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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며,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을 접하길 원하는 1인입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며 주기적으로 헌혈하는 헌혈자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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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최후의 일전(1)(572년 ~ 610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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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선 참수를 묘사한 다소 끔찍한 그림이 글 후반부에 나오니 마음의 준비를 부탁드립니다.

  * 할리드와 이슬람의 팽창에 대해 글을 이어나가려다가 비잔티움과 사산조 대립 과정을 빼놓으면 섭섭할 것 같아서 글을 씁니다.

 

572년 소아시아를 기준으로 지도를 공유합니다.(출처: Geacron)

 

  1.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572년 ~ 591년 전쟁

 

  572년부터 591년까지 로마와 페르시아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입니다. 시작점은 사산조가 차지하고 있던 아르메니아 지역의 반란이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이 이 반란을 지원하고 있었고,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 사태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사산조에 충성하는 쪽과 비잔티움에 충성하는 쪽 이렇게 둘로 분열되었습니다.

 

노미스마(다른 이름으로 솔리두스)라는 금화입니다. 순금은 아니지만 금의 함량이 95% 이상이었고 하나에 4.5g의 금이 들어갔습니다.

 

  이 때 예전에 말씀드린 호스로 1세, 즉 사산조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향해서 군대를 이끌었습니다. 과거에 벨리사리우스가 활약한 다라 지역을 포위 끝에 점령하고(573년), 시리아에서 비잔티움의 것을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결국 5년 동안 휴전을 맺는 대신에 비잔티움 쪽에서 '노미스마'라는 금화 30,000개(대략 135kg)를 연간 지불하기로 합의를 맺었습니다.

 

호스로 1세의 당시 퇴각로를 지도로 설정해봤습니다.

 

  하지만 이는 터키 남부와 시리아 지역에 한해서 이루어지는 협정이었고, 북부 방면에서는 계속 교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서는 비잔티움이 가산 왕국과 동맹을 맺어 전황을 유리하게 만들었습니다. 호스로 1세의 원정은 터키 전역에서 막히고 후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잔티움 장군인 유스티니아누스(옛 황제와 동명이인)는 퇴각하는 곳을 끊으려고 했고 그 와중에도 호스로 1세는 현재의 터키 도시인 카이세리(당시 도시 이름 세바스티아)를 공략했다고 합니다.

 

좀 더 넓은 지도로 퇴각로(Caesarea -> Melitene)를 그려봤습니다. 장소는 비잔티움 영토 한복판이었습니다.

 

  약탈하면서 후퇴하는 도중 호스로 1세는 위 지도 상의 말라티아 도시 근처에서 강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하필 유스티니아누스의 비잔티움 군대에게 따라잡혀서 패배해서 말년의 옥의 티를 남깁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576년 12월에 사산조의 영토 안쪽의 캅카스 지역까지 군대를 주둔시켰습니다. 호스로 1세는 이번에는 자신이 불리한 쪽으로 평화협정을 맺어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면의 '탐호스로'라는 사산조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가 유스티니아누스의 비잔티움 군대를 패퇴시켜서 영토를 보전합니다. 한숨 돌린 호스로 1세는 다시 남쪽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2. 새로운 샤한샤(사산조의 황제), 호르미즈드 4세의 즉위

 

