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로물루스의 로마 왕국 건국부터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으로 인한 비잔티움 제국 멸망까지 2,000년 이상을 존속한 위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중국 왕조가 수백 년을 지탱하지 못하고 멸망했을 때 로마의 계보는 살아서 2,000년을 이어졌습니다. 유럽과 북아프리카, 서아지아까지 세력을 넓히 '팍스 로마나(Fax Romana)' 라고 불리는 로마의 질서를 만들었죠.
아우구스투스,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등의 5현제, 콘스탄티누스 1세 등의 명군은 세계사에 남았고, 스키피오, 카이사르, 벨리사리우스, 헤라클리우스 등 역대급 군재를 발휘한 명장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콜로세움과 수도교 등의 건축물이 대표적이고, 콘크리트와 시멘트의 사용은 시대를 앞서갔습니다. 지중해 패권을 확립한 웅장한 영토와 제국의 최전성기에 6천만 이상의 인구는 그야말로 로마의 위대함을 말합니다. 공화정, 군주정 등의 기나긴 역사에서 나타난 정치 체제에서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로마에 관한 기록은 역사에 귀중한 자료인 것입니다.
<로마전쟁영웅사>는 그런 로마 제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발전시킨 명장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했다/패배했다고 설명하는 게 아닌, 전쟁 전후의 자세한 상황과 한니발 같은 적장, 연도별 진행과 전장의 위치, 로마군의 병력 체계, 전쟁의 과정과 의의 등 다양한 과정으로 로마의 전쟁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 아드리안 골즈워디는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해석을 통해 인물과 사건을 분석했습니다. 실제 로마사를 기록한 옛 문장과 전쟁을 묘사한 그림과 초심자도 알아볼 수 있는 지도도 있어서 흥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명장이 계획한 전략, 전쟁에서 발휘한 지휘와 전술, 로마에 기여한 업적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사는 중국사와 다르게 전쟁 과정이 상세하고 다채로워서 의의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병력 규모도 더욱 정확하게 나와 있어서 신뢰성도 높고요. 전쟁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거대한 일이듯이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힘과 병사들의 숫자와 정예의 정도, 함께하는 장군들, 주변 지형과 같이 평가해야 할 요소가 많습니다. 로마사는 전쟁의 과정을 비롯한 기록이 많아서 명장들을 판별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이 국내에서 절판되었다는 점과 콘스탄티누스 1세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필자도 이 책을 도서관에서의 대출로 말미암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전쟁영웅사>를 직접 읽으시려면 중고로 구하시거나 도서관에서 보시는 방법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의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 로마를 휩쓸고 연전연승한 명장이자 대단한 명군인데 그의 기록이 책에 거의 없다는 점은 살짝 안타까웠습니다. 물론 그 이외에 부족하다고 여겼던 부분은 없었습니다.
476년, 오토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그 이후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의 왕국이 옛 제국의 영토를 조각냈습니다. 한편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은 존속했습니다. 지금의 이집트, 발칸 반도, 그리스, 터키, 시리아, 요르단이라는 넓은 영토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국의 동쪽에는사산조 페르시아라는 또다른 제국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사산조 페르시아. 3세기 중반부터 부흥한 이 제국은 400년 가까이 세계사에서 강대국으로 군림했습니다. 제국의 창건자이자 초대샤한샤(페르시아어로 왕 중의 왕을 의미)인아르다시르 1세는 파르티아를 멸망시켰고, 세 방향으로 공격해오는 로마 대군을 상대로 버텨냈습니다. 그의 맏아들샤푸르 1세는 시리아의 안티오크를 잔혹하게 약탈하고 로마 국경을 공격해서 지금의 아르메니아를 점령했죠. 또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는 기념비적인 일을 달성했습니다. 그 뒤 수십 년 동안 혼란의 시기를 겪고 로마에게 서쪽 영토를 많이 뺏기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10대 샤한샤인 샤푸르 2세에 다시 전성기를 맞이합니다.샤푸르 2세는 기병을 이끌고 사막을 돌파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유목민을 토벌하고, 로마 황제 율리아누스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2. 에프탈의 등장, 그리고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전쟁
그러나 사산조는 5세기부터 등장한 유목 민족에프탈에게 시달리게 됩니다. 아틸라의 죽음과 훈족의 쇠퇴 이후 에프탈은 강성해졌고, 서쪽에 있는 사산조를 압박했습니다. 에프탈의 강력함을 보고 사람들은'백훈족'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20대 샤한샤 페로즈 1세는 에프탈과의 전쟁에서 전사했고, 다음 샤한샤인 발라시는 에프탈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고,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용인하는 무능한 지도자였습니다. 왕조 곳곳에 잦은 반란이 일어났고 겨우 4년 만에카바드 1세가 새로운 샤한샤가 되었습니다. 카바드 1세는 에프탈의 지원을 받아 황제가 되었고, 재위 기간 도중 동생 자마습과 귀족들로 인해 2년 동안 샤한샤의 자리를 빼앗겼습니다. 다시 샤한샤에 복위할 때도 에프탈 군대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에프탈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고, 조공을 바쳐야 하는 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에프탈을 이길 힘이 없었고, 바닥난 재정이라는 위기를 탈출하고자 그는 서쪽의 비잔티움을 노립니다.
