wikipedia.org/wiki/Heraclius)

 

<Shahrbaraz> (https://en.wikipedia.org/wiki/Shahrbaraz)

 

<Byzantine–Sasanian War of 602–628>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E2%80%93Sasanian_War_of_602%E2%80%93628)

 

<Battle of Antioch (613)>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ntioch_(613))

 

<Sasanian conquest of Jerusalem> (https://en.wikipedia.org/wiki/Sasanian_conquest_of_Jerusalem)

 

<Sasanian conquest of Egypt> (https://en.wikipedia.org/wiki/Sasanian_conquest_of_Egypt)

 

<Heraclius' campaign of 622> (https://en.wikipedia.org/wiki/Heraclius%27_campaign_of_622)

 

<Battle of Saru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arus)

 

<Third Perso-Turkic War> (https://en.wikipedia.org/wiki/Third_Perso-Turkic_War)

 

<Siege of Constantinople (626)>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Constantinople_(626))

 

<Battle of Nineveh (627)>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Nineveh_(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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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최후의 일전(1)(572년 ~ 610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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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선 참수를 묘사한 다소 끔찍한 그림이 글 후반부에 나오니 마음의 준비를 부탁드립니다.

  * 할리드와 이슬람의 팽창에 대해 글을 이어나가려다가 비잔티움과 사산조 대립 과정을 빼놓으면 섭섭할 것 같아서 글을 씁니다.

 

572년 소아시아를 기준으로 지도를 공유합니다.(출처: Geacron)

 

  1.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572년 ~ 591년 전쟁

 

  572년부터 591년까지 로마와 페르시아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입니다. 시작점은 사산조가 차지하고 있던 아르메니아 지역의 반란이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이 이 반란을 지원하고 있었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 사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사산조에 충성하는 쪽과 비잔티움에 충성하는 쪽 이렇게 둘로 분열되었습니다.

 

노미스마(다른 이름으로 솔리두스)라는 금화입니다. 순금은 아니지만 금의 함량이 95% 이상이었고 하나에 4.5g의 금이 들어갔습니다.

 

  이 때 예전에 말씀드린 호스로 1세, 즉 사산조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향해서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과거에 벨리사리우스가 활약한 다라 지역을 포위 끝에 점령하고(573년), 시리아에서 비잔티움의 것을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결국 5년 동안 휴전을 맺는 대신에 비잔티움 쪽에서 '노미스마'라는 금화 30,000개(대략 135kg)를 연간 지불하기로 합의를 맺었습니다.

 

호스로 1세의 당시 퇴각로를 지도로 설정해봤습니다.

 

  하지만 이는 터키 남부와 시리아 지역에 한해서 이루어지는 협정이었고, 북부 방면에서는 계속 교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는 비잔티움이 가산 왕국과 동맹을 맺어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었습니다. 호스로 1세의 원정은 터키 전역에서 막히고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잔티움 장군인 유스티니아누스(옛 황제와 동명이인)는 퇴각하는 곳을 끊으려고 했고 그 와중에도 호스로 1세는 현재의 터키 도시인 카이세리(당시 도시 이름 세바스티아)를 공략했다고 합니다.

 

좀 더 넓은 지도로 퇴각로(Caesarea -&gt; Melitene)를 그려봤습니다. 장소는 비잔티움 영토 한복판이었습니다.

 

  약탈하면서 후퇴하는 도중 호스로 1세는 위 지도 상의 말라티아 도시 근처에서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필 유스티니아누스의 비잔티움 군대에게 따라잡혀서 패배해서 말년의 옥의 티를 남깁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576년 12월에 사산조의 영토 안쪽의 캅카스 지역까지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호스로 1세는 이번에는 자신이 불리한 쪽으로 평화협정을 맺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면의 '탐호스로'라는 사산조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가 유스티니아누스의 비잔티움 군대를 패퇴시켜서 영토를 보전합니다. 한숨 돌린 호스로 1세는 다시 남쪽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2. 새로운 샤한샤(사산조의 황제), 호르미즈드 4세의 즉위

 