  578년, 남부 전선에서 약속한 5년 간의 휴전이 끝나자 양쪽은 다시 전쟁을 벌입니다. 그런데 이듬해 호스로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호르미즈드 4세가 즉위합니다. 사망하기 직전 호스로 1세는 재개된 전쟁 초기에 신통치 않자 이를 중단하려고 협상했습니다. 비잔티움은 기나긴 전쟁으로 국고가 거덜나고 있었고, 사산조 역시 지쳐 있었고 백성들과 귀족들 모두가 지쳐있었습니다. 그러나 패기만만한 호르미즈드 4세가 합의에 도달할 뻔한 협상을 중단했고, 비잔티움으로서도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전쟁은 비잔티움과 사산조라는 코끼리들의 싸움에 가산 왕국(위 지도의 주황색 영토, Ghassanid)과 라흠 왕국(위 지도의 연한 파랑색 영토, Lakhmid)이라는 늑대들이 각각 보조하고 있었습니다. 580년 가산 왕국이 라흠 왕국에게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다음 해에 비잔티움의 장군 마우리키우스는 티그리스 강까지 도달합니다. 그는 유프라테스 강에 함대까지 만들어서 수륙 양공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어찌된 이유인지 잘만 지원하던 가산 왕국의 지도자 알 문디르 3세가 비잔티움군의 진군 경로를 사산조에게 누설합니다. 이 배신이 원인이 되어 비잔티움의 진격이 막혔고, 사산조와 라흠 왕국이 오히려 공격 태세로 나섭니다. 이상하게도 알 문디르 3세는 적들이 올 때는 다시 마우리키우스와 함께 적들을 막아내고, 그가 후퇴하는 시간을 벌어줍니다. 마우리키우스는 비잔티움 영토 근처까지 가서 병력을 추스리는듯 했지만 국경에 대기하던 페르시아 군대에게 한 차례 패배합니다.

 

  마우리키우스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비잔티움의 황제 티베리우스 2세는 격노하여 알 문디르 3세를 처형시킵니다. 정작 알 문디르 3세는 패배한 건 마우리키우스가 못싸운 책임이라고 반박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이 기록이 간략하게 써져있어 알 문디르 3세가 왜 누설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전의 계획이 틀어지거나(예시 - 정보 누설을 역이용한다거나) 서로 소통이 안 된 모양입니다. 아니면 사산조나 라흠 왕국이 이미 정보를 입수했는데 그가 배신한 것으로 왜곡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아무튼 가산 왕국은 미래에 이슬람 세력이 쳐들어오기 전까지 비잔티움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산조는 이 기회를 삼아 582년 '콘스탄티나'라는 지역을 공격하지만 마우리키우스가 재정비에 성공했는지 막아내고, 5년 전 호스로 1세를 도와준 탐호스로를 전사시킵니다. 마우리키우스는 그 해에 티베리우스 2세의 사위가 되고 후계자 지명을 받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티베리우스 2세가 사망하고 그가 새로운 황제가 됩니다.

 

사산조와 서돌궐(보라색)은 6세기 초반까지 여러 차례 전쟁을 치릅니다. 비잔티움이나 사산조나 1대1로 싸우는 건 무리였고 다른 적들도 신경써야 했습니다.

 

  3. 사산조의 내전

 

  580년대의 상황은 서로 결정적인 승리 없이 이기고 지는 싸움을 반복했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사산조의 '바흐람 추빈'이라는 장군에게서 전환됩니다. 바흐람 추빈은 588년 아무 다리야(Amu Darya) 강을 침범한 서돌궐의 30만 ~ 40만 대군(기록상)을 1만 2천 명의 기병으로 막아낸 명장입니다. 사산조는 호스로 1세 치기에 에프탈을 멸망시키는 과정에서 돌궐과 연합한 적이 있었으나 서로 적대 관계로 돌아섰고, 서쪽의 비잔티움까지 수십 년간 양면 전쟁을 치르는 입장에 놓입니다. 다음해 바흐람 추빈은 비잔티움 전선으로 나가서 공격해오는 비잔티움과 승패를 한 번씩 주고 받습니다.

 

바흐람 추빈을 새긴 은화입니다.

