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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며,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을 접하길 원하는 1인입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며 주기적으로 헌혈하는 헌혈자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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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사] 초기 이슬람에서 무함마드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승리(~6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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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ovisionnew.tistory.com/59

 

[전쟁사]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악연(Main: 530년의 다라 전투)

1.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476년, 오토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그 이후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의 왕국이 옛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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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년 지도입니다.(출처:GeaCron)

 

  1. 7세기가 시작할 때 세계 현황, 그리고 무함마드

 

  601년의 상황은 수나라와 비잔티움 제국이 세계 최강국을 다투고 있었고, 이들에 비견될 만한 국가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분열된 서돌궐과 동돌궐이었습니다. 고구려 역시 몇 년 전 수문제의 침공을 막아낼 만큼 강대국이었고, 인도는 삼국지의 군웅할거처럼 조각조각 분열되었으며, 유럽은 고트족과 아바르 칸국이 주요 세력이었습니다.

 

 

  비잔티움과 사산조가 끝없는 전쟁을 벌이던 610년대,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 지대에 살던 사람들은 메마른 땅에서 하루하루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다만 메카는 무역의 중심지로 많은 자본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씨족과 씨족들이 모인 부족들이 메카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이 중 가장 강력한 씨족이 '쿠라이시족'이었습니다.

 

  570년에 태어난 이슬람의 사도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 고아였습니다. 태어나기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여섯 살에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25살이 되자 한 쿠라이시족의 여성 상인에게서 무역을 대신 맡았고, 문제 없이 시리아에 도착해서 그녀의 투자금을 배로 불렸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를 마음에 들어한 여성 상인의 이름은 '카디자'로 그에게 청혼하여 결혼이 성사되었습니다. 갑부가 된 무함마드는 메카의 빈부 격차와 씨족들 사이의 돈을 둘러싼 갈등을 염려했는지,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찾아오면 식량을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무함마드 전기>의 삽화 중 하나입니다. 무함마드에 반대하는 메카 사람들이 돌을 던지려고 할 때 아부 바크르가 사람들을 말립니다. 흰 천으로 얼굴이 나타나 있지 않은 사람이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610년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포교했습니다. 아내들과 친구들을 이슬람의 신도가 되었고, 나날이 추종자들이 불어났습니다. 특히 씨족에서 내쳐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씨족장 등의 상류층 대부분이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의 메시지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고, 부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함마드를 따르던 사람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거나, 메카 바깥으로 쫓겨나거나, 식량과 물을 구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무함마드는 자신을 키워준 큰아버지 아부 탈리브와 아내 하디자가 619년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자신을 따르는 일행과 함께 622년 암살단의 눈을 피해서 메디나에 도착했습니다.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금방 메디나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메카를 출발해서 북쪽으로 가는 상인들을 습격하면서 전쟁물자를 모았습니다. 메디나를 지나치는 메카 유력자 중에 '아부 수피안'이 있는데 그는 행렬 중 메디나군이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고 메카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전투 위주로 역사를 분석했습니다. 전투 연도, 추정되는 양쪽 병력, 전투가 벌어졌던 위치를 현재로 치환했으며, 마지막으로 전투의 과정을 썼습니다. 중간에 몇 번의 역사 배경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병력이 여러 자료에서 이견이 갈리는 경우는 물결표를 썼습니다.)

 

바드르 전투의 삽화, 초록색 옷의 무함마드는 하얀 천으로 가려져 있는데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리는 걸 터부시하고 있습니다.

 

2. 바드르 전투(Battle of Badr, 624년)

병력: 이슬람군 300명 ~ 400명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1,000명

결과: 이슬람군 승, 이슬람군 14명 전사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70명 전사, 70명 포로

이슬람 지휘관: 무함마드

위치: 사우디아라비아 히자즈 지역(메디브 근방)

 

  과정: 메디나로 근거지를 옮긴 무함마드는 622년 부터 630년까지 메카를 장악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을 벌입니다. 홍해 연안과 가까운 바드르(Badr)라는 우물가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여기서 무함마드의 장수들이 쿠라이시의 장수들 간의 일기토에서 연승했고 동요하는 적들을 상대로 화살비를 퍼부어 승리했습니다.

 

  바드르는 메카보다 메디나 쪽에 몇 배는 가까이 위치했는데, 이 때문에 메카의 군대는 지쳐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무함마드가 메카군이 오는 길에 있는 우물을 못 쓰게 흙으로 메워서 물 확보에도 어려웠습니다. 병력 3배 앞서는 건 그 상황에서 거의 무의미했죠. 하지만 아부 수피얀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 메카로 일찍 도주하면서 대부분의 상인 행렬을 보존했고, 이슬람의 전리품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

 

  70명의 포로 중에는 그 유명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동생인 왈리드 빈 왈리드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후드 전투의 형세, 언덕에 이슬람 궁병이 있습니다.

 

3. 우후드 전투(Battle of Uhud, 625년)

병력: 이슬람군 보병 700명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3,000명(+낙타 3,000마리), 기병 200명

결과: 메카군 승리, 이슬람군 62명 ~ 75명 전사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22명 ~ 35명 전사

이슬람 지휘관: 무함마드

위치: 사우디아라비아 우후드 산

 

  과정: 앞에서 말한 아부 수피안은 많은 돈을 투자하여 이번에는 메디나를 공격하는 총사령관이 됩니다. 3,000명 이상의 군대를 이끌고 메디나로 향합니다.

 

  원래 무함마드에게는 1,000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메디나의 유력자 한 명이 너무 불리하다며 도망치고, 겨우 700명의 병력만 남았습니다. 전황이 불리하다는 걸 깨달은 무함마드는 메디나 근처의 우후드 산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보병으로 긴 전선을 형성하고 언덕에 궁병을 배치했습니다. 아부 수피안은 이크리마(Ikrimah)라는 장수와 할리드에게 200명의 병력(이 중 기병이 100명)을 주고 양 날개를 맡을 것을 지시하고 자신은 대부분의 보병을 이끌었습니다.

 

  전투 초반은 숫자가 적은 이슬람군의 우세였습니다. 이슬람군은 메카군의 중앙을 휩쓸었고, 할리드는 적 궁병이 있는 언덕을 공략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다 이겼다는 듯이 이슬람군의 약탈이 거세지자 언덕 위의 이슬람 궁병도 약탈에 참가하려고 대부분이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 할리드는 소수의 궁병을 공격했고 반대쪽의 이크리마도 가담했습니다. 궁수들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자 할리드는 이슬람군의 후방을 노렸고, 이크리마는 무함마드가 있는 적 본진으로 진격했으며, 총사령관인 아부 수피안도 재정비해서 반격에 나섭니다.

 

  전세가 역전되자 이슬람군은 후퇴하고 무함마드도 산 속에 숨었습니다. 이슬람군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메카군이 죽은 이슬람군 시체에서 약탈할 게 있나 정신이 팔려서 그렇게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산비탈에서 이슬람군은 재정비하여 방어진을 구성했습니다. 할리드와 이크리마의 기병은 산비탈을 올라가기 힘들었고 아부 수피얀은 메카로 되돌아갔습니다. 무함마드는 이마와 입술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Trench, 즉 참호를 썼다고 해서 이 전투를 참호 전투라고 부릅니다.

 

4. 한다크 전투(참호 전투, Battle of the Trench, 627년)

병력: 이슬람군 3,000명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 아랍 부족들 10,000명

결과: 이슬람군 방어 성공, 양쪽 병력 소규모 피해(최대 10명), 한 달 간의 포위 끝에 메카군 후퇴

이슬람 지휘관: 무함마드

위치: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

 

  과정: 627년 1월에 있었던 전투입니다. 메카 쿠라이시 부족이 아라비아 쪽 부족들과 연합하여 1만 명의 병력을 구성했고 이번에는 메디나까지 가서 물샐틈 없이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영리한 무함마드는 참호를 파고 3천 명의 병력으로 막아냈죠.

 

  오히려 이 전투보다 3년 뒤 메카를 함락한 전투나 6,000명의 포로와 수만 마리의 양과 낙타를 전리품으로 획득한 후냔 전투(Battle of Hunayn)를 꼽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참호전이라는 과정이 있고 이를 기점으로 무함마드가 더욱공격적으로 나와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봅니다. 또한 이 전투 이후 가까운 시기에 휴전이 성사되고 적이었던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이슬람으로 개종합니다. 바드르 전투에서 포로가 된 동생을 돈을 주고 데려왔는데, 그에게서 몇 년 동안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도 속 녹색이 무함마드가 생전에 정복한 영역입니다. 다만 현재 오만 지역까지 녹색으로 칠해진 건 오류인 것 같네요.

  무함마드는 63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메카를 정복한 뒤 아라비아 반도 땅 중 홍해를 따라서 남북으로 긴 땅을 확보했고, 훗날 이슬람 세력이 제국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왈라자 전투를 요약한 gif 파일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전투 지도를 더 첨부합니다.

 

 

5. 왈라자 전투(Battle of Walaja, 633년)

병력: 정통 칼리파 이슬람 15,000명 vs 사산조 페르시아 30,000명 ~ 50,000명

결과: 이슬람군 대승, 이슬람 병력 2,000명 상실 vs 사산조 페르시아 20,000명 상실

이슬람 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위치: 현재 이라크 알 나자프 지역

 

  '알라의 검'은 무함마드 사후 아라비아 지역에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고,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을 향한 정복 전쟁에 돌입합니다. 할리드의 승전은 수십 회나 되지만 그 중 위대하고 역사적인 승리만 골랐습니다. 왈라자 전투는 그의 전술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과정: 왈라자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도 할리드는 체인스 전투(Battle of Chains)와 리버 전투(Battle of Rivers)에서도 대승을 거두었고, 위기감을 느낀 사산조 페르시아는 지원군을 파견합니다. 다만 어찌된 이유인지 1차 지원군과 2차 지원군이 합쳐지기 전까지 지연되었습니다. 할리드는 척후병들에게서 이 정보를 얻고 전투를 벌입니다.

 

  전투 이전 날에 4,000의 기병을 사산조군의 뒤쪽 언덕에 보이지 않게 숨겨놓았고, 2배 이상의 전력 차이에도 적극적인 공세를 취합니다. 상대 지휘관 안다르자그하르는 보병, 기병이 중무장이라는 우위를 점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이슬람군이 지칠 때를 노립니다. 전투가 유리해지자 때가 되었다는 걸 판단하고 역공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할리드는 후방에 대기시킨 경기병의 공격을 명령하고 포위 작전은 대성공을 거둡니다. 안다르자그하르는 전멸하는 전장에서 겨우 도망치지만 사막에서 물을 구하지 못해 죽고 말았습니다.

 

할리드의 633년경 원정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보라색으로 표시한 곳이 왈라자 전투, 피라즈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6. 피라즈 전투(Battle of Firaz, 634년)

병력: 정통 칼리파 이슬람 15,000명 vs 사산조 + 비잔티움 연합군 120,000명+

결과: 이슬람군 대승, 이슬람군 피해 미미 vs 연합군 100,000명 상실

이슬람 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지역: 현재 이라크-시리아 국경지대 중 유프라테스 강이 교차하는 곳

 

  배경: 이 전투 이전에 할리드는 사산조 전역에서 10전 전승이라는 대기록으로 사산조의 정예군을 황폐화 시켰습니다. 이는 추후에 이슬람군이 사산조에 깊숙히 진군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비잔티움은 할리드를 경계하기도 했고, 피라즈가 비잔티움의 국경이기도 해서 한 때 철천히 원수였던 사산조에게 지원군을 보냅니다. 피라즈에서 사산조군은 패잔병을 긁어모았습니다.

 

이슬람군과의 전투 도중 수공으로 중앙이 혼비백산해진 연합군

  과정: 유프라테스 강을 두고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우선 할리드는 후퇴 명령을 내리고 적들이 강을 건너길 기다렸습니다. 할리드는 적은 병력에도 길게 저지선을 형성했고 양 날개에 있는 기민한 병력은 강둑으로 가라고 지시했습니다. 명령을 받은 이슬람군은 강둑을 파괴시키고 순식간에 강물이 불어났습니다. 연합군의 중군은 물에 휩쓸리고 이미 강을 건넌 병력과 후방의 병력이 따로 고립되었고, 이슬람은 압도적인 전투교환비를 거둡니다.