카바드 1세는 에프탈과 연합하여 비잔티움 제국과의 전쟁에서 이득을 취했습니다. 비잔티움은 적지 않은 성을 빼앗겼고 캅카스 지역의 요새 유지비를 부담한다는 불평등 조약을 사산조와 체결했습니다. 이렇게 휴전을 한 이유는 캅카스 지역에 남아 있던 훈족이 쳐들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산조는 약탈로써 재정을 충당했습니다.
527년 재위에 등극한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기독교 세계를 통일시키려 했고 위대한 제국의 팽창을 노렸습니다. 그가 황제에 오를 때, 몇 년 전 부터 이베리아 지역(지금의 스페인/포르투갈이 아니라 캅카스 중에서 조지아를 말하는 고대 지명)의 종교 박해 문제로 양국의 갈등은 심화되었습니다. 이는 카바드 1세가 조로아스터교를 강요한 게 원인이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옛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정복 사업과 성 소피아 성당을 재건할 만큼 교회 통합을 실현시키려했던 대제였습니다. 그는 로마법 편찬과 같은 많은 업적을 남겼고, 제국의 팽창을 위해 사산조와의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 매듭지어야 했습니다.
그는 재위 첫 해벨리사리우스의 계급을 몇 단계나 올려서 장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이전에 벨리사리우스는 사산조를 약탈하기 위해 보내진 병력을 맡고 있었다고 합니다. 528년 그는 국경 지대에 요새를 건설하는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마침내 530년 그는 동방군 사령관의 직책에 오르고, 비잔티움의 5개 야전 부대 중 하나를 맡았습니다. 카바드 1세는 페로즈라는 장수에게 1만의 병력을 추가로 보내주었고다라 요새(지금의 터키 남쪽의 마르딘주)를 향해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3. 다라 전투(Battle of Dara, 530AD)
사산조의 총 병력은 오게 될 지원병까지 합쳐서 도합 5만이었습니다. 반면 다라를 지키고 있던 벨리사리우스의 병력은 2만 5천에 불과했습니다. 이 중 3분의 1이 기병이었는데, 지난날 사산조와의 약탈에서 기병이 중심으로 활약했기에 보병의 숙련도가 낮았습니다. 보병은 전쟁 경험이 많지 않았고 주둔병으로서 치안 업무를 주로 수행했습니다. 반면 사산조는 최소 1만의 기병에 대부분이'카타프락토이'라고 불리는 강력한 중기병이었습니다.
심지어 페로즈의 군대는 지난 수십 년간 비잔티움 군대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자신만만한 페로즈는 전투 전날 사절을 보내서 내가 요새에 입성해서 목욕할 수 있게 목욕물이나 데워놓으라고 도발했습니다. 병력이 밀리는 상황에서 일반적인 장수라면 다라 요새를 끼면서 방어에 치중했겠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성벽 바깥으로 나와서 진열을 구성했습니다.