 

  바흐람의 패배를 트집잡은 호르미즈드 4세는 평상복을 보내며 지휘관 자리를 박탈한다는 친서를 보냅니다. 그러나 바흐람은 해고 명령에도 버티고 있었고, 격노한 황제는 그를 제거하기 위한 군대를 보냅니다. 하지만 파견한 군대도 바흐람을 따랐고, 그는 수도 크테시폰으로 돌격합니다. 하지만 600명에 달하는 귀족들 호르미즈드 4세를 폐위시키고 아들이자 새로운 군주인 호스로 2세가 제위에 오릅니다. 전쟁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군주에게 질렸던 귀족들은 앞장서서 반역하여 호르미즈드 4세의 눈을 뽑아버립니다.

 

  야심에 넘쳤던 바흐람은 호스로 2세를 위협하여 샤한샤의 자리를 내놓으라고 위협했습니다. 휘하에 있는 군대에 있는 군대는 바흐람이 훨씬 많았기에, 호스로 2세는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과 함께 수도를 빠져나오고, 비잔티움으로 향합니다. 국경 근처에 도달하자 편지를 보내서 마우리키우스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마우리키우스의 얼굴을 새긴 동전입니다.

  마우리키우스는 끝나지 않는 전쟁을 종결할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호스로 2세에게 비잔티움 군대를 보냈고 크테시폰에서 찬탈자 바흐람을 몰아냅니다. 내전은 2년을 끌었고 바흐람은 서돌궐로 망명을 갔지만 금방 암살당합니다. 

 

지도 속 'ARMENIA'가 구원의 대가로 비잔티움이 가져간 땅입니다.

 

  여기서 비잔티움이 맨입으로 호스로 2세를 도와줬을 리가 없겠죠? 사산조 기준으로 북서쪽의 수많은 변경 도시가 비잔티움으로 넘어갑니다. 또 호스로 2세는 마우리키우스의 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평화 협정과 함께 양국은 실로 오랜만에 전쟁을 멈췄습니다.

 

  4. 없는 살림에 처한 마우리키우스

 

마우리키우스는 다뉴브 강에 긴 전선을 구축했습니다.

 

  사산조 방면의 정세를 매듭 지은 마우리키우스는 슬라브족과 아바르족을 막아내는데 집중합니다. 그들은 이미 580년대부터 다뉴브 강을 넘어서 제국을 무한정 괴롭혔습니다. 이에 마우리키우스는 강을 따라 견고한 방어선을 형성했습니다. 발칸에 군대가 집중되고 성과가 미미하자 아바르족은 596년경에 서쪽의 프랑크 왕국으로 공격 방향을 돌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프랑크도 쉽게 볼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아바르족의 공격은 1년 뒤 재개되었습니다. 비잔티움의 군대는 지쳐 있었고 마우리키우스의 대중적인 인기도 떨어져 갔습니다. 599년에 아바르 족이 비잔티움군 12,000명을 포로로 잡아서 몸값을 요구한 적이 있었는데, 마우리키우스가 일언지하에 거절하자 아바르족은 그들을 모두 죽입니다. 이 때문에 병사들의 사기는 낮아졌고 백성들의 성토는 높아져 갔습니다. 마우리키우스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는데 전임자 티베리우스 2세가 돈을 펑펑쓰는 사치스러운 생활 등으로 제국의 재정의 국고가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588년에도 병사들의 임금을 4분의 1로 줄인다는 계획을 발표하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철회한 적도 있었습니다. 바닥난 군자금 사정으로 마우리키우스는 돈이 드는 적극적인 계획을 실행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602년 11월에 일이 터집니다. 우선 겉으로 비잔티움의 전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아보였습니다. 아바스조과 슬라브족은 거의 들어오지 못했고, 마우리키우스는 다뉴브 강 북쪽에 군대를 주둔시킵니다. 이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본래 겨울이면 병사들이 고향으로 귀향하는 전통이 있었지만, 보급품과 여비를 아끼라고 강 건너편에 진지를 짓고 여기서 겨울을 보내라고 명령했습니다.

 

지도 속의 '콘스탄티노플', '칼케돈', '니케아'라는 도시 위치에 주목하시면 됩니다.