 

동그랗게 성을 둘러싼 빨간색 병력이 이슬람군입니다.

 

7. 다마스쿠스 공성전(Siege of Damascus, 634년)

병력: 정통 칼리파 이슬람 20,000명 vs 비잔티움 제국군 16,000명(+지원군 12,000명)

결과: 공성 성공, 이슬람의 다마스쿠스 점령 및 비잔티움 큰 피해

이슬람 총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위치: 현재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할리드는 회전은 물론 공성전에 있어서도 단 한 차례 패배조차 몰랐습니다.

 

빨간 줄은 할리드가 수백km의 사막을 횡단했다는 걸 알려줍니다.

 

  전투 이전 배경: 할리드는 직접 정예 경기병 군단인 모바일 가드(Mobile Guard)를 창설했다고 합니다. 이들을 이끌고 비잔티움이 예측한 경로를 피해서 무보급으로 진격했습니다. 오아시스에 의존하여 수백km나 되는 사막을 돌파했고, 쉴틈 없이 진군하여 수와, 팔미라 등의 요새를 떨어뜨리고 남진합니다. 남쪽에는 비잔티움의 동맹이자 방패인 가산 왕조의 수도인 보스라가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의 지원에도 할리드는 보스라 공성전(Battle of Bosra)에 성공하고 가산 왕조는 4년 뒤 멸망합니다.

 

  보스라 공성전 이후 아즈나다인 전투(Battle of Ajnadayn)와 야쿠사 전투(Battle of Yaqusa)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승리하고 시리아 남부를 안정시킵니다. 이제 할리드는 보스라 공성전 때문에 미뤄두었던 다마스쿠스 공략에 나섭니다.

 

  과정: 다마스쿠스는 비잔티움 동부의 핵심 중의 핵심인 도시로 성벽의 높이는 11m, 길이는 1,500m에 달했다고 합니다. 문은 6개나 되었고요.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사위인 토마스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쪽에서도 할리드 뿐만 아니라 훗날 이집트 원정에 큰 공을 세우는 아므르 이븐 알 아스, 보스라 공성전에서 선발대 역할을 맡은 슈르하빌 등의 여러 사령관 등 총 출동하여 20,000의 대군을 모았고, 634년 8월 21일 철저하게 성을 포위합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도 다마스쿠스를 잃는 참사는 피해야 했기에, 12,000명의 병력을 보내서 구원을 시도합니다. 할리드는 정찰병들에게서 이 소식을 듣고, 즉시 5,000명의 별동대와 동쪽 문을 지키던 사령관인 라파이 빈 우마이르를 보냅니다. 성 내부의 적군이 이 사실을 알지 않기 위해 다마스쿠스에서 32km나 떨어진 곳에서 지원군과 싸우도록 했습니다. 선봉으로 보낸 라파이의 군사들이 포위되자, 할리드는 직접 4,000명의 병력을 다시 이끌고 지원군의 후방을 기습하여 재차 승리했습니다. 그 뒤 안심할 수 없었기에 할리드는 포위 진영으로 돌아갑니다.

 

  한편, 토마스는 지원군이 왔다 간 사실과 이 때문에 적들이 일시적으로 병력을 빼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직접 정예 5,000병을 뽑았고, 성벽 위의 궁수들의 지원 사격을 시작으로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슬람군에 의해 오른쪽 눈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고 다시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 돌파전은 4개의 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격했습니다. 토마스는 슈르하빌이 지키고 있던 '토마스 문'과 할리드가 있던 동쪽 문에 힘을 강하게 실었습니다. 특히 생포해야 할 대상인 할리드 쪽에는 상당한 병력이 배정되었으나 그가 이끄는 정예병을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아군의 피해가 더 심하다고 여긴 토마스는 다시 후퇴했습니다.

 

  이슬람군은 당시 기준으로 공성병기가 부족했기에 할리드도 적극적인 성벽 공략은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고, 할리드는 성 안의 '요나(Jonah)'라는 한 그리스 출신 사람로부터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정보를 듣습니다. 오늘(9월 18일) 큰 축제가 있으니 수비군이 약할 것이라는 정보였죠.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할리드는 100명의 결사대을 이끌고 동쪽 문의 성벽을 올라갑니다. 아니나 다를까 성벽 꼭대기에는 수비 병력이 없었습니다. 6개의 문 중 동쪽 문이 가장 튼튼한 벽인데도 비잔티움군은 축제에 심취해 있었던 것입니다. 할리드는 즉시 성 내부로 진입해서 안의 경비병을 살해했고 문을 열었습니다. 개방되자마자 이슬람군은 성 안으로 진입했고 처절한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초록색 = 이슬람군, 보라색 = 비잔티움군, 성 안으로 할리드가 침입했을 때 상황입니다. 빨간색으로 그려진 건 토마스가 다른 이슬람 지휘관에게 보낸 평화 협상 사절입니다.

  토마스는 이 소식을 듣고 동쪽 문만 뚫렸을 뿐 다른 문은 아직 호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반대쪽에 있던 '쟈비야 문'을 지키던 아부 우바이다에게 성을 넘겨줄 테니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평화 협정을 제안했습니다. 우바이다는 이를 받아들였고 토마스와 함께 '마리아미테 대성당'까지 행진했고, 눈에 들어온 모든 적들을 죽이면서 진군한 할리드의 군대와 만납니다.

 

토마스와 할리드 등 이슬람 지휘관들이 협상했다고 전해지는 마리아미테 대성당입니다.

  할리드는 평화 협정에 기가 막혔고 이미 도시는 무력으로 점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우바이다는 평화 협정으로 다마스쿠스를 손에 넣었다고 주장하며 대립했습니다. 몇몇 장군들의 설득에 할리드는 불만족하면서도 평화 협정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마스쿠스 사람들은 아무도 노예가 되지 않고, 사원 등의 건물은 파괴할 수 없고, 사람들이 다마스쿠스에서 도망쳐도 안전을 보장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다만 협정에는 사흘의 유예 기간이 있었습니다. 사흘이 지나면 군대와 군대 간의 전투는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마라즈 알 데바르 전투를 요약한 gif 파일입니다. 할리드의 기병은 네 방향에서 적들을 둘러쌉니다.

 

8. 마라즈 알 데바르 전투(Battle of Maraj-al-Debaj, 634년)

병력: 정통 칼리파 이슬람 4,000명 vs 비잔티움 제국군 10,000명

결과: 이슬람군 승리, 토마스 살해, 수천 명을 포로로 잡음.

이슬람 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위치: 현재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와 터키 안타키아 사이의 지역

 

  과정: 유예 기간이 끝나고 할리드는 앞에서 언급한 정예 경기병 군단인 '모바일 가드(Mobile Guard)' 4,000을 이끌고 기습에 나섰습니다. 병력을 정확하게 4등분하여 할리드는 포위 섬멸할 것을 계획합니다. 먼저 기병 1,000명은 남쪽에서 적들의 후방을 치고 동쪽과 북쪽에도 기병 1,000명 씩을 할당하여 안티오크로 가는 퇴각로를 막고, 남은 1,000 기병도 서쪽을 차단하여 포위망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후퇴하던 비잔티움 병사들 10,000명은 죽기 살기로 싸웠습니다. 기병의 우위는 있었지만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천 명의 비잔티움군은 포위를 벗어나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휘관인 토마스는 할리드와와의 칼싸움에서 패배하여 전사했고, 수많은 다마스쿠스 출신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고, 황제의 딸이자 토마스의 아내까지 포로가 됩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비단도 전리품으로 획득했습니다.

이슬람군이 전리품으로 획득했다는 보로케이드 직물 비단입니다.

 

  한편 다마스쿠스 함락에서 할리드에게 힌트를 준 '요나'라는 사람(후에 이슬람으로 개종)도 이 전투에 따라왔습니다. 원래 할리드에게 정보를 알려준 대가로 사랑하는 약혼녀와 결혼시켜 달라고 요청했는데, 성이 포위당해 결혼이 취소당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 전투가 끝나고 그녀를 발견하여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약혼녀는 배신자인 그를 혐오했고 품에서 단검을 꺼내 자살했습니다. 할리드는 요나에게 황제의 딸과 결혼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약혼녀가 죽었으니 이제 다른 여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면서 거절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다마스쿠스로 다시 돌아가는 할리드에게 사절을 보내서 딸을 돌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짐은 그대가 내 군대에 한 짓을 알고 있다. 그대는 짐의 사위를 죽이고 딸을 사로 잡았다. 그대는 이겼고 무사히 탈출했다. 짐은 이제 그대에게 짐의 딸을 요청한다. 몸값을 지불하고 그녀를 짐에게 돌려주거나 그녀를 짐에게 선물로 주거라. 그대의 성품에 명예가 강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라는 편지를 읽은 할리드는 대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녀를 선물로 데려가시오. 몸값은 없을 것이오."

 

  라고 대사와 황제의 딸을 헤라클리우스에게 돌려보냈습니다.

 

할리드라는 인물을 나타낸 대표적인 그림입니다.
할리드가 전투를 지휘했던 모든 전쟁 구역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9. 총평

 

  할리드는 역사상 최고는 아닐지라도 이슬람 역사상에서 만큼은 가장 위대한 군사지휘관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그를 향해 '사이프 알라흐(Sayf Allah)'라는 별칭으로 부르는데 이는 '신(알라)의 검'을 의미합니다.

 

  비잔티움과 사산조가 자랑하는 중기병(카타프락토이)는 이슬람군에게 거의 없었지만, 할리드는 경기병의 기동력을 극대화시켰습니다. 포위전, 수공 등 빠른 전술 수행에 경기병은 보탬이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보병에 있어서도 이슬람은 사산조, 페르시아에 비해 중보병 숫자가 적었는데도 할리드는 무패 신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할리드는 영토를 아주 크게 확장한 명장에 속하지는 않지만 사산조와 비잔티움의 정예 병력을 수없이 궤멸시켰고, 이는 정통 칼리파 이슬람이 훗날 영토를 대폭 확장하는 원인이자 공로였습니다. 신생 이슬람 세력이 그 시기 세계 최강 제국을 두 나라나 압도한 건 할리드의 전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심지어 두 제국이 연합했는데도 할리드에게는 어림없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용인술도 전술 못지 않게 높았습니다. 이슬람 규율에 도덕적인 지침을 명령한 친구이자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있었고, 한 때 적이었던 할리드를 개의치 않고 크게 중용했으며, 2대 칼리프 우마르도 적이었지만 이슬람 교리에 감화되어 개종했으며, 이집트 정복의 영웅 아므르 이븐 알 아스와 페르시아 정복의 영웅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도 일찍이 무함마드와 함께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 시절 이슬람군은 점령지의 백성들이 저항하거나 배신하지 않으면 권리를 보장해주고 차별 대우를 적게 했습니다. 이는 초기 이슬람이 팽창하는 근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634년까지의 전투와 상황을 다뤘습니다. 할리드의 비잔티움 전역은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어지는 글을 올리겠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위대한 황제였지만 말년에는 할리드라는 악몽에 시달렸고, 심지어 634년까지의 상황은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10. 출처

 

  출처: 정명섭 외 1인, 『전쟁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2016)

  고원, 『이슬람 역사 1400년 - 알라가 아니면 칼을 받아라』, 동서문화사(2002)

  수잔 와이즈 바우어,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권』, 부키(2010)

  유튜브 <Siege of Damascus 634 - Arab - Byzantine Wars DOCUMENTARY>(https://www.youtube.com/watch?v=ZGo5ck2EEHg)

 

영문위키 <Battle of Badr>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adr)

<Battle of Uhud>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Uhud)

<Battle of the Trench>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Trench)

<Battle of Walaja>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laja)

<Battle of Firaz>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Firaz)

<Siege of Damascus (634)>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Damascus_(634))

<Battle of Maraj-al-Debaj>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Maraj-al-Deb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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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사] 16세기에 시작된 페르시아 사파비 제국의 이야기(vs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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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파비 왕조의 건국

사진 속 'Persia'가 사파비 왕조입니다.