  578년, 남부 전선에서 약속한 5년 간의 휴전이 끝나자 양쪽은 다시 전쟁을 벌입니다. 그런데 이듬해 호스로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호르미즈드 4세가 즉위합니다. 사망하기 직전 호스로 1세는 재개된 전쟁 초기에 신통치 않자 이를 중단하려고 협상했습니다. 비잔티움은 기나긴 전쟁으로 국고가 거덜나고 있었고, 사산조 역시 지쳐 있었고 백성들과 귀족들 모두가 지쳐있었습니다. 그러나 패기만만한 호르미즈드 4세가 합의에 도달할 뻔한 협상을 중단했고, 비잔티움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전쟁은 비잔티움과 사산조라는 코끼리들의 싸움에 가산 왕국(위 지도의 주황색 영토, Ghassanid)과 라흠 왕국(위 지도의 연한 파랑색 영토, Lakhmid)이라는 늑대들이 각각 보조하고 있었습니다. 580년 가산 왕국이 라흠 왕국에게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다음 해에 비잔티움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티그리스 강까지 도달합니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에 함대까지 만들어서 수륙 양공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어찌된 이유인지 잘만 지원하던 가산 왕국의 지도자 알 문디르 3세가 비잔티움군의 진군 경로를 사산조에게 누설합니다. 이 배신이 원인이 되어 비잔티움의 진격이 막혔고, 사산조와 라흠 왕국이 오히려 공격 태세로 나섭니다. 이상하게도 알 문디르 3세는 적들이 올 때는 다시 마우리키우스와 함께 적들을 막아내고, 그가 후퇴하는 시간을 벌어줍니다. 마우리키우스는 비잔티움 영토 근처까지 가서 병력을 추스리는듯 했지만 국경에 대기하던 페르시아 군대에게 한 차례 패배합니다.

 

  마우리키우스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비잔티움의 황제 티베리우스 2세는 격노하여 알 문디르 3세를 처형시킵니다. 정작 알 문디르 3세는 패배한 건 마우리키우스가 못싸운 책임이라고 반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기록이 간략하게 써져있어 알 문디르 3세가 왜 누설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전의 계획이 틀어지거나(예시 - 정보 누설을 역이용한다거나) 서로 소통이 안 된 모양입니다. 아니면 사산조나 라흠 왕국이 이미 정보를 입수했는데 그가 배신한 것으로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가산 왕국은 미래에 이슬람 세력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비잔티움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산조는 이 기회를 삼아 582년 '콘스탄티나'라는 지역을 공격하지만 마우리키우스가 재정비에 성공했는지 막아내고, 5년 전 호스로 1세를 도와준 탐호스로를 전사시킵니다. 마우리키우스는 그 해에 티베리우스 2세의 사위가 되고 후계자 지명을 받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베리우스 2세가 사망하고 그가 새로운 황제가 됩니다.

 

사산조와 서돌궐(보라색)은 6세기 초반까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릅니다. 비잔티움이나 사산조나 1대1로 싸우는 건 무리였고 다른 적들도 신경써야 했습니다.

 

  3. 사산조의 내전

 

  580년대의 상황은 서로 결정적인 승리 없이 이기고 지는 싸움을 반복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사산조의 '바흐람 추빈'이라는 장군에게서 전환됩니다. 바흐람 추빈은 588년 아무 다리야(Amu Darya) 강을 침범한 서돌궐의 30만 ~ 40만 대군(기록상)을 1만 2천 명의 기병으로 막아낸 명장입니다. 사산조는 호스로 1세 치기에 에프탈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돌궐과 연합한 적이 있었으나 서로 적대 관계로 돌아섰고, 서쪽의 비잔티움까지 수십 년간 양면 전쟁을 치르는 입장에 놓입니다. 다음해 바흐람 추빈은 비잔티움 전선으로 나가서 공격해오는 비잔티움과 승패를 한 번씩 주고 받습니다.

 

바흐람 추빈을 새긴 은화입니다.

 

  바흐람의 패배를 트집잡은 호르미즈드 4세는 평상복을 보내며 지휘관 자리를 박탈한다는 친서를 보냅니다. 그러나 바흐람은 해고 명령에도 버티고 있었고, 격노한 황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한 군대를 보냅니다. 하지만 파견한 군대도 바흐람을 따랐고, 그는 수도 크테시폰으로 돌격합니다. 하지만 600명에 달하는 귀족들 호르미즈드 4세를 폐위시키고 아들이자 새로운 군주인 호스로 2세가 제위에 오릅니다. 전쟁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군주에게 질렸던 귀족들은 앞장서서 반역하여 호르미즈드 4세의 눈을 뽑아버립니다.