 

  적들이 우글거리는 곳에서 추운 나날을 보내라는 요구에 병사들은 들고 있어났습니다. 포카스라는 장군이 병사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병사들을 고무시켰습니다. 북쪽에서 내려오는 반란에 마우리키우스는 가족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에서 도망칩니다. 마르마라 해를 건너서 '칼케돈'이라는 도시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호스로 2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습니다.

 

  "10여 년전 나는 페르시아를 도운 일이 있었소. 이참에 이에 대한 보답으로 여기고 비잔티움의 황태자를 보호해 주시오."

 

  황태자 테오도시우스에게 직접 사산조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라고 다급하게 말합니다. 하지만 이미 포카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추대를 끝냈고 장교들과 병사들을 칼케돈으로 보냅니다. 마우리키우스와 네 아들 모두 살해당합니다. 멀리 도망치지 못한 황태자도 니케아에 자객의 습격을 받아서 아버지와 형제들 곁으로 끌려옵니다.

 

마우리키우스(왼쪽)가 처형당하기 직전의 그림입니다. 오른쪽에는 포카스가 있고, 중앙의 목 없는 시체는 마우리키우스의 다섯 아들들인 것 같습니다.
포카스를 따르는 군인들이 마우리키우스와 아들들의 머리를 잘라 효수하는 걸 묘사한 그림입니다.

 

  5. 새로운 전쟁(603년 ~ 628년)

 

  전 황제와 다섯 아들의 머리는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에 효시됩니다. 호스로 2세는 즉시 군대를 일으키고 마우리키우스의 복수를 내세우면서 침입합니다. 심지어 테오도시우스 황태자는 살아있으며 내 군대가 보호하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효시된 머리는 가짜라고 말한 것이죠. 실제로 테오도시우스의 머리는 고문에 손상되어 대중들이 판별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지도 수정합니다.) 위 지도는 602년 사산조와 610년 사산조를 나타낸 것입니다. 개전되자마자 밀리기 시작하는 비잔티움을 알 수 있습니다.

 

  포카스는 사악한 폭군이면서도 무능한 군주였습니다. 사산조의 공격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면서 주변의 유능한 장수들을 의심하여 자꾸 숙청했습니다. 특히 나르세스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역사가 테오파네스는 '페르시아 어린이들까지 나르세스의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포카스를 인정하지 않고 단독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렇게 동쪽 국경에서 사산조를 상대로 계속 이겨낸 장군을 회유하지 않고 화형시킵니다.

 

   그 와중에 사산조는 전쟁의 승기를 잡아 아르메니아, 에데사, 카이사레아를 손에 넣습니다. 비잔티움은 외부에는 사산조라는 쓰나미를 맞았고 내부에는 내전 상황에 돌입합니다. 포카스는 정신을 못 차리고 학살과 고문을 계속합니다.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건 이런 경우를 놓고 하는 말이겠죠.

 

  6. 암군 포카스의 말로, 그러나 풍전등화에 처한 비잔티움 제국

 

  마침내 카르타고의 총독 헤라클리우스(이라클리오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알렉산드리아 사령관 등 포카스에게 불만을 품은 병사들이 합류합니다. 610년 10월 4일 마르마라 해를 통해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도착하는데, 시민들이 포카스를 잡아서 헤라클리우스 앞으로 끌고 옵니다.

 

"그래, 그대가 제국을 이 따위로 다스린 자인가?"라는 헤라클리우스의 질문을 "너가 더 잘 통치하게 해주겠나?"라고 포카스가 대답합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분노했고,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면서도 참회하지 않는 포카스를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화형을 선고하는 헤라클리우스(오른쪽)과 잡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포카스(왼쪽), 그리고 중앙에 화형 처형대가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포카스의 최후는 의견이 다른 것인지 나무위키에서는 오체가 분해되었다고 나오는데, 제가 읽은 책에서는 도시 한복판에서 화형에 처해졌다고 나옵니다. 사로잡힌 포카스와 화형을 선고하는 헤라클리우스의 사진을 올립니다.