  사파비 왕조는 근대 이란 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창건자 이스마일 1세는 1501년 사파비 교단과 튀르크계 전사들을 모아 지금으로 치면 이란 북부의 '타브리즈'라는 도시(카스피해 서쪽의 도시)에 사파비 왕조를 건국했습니다. 이스마일 1세에게 강력한 전력이 된 붉은 모자를 쓴 기병을 '키질바시'라고 합니다. 그는 자기자신을 시아파의 화신이라 칭하고 과거 페르시아 군주의 칭호인 '샤'를 계승하기로 했습니다. 주변국이 쓰고 있던 '칸'이나 '숱탄'의 칭호가 아니었죠.

 

키질바시 전사의 그림 중 하나입니다.

  수도 주민들의 반 이상이 수니파교도였음에도 이스마일 1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수니파가 존경하는 초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와 2대, 3대 칼리프인 우마르와 우스만을 폄하할 것을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기존 시아파가 그랬듯이 4대 칼리프인 알리를 신성시했습니다.

  옛 페르시아의 영광을 찾고자 이스마일 1세는 남쪽, 동쪽, 서쪽으로 정복전쟁을 벌입니다. 아제르바이잔에 머물렀던 국가가 10년이 안 되어 제국을 이룩하죠. 이란 전역을 석권했고, 동쪽으로는 페샤와르(현재 파키스탄 도시), 서쪽으로는 바그다드와 디야르바키르(현재 터키 도시)에 닿았습니다.

 

이스마일 1세(왼쪽)과 셀림 1세(오른쪽)

 

  2. 찰디란 전투(Battle of Chaldiran, 1514년)

  하지만 서쪽으로는 당시 사방에 세력을 넓히는 오스만 제국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정복자인 셀림 1세가 재위하고 있었죠. 수니파가 국교인 국가와 시아파가 국교인 국가는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1514년 8월 찰디란 전투에서 사파비의 기병은 오스만의 포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마일 1세는 중앙에 쏟아지는 포격을 피해 오스만군의 양익을 노렸습니다. 하지만 마차로 이루어진 장벽을 뚫을 수는 없었습니다. 막힌 기병의 앞에는 강력한 머스킷으로 무장한 예니체리 군단과 배치를 바꾼 포병의 화력 사례가 소나기처럼 쏟아졌습니다.

 

찰디란 전투 전후의 상황을 그린 지도가 있습니다.
찰디란 전투의 상상화입니다.

 

  패색이 짙어지는 와중에 이스마일 1세 본인조차 팔에 총상을 입고 도망쳤고, 양쪽의 수만명이 격돌한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2,000명의 사상자 뿐이었지만 사파비군은 5,0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 때 확실한 병력을 찾기 힘든데 개인적으로 오스만군은 8만, 사파비군은 5만 쯤 되지 않을까 예측합니다. 디야르바키르를 비롯한 서쪽 영토를 상실했고, 일시적이지만 패전의 여파로 수도인 타브리즈까지 점령당했습니다. 동쪽의 부하라 칸국과의 싸움에서도 국력을 소모해야 했습니다. 병사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셀림 1세는 철수했습니다.

  3. 계속 웅크리는 사파비 제국

 

쉴레이만 1세(대제)의 초상화입니다.

  1520년대 이스마일 1세가 죽고 타흐마스프 1세가 샤의 자리를 이었고, 오스만에도 셀림 1세가 죽고 그 아들인 쉴레이만이 뒤를 이었습니다. 후자는 그 위대한 쉴레이만 대제로, 알제리와 이라크 지역을 손에 넣고 헝가리를 멸망시키고 지중해의 절반 이상을 장악한 세계사의 초역대급 명군이었습니다. 사유재산을 보호했고 노예 신분일지라도 능력이 출중하면 등용했으며, 모스크 건설을 지원하는 등 예술인들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전설적인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입니다. 당연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합니다.

  그의 정복에는 선대부터 맞붙은 사파비가 빠질 수 없었습니다. 1532년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라는 장군에게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고, 대제 본인은 뒤에 합류했습니다. 2년 뒤 수도인 타브리즈와 바그다드를 점령했으나 사파비군은 청야 전술로 대응했고, 1536년까지 점령하다가 물러갔습니다. 타브리스에서는 물러갔지만 바그다드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은 내주지 않았습니다.

 

쉴레이만 대제 시대에 오스만 제국 최대 영역입니다.

  쉴레이만 대제는 그 해에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과거 오스트리아와 사파비가 동맹을 맺고 양쪽에서 오스만을 압박한 적이 있었는데, 똑같이 대응하고자 한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프랑스 국왕인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그는 스스로를 '술탄 중의 술탄, 지상의 군주에게 왕관을 하사하는 신의 그림자'라고 표현했습니다.

  1548년과 1553년에 연이어 오스만군은 계속 사파비를 침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서쪽 영토를 획득하고, 20년 동안 휴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파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압박과 청야 전술의 피해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결국 1555년 수도를 타브리즈에서 남동쪽의 카즈빈으로 천도했습니다.

  4. 제국의 황금기 - 아바스 1세 시대, 그리고 우르미아 전투(Battle of Urmia, 1604년)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이 사파비 제국의 첫 번째 수도 타브리즈, 두 번째 수도 카즈빈, 세 번째 수도 이스파한입니다.

 

  훗날 1588년 아바스 1세가 사파비 제국의 5번째 샤로 즉위했습니다. 즉위 당시에 또다시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3세와 10년 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1590년 조약을 맺고 약간의 남서쪽 영토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대부분을 넘겼습니다. 피해를 감수하고 전쟁이 멈추자 아바스 1세는 칼을 갈았습니다.

 

아바스 1세의 초상화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키질 바쉬'는 과거에는 사파비 왕조 창건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바스 1세에 이르자 왕에게 불충하고 지방 족장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아바스 1세는 이들을 해체하고 '샤 샤반'이라는 새로운 샤의 군대를 창설했습니다. 500문의 포병대와 12,000명의 보병을 총으로 무장시키고 이들은 샤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러시아, 스페인, 영국에 사절을 파견하고, 서양의 군사 전문가들을 관료로 채용하고 무기의 근대화에 성공했습니다. 봉건적인 영주제를 폐지하는 걸로 말미암아 중앙에 권력을 집중시켰고, 지방의 조세권을 확실히 장악하자 샤의 군대에게 충분한 봉급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맘 광장의 사진과 그림입니다. 원래 이름은 샤의 광장이었는데 이란 혁명이후 팔레비 왕조가 끝나고 이름이 바뀝니다.

  1597년 새롭게 옮긴 수도 이스파한에서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대도시가 생겼고 지금도 이스파한은 이란의 제 3의 도시입니다. '이스파한은 세계의 절반'이라는 이란의 유명한 속담까지 있을 정도죠.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이맘 광장(당시 샤의 광장)은 이 때 건설을 시작하여 1629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에게 쉴레이만 1세가 역사상 최고의 군주였다면 사파비 제국에게는 아바스 1세가 역사상 최고의 군주였던 셈입니다.

  아바스 1세는 정예화된 병력으로 복수를 시작했습니다. 부하르 칸국 상대로 잠깐이지만 발흐(Balkh,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도시)까지 나아갔으며 오스만 제국 상대로도 더 이상 청야 전술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우르미아 전투를 묘사한 지도입니다. 철저히 준비된 언덕 매복&포위로 오스만군의 선봉을 괴멸시킵니다.

  1604년 발발한 우르미아 전투가 아바스 1세에게는 영광의 순간일 것입니다. 전투가 사파비 장군 알라흐베르디가 기병을 이끌고 작전 장소까지 오스만군을 유인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아바스 1세가 매복군을 여러 개로 나누었는데, 언덕에 포병을 배치하고 남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일부는 알라흐베르디를 쫓아온 적군을 정면에서 막고 나머지는 오스만 본진을 타격하는 듯하다가 기민하게 방향을 바꿔 튀어나온 적군의 후미를 급습했습니다. 오스만군의 선봉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남은 병력은 그대로 퇴각했습니다. 이어진 수피얀 전투, 간자 전투에서 사파비는 연전연승했고 1600년대 전황은 사파비 제국의 승리였습니다.

  이렇게 옛 수도인 타브리즈가 포함된 아제르바이잔 영토를 재탈환했고 야전에서오스만을 이길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 뒤 두 나라는 휴전과 전쟁 재개를 반복하고, 1624년에는 거의 90년 만에 바그다드를 회복하는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남쪽에서는 반다르아바스, 바레인, 호르무즈 해협의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고 1622년 무굴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로 마무리했습니다.

  5. 제국의 황혼기와 몰락

 

 

  그러나 아바스 1세 사후 사파비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1638년 바그다드가 다시 오스만의 손에 넘어가고 사파비 왕조는 멸망할 때까지 이라크를 되찾지 못합니다. 15세기 ~ 16세기 오스만과 사파비의 전쟁에는 대부분 오스만이 승리했습니다. 찰디란 전투를 시작으로 100년이 넘는 기나긴 전쟁에서 사파비가 이겼던 건 거의 아바스 1세 시기 뿐이었습니다.

  7대 샤인 아바스 2세를 제외하고 후대의 왕들은 내치든 외치든 무능한 경우가 아주 많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대항해시대에 실크로드의 무역로 중요성이 예전같지 않았고, 사파비 왕조의 비단 산업도 무굴 제국의 비단 산업에 고전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1724년 지도에서 사파비 왕조는 사라졌습니다.

  1722년 수도 이스파한이 동쪽의 호타키 왕조에게 점령당한 건 사파비 왕조에게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죠. 왕조 영토 중에 중부와 동부의 대부분이 호타키 왕조에게, 카스피해 남쪽 땅은 러시아에게, 서부는 오스만에게 넘어가서 왕조가 산산조각났죠.

  수도가 함락되자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던 타흐마스프는 북쪽의 호라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훗날 새로운 샤가 되는 호족 나디르 베그를 만납니다. 몇 년 뒤 나디르 베그는 왕조를 재건했으나 실권자에 만족하지 않았고, 사파비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샤의 자리에 올라 아프샤르 왕조를 창건합니다.

훗날 새로운 왕조의 초대 샤가 되는 나디르 베그입니다.

 

출처: 미야자키 마사카츠, 『한눈에 꿰뚫는 중동과 이슬람 상식도감』, 이다미디어(2015)

고원, 『이슬람 역사 1400년 - 알라가 아니면 칼을 받아라』, 동서문화사(2002)

영문위키 <Battle of Chaldira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haldiran)'

영문위키 <Abbas the Great> (https://en.wikipedia.org/wiki/Abbas_the_Great)

영문위키 <Battle of Urmia (1604)>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Urmia_(1604))

영문위키 <Suleiman the Magnificent> (https://en.wikipedia.org/wiki/Suleiman_the_Magnificent)

<GeaCron Project>(http://geacron.com/hom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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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가 한 세기도 안 되어 무너질 뻔한 역사, 토목의 변과 북경 공성전(144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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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이라트와 북원

 

   오이라트는 알타이산맥 근처에 살던 부족이었습니다. 몽골 서북쪽 끝에 살던 산림 부족이었죠. '오이라트'라는 단어가 몽골어로 '숲의 사람들'을 뜻하기도 합니다.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세우자 13세기 초 그에게 복종했습니다. 오이라트의 지도자들은 몽골 제국의 신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14세기 후반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과 서달과 상우춘의 북벌로 원나라가 무너지고 명나라가 비상했습니다. 오이라트의 족장들은 새 시대가 열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명나라에 조공을 바쳤습니다.