 

  야심에 넘쳤던 바흐람은 호스로 2세를 위협하여 샤한샤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위협했습니다. 휘하에 있는 군대에 있는 군대는 바흐람이 훨씬 많았기에, 호스로 2세는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과 함께 수도를 빠져나오고, 비잔티움으로 향합니다. 국경 근처에 도달하자 편지를 보내서 마우리키우스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마우리키우스의 얼굴을 새긴 동전입니다.

  마우리키우스는 끝나지 않는 전쟁을 종결할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호스로 2세에게 비잔티움 군대를 보냈고 크테시폰에서 찬탈자 바흐람을 몰아냅니다. 내전은 2년을 끌었고 바흐람은 서돌궐로 망명을 갔지만 금방 암살당합니다. 

 

지도 속 'ARMENIA'가 구원의 대가로 비잔티움이 가져간 땅입니다.

 

  여기서 비잔티움이 맨입으로 호스로 2세를 도와줬을 리가 없겠죠? 사산조 기준으로 북서쪽의 수많은 변경 도시가 비잔티움으로 넘어갑니다. 또 호스로 2세는 마우리키우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평화 협정과 함께 양국은 실로 오랜만에 전쟁을 멈췄습니다.

 

  4. 없는 살림에 처한 마우리키우스

 

마우리키우스는 다뉴브 강에 긴 전선을 구축했습니다.

 

  사산조 방면의 정세를 매듭 지은 마우리키우스는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을 막아내는데 집중합니다. 그들은 이미 580년대부터 다뉴브 강을 넘어서 제국을 무한정 괴롭혔습니다. 이에 마우리키우스는 강을 따라 견고한 방어선을 형성했습니다. 발칸에 군대가 집중되고 성과가 미미하자 아바르족은 596년경에 서쪽의 프랑크 왕국으로 공격 방향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프랑크도 쉽게 볼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아바르족의 공격은 1년 뒤 재개되었습니다. 비잔티움의 군대는 지쳐 있었고 마우리키우스의 대중적인 인기도 떨어져 갔습니다. 599년에 아바르 족이 비잔티움군 12,000명을 포로로 잡아서 몸값을 요구한 적이 있었는데, 마우리키우스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아바르족은 그들을 모두 죽입니다. 이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는 낮아졌고 백성들의 성토는 높아져 갔습니다. 마우리키우스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는데 전임자 티베리우스 2세가 돈을 펑펑쓰는 사치스러운 생활 등으로 제국의 재정의 국고가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588년에도 병사들의 임금을 4분의 1로 줄인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철회한 적도 있었습니다. 바닥난 군자금 사정으로 마우리키우스는 돈이 드는 적극적인 계획을 실행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602년 11월에 일이 터집니다. 우선 겉으로 비잔티움의 전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보였습니다. 아바스조과 슬라브족은 거의 들어오지 못했고, 마우리키우스는 다뉴브 강 북쪽에 군대를 주둔시킵니다. 이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본래 겨울이면 병사들이 고향으로 귀향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보급품과 여비를 아끼라고 강 건너편에 진지를 짓고 여기서 겨울을 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지도 속의 '콘스탄티노플', '칼케돈', '니케아'라는 도시 위치에 주목하시면 됩니다.

 

  적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추운 나날을 보내라는 요구에 병사들은 들고 있어났습니다. 포카스라는 장군이 병사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병사들을 고무시켰습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반란에 마우리키우스는 가족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칩니다. 마르마라 해를 건너서 '칼케돈'이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호스로 2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10여 년전 나는 페르시아를 도운 일이 있었소. 이참에 이에 대한 보답으로 여기고 비잔티움의 황태자를 보호해 주시오."

 

  황태자 테오도시우스에게 직접 사산조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라고 다급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이미 포카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추대를 끝냈고 장교들과 병사들을 칼케돈으로 보냅니다. 마우리키우스와 네 아들 모두 살해당합니다. 멀리 도망치지 못한 황태자도 니케아에 자객의 습격을 받아서 아버지와 형제들 곁으로 끌려옵니다.