 

  막장 지도자는 죽었고 새 시대가 열렸지만 동쪽에는 해일처럼 몰려오는 사산조가, 북쪽에는 아바르족이 있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즉위했지만 경제, 군사, 외교, 안보 모든 면에서 망조가 든 제국을 되살려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7. 출처

 

도현신,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서해문집(2019)

 

수잔 와이즈 바우어,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권』, 부키(2010)

 

유튜브 <The Rise and Fall of the Sassanid Empire>

(https://www.youtube.com/watch?v=Qf2Hm2AP8D8)

 

디비언트아트 <End of Antiquity> (https://www.deviantart.com/amelianvs/art/End-of-Antiquity-451118475)

 

영문위키 <byzantine–sasanian war="" of="" 602–628="">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E2%80%93Sasanian_War_of_602%E2%80%93628)</byzantine–sasanian>

<byzantine–sasanian war="" of="" 572–591="">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Sasanian_War_of_572–591)</byzantine–sasanian>

(https://en.wikipedia.org/wiki/Sasanian_civil_war_of_589–591)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Perso-Turkic_War)

(https://en.wikipedia.org/wiki/Heraclian_revo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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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악연(Main: 530년의 다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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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9년 당시 세계지도.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최강국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시대였습니다.

  1.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476년, 오토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그 이후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의 왕국이 옛 제국의 영토를 조각냈습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은 존속했습니다. 지금의 이집트, 발칸 반도, 그리스, 터키, 시리아, 요르단이라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동쪽에는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또다른 제국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사산조 페르시아. 3세기 중반부터 부흥한 이 제국은 400년 가까이 세계사에서 강대국으로 군림했습니다. 제국의 창건자이자 초대 샤한샤(페르시아어로 왕 중의 왕을 의미) 아르다시르 1세는 파르티아를 멸망시켰고, 세 방향으로 공격해오는 로마 대군을 상대로 버텨냈습니다. 그의 맏아들 샤푸르 1세는 시리아의 안티오크를 잔혹하게 약탈하고 로마 국경을 공격해서 지금의 아르메니아를 점령했죠. 또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는 기념비적인 일을 달성했습니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혼란의 시기를 겪고 로마에게 서쪽 영토를 많이 뺏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10대 샤한샤인 샤푸르 2세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샤푸르 2세는 기병을 이끌고 사막을 돌파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유목민을 토벌하고,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500년 경의 에프탈 세력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2. 에프탈의 등장, 그리고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전쟁

 

  그러나 사산조는 5세기부터 등장한 유목 민족 에프탈에게 시달리게 됩니다. 아틸라의 죽음과 훈족의 쇠퇴 이후 에프탈은 강성해졌고, 서쪽에 있는 사산조를 압박했습니다. 에프탈의 강력함을 보고 사람들은 '백훈족'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20대 샤한샤 페로즈 1세는 에프탈과의 전쟁에서 전사했고, 다음 샤한샤인 발라시는 에프탈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고,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용인하는 무능한 지도자였습니다. 왕조 곳곳에 잦은 반란이 일어났고 겨우 4년 만에 카바드 1세가 새로운 샤한샤가 되었습니다. 카바드 1세는 에프탈의 지원을 받아 황제가 되었고, 재위 기간 도중 동생 자마습과 귀족들로 인해 2년 동안 샤한샤의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다시 샤한샤에 복위할 때도 에프탈 군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에프탈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고, 조공을 바쳐야 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에프탈을 이길 힘이 없었고, 바닥난 재정이라는 위기를 탈출하고자 그는 서쪽의 비잔티움을 노립니다.