   1368년 수도가 명나라에게 넘어가자 원나라의 11대 황제 혜종(토곤테무르)가 이끄는 잔존 세력은 북쪽 몽골 고원으로 피해서 북원으로 존속했습니다. 북원은 세력이 축소되었지만 계속 명나라와 다투었습니다. 1388년 북원의 3대 황제 천원제(토구스 테무르)는 명나라에게 패퇴하고 수도 카라코룸으로 오다가 예수데르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예수데르는 '조리그투 칸'이라는 이름으로 북원 대칸의 직위에 올랐지만 북원 황제의 칭호까지 이어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대칸과 황제, 두 칭호 중 대칸의 이름은 남았지만 북원 황제의 계보는 20년 만에 끝난 것입니다.

 

오이라트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북원의 엘베그 니굴세그치 칸과 울제이 테무르 칸의 초상화

   오이라트와 북원은 장기간 대립했습니다. 조리그투 칸이 막 대칸에 올랐을 때 오이라트는 내부에서 권력 이양이 진행 중이라 그를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북원의 내부 사정은 뒤죽박죽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상 부족 연맹이 되어서 내부에서도 죽고 죽인 것이죠. 북원의 대칸들 중 조리그투 칸부터 델베그 칸까지 7명의 대칸이 즉위했지만 평균 재위 기간은 4년도 안 될 정도로 혼란했습니다. 북원의 엘베크 칸 부터 북원과 오이라트는 본격적으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1399년 엘베크 니굴세그치 칸은 오이라트와의 전쟁에서 전사했고, 1412년 울제이 테무르 칸도 오이라트의 지도자 마흐무드에게 붙잡혀서 살해당했습니다. 오이라트는 서쪽 몽골 고원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2. 비상하는 오이라트 부족

   오이라트 부족들과 동쪽 몽골 부족들은 계속 대립했습니다. 명나라는 둘 사이를 이간질하고 분열시킴으로써 이이제이의 방향을 취했습니다. 오이라트는 울제이 테무르 칸을 생포하여 처형했던 마흐무드라는 부족 지도자 시대에 본격적으로 비상했습니다. 그는 델베그 칸을 꼭두각시 칸으로 만들기도 했죠. 1416년 마흐무드가 죽고 아들 토곤이 오이라트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토곤은 오이라트의 4부족을 연합시켜서 스스로 타이시라는 사령관의 이름을 칭했습니다. 토곤 타이시 시대에 오이라트는 몽골 초원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북원의 아다이 칸과의 대결에서 완승하면서 남은 북원의 보르지긴 왕가 세력을 사실상 속국으로 만들었죠. 토곤 타이시의 아들 에센에 이르러서 오이라트는 최전성기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1439년 지도자의 자리에 오르고 아버지가 진행했던 영토 확장 사업을 더욱 발전시켰습니다. 몽골 초원을 완전히 통합시켰고, 서쪽으로는 발하시 호수를 끼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만주, 북쪽으로는 바이칼 호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 영토의 일부를 빼앗는 위업도 달성했습니다.

 

에센 타이시 초상화

 

   3. 토목의 변 발발

   이제 주변국들 중 오이라트를 이길 수 있는 건 남쪽의 명나라뿐이었습니다.

   시작점은 무역 문제였습니다. 영락제는 1406년 몽골 부족들에게 조공을 통한 무역을 허용했습니다. 명나라는 마시(馬市), 즉 말을 파는 시장을 만들고 말과 가축 등을 수입하면서, 대신 비단을 필두로 한 의류와 식량 등을 수출하였습니다. 하지만 영락제 시절에는 문제가 없었으나 정통제 시대에 조공 사절단 규모가 60배 가까이 커지면서(50명 -> 3,000명) 부작용이 심각해졌습니다. 오이라트 상인들은 말을 팔면서 말 숫자와 금액을 속였고 주변 위구르의 상인들까지 가세해서 밀무역도 벌어졌습니다.

  이 문에 경제적으로 막심한 손해를 입은 명나라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정통제가 총애하는 환관 왕진이 앞장서서 오이라트와의 무역을 제한시켰고 말 가격도 오이라트가 제시한 가격의 20%만 지급했습니다. 화가 난 에센은 병력 2만 명을 이끌고 1449년 지금의 산시 성을 침공했습니다.

 

옛날 에센 타이시가 공격한 산시 성 지역입니다. 수도 북경과의 거리도 가까웠죠.

 

토목의 변을 기록한 지도입니다. 파란색이 오이라트(+북원) 공격 방향이고 붉은색 방향은 당나라입니다.

   명나라의 방어선은 오이라트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오이라트군은 군사적 요충지인 대동(위에서 오른쪽 지도의 DATONG)을 손에 넣고 동쪽으로 빠르게 진군했습니다. 이에 정통제는 기록상 50만 대군을 이끌고 북경을 나와서 에센 타이시와 맞섰습니다. 그러나 고작 2만의 군대에게 명나라의 대군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했습니다.

   명나라의 졸전은 이 50만 대군이 형편없는 오합지졸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애당초 병력이 과장되었을 게 뻔하고, 물론 정예군도 꽤 포함되었지만 잡병이나 귀족과 문신들까지 포함된 거품이 가득한 병력이었습니다. 심지어 황제 다음의 지휘관이라는 자가 앞에서 말한 환관 왕진이었습니다. 애당초 정통제는 주변에서 직접 진군하지 말아달라고 간언했는데 왕진이 부추겨서 나선 것이었습니다.

   무능한 지휘관이 이끄는 병력은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오이라트의 기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도망쳐서 토목보라는 요새(지금의 허베이 성 장자커우 시)에 도망치긴 했지만 금방 포위당했습니다. 토목보에는 물이 부족해서 버틸 수도 없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모든 보급로를 차단시켰고, 결국 정통제는 포로로 잡혔습니다. 대륙을 통일한 제국의 황제가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힌 끔찍한 일이라는 의미로 이 사건을 '토목의 변'이라고 부릅니다. 오이라트의 시각에서 보면 대첩이고 대승이겠지만요.

   4. 북경 공성전

  명나라 조정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황제는 물론 상당수의 조정 대신들도 죽거나 포로가 되었습니다. 패닉 상태에 빠진 많은 대신들이 남경으로 천도해야 산다고 주장했지만 병부시랑 우겸은 강력한 반대 의견으로 이를 막았습니다. 그는 "남쪽으로 도망하여 멸망한 송나라의 예를 못보았느냐!", "수도는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을 버리고 어찌 살길 바라는가?", "북경은 천리이므로 반드시 사수하여야 한다!"라는 말로 간신히 뜯어 말렸습니다.

 

새롭게 황제가 된 경태제
포로로 사로잡힌 정통제

   남아 있는 우겸과 조정 대신들은 정통제를 태황제로 부르고 그의 동생 주기옥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이렇게 경태제가 즉위했습니다. 그리고 남경과 각 도시로부터 엄청난 숫자의 병력과 군수물자를 북경으로 집중시키고 요새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명나라의 존속 걸린 결전을 준비했습니다.

   한편 에센 타이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낸 만큼 엄청난 야망을 품었습니다. 명나라를 손에 넣을 생각으로 정통제를 앞세워서 항복하라는 언질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는 우리는 이미 황제를 새로 추대했다는 강경한 태도와 함께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분노한 에센 타이시는 각 유목민족을 총동원한 10만 대군으로 북경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22만의 대군이 북경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9개의 성문에는 수많은 진지가 건설되어 있었고, 우겸과 지휘관들은 절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우겸은 "선봉이 물러서면 후위가 선봉을 참수할 것이요, 병졸이 장군을 버리고 도망치면 그 역시 참수할 것이요, 장군이 병졸을 버리고 도망친다면 그 또한 참수할 것이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북경 공성전에 나선 명나라 지휘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덕승문(德勝門) : 병부시랑 우겸, 무청백 석향(石享), 부총병 범광(范廣), 무흥(武興) 등

안정문(安定門) : 도독 도근(陶瑾)

동직문(同直門) : 광녕백 유안(劉安)

조양문(朝陽門) : 무진백 주영(朱瑛)

서직문(西直門) : 도독 유취(劉聚)

부성문(阜成門) : 진원후 고흥조(顧興祖)

정양문(正陽門) : 도지휘 이단(李端)

숭문문(崇文門) : 도독 유득신(劉得新)

선무문(宣武門) : 도지휘 양절(楊節)

   여기에 남쪽 외성인 중도성(中都城)의 창의문(彰義門)에는 우첨도어사 왕횡(王竑)이 이끄는 도독 모복수(毛福壽), 고례(高禮)의 군대가 수비했고, 북경성 내부에는 도독첨사 왕통(王通), 좌부도어사 양선(楊善), 병료급사중 정신(程信)이 배치되었습니다.

   1449년 10월 11일, 오이라트의 공격으로 공성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우선 창의문을 노렸지만 선봉대만 수백명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오이라트군의 앞에은 지난 번 토목의 변과 차원이 다른 우주방어선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명나라는 강력한 대포와 화약을 배치했습니다.

 

   명나라의 화력에 놀란 에센 타이시는 잠깐 공격을 중단했습니다. 이틀 뒤에 화기를 쓸 수 없을 것만큼 비가 내리자, 만 명의 병력으로 덕승문 쪽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우겸은 진지 지붕이 있는 곳에 이미 포병대를 배치시켰고. 오히려 에센의 동생을 포함한 오이라트의 지휘관들까지 잃는 패배만 입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격노해서 여러 성문을 계속 공격했지만 포탄과 화살만 날아왔습니다. 명나라 지원군이 속속들이 북경에 도착했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그는 10월 15일에 퇴각했습니다.

   에센 타이시는 오이라트로 돌아온 뒤에도 정통제를 송환하는 대가로 뭔가 얻어내려고 했지만 명나라는 협상에서 조금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무 대가 없이 1450년 정통제를 명나라로 돌려보냈습니다.

   5. 그 이후 정치상황과 북경 공성전의 의의

   경태제는 돌아온 형 정통제를 남궁에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경태제 파와 정통제 파로 나뉘었고, 경태제는 더욱 강경하게 나가기 위해 1452년 황태자였던 정통제의 아들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을 새로운 황태자로 책봉했습니다. 그러나 경태제의 아들은 다음 해에 병으로 사망하고 경태제 본인까지 몇 년 뒤 병에 걸려 끙끙 앓고 말았습니다.

   기회를 노린 정통제 파는 1457년 쿠데타를 일으켜 경태제를 폐위시키고 옛 황제 정통제를 재차 황제의 자리로 올렸습니다. 이 사건을 '탈문의 변'이라고 부릅니다. 경태제는 병이 악화되어 얼마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복위한 황제는 예전처럼 '정통'이라는 연호를 버리고 '천순'이라는 연호를 썼습니다. 천순제는 지난날 경태제를 세운 우겸을 처형시켰습니다. 반란을 일으켰다는 이유였죠. 우겸은 담담하게 처형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문무에 밝았고 청빈한 인물이라 재산을 몰수했는데도 가진 보물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겸을 처형한 건 쿠데타를 일으킨 장수들이 부추긴 것이 컸고, 천순제도 우겸을 죽인 걸 크게 후회했습니다.

명나라를 구했으나 숙청당한 병부시랑 우겸

   한편 에센 타이시는 1452년 동몽골의 황족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 타이순 칸이 명령에 따르지 않고 자신을 공격하자 바로 진압하여 살해했고, 황족들 중 어머니가 오이라트 출신이 아니라면 모조리 죽였습니다. 그는 동몽골의 기록, 문서, 족보까지 거의 대부분 불태웠습니다. 이듬해 그는 타이순 칸의 뒤를 이은 아크바르진 칸까지 죽인 다음 스스로 대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타이시라는 칭호에 만족하지 못한 에센은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몽골 부족들은 칭기즈 칸의 직계 후손 만이 대칸에 오를 수 있었던 규율을 깨뜨린 에센을 향해 대대적인 반란을 개시했죠. 대혼란 상태에서 그는 재위한지 1년 만에 부하의 손에 죽었습니다.