비잔티움의 왼쪽에는 언덕이 있었고, 벨리사리우스는 양익 부대와 중앙 부대에게참호를 파게 했고, 다만 중앙 부대의 참호는 약간 떨어져서 파게 했습니다. 중앙과 양익의 참호는 직선으로 평행을 이루었고, 양끝에는 세로 방향의 참호를 재차 파서 직각으로 꺾여서 중앙의 참호와 연결 될 수 있게 했습니다. 참호를 건널 수 있는 지점을 여러 개 만들어서 유사시에 아군이 통과할 수 있도록 만들었고, 사산조가 쉽게 찾을 수 없도록 지점을 엄폐했습니다. 참호 앞쪽에는 각각 600명의 훈족 기병대가 두 예비 부대로 배치되었고, 참호 뒤쪽 중앙에 보병과 양익에 기병이 배치되었습니다. 다만 서로 진격이 불가능할 만큼 깊게 참호를 판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투 첫째 날은 서로 거의 피해 없는 소규모 교전만 일어났고, 둘째 날은 서신을 주고 받았으나 전혀 진전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 날 사산조에 드디어 지원군 1만이 도착했습니다. 셋째 날 아침에 두 사령관은 이제 전투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병사들에게 연설을 했고, 페로즈도 중앙에 보병을, 양익에 기병을 두면서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다만 각각 2열 대형을 갖추었고 정예 보병인 불사신 부대는 신호를 주기 전까지는 대기하는 예비 병력으로 배치했습니다.
오후에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산조의 기병대는 비잔티움의 양익을 공격했고 서로 화살을 쏘았습니다. 사산조 기병 제1열의 화살이 바닥하자 제2열이 공격을 맡았습니다. 화살이 바닥나자 양군의 기병은 부딪혔습니다. 피티약세스가 이끄는 사산조의 카디세니족 기병이 비잔티움의 좌익을 꿰뚫었습니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가 매복시켜둔 수니카스와 아이간의 훈족 기병대가 카디세니족의 측면을 공격했고 파라스가 이끄는 비잔티움 기병대가 후방을 기습했습니다.
실은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기 전, 위의 전투 그림에 나와있는 비잔티움 장수들 중 파라스라는 인물이 벨리사리우스와 부사령관 헤르모게네스에게 계략을 말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헤를리족(기병 부대)과 함께 제가 여기 머무른다고 적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희가 언덕에 몸을 숨겼다가 페르시아인들이 전투를 시작하면 언덕을 통과해서 그들의 뒤로 기습하면 아마도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700년전 한니발 바르카가 로마를 상대로 트레비아 전투에서 실행하여 승리한 전술과 똑같은데, 별동대가 행동을 개시하는 시기가 조금이라도 빠르거나 늦으면 각개격파 당해서 패배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참호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기동력이 떨어졌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산조의 우익은 예상하지 못한 기습에 3,000명의 사망자가 나왔습니다. 페로즈는 불사신 부대를 왼쪽으로 보내서 좌익에 힘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벨리사리우스는 움직임을 읽고 수니카스와 아이간에게 재차 지시를 내려서 다른 훈족 기병대와 합류하도록 명령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예비대에서 상당한 기병을 빼내서 훈족의 뒤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사산조의 좌익을 이끄는 바라스마나스는 불사신 부대의 지원으로 공격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하지만 비잔티움 기병대가 일점돌파를 감행해서 사산조의 좌익은 본대와 고립되었습니다. 사산조의 기병과 불사신 부대는 어떻게든 돌파하려 했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수니카스가 바라스마나스를 죽였고, 남은 좌익의 병력도 도주하거나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여기서 사산조는 5,000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습니다.
남은 사산조의 보병도 공포에 휩싸였고, 방패와 무기까지 버린 채 도망치기 시작했습니다. 적군이 후퇴했지만 벨리사리우스와 휘하 장수들은 너무 멀리까지 추격하지 못하도록 자제시켰습니다. 혹시나 아군이 흩어질 수도 있고, 적들의 역공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압도적인 승리는 이미 비잔티움의 몫이었습니다.