 

  카바드 1세는 에프탈과 연합하여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득을 취했습니다. 비잔티움은 적지 않은 성을 빼앗겼고 캅카스 지역의 요새 유지비를 부담한다는 불평등 조약을 사산조와 체결했습니다. 이렇게 휴전을 한 이유는 캅카스 지역에 남아 있던 훈족이 쳐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산조는 약탈로써 재정을 충당했습니다.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

 

  527년 재위에 등극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기독교 세계를 통일시키려 했고 위대한 제국의 팽창을 노렸습니다. 그가 황제에 오를 때, 몇 년 전 부터 이베리아 지역(지금의 스페인/포르투갈이 아니라 캅카스 중에서 조지아를 말하는 고대 지명)의 종교 박해 문제로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습니다. 이는 카바드 1세가 조로아스터교를 강요한 게 원인이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옛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정복 사업과 성 소피아 성당을 재건할 만큼 교회 통합을 실현시키려했던 대제였습니다. 그는 로마법 편찬과 같은 많은 업적을 남겼고, 제국의 팽창을 위해 사산조와의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 매듭지어야 했습니다.

 

  그는 재위 첫 해 벨리사리우스의 계급을 몇 단계나 올려서 장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이전에 벨리사리우스는 사산조를 약탈하기 위해 보내진 병력을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528년 그는 국경 지대에 요새를 건설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마침내 530년 그는 동방군 사령관의 직책에 오르고, 비잔티움의 5개 야전 부대 중 하나를 맡았습니다. 카바드 1세는 페로즈라는 장수에게 1만의 병력을 추가로 보내주었고 다라 요새(지금의 터키 남쪽의 마르딘주)를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3. 다라 전투(Battle of Dara, 530AD)

 

  사산조의 총 병력은 오게 될 지원병까지 합쳐서 도합 5만이었습니다. 반면 다라를 지키고 있던 벨리사리우스의 병력은 2만 5천에 불과했습니다. 이 중 3분의 1이 기병이었는데, 지난날 사산조와의 약탈에서 기병이 중심으로 활약했기에 보병의 숙련도가 낮았습니다. 보병은 전쟁 경험이 많지 않았고 주둔병으로서 치안 업무를 주로 수행했습니다. 반면 사산조는 최소 1만의 기병에 대부분이 '카타프락토이'라고 불리는 강력한 중기병이었습니다.

 

  당시 명예 중장기병인 카타프락토이

 

 

  다라 전투에서 양군의 진형입니다. 양쪽 사령관과 부하 장수들 이름이 적혀져 있습니다.

 

  심지어 페로즈의 군대는 지난 수십 년간 비잔티움 군대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자신만만한 페로즈는 전투 전날 사절을 보내서 내가 요새에 입성해서 목욕할 수 있게 목욕물이나 데워놓으라고 도발했습니다. 병력이 밀리는 상황에서 일반적인 장수라면 다라 요새를 끼면서 방어에 치중했겠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성벽 바깥으로 나와서 진열을 구성했습니다.

 

  비잔티움의 왼쪽에는 언덕이 있었고, 벨리사리우스는 양익 부대와 중앙 부대에게 참호를 파게 했고, 다만 중앙 부대의 참호는 약간 떨어져서 파게 했습니다. 중앙과 양익의 참호는 직선으로 평행을 이루었고, 양끝에는 세로 방향의 참호를 재차 파서 직각으로 꺾여서 중앙의 참호와 연결 될 수 있게 했습니다. 참호를 건널 수 있는 지점을 여러 개 만들어서 유사시에 아군이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사산조가 쉽게 찾을 수 없도록 지점을 엄폐했습니다. 참호 앞쪽에는 각각 600명의 훈족 기병대가 두 예비 부대로 배치되었고, 참호 뒤쪽 중앙에 보병과 양익에 기병이 배치되었습니다. 다만 서로 진격이 불가능할 만큼 깊게 참호를 판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투 첫째 날은 서로 거의 피해 없는 소규모 교전만 일어났고, 둘째 날은 서신을 주고 받았으나 전혀 진전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 날 사산조에 드디어 지원군 1만이 도착했습니다. 셋째 날 아침에 두 사령관은 이제 전투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병사들에게 연설을 했고, 페로즈도 중앙에 보병을, 양익에 기병을 두면서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다만 각각 2열 대형을 갖추었고 정예 보병인 불사신 부대는 신호를 주기 전까지는 대기하는 예비 병력으로 배치했습니다.