   에센의 죽음 이후 오이라트 부족도 분열되었고, 동몽골에 의해 서쪽으로 밀려났습니다. 오이라트는 부족으로서 존속했지만 한때나마 강성했던 오이라트 제국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북경 공성전에서 에센 타이시가 승리했다면 명나라는 건국한지 80년 만에 남북으로 분열되거나 멸망하는 결과를 맞이했을 것입니다. 또다시 유목민족이 중국 대륙의 중원을 정복했을 것이고, 동아시아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 것입니다. 우겸의 업적을 통해 리더 한 사람에게 모든 걸 기대하는 맹신은 착각이겠지만, 뛰어난 리더로 인해 크게 발전하는 경우는 미래에도 계속 나올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출처: 영문위키 토목의 변( https://en.wikipedia.org/wiki/Tumu_Crisis )

나무위키 토목의 변( https://namu.wiki/w/%ED%86%A0%EB%AA%A9%EC%9D%98%20%EB%B3%80 )

도서 <명나라 역대 황제 평전>

위키백과 오이라트부 ( https://ko.wikipedia.org/wiki/%EC%98%A4%EC%9D%B4%EB%9D%BC%ED%8A%B8%EB%B6%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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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제독 호레이쇼 넬슨, 과감함으로 해양을 지배하다 - 코펜하겐 전투(18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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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투 배경

 

  1800년 11월, 러시아는 발트 해에 영국 선박의 입출항 금지 명령을 내립니다. 러시아, 덴마크, 프로이센, 스웨덴은 무장 중립 동맹을 결성했고, 그들은 영국이 발트 해와 엘베 강에 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덴마크 역시 자국 항구의 영국 선박의 출입을 중단시켰습니다. 영국과 동유럽의 무역은 최악의 상황에 치달았습니다.

 

  당시 영국은 지금의 폴란드 지역 등 동유럽 내륙에서 많은 곡물을 수입했었습니다. 이는 산업혁명이 활발히 진행중인 것도 이유였습니다. 영국으로서는 다가올 식량 부족 문제에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영국 본토에서 식량을 어느정도 자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799년~1800년, 영국은 심한 흉년을 겪고 있었습니다. 1799년에는 소빙하기 현상으로 인해 비가 지나치게 쏟아지고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반대로 1800년에는 아조레스 고기압의 확장으로 강수량이 지나치게 감소했습니다. 그 해 여름에 큰 가뭄이 오고, 기후변화로 인해 농작물이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1799년~1800년의 영국의 밀 수확량은 예전 몇 년 동안의 평균 수확량에 비해 절반, 75% 수준이었습니다. 1799년 10월~1800년 9월까지 밀 수확량과 수입량을 합쳐도 영국 국민들이 소비해야 할 밀 양의 60% 뿐이었습니다. 1799년~1801년 밀 가격은 3배 이상 올랐습니다. 식량 부족에 참다못한 영국 백성들은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영국 정부는 무료 급식소를 설치하고, 곡물 수입상에 대해서 정부 보조금을 주면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근본적인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1800년 3월 영국 내 한 포스터에는 이런 메시지가 있었다고도 합니다.

 

“빵 아니면 피… 자유를 위한 프랑스인들의 투쟁을 당신들은 보지 못했습니까?”

 

  2. 전투 준비

 

  이미 식량 부족 문제가 커지던 상황이었습니다. 국가의 명운이 달린 시기, 영국은 무역로를 회복하기 위해, 북유럽의 동맹을 응징하기 위해 함선을 모아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1801년 3월 영국 전함들은 북해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발트해에 있는 러시아 항구까지 공격하는 건 영국 해군이라고 해도 무리였고, 덴마크를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습니다.

 

Hyde Parker

 

Horatio Nelson

  영국은 해군제독 하이드 파커 경을 사령관으로, 호레이쇼 넬슨 중장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들은 한 달이 지나 코펜하겐에 도달했습니다. 덴마크는 해역이 좁은 코펜하겐에 강한 방어벽을 구축했습니다. 요새들이 남북으로 쭉 방어선을 형성했고, 해안가 포대의 화력은 강력했으며, 수비를 위해 배치된 수십 척의 덴마크 함선 또한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넬슨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 해도를 포함한 갖고 있던 모든 정보를 검토했습니다. 코펜하겐 항구는 모래톱지대이며 해풍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곳이었습니다. 파커 경이 덴마크 함대가 항구 밖으로 나올 때를 노리자고 말하자 넬슨은 강력하게 설득했습니다.

 

  “덴마크의 방어벽은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에게나 겁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기동력으로서 덴마크 대포를 무력화할 것입니다. 모래톱은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과거 이집트의 나일 강에서도 우리는 모래톱을 이겨내고 프랑스군을 대파한 적이 있습니다. 해풍에 너무 민감하게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공격대형을 바꾸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접근이 용이한 남쪽 방향에서부터 공격하겠습니다. 사령관님과 예비 병력은 코펜하겐 북쪽에 대기해주십시오.”

 

 

코펜하겐 전투 지도

 

  3. 전투 과정

 

  1801년 4월 2일 아침,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넬슨은 파커 사령관 대신 대형 함선 12척, 프리깃 함선 5척, 폭탄선과 화공선 등의 소형 함선들을 이끌고 전장을 지휘했습니다. 미리 파악한 모래톱을 최대한 회피하면서 공격했습니다. 넬슨은 해풍에 따라 공격대형을 변화시키고, 최대한의 기동력을 이용해 해안포대의 공격에 대응했습니다. 영국 함선은 코펜하게의 부두를 향해 공격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반적으로 중무장한 함선이라고 해도 해안가 포대에 파손될 수 있어서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지만, 넬슨은 목표 지점을 향해 위험을 무릅씁니다. 강의 조류나 미처 피하지 못한 모래톱 때문에 영국 함선 중 3척(Bellona호, Russell호, Agamemnon호)이 좌초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스케치로 만들어진 코펜하겐 전투 지도(검은 점이 영국 함선입니다.)

 

  영국군은 적의 목덜미를 쥐기 위해 코펜하겐 도시를 최대한 폭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파열탄을 집중적으로 발사해서 덴마크의 기함인 Dannebrog호를 파괴했습니다. 덴마크의 피셔 제독은 급히 다른 함대로 피했습니다. 덴마크군은 강력하게 저항했고, 서로 일제사격 등 셀 수 없는 포격을 주고받았습니다. 전투 시간은 네 시간을 넘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파커 제독은 패전을 염려하여 ‘교전 중지 및 퇴각 신호’를 보냅니다. 하지만 넬슨은 승리를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실명한 눈에 망원경을 대고 신호를 확인했습니다. 그는 몇 년 전의 전투로 한 쪽 눈을 실명한 상태였는데, 퇴각 신호의 깃발을 보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신호가 보이지 않는군.”

 

  퇴각 신호를 모른척하는 넬슨

  오후 2시 쯤, 코펜하겐 항구의 해풍이 잦아들고 있었습니다. 움직임이 용이해진 영국 함선은 덴마크 함선을 포위하고 압도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넬슨은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덴마크 함선 가운데 Nybrog호와 Aggershuus호가 영국 함선의 포탄을 맞고 폭발했습니다. 덴마크의 전함은 포위된 채 항복했으며, 해안포 사격도 점차 무력해졌습니다. 오후 2시 반, 덴마크 방어선의 남쪽과 중앙이 본격적으로 무너졌습니다. 영국은 12척의 배를 나포하기까지 했으며, 마침내 전투는 영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4. 전투 이후와 총평

 

  코펜하겐 해전에서 영국군은 12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덴마크군은 사상자 1700명과 포로 4300명을 냈습니다. 영국군 역시 많은 피해를 입었기에 상륙 후 도시 점령은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은 함선 내포 이외에도 대형 박격포라는 전리품도 획득했습니다. 도시를 폭격할 수도 있었기에 덴마크의 프레데릭 황태자는 정전협정에 동의했습니다.

 

  영국과 덴마크 전쟁의 발단은 영국의 날씨와 식량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곡식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은 전쟁을 각오했습니다. 전투 이후 러시아나 북유럽 국가들은 영국에 쉽사리 맞서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함부로 영국을 적대하지 못했고, 러시아-덴마크-스웨덴-프로이센의 무장 중립은 깨졌습니다. 코펜하겐 해전은 영국과 덴마크에게 분기점이 될만큼 중요한 해전이었습니다. 이 해전의 패배 이후 덴마크의 해상 영향력은 추락했지만, 영국의 해상 영향력은 날아올랐으며 그들의 선박은 코펜하겐 항로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국 함대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넬슨의 치밀한 작전과 기민한 지휘력, 기회를 확실히 잡기 위해 상관의 명령을 임기응변으로 무시한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잘 훈련된 영국 선원들은 우월한 포술을 발휘할 수 있었고, 지속되는 원정 포격전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넬슨의 단호한 공격적 성향이 대단히 잘 나타난 전투입니다. 전투 해역이 좁았지만 날카로운 판단으로 말미암아 중요한 위치를 점거해서 승리한 것입니다.

 

  코펜하겐 전투의 공로로 넬슨은 자작에 서임되었습니다. 그의 승전하면 일반적으로 트라팔가르 해전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본토에서 덴마크까지 도달한 이 코펜하겐 전투와 본토에서 이집트까지 도달해서 승리한 아부키르만 해전(나일 강 해전)도 백미입니다. 명실공히 호레이쇼 넬슨은 장거리 항해라는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난공불락의 요새를 공략했던 역대 최고의 해군 제독 중 한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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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말기 위나라와 오나라의 최대 공방전: 동흥전투(252년)와 합비신성전투(2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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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폭풍전야

 

  위촉오 삼국시기 중 250년대 초반은 권력 승계의 시대였습니다. 251년에 사마의가 죽고 아들 사마사가 위나라의 권력을 승계하고, 252년에는 손권이 죽고 손량이 오나라의 제위에 오릅니다. 253년에는 비의가 죽고 강유가 촉나라의 군사권을 잡습니다.

  이 시기 오나라의 대장군 제갈각이 전권을위임받습니다. 제갈각은 제갈근의 아들이고 제갈량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제갈서, 제갈탄 등 제갈씨 성을 가진 인물은 위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제갈각은 위나라의 국경 바로 앞의 '동흥'이라는 곳에 동흥제라는 제방을 건축합니다.

 

 

 

  (하늘색 선 왼쪽이 위나라 영토, 오른쪽이 오나라 영토입니다.)

 

  위 지도의 푸른색 호수가 소호입니다. 소호는 위나라의 영역에 있었지만 오나라가 옆의 강을 제방으로 막으면 소호의 물이 막히게 됩니다. 자칫 범람할 위험도 있었죠. 제갈각은 이를 노리고 여기에 수비를 강화하고자 동흥제의 양쪽으로 성을 쌓습니다. 옆에 산이 있어서 수비하기에도 용이했습니다. 성 하나당 천 명의 병력만을 남겨두고 제갈각은 본진으로 귀환합니다.

 

  2. 동흥전투의 시작

 

 

 

(맨 왼쪽 파란색 지점이 강릉, 보라색 지점이 무창, 청록색 지점이 동흥으로 향하는 위나라 군대고 분홍색 지점은 오나라 구원군의 방향입니다.)

 

  제갈각의 도발에 사마사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오나라를 침공했습니다. 정남장군 왕창, 진남도독 관구검, 진동장군 제갈탄과 정동장군 호준에게 각각 강릉, 무창, 동흥 공격을 지시했습니다. 제갈탄과 호준은 7만 대군의 주력 병력을 이끌고 동흥을 공략했고, 사마소가 감군의 직책에서 이 둘을 감독했습니다.

  무창에는 대치전이 계속되었고, 강릉은 워낙에 요충지인 곳이라 오나라가 쉽게 내주지 않았습니다. 제갈각은 무창과 강릉에 지원을 하면서도 4만 대군의 지원군과 정봉, 여거, 당자, 주이 등의 휘하 장수와 함께 동흥에 당도합니다. 동흥의 두 성은 각각 병력이 천 명밖에 없었지만 지원군이 올 때까지 위나라 대군의 공세를 충실히 방어합니다.

  제갈각과 정봉은 행군이 지지부진 하다는 사실을 알고 별동대를 조직합니다. 이는 위나라가 병력을 강에 놓은 부교로 이동시키고 제방 위에 많은 병력을 배치시켰기 때문입니다. 정봉은 3천 명의 별동대를 제갈각은 평북장군 정봉에게 군사 3000명을 주어 장강을 따라 나가고 여거, 당자, 주이에게 나머지 병력을 주어 따르게 했습니다. 정봉은 병력을 30척의 배에 나누어서 싣고 빠르게 진군합니다.