4. 다라 전투 이후의 역사
카바드 1세는 패전하고 돌아온 페로즈가 가지고 있던 금과 진주를 새겨서 계급을 표시한 머리띠를 회수했습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이듬해 1만 5천의 병력을 보내서 유그라테스강 남쪽의 비잔티움 영토를 공격했습니다. 그동안 사산조와 비잔티움의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벨리사리우스는 급하게 2만 명의 병력을 편성해서칼리니쿰(지금의 시리아 의 락까 지역)이라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벨리사리우스가 가진 병력은 더 많았지만 신병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고 동맹국의 군대까지 섞여 있어서 다라 전투의 정예병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는 큰 충돌 없이 적들이 영토에서 물러나게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멀리 떨어져서 사산조의 상황을 지켜보는데 병사들이왜 싸우지 않습니까라고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습니다.
벨리사리우스는 병사들을 말렸습니다. 적들이 우리 땅에서 후퇴하고 있는데 굳이 전투를 벌일 필요는 없으며 내일이 부활절이라 모두 단식해야 할텐데 기력이 떨어져서 싸우기가 힘들다고 말했죠. 하지만 병사들은 말을 듣지 않았고 그는 하는 수 없이 전투를 벌였습니다. 결국 새옹지마라고 이 칼리니쿰 전투에서 패전을 겪었습니다. 영문위키의 칼리니쿰 전투 항목에는 양쪽 군대는 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사산조가 전략적인 승리를 취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벨리사리우스는 가까운 유프라테스 강으로 후퇴했고 남은 병력을 수습해서 사산조의 병력을 막는데 집중했습니다.
몇 달 뒤 카바드 1세가 죽고 그의 셋째 아들인호스로 1세가 샤한샤를 계승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호스로 1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아버지가 중앙집권을 위해 시작한 토지 제도와 세금 제도 개혁을 완성시켰고, 나아가 군제와 행정 개혁도 대성공을 거두면서 재정을 확충했습니다. 그는 봉건 영주들을 견제할 수 있는 관료들을 육성했고 군사 장비를 체계화했습니다. 힘을 모은 그는 6세기 중반 돌궐과 연합하여 마침내에프탈을 공격하여 분열시켰고, 남쪽의 원정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오만과 예멘을 정복해서 사산조 페르시아의 최전성기를 만들었습니다.
다라 전투 이후 벨리사리우스는 제국으로 귀환했습니다. 532년 그는나르세스와 함께'니카의 반란'을 진압하고 유스티니아누스의 명령을 받아 서쪽으로 진군했습니다.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활약으로 반달 왕국과 동고트 왕국의 땅이 비잔티움의 손에 들어왔고, 스페인 남부까지 정복하면서 최대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550년경 비잔티움 제국은 지중해를 거의 호수로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예전에 맺었던 평화조약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541년 호스로 1세는 다시 시리아 쪽을 공격하면서 많은 전리품을 챙겼습니다. 벨리사리우스와 호스로 1세는 서로 니시비스와 에데사를 포위했으나 공성에는 실패했고, 아르메니아로 향하던 다른 비잔티움 군대가 사산조의 기습으로 대패했습니다. 결국 비잔티움은 공물을 보내는 조약을 맺어서 5년 간의 휴전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548년 라지카 왕국(지금의 조지아 서쪽에 있던 나라)이 종교 문제로 사산조와 싸우기 위해 비잔티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났고 무의미한 전쟁이 오랜 시간 지속되었습니다. 562년에 이르러서야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고 또 사산조에 공물을 보냈지만 라지카 왕국은 비잔티움에 귀속될 수 있었습니다. 565년 유스티니아누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치세 후기에는흑사병이 창궐해서 천문학적인 인구가 사망했습니다. 그 여파로 그가 죽은 뒤 이탈리아, 스페인, 발칸반도, 이집트, 서아시아에 있었던 비잔티움의 영토는 갈수록 감소했습니다. 그 사이에 사산조는 비잔티움의 공격을 재개했고, 호스로 1세의 뒤를 이은호르미즈드 4세, 다음의 호스로 2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전쟁은 훗날 비잔티움의 황제가 되는헤라클리오스와 사산조의 명장샤흐르바라즈와의 대결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헤라클리오스는니네베 전투에서 적을 격파하고 기어코 사산조와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위대한 성유물인성십자가를 되찾아서 예루살렘에 안치시키는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대결은 이게 마지막이었습니다. 두 제국은 새롭게 발흥하는 이슬람 제국과 새로운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비잔티움과 사산조를 역사의 무대에서 몰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