 

  오후에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산조의 기병대는 비잔티움의 양익을 공격했고 서로 화살을 쏘았습니다. 사산조 기병 제1열의 화살이 바닥하자 제2열이 공격을 맡았습니다. 화살이 바닥나자 양군의 기병은 부딪혔습니다. 피티약세스가 이끄는 사산조의 카디세니족 기병이 비잔티움의 좌익을 꿰뚫었습니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가 매복시켜둔 수니카스와 아이간의 훈족 기병대가 카디세니족의 측면을 공격했고 파라스가 이끄는 비잔티움 기병대가 후방을 기습했습니다.

 

  실은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 위의 전투 그림에 나와있는 비잔티움 장수들 중 파라스라는 인물이 벨리사리우스와 부사령관 헤르모게네스에게 계략을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헤를리족(기병 부대)과 함께 제가 여기 머무른다고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언덕에 몸을 숨겼다가 페르시아인들이 전투를 시작하면 언덕을 통과해서 그들의 뒤로 기습하면 아마도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700년전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를 상대로 트레비아 전투에서 실행하여 승리한 전술과 똑같은데, 별동대가 행동을 개시하는 시기가 조금이라도 빠르거나 늦으면 각개격파 당해서 패배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참호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기동력이 떨어졌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산조의 우익은 예상하지 못한 기습에 3,000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페로즈는 불사신 부대를 왼쪽으로 보내서 좌익에 힘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움직임을 읽고 수니카스와 아이간에게 재차 지시를 내려서 다른 훈족 기병대와 합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예비대에서 상당한 기병을 빼내서 훈족의 뒤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사산조의 좌익을 이끄는 바라스마나스는 불사신 부대의 지원으로 공격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하지만 비잔티움 기병대가 일점돌파를 감행해서 사산조의 좌익은 본대와 고립되었습니다. 사산조의 기병과 불사신 부대는 어떻게든 돌파하려 했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수니카스가 바라스마나스를 죽였고, 남은 좌익의 병력도 도주하거나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여기서 사산조는 5,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남은 사산조의 보병도 공포에 휩싸였고, 방패와 무기까지 버린 채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적군이 후퇴했지만 벨리사리우스와 휘하 장수들은 너무 멀리까지 추격하지 못하도록 자제시켰습니다. 혹시나 아군이 흩어질 수도 있고, 적들의 역공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압도적인 승리는 이미 비잔티움의 몫이었습니다.

 

  빨간색으로 표시한 곳이 다라 전투, 하늘색으로 표시한 곳이 칼리니쿰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4. 다라 전투 이후의 역사

 

  카바드 1세는 패전하고 돌아온 페로즈가 가지고 있던 금과 진주를 새겨서 계급을 표시한 머리띠를 회수했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듬해 1만 5천의 병력을 보내서 유그라테스강 남쪽의 비잔티움 영토를 공격했습니다. 그동안 사산조와 비잔티움의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벨리사리우스는 급하게 2만 명의 병력을 편성해서 칼리니쿰(지금의 시리아 의 락까 지역)이라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벨리사리우스가 가진 병력은 더 많았지만 신병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동맹국의 군대까지 섞여 있어서 다라 전투의 정예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큰 충돌 없이 적들이 영토에서 물러나게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사산조의 상황을 지켜보는데 병사들이 왜 싸우지 않습니까 라고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습니다.