 

  3. 평북장군 정봉, 전장을 뒤흔들다

 

  정봉이 도착했을 때 절묘하게도 위군은 공성을 중단하고 연회를 벌이면서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정봉과 그의 별동대는 칼과 방패만 가지고 제방에 올랐습니다. 갑옷이 없어서인지, 병력이 적어서인지 위군은 오군을 보고 크게 비웃으며 방심했습니다. 정봉과 오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나라의 주둔지를 깨뜨렸고, 여거, 당자, 주이가 이끄는 오나라 대군이 뒤를 이어 도착하자 놀란 위군은 앞다투어 도망쳤습니다.

  그 뒤에 전투는 일방적이었습니다. 부교에 너무 많은 퇴각 병력이 타서 무너지기도 했고, 주이의 별동대 수군으로 인해 부교가 끊어지기도 했습니다. 퇴각로가 막히자 위군이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거나, 도망치지 못하고 죽는 병력도 셀 수 없었습니다. 호준의 휘하 장수인 환종과 한가로 정봉에게 죽었습니다. 호준은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수만 명의 위군이 죽었고, 강릉과 무창 방면에 있었던 왕창과 관구검은 동흥에서의 패전 소식을 접하고 후퇴했습니다. 전투의 대승으로 오군은 수천 대의 수레와 가마, 수천 마리의 소, 말, 노새, 당나귀를 노획하고, 빼앗은 물자와 무기가 산처럼 쌓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4. 동흥전투 이후의 향방

 

  패전한 위나라에는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위나라 조정에서는 일선에 장수들을 처벌해야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서쪽 지방에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심각한 대패에 사마사는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면서 본인과 동생 사마소의 즉위를 강등시키면서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반면 오나라의 제갈각은 대승에 고무되어 대규모의 북벌을 주장합니다. 입지가 탄탄해진 그는 지금이 기회라고 주장하며 반대 목소리를 눌렀습니다. 동흥전투 이후 3개월 만에 자그마치 20만 대군을 모아서 합비로 진군합니다. 삼국지에서 20만 명이 한 전쟁에 동원된 사례는 손에 꼽을 만큼 대병력이었습니다.

 

 

 

 

  5. 3,000 vs 200,000: 수성의 장특

 

  253년 3월, 제갈각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신성을 포위합니다. 이 때 위나라의 장특이라는 장수가 합비신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배송지주-장특전'에 의하면 신성 안의 병력은 겨우 3천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90여일간 필사적으로 수성하지만, 제갈각이 토산까지 쌓으며 공격하고 성의 곳곳에 구멍이 생깁니다. 풍전등화의 상황에 이르자 장특은 고심 끝에 항복하겠다는 말을 전합니다.

 

  ["오늘 나는 다시 싸울 마음이 없다. 그러나 우리 위나라의 법에는 공격을 받아서 100일이 넘었는데도 구원병이 오지 않게 되었다면 비록 항복을 하여도 그 집안사람들이 연좌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적의 공격을 받은 이래로 90여 일이 지났고, 이 성 안에는 본래 4천여 명이 있었는데, 전사자가 이미 반을 넘겼지만 성이 비록 함락된다고 하여도 오히려 이 반쯤 남은 사람들은 항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돌아가서 서로 상의하여 좋은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해서 내일 일찍 명단을 보내겠고, 또한 인수를 버리는것으로 신표를 삼겠다."]

 

  장특은 오군 쪽으로 인수를 던지고 제갈각은 공격을 중단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항계였고, 오군이 공격을 중단한 날 밤에 성 안에 있던 목재로 성벽을 채우면서 성을 수리합니다. 다음 날 장특은 "나는 다시 싸우다가 죽을 뿐이다."라고 전하죠. 분노한 제갈각은 재차 공격을 명령하지만 오군의 피해는 막심해지기만 했습니다. 심지어 여름이 되어 전염병이 창궐하고 그렇게 병력 태반이 병에 걸리거나 공성전에서 죽고 다치는 사태로 귀결됩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지자 오군은 뒤늦게 퇴각하지만 관구검과 문흠의 위나라 추격병으로 또다시 많은 피해를 입고 간신히 퇴각합니다.

 

  6. 대패의 후폭풍

 

  오나라는 합비신성의 패전으로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인구 250만명인 오나라에서 20만명의 대군이 만신창이를 입었으니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져갔죠. 그러나 제갈각은 실패를 인정해도 시원찮을 시기에 주변 사람들을 탓하면서 재차 북벌을 주장합니다. 지난날 숙부 제갈량이 1차 북벌 실패의 책임을 느끼고 즉위를 스스로 낮췄던 것과는 비교되는 일입니다. 결국 오나라에는 당해 내분이 일어났고 제갈각은 암살당합니다.

 

  반면 위나라와 사마씨 형제의 권력은 오히려 공고해졌습니다. 오나라는 그 이후 동흥 전투만큼 위나라 상대로 수만 명을 살해하는 전공을 다시 세우지 못합니다. 물론 그 뒤에도 양국 사이에 계속 충돌은 있었지만 오나라는 유의미한 전과를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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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 대한 감상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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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voakorea.com/world/world-today/armenia-azerbaijan-eu-us-tariffs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종전 합의... EU, 미국에 징벌적 관세 부과

세계 여러 나라의 주요 소식을 전해 드리는 ‘지구촌 오늘’입니다.   진행자) 오늘은 어떤 소식들이 있습니까?  기자) 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했습니다. 유럽

www.voakorea.com

 

  1.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의 결말

 

  작년 이슈를 뜨겁게 달구었던 전쟁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전쟁일 것입니다. 2020년 9월 27일부터 진행된 아르메니아(+아르차흐 공화국) vs 아제르바이잔 전쟁이 11월 10일자로 끝났습니다. 10월 10일에도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5일 만에 협정이 깨졌고, 한 달 동안 전쟁이 다시 이어지다가 재차 협정을 맺었습니다. 전세가 아제르바이잔 쪽으로 기운 상태에서 협정이 체결되어서 아르메니아 군대가 이를 파기하기는 힘듭니다. 캅카스 지역에 위치한 이 두 나라 간의 전쟁이 다시 벌어지는 건 당분간 힘들 거라고 봅니다.

 

  이 전쟁은 아제르바이잔 영토 남서쪽에 있는 '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미승인국이 주요 전장이었습니다. 1991년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아르차흐 공화국은 영토 분쟁 지역이었습니다. 북키프로스 공화국이 터키의 괴뢰정부가 있고 터키군이 점령하고 터키계가 대부분인 지역인 것처럼, 아르차흐 공화국도 사실상 아르메니아의 괴뢰정부가 있었고 아르메니아군이 주둔하고 아르메니아계가 주도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이 전쟁에서 아르메니아와 함께 싸웠습니다.

 

지도의 ARTSAKH가 아르차흐 공화국입니다. 도시들 중 밑줄이 쳐진 'Stepanakert'가 수도 스테파나케르트이고 아래 도시인 'Shushi'가 슈샤입니다.

 

 

  결론을 재차 말씀드리자면 이 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완승입니다. 지도에서 보시면 각 도시들 가운데 이름이 밑줄로 쳐진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가 아르차흐 공화국의 수도인데, 수도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슈샤(shushi)라는 제 2의 도시가 아제르바이잔에게 점령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산맥이 많아 아제르바이잔군이 다가가기 힘들었는데도 공방전 끝에 점령한 것입니다. 슈샤 산맥을 아제르바이잔이 장악한 것은 스테파나케르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요충지를 점령했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이 지속되었다면 아르메니아는 더더욱 불리한 상황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2.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1988-1994)과 아르차흐 공화국

 

  1980년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자치를 보장받고 있었습니다. 산맥 지대인 나고르노카라바흐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인 자치주였습니다.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하면서 아제르바이잔과 대립했습니다. 그 뒤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각각 자국에 살던 아르메니아계와 아제르바이잔계 사람을 추방시키는 등 대립했습니다. 소련 해체 후 그들은 완전히 독립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병력의 열세에도 캅카스 지역에 남아 있던 소련 부대들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는 분쟁 초기 기간이었는데, 고립된 아르메니아군은 소련 공군의 헬기를 통해 서쪽의 아르메니아 본토에서 무기를 지원받았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전쟁은 본격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옛 소련군 장교들의 상당수는 용병으로 고용되었습니다. 양국은 러시아로 떠나면서 남겨진 헬리콥터와 항공기 등 소련군의 장비를 확보하는데 혈안이었고, 소련군 고위 장교들에게 돈을 주고 무기를 구입했습니다. 1991년 9월 2일,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자치주 지도자들은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전격적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아르메니아에 합병되겠다고 말했습니다.

 

빨간 줄 안의 땅이 1991년 독립 당시의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영역이고, 전쟁이 끝나가는 1994년 초 지도의 갈색 땅까지 영토를 넓혔습니다.

 

 

  1992년 2월, 아르메니아인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 국경을 연결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했습니다. 대대적인 공세는 성공했으며, '라츤 회랑(Lachin Corridor)' 이라는 도로 연결망을 확보했습니다. 러시아가 고립된 곳에 보급품을 공급하기 위해 헬기를 보내주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3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라츤 회랑을 절단하기 위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러시아가 아르메니아를 지원한 이유 중 하나가 그루지아(조지아)와 체첸에 투입되어있는 러시아군의 후방을 안전하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해 아르메니아는 미국으로부터 100만 달러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미국에 이민을 간 아르메니아인들의 로비가 결정적이었습니다. 1993년 3월, 아르메니아군은 '켈바드야르(Kel’badjar)' 전투에서 아제르바이잔 육군 2군단을 포위 및 격파했습니다. 7월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도시 아그담을 점령했고, 1994년 1월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기점으로 서쪽과 남쪽의 아제르바이잔 영토를 거의 빼앗았습니다. 1994년 5월 16일 전쟁이 끝났고, 아제르바이잔은 동원한 병력 4만2천명 ~ 5만6천명 중 2만5천명 ~ 3만명이 전사하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아르메니아에 비해 아제르바이잔은 고립되었습니다. 터키가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해주기는 했지만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인 지원까지는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991년 독립을 선언한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국제법상으로 인정받지 못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습니다. 7000 제곱킬로미터의 막대한 땅을 얻는 전과를 거두고, 그들은 2017년 2월의 국민투표를 거쳐 '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국명을 바꿨습니다.

 

지도의 'Corridor de Lachin'이 라츤 회랑으로, 아르메니아와 아르차흐공화국을 가장 가깝게 연결하는 핵심 연결선입니다.

 

 

  3. 다시 발발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 대한 감상

 

  1994년의 휴전 이후에도 양국의 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2016년 충돌에도 양쪽이 합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만큼 분쟁지역이었습니다. 올해 전쟁이 터졌는데 애당초 아제르바이잔은 국력에서 아르메니아를 압도했습니다. 인구가 아제르바이잔이 1000만이고 아르메니아가 300만으로 차이가 나고, GDP도 3배 이상 아제르바이잔이 앞섰습니다.

 

  아제르바이잔군은 전쟁 초기부터 일방적으로 몰아붙였습니다. 남부 전선을 집중적으로 타격했죠. 하드루트(Hadrut)시와 주위의 마을들을 점령하고, 이란 국경에 가까이 있는 아라스 강을 따라 남쪽 영토를 계속해서 장악했으며, 슈샤 전투의 승리로 전쟁을 종결지었습니다. 아르메니아와 아르차흐 공화국도 유리한 산악 지형으로 방어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와 이스라엘으로부터 드론이라는 무인 공격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드론의 활용으로 산악 지대에 자리잡은 아르메니아군을 철저히 타격하면서 연전연승했습니다. 물론 아르메니아도 100대가 넘는 드론을 격추시켰으나 고지대에 자리잡은 포병이 점점 무력화되었습니다.