 

마우리키우스(왼쪽)가 처형당하기 직전의 그림입니다. 오른쪽에는 포카스가 있고, 중앙의 목 없는 시체는 마우리키우스의 다섯 아들들인 것 같습니다.
포카스를 따르는 군인들이 마우리키우스와 아들들의 머리를 잘라 효수하는 걸 묘사한 그림입니다.

 

  5. 새로운 전쟁(603년 ~ 628년)

 

  전 황제와 다섯 아들의 머리는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에 효시됩니다. 호스로 2세는 즉시 군대를 일으키고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침입합니다. 심지어 테오도시우스 황태자는 살아있으며 내 군대가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효시된 머리는 가짜라고 말한 것이죠. 실제로 테오도시우스의 머리는 고문에 손상되어 대중들이 판별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지도 수정합니다.) 위 지도는 602년 사산조와 610년 사산조를 나타낸 것입니다. 개전되자마자 밀리기 시작하는 비잔티움을 알 수 있습니다.

 

  포카스는 사악한 폭군이면서도 무능한 군주였습니다. 사산조의 공격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면서 주변의 유능한 장수들을 의심하여 자꾸 숙청했습니다. 특히 나르세스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역사가 테오파네스는 '페르시아 어린이들까지 나르세스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포카스를 인정하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동쪽 국경에서 사산조를 상대로 계속 이겨낸 장군을 회유하지 않고 화형시킵니다.

 

   그 와중에 사산조는 전쟁의 승기를 잡아 아르메니아, 에데사, 카이사레아를 손에 넣습니다. 비잔티움은 외부에는 사산조라는 쓰나미를 맞았고 내부에는 내전 상황에 돌입합니다. 포카스는 정신을 못 차리고 학살과 고문을 계속합니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건 이런 경우를 놓고 하는 말이겠죠.

 

  6. 암군 포카스의 말로, 그러나 풍전등화에 처한 비잔티움 제국

 

  마침내 카르타고의 총독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 사령관 등 포카스에게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합류합니다. 610년 10월 4일 마르마라 해를 통해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도착하는데, 시민들이 포카스를 잡아서 헤라클리우스 앞으로 끌고 옵니다.

 

"그래, 그대가 제국을 이 따위로 다스린 자인가?"라는 헤라클리우스의 질문을 "너가 더 잘 통치하게 해주겠나?"라고 포카스가 대답합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분노했고,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면서도 참회하지 않는 포카스를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화형을 선고하는 헤라클리우스(오른쪽)과 잡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포카스(왼쪽), 그리고 중앙에 화형 처형대가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포카스의 최후는 의견이 다른 것인지 나무위키에서는 오체가 분해되었다고 나오는데, 제가 읽은 책에서는 도시 한복판에서 화형에 처해졌다고 나옵니다. 사로잡힌 포카스와 화형을 선고하는 헤라클리우스의 사진을 올립니다.

 

  막장 지도자는 죽었고 새 시대가 열렸지만 동쪽에는 해일처럼 몰려오는 사산조가, 북쪽에는 아바르족이 있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즉위했지만 경제, 군사, 외교, 안보 모든 면에서 망조가 든 제국을 되살려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7. 출처

 

도현신,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서해문집(2019)

 

수잔 와이즈 바우어,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권』, 부키(2010)

 

유튜브 <The Rise and Fall of the Sassanid Empire>

(https://www.youtube.com/watch?v=Qf2Hm2AP8D8)

 

디비언트아트 <End of Antiquity> (https://www.deviantart.com/amelianvs/art/End-of-Antiquity-451118475)

 

영문위키 <byzantine–sasanian war="" of="" 602–628="">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E2%80%93Sasanian_War_of_602%E2%80%93628)</byzantine–sasanian>

<byzantine–sasanian war="" of="" 572–591="">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Sasanian_War_of_572–591)</byzantine–sasanian>

(https://en.wikipedia.org/wiki/Sasanian_civil_war_of_589–591)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Perso-Turkic_War)

(https://en.wikipedia.org/wiki/Heraclian_revo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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