 

  벨리사리우스는 병사들을 말렸습니다. 적들이 우리 땅에서 후퇴하고 있는데 굳이 전투를 벌일 필요는 없으며 내일이 부활절이라 모두 단식해야 할텐데 기력이 떨어져서 싸우기가 힘들다고 말했죠. 하지만 병사들은 말을 듣지 않았고 그는 하는 수 없이 전투를 벌였습니다. 결국 새옹지마라고 이 칼리니쿰 전투에서 패전을 겪었습니다. 영문위키의 칼리니쿰 전투 항목에는 양쪽 군대는 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사산조가 전략적인 승리를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벨리사리우스는 가까운 유프라테스 강으로 후퇴했고 남은 병력을 수습해서 사산조의 병력을 막는데 집중했습니다.

 

호스로 1세가 이룩한 사산조 페르시아 최전성기

 

  몇 달 뒤 카바드 1세가 죽고 그의 셋째 아들인 호스로 1세가 샤한샤를 계승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호스로 1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아버지가 중앙집권을 위해 시작한 토지 제도와 세금 제도 개혁을 완성시켰고, 나아가 군제와 행정 개혁도 대성공을 거두면서 재정을 확충했습니다. 그는 봉건 영주들을 견제할 수 있는 관료들을 육성했고 군사 장비를 체계화했습니다. 힘을 모은 그는 6세기 중반 돌궐과 연합하여 마침내 에프탈을 공격하여 분열시켰고, 남쪽의 원정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오만과 예멘을 정복해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최전성기를 만들었습니다.

 

  카바드 1세를 그린 주화
  호스로 1세의 조각상

 

  다라 전투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제국으로 귀환했습니다. 532년 그는 나르세스와 함께 '니카의 반란'을 진압하고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을 받아 서쪽으로 진군했습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활약으로 반달 왕국과 동고트 왕국의 땅이 비잔티움의 손에 들어왔고, 스페인 남부까지 정복하면서 최대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550년경 비잔티움 제국은 지중해를 거의 호수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가 이룩한 비잔티움 최대 영토

 

  하지만 예전에 맺었던 평화조약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541년 호스로 1세는 다시 시리아 쪽을 공격하면서 많은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벨리사리우스와 호스로 1세는 서로 니시비스와 에데사를 포위했으나 공성에는 실패했고, 아르메니아로 향하던 다른 비잔티움 군대가 사산조의 기습으로 대패했습니다. 결국 비잔티움은 공물을 보내는 조약을 맺어서 5년 간의 휴전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548년 라지카 왕국(지금의 조지아 서쪽에 있던 나라)이 종교 문제로 사산조와 싸우기 위해 비잔티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났고 무의미한 전쟁이 오랜 시간 지속되었습니다. 562년에 이르러서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또 사산조에 공물을 보냈지만 라지카 왕국은 비잔티움에 귀속될 수 있었습니다. 565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 후기에는 흑사병이 창궐해서 천문학적인 인구가 사망했습니다. 그 여파로 그가 죽은 뒤 이탈리아, 스페인, 발칸반도, 이집트, 서아시아에 있었던 비잔티움의 영토는 갈수록 감소했습니다. 그 사이에 사산조는 비잔티움의 공격을 재개했고, 호스로 1세의 뒤를 이은 호르미즈드 4세, 다음의 호스로 2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전쟁은 훗날 비잔티움의 황제가 되는 헤라클리오스와 사산조의 명장 샤흐르바라즈와의 대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헤라클리오스는 니네베 전투에서 적을 격파하고 기어코 사산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위대한 성유물인 성십자가를 되찾아서 예루살렘에 안치시키는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대결은 이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두 제국은 새롭게 발흥하는 이슬람 제국과 새로운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비잔티움과 사산조를 역사의 무대에서 몰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출처: 도서 <로마전쟁영웅사>

 

  영문위키 'Battle of Dara'(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Dara )

 

  위키백과 '로마-페르시아 전쟁' ( 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A7%88-%ED%8E%98%EB%A5%B4%EC%8B%9C%EC%95%84_%EC%A0%84%EC%9F%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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