 

현재 아르메니아 총리인 니콜 파시냔(왼쪽)과 전임 총리인 세르지 샤르키샨(오른쪽)

 

  이 전쟁의 교훈은 외교라고 생각합니다. 국력 차이도 현격했는데 외교적으로도 아르메니아는 불리한 입장에 놓였습니다. 내륙국인 아르메니아가 항구를 조지아로부터 임차해서 사용했는데 전쟁이 터지고 조지아가 군수물자의 통과를 막았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은 터키, 이스라엘까지 완벽하게 우호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북쪽에 있는 조지아는 아르메니아로 들어가는 군수물자를 끊어주고, 남쪽에 있는 터키는 전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해주고 이스라엘은 무기를 공급했습니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이 바쿠 유전으로 대표되는 산유국이라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2018년 4월까지 아르메니아의 총리를 지냈던 세르지 샤르키샨은 철저하게 친러시아 행보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샤르키샨이 민주화 운동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고, 이후 니콜 파시냔 총리는 어설프게 친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러시아의 심리를 거스르는 실책을 범했습니다. 서방 국가들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보여서 러시아도 아르메니아가 패배하는 것에 그러려니 하는 태도였죠. 아르메니아는 이렇게 상황이 불리하면 최소한 터키와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란을 비롯한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이라도 설득시켜야 했는데 괜히 몇몇 서방 국가들에게 기대하다가 일방적인 패전을 맞이한 것입니다. 프랑스 등이 아르메니아에 지지를 표시했다고 한들 현실적으로 그들은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중재하지 않았습니다. 유럽과 미국은 코로나 때문에 경제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최악의 나날을 보내고 있고, 특히 미국은 대선에 초점이 맞춰질 때라 아르메니아에 별로 관심이 없었죠. 그 밖에도 아르메니아는 우크라이나 내전(돈바스 전쟁) 시기에 동부 친러 반정부군을 지원하겠다고 의용군을 보내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도 최악이 되었습니다.

 

과연 이 드론이 앞으로의 전쟁에서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될까요?

  이 전쟁의 종전 내용은 우선 양국의 군대가 더 이상의 개전을 중단하고, 아제르바이잔이 점령한 땅을 아르메니아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수도 스테파나케르트는 아흐차르 공화국에 남지만, 점령한 슈샤는 아제르바이잔의 몫이 되었습니다. 아그담, 라츤, 캘배제르는 가까운 시일에 아제르바이잔에 반환되지만, 아르메니아와 스테파나케르트를 잇는 라츤 회랑은 아제르바이잔 쪽에서 인정하고 통행을 보장시켜주는 것입니다. 라츤 회랑에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5년 동안 주둔하고, 전쟁 포로와 전사자 시신은 서로 교환하는 조항도 있습니다. 사실상 아제르바이잔은 영토 상으로아흐차르 공화국을 포위하게 되었습니다.

 

지도의 연두색은 이미 아제르바이잔의 땅이 되었고 노란색도 가까운 시일에 아제르바이잔의 땅이 될 곳입니다. 이 전쟁으로 아르차흐 공화국은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였습니다.

 

 

  이번 전쟁은 많은 점을 시사하는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비 병력에 비수를 꽂는 드론이 이 전쟁에서 끊임없이 사용되고 그 효과가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전에서 드론의 위력이 더욱 커질 것이라 생각하며. 세계 각국이 드론 부대를 대대적으로 늘리지 않을까 하는 예감도 듭니다. 우리나라도 드론을 더욱 늘리고 개발하는 것으로 검토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전쟁에서 외교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인구와 경제력으로 대표되는 국력의 차이가 전쟁을 얼마나 좌지우지 하는지 한 번 더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특히나 현대전으로 올수록 국력의 중요도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참고: BBC 기사( https://www.bbc.co.uk/news/amp/world-europe-54882564 )

 

  영문위키 슈샤 전투 (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husha_(2020) )

 

  1988-1994 나고르노 카라바흐 전투 자료 ( https://web.archive.org/web/20140821205403/http://www.acig.org/artman/publish/article_280.shtml )

 

  아시아경제 기사 ( https://www.asiae.co.kr/article/20201101140805987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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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대전은 확실히 세계사 흐름을 바꿔놓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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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 사진에서 파란색이 전진이고 노란색이 동진입니다.

  383년 11월 벌어진 비수대전은 전진의 100만 대군과 동진의 8만 명이 맞선 전투였죠. 심지어 서역으로도 10만명의 원정군을 더 보냈다고 합니다. 물론 이건 기록상에 나오는 기록이고, 실제 전진의 병력은 3분의 1도 안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4세기 후반 전진의 군주 부견은 대륙 통일을 거의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370년 전연을 정복하고, 북벌로 전진과 맞섰던 환온이 죽자 역공을 가해서 한중을 비롯한 서쪽의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378년에도 동진이 가진 양양 영토를 가져갔죠. 핵심이었던 화북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과거 삼국지의 촉나라 땅까지 손에 넣으면서 전진과 동진의 격차는 압도적이었습니다. 반면 동진이 가진 남쪽 영토는 개발이 아직 안 된 곳이 너무 많았죠. 당시 두 나라의 국력 격차는 삼국지의 위나라와 오나라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비수대전이 벌어진 강력한 원인은 위대한 재상이었던 왕맹이 375년 죽은 게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군대를 이끌고 전연을 평정하고, 부견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호족들을 정리하면서 최전성기 동진을 이끌었던 대단한 인물이었죠. 내정도 탄탄했고요. 왕맹은 죽기 직전 "동진을 도모하지 말고, 내치에 집중하시고 선비족과 강족을 멀리하고 때가 되면 제거하십시오"는 유언을 남깁니다. 왕맹이 죽자 부견은 하늘이 왜 그를 이렇게 빨리 데려가냐고 원통해했습니다. 왕맹은 부견 휘하의 선비족의 모용수와 강족의 요장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맹이 죽고 대략 7년이 지나자 부견은 거대한 병력을 동원할 마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회수 정벌에서 동진의 군대에게 막히는 일도 일어나고, 더 이상 소규모의 병력을 통한 점진적인 정복에 싫증이 난 것인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내와 아들들, 신하들과 스승으로 모시던 스님들까지 부견을 말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맹이 멀리한 다음 숙청하라고 간언했던, 선비족 출신의 명장이었던 모용수가 찬성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전진의 기세가 막강했습니다. 운성이 모용수에게 떨어지고, 수양성이 부융에게 떨어지고, 수춘성 근처까지 전진의 군대가 들이닥쳤죠. 그 다음 비수를 사이에 두고 거대한 전진의 대군과 한참 적은 동진의 군대가 맞섰습니다. 동진의 총사령관 사현은 대군을 조금 뒤로 후퇴시킨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부견은 의심했지만 우선 제의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후퇴시켰습니다. 설사 동진의 거짓말이었고 뒤를 공격한다고 해도 바로 역습해서 섬멸시키겠다고 계획했죠.

   그러나 부견의 몰락은 시작되었습니다. 부견이 군대를 뒤로 이동시켰는데 후속 부대에게 그 이유를 제대로 명령내리지 않았습니다. 전진의 대군은 혼란에 빠졌고, 심지어 겉으로는 전진에 항복했으나 부견을 제대로 섬길 마음이 없었던 주서라는 지휘관이 "전진이 패배했고 동진이 이겼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서 대군이 순식간에 붕괴되었습니다.

   그 때 동진의 기병이 비수를 도하해서 뒤를 급습했습니다. 지리멸렬한 대군으로 부견의 계획은 실행할 수 업섰고, 전진의 병사들은 살 길을 찾아 도망갔습니다. 부융은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사망했고, 부견도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남은 전진의 병력도 동진군의 공격에 패퇴했습니다. 호위병도 없이 혼자 도망간 부견은 모용수의 군대와 접촉해서 전진으로 돌아갔습니다. 부견이 직접 비수대전에서 거느리던 87만의 원정군 병력 중 제대로 수습할 수 있었던 병력은 10만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비수대전은 부견의 입장에서 참담하게 끝났습니다. 역사에 남을 참패 이후 전진은 분열의 길로 추락하죠. 왕맹이 경고했던 이민족 출신의 모용수는 후연을 건국하고, 요장은 후진을 건국하고, 모용홍도 서연을 건국했습니다. 중국 역사는 또다시 분열의 역사와 마주했습니다. 다만 모용홍은 오래 가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죽고 그의 동생 모용충이 서연을 이어받았습니다.

 

   서연의 군대는 장안성을 포위했고, 부견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서쪽으로 도주했으나 요장에게 잡혀서 포로가 되어버립니다. 과거 신하였던 요장에게 부견은 385년 살해되고, 전진도 394년 멸망했습니다. 비수대전이 벌어지고 2년 만에 부견이 죽고, 11년 만에 사방의 반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망한 것입니다.

   부견이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게 패인이고, 너무 많은 병력을 잃은 것도 컸습니다. 부견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이 전쟁은 재상 왕맹만 살아있어서 말렸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참사였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계속 소규모 병력으로 손해를 크게 줄일 수도 있었겠죠. 이 말년의 큰 실책만 아니었어도 부견의 이름은 더욱 위대하게 남았을 것입니다. 만약 통일에 성공했다면 6세기 후반 수나라의 통일을 200년 정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진은 세계사의 위대한 제국이자 패권국으로 엄청난 칭송을 받았을 것입니다. 4세기가 끝나길 시기라면 로마가 동서로 갈라졌을 때라 동시대 중국 통일 왕조는 당대 압도적인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는 의의가 있었죠. 사산 왕조와 굽타 왕조도 만만치 않은 국가였지만 통일 중국 왕조의 국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겠죠.

   물론 당시 전진이 통일했으면 고구려가 위험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한국인으로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전쟁이라는 역사가, 잘하다가 한 번의 실패만으로도 몰락하거나 시대의 패배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삼국지의 원소도 관도대전 이전까지 전쟁에서 전승이었고 조조보다 훨씬 강한 세력을 구축했으나 관도대전의 대패로 이미지가 너무 평가절하 되어있는 것처럼요. 왕맹 같은 훌륭한 신하의 존재가 군주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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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악연(Main: 530년의 다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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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9년 당시 세계지도.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최강국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시대였습니다.

  1.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476년, 오토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그 이후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의 왕국이 옛 제국의 영토를 조각냈습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은 존속했습니다. 지금의 이집트, 발칸 반도, 그리스, 터키, 시리아, 요르단이라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동쪽에는 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또다른 제국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사산조 페르시아. 3세기 중반부터 부흥한 이 제국은 400년 가까이 세계사에서 강대국으로 군림했습니다. 제국의 창건자이자 초대 샤한샤(페르시아어로 왕 중의 왕을 의미) 아르다시르 1세는 파르티아를 멸망시켰고, 세 방향으로 공격해오는 로마 대군을 상대로 버텨냈습니다. 그의 맏아들 샤푸르 1세는 시리아의 안티오크를 잔혹하게 약탈하고 로마 국경을 공격해서 지금의 아르메니아를 점령했죠. 또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는 기념비적인 일을 달성했습니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혼란의 시기를 겪고 로마에게 서쪽 영토를 많이 뺏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10대 샤한샤인 샤푸르 2세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샤푸르 2세는 기병을 이끌고 사막을 돌파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유목민을 토벌하고,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500년 경의 에프탈 세력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2. 에프탈의 등장, 그리고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전쟁

 

  그러나 사산조는 5세기부터 등장한 유목 민족 에프탈에게 시달리게 됩니다. 아틸라의 죽음과 훈족의 쇠퇴 이후 에프탈은 강성해졌고, 서쪽에 있는 사산조를 압박했습니다. 에프탈의 강력함을 보고 사람들은 '백훈족'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20대 샤한샤 페로즈 1세는 에프탈과의 전쟁에서 전사했고, 다음 샤한샤인 발라시는 에프탈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고,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용인하는 무능한 지도자였습니다. 왕조 곳곳에 잦은 반란이 일어났고 겨우 4년 만에 카바드 1세가 새로운 샤한샤가 되었습니다. 카바드 1세는 에프탈의 지원을 받아 황제가 되었고, 재위 기간 도중 동생 자마습과 귀족들로 인해 2년 동안 샤한샤의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다시 샤한샤에 복위할 때도 에프탈 군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에프탈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고, 조공을 바쳐야 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에프탈을 이길 힘이 없었고, 바닥난 재정이라는 위기를 탈출하고자 그는 서쪽의 비잔티움을 노립니다.

 

  카바드 1세는 에프탈과 연합하여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득을 취했습니다. 비잔티움은 적지 않은 성을 빼앗겼고 캅카스 지역의 요새 유지비를 부담한다는 불평등 조약을 사산조와 체결했습니다. 이렇게 휴전을 한 이유는 캅카스 지역에 남아 있던 훈족이 쳐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산조는 약탈로써 재정을 충당했습니다.

 

  벨리사리우스와 유스티니아누스

 

  527년 재위에 등극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기독교 세계를 통일시키려 했고 위대한 제국의 팽창을 노렸습니다. 그가 황제에 오를 때, 몇 년 전 부터 이베리아 지역(지금의 스페인/포르투갈이 아니라 캅카스 중에서 조지아를 말하는 고대 지명)의 종교 박해 문제로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습니다. 이는 카바드 1세가 조로아스터교를 강요한 게 원인이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옛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정복 사업과 성 소피아 성당을 재건할 만큼 교회 통합을 실현시키려했던 대제였습니다. 그는 로마법 편찬과 같은 많은 업적을 남겼고, 제국의 팽창을 위해 사산조와의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 매듭지어야 했습니다.

 

  그는 재위 첫 해 벨리사리우스의 계급을 몇 단계나 올려서 장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이전에 벨리사리우스는 사산조를 약탈하기 위해 보내진 병력을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528년 그는 국경 지대에 요새를 건설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마침내 530년 그는 동방군 사령관의 직책에 오르고, 비잔티움의 5개 야전 부대 중 하나를 맡았습니다. 카바드 1세는 페로즈라는 장수에게 1만의 병력을 추가로 보내주었고 다라 요새(지금의 터키 남쪽의 마르딘주)를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3. 다라 전투(Battle of Dara, 530AD)

 

  사산조의 총 병력은 오게 될 지원병까지 합쳐서 도합 5만이었습니다. 반면 다라를 지키고 있던 벨리사리우스의 병력은 2만 5천에 불과했습니다. 이 중 3분의 1이 기병이었는데, 지난날 사산조와의 약탈에서 기병이 중심으로 활약했기에 보병의 숙련도가 낮았습니다. 보병은 전쟁 경험이 많지 않았고 주둔병으로서 치안 업무를 주로 수행했습니다. 반면 사산조는 최소 1만의 기병에 대부분이 '카타프락토이'라고 불리는 강력한 중기병이었습니다.

 

  당시 명예 중장기병인 카타프락토이

 

 

  다라 전투에서 양군의 진형입니다. 양쪽 사령관과 부하 장수들 이름이 적혀져 있습니다.

 

  심지어 페로즈의 군대는 지난 수십 년간 비잔티움 군대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자신만만한 페로즈는 전투 전날 사절을 보내서 내가 요새에 입성해서 목욕할 수 있게 목욕물이나 데워놓으라고 도발했습니다. 병력이 밀리는 상황에서 일반적인 장수라면 다라 요새를 끼면서 방어에 치중했겠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성벽 바깥으로 나와서 진열을 구성했습니다.

 

  비잔티움의 왼쪽에는 언덕이 있었고, 벨리사리우스는 양익 부대와 중앙 부대에게 참호를 파게 했고, 다만 중앙 부대의 참호는 약간 떨어져서 파게 했습니다. 중앙과 양익의 참호는 직선으로 평행을 이루었고, 양끝에는 세로 방향의 참호를 재차 파서 직각으로 꺾여서 중앙의 참호와 연결 될 수 있게 했습니다. 참호를 건널 수 있는 지점을 여러 개 만들어서 유사시에 아군이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사산조가 쉽게 찾을 수 없도록 지점을 엄폐했습니다. 참호 앞쪽에는 각각 600명의 훈족 기병대가 두 예비 부대로 배치되었고, 참호 뒤쪽 중앙에 보병과 양익에 기병이 배치되었습니다. 다만 서로 진격이 불가능할 만큼 깊게 참호를 판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투 첫째 날은 서로 거의 피해 없는 소규모 교전만 일어났고, 둘째 날은 서신을 주고 받았으나 전혀 진전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 날 사산조에 드디어 지원군 1만이 도착했습니다. 셋째 날 아침에 두 사령관은 이제 전투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병사들에게 연설을 했고, 페로즈도 중앙에 보병을, 양익에 기병을 두면서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다만 각각 2열 대형을 갖추었고 정예 보병인 불사신 부대는 신호를 주기 전까지는 대기하는 예비 병력으로 배치했습니다.

 

  오후에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산조의 기병대는 비잔티움의 양익을 공격했고 서로 화살을 쏘았습니다. 사산조 기병 제1열의 화살이 바닥하자 제2열이 공격을 맡았습니다. 화살이 바닥나자 양군의 기병은 부딪혔습니다. 피티약세스가 이끄는 사산조의 카디세니족 기병이 비잔티움의 좌익을 꿰뚫었습니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가 매복시켜둔 수니카스와 아이간의 훈족 기병대가 카디세니족의 측면을 공격했고 파라스가 이끄는 비잔티움 기병대가 후방을 기습했습니다.

 

  실은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 위의 전투 그림에 나와있는 비잔티움 장수들 중 파라스라는 인물이 벨리사리우스와 부사령관 헤르모게네스에게 계략을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헤를리족(기병 부대)과 함께 제가 여기 머무른다고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언덕에 몸을 숨겼다가 페르시아인들이 전투를 시작하면 언덕을 통과해서 그들의 뒤로 기습하면 아마도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700년전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를 상대로 트레비아 전투에서 실행하여 승리한 전술과 똑같은데, 별동대가 행동을 개시하는 시기가 조금이라도 빠르거나 늦으면 각개격파 당해서 패배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참호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기동력이 떨어졌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산조의 우익은 예상하지 못한 기습에 3,000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페로즈는 불사신 부대를 왼쪽으로 보내서 좌익에 힘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움직임을 읽고 수니카스와 아이간에게 재차 지시를 내려서 다른 훈족 기병대와 합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예비대에서 상당한 기병을 빼내서 훈족의 뒤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사산조의 좌익을 이끄는 바라스마나스는 불사신 부대의 지원으로 공격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하지만 비잔티움 기병대가 일점돌파를 감행해서 사산조의 좌익은 본대와 고립되었습니다. 사산조의 기병과 불사신 부대는 어떻게든 돌파하려 했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수니카스가 바라스마나스를 죽였고, 남은 좌익의 병력도 도주하거나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여기서 사산조는 5,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남은 사산조의 보병도 공포에 휩싸였고, 방패와 무기까지 버린 채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적군이 후퇴했지만 벨리사리우스와 휘하 장수들은 너무 멀리까지 추격하지 못하도록 자제시켰습니다. 혹시나 아군이 흩어질 수도 있고, 적들의 역공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압도적인 승리는 이미 비잔티움의 몫이었습니다.

 

  빨간색으로 표시한 곳이 다라 전투, 하늘색으로 표시한 곳이 칼리니쿰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4. 다라 전투 이후의 역사

 

  카바드 1세는 패전하고 돌아온 페로즈가 가지고 있던 금과 진주를 새겨서 계급을 표시한 머리띠를 회수했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듬해 1만 5천의 병력을 보내서 유그라테스강 남쪽의 비잔티움 영토를 공격했습니다. 그동안 사산조와 비잔티움의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벨리사리우스는 급하게 2만 명의 병력을 편성해서 칼리니쿰(지금의 시리아 의 락까 지역)이라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벨리사리우스가 가진 병력은 더 많았지만 신병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동맹국의 군대까지 섞여 있어서 다라 전투의 정예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큰 충돌 없이 적들이 영토에서 물러나게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사산조의 상황을 지켜보는데 병사들이 왜 싸우지 않습니까 라고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습니다.

 

  벨리사리우스는 병사들을 말렸습니다. 적들이 우리 땅에서 후퇴하고 있는데 굳이 전투를 벌일 필요는 없으며 내일이 부활절이라 모두 단식해야 할텐데 기력이 떨어져서 싸우기가 힘들다고 말했죠. 하지만 병사들은 말을 듣지 않았고 그는 하는 수 없이 전투를 벌였습니다. 결국 새옹지마라고 이 칼리니쿰 전투에서 패전을 겪었습니다. 영문위키의 칼리니쿰 전투 항목에는 양쪽 군대는 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사산조가 전략적인 승리를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벨리사리우스는 가까운 유프라테스 강으로 후퇴했고 남은 병력을 수습해서 사산조의 병력을 막는데 집중했습니다.

 

호스로 1세가 이룩한 사산조 페르시아 최전성기

 

  몇 달 뒤 카바드 1세가 죽고 그의 셋째 아들인 호스로 1세가 샤한샤를 계승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호스로 1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아버지가 중앙집권을 위해 시작한 토지 제도와 세금 제도 개혁을 완성시켰고, 나아가 군제와 행정 개혁도 대성공을 거두면서 재정을 확충했습니다. 그는 봉건 영주들을 견제할 수 있는 관료들을 육성했고 군사 장비를 체계화했습니다. 힘을 모은 그는 6세기 중반 돌궐과 연합하여 마침내 에프탈을 공격하여 분열시켰고, 남쪽의 원정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오만과 예멘을 정복해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최전성기를 만들었습니다.

 

  카바드 1세를 그린 주화
  호스로 1세의 조각상

 

  다라 전투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제국으로 귀환했습니다. 532년 그는 나르세스와 함께 '니카의 반란'을 진압하고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을 받아 서쪽으로 진군했습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활약으로 반달 왕국과 동고트 왕국의 땅이 비잔티움의 손에 들어왔고, 스페인 남부까지 정복하면서 최대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550년경 비잔티움 제국은 지중해를 거의 호수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벨리사리우스, 나르세스가 이룩한 비잔티움 최대 영토

 

  하지만 예전에 맺었던 평화조약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541년 호스로 1세는 다시 시리아 쪽을 공격하면서 많은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벨리사리우스와 호스로 1세는 서로 니시비스와 에데사를 포위했으나 공성에는 실패했고, 아르메니아로 향하던 다른 비잔티움 군대가 사산조의 기습으로 대패했습니다. 결국 비잔티움은 공물을 보내는 조약을 맺어서 5년 간의 휴전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548년 라지카 왕국(지금의 조지아 서쪽에 있던 나라)이 종교 문제로 사산조와 싸우기 위해 비잔티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났고 무의미한 전쟁이 오랜 시간 지속되었습니다. 562년에 이르러서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또 사산조에 공물을 보냈지만 라지카 왕국은 비잔티움에 귀속될 수 있었습니다. 565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 후기에는 흑사병이 창궐해서 천문학적인 인구가 사망했습니다. 그 여파로 그가 죽은 뒤 이탈리아, 스페인, 발칸반도, 이집트, 서아시아에 있었던 비잔티움의 영토는 갈수록 감소했습니다. 그 사이에 사산조는 비잔티움의 공격을 재개했고, 호스로 1세의 뒤를 이은 호르미즈드 4세, 다음의 호스로 2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전쟁은 훗날 비잔티움의 황제가 되는 헤라클리오스와 사산조의 명장 샤흐르바라즈와의 대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헤라클리오스는 니네베 전투에서 적을 격파하고 기어코 사산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위대한 성유물인 성십자가를 되찾아서 예루살렘에 안치시키는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대결은 이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두 제국은 새롭게 발흥하는 이슬람 제국과 새로운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비잔티움과 사산조를 역사의 무대에서 몰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출처: 도서 <로마전쟁영웅사>

 

  영문위키 'Battle of Dara'(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Dara )

 

  위키백과 '로마-페르시아 전쟁' ( 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A7%88-%ED%8E%98%EB%A5%B4%EC%8B%9C%EC%95%84_%EC%A0%84%EC%9F%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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