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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며,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을 접하길 원하는 1인입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며 주기적으로 헌혈하는 헌혈자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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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드이븐알왈리드 (2)
[중동사]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황혼의 영광(부제: 야르무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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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ovisionnew.tistory.com/384

 

[중동사] 초기 이슬람에서 무함마드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승리(~634년)

https://neovisionnew.tistory.com/59 [전쟁사]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악연(Main: 530년의 다라 전투) 1.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476년, 오토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

neovisionnew.tistory.com

  예전에 썼던 글에서 계속 이어지는 글입니다.

 

배교 전쟁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X자 표시로 된 곳이 모두 전투지입니다.

 

  1. 배교 전쟁(릿다 전쟁, Ridda wars)

 

  634년 다마스쿠스 공성전 도중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사망하고 우마르가 다음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우마르는 지도자에 오르자 마자 바로 할리드의 총사령관 직책을 박탈했습니다. 정황을 살펴보면 우마르가 할리드를 개인적으로 싫어했다는 설이 유력하고 필자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기 위해 잠깐 몇 년 전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과거 무함마드가 죽고 아라비아 반도는 이전처럼 분열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무함마드가 지도자 활동을 하기 전 수십 개 부족이 난립하여 제대로 된 국가를 만들지 못했죠. 유목생활을 했던 그들은 서로 다른 신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메디나와 메카 같이 몇 안 되는 도시들이야 산업이 발달되어 있었지만, 다른 부족들은 떠돌아다니며 서로를 약탈했습니다.

 

  이슬람을 믿는 사람들이 열심히 포교했고, 한 때 적대적이었던 2대 칼리프 우마르와 명장 할리드도 무함마드를 따랐죠. 하지만 무함마드가 죽을 당시에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고 합니다. 그는 아라비아 부족들과 전쟁을 벌여서 진압하거나 반강제적으로 개종시켰기에, 기존 부족들은 복수심을 가질만 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만 무함마드를 따랐죠. 무함마드가 죽고 이 때다 싶어 여러 부족들이 봉기했는데 이를 '배교 전쟁'이라고 합니다.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 반란이 일어났고 그들은 메디나까지 위협했습니다.

 

 

  아부 바크르는 직접 두키사를 점령하고 할리드에게 출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할리드는 부자하에 도착했는데, 자신이 가진 6,000명의 군사에 비해 상대 병력이 15,000명이나 되자 묘책을 내어 상대 지도자 툴라이하와 일기토를 벌입니다. 가볍게 승리한 뒤 사기가 떨어진 적들을 향해 전투를 벌여 부자하를 회복했습니다. 그는 죽지세로 자파르까지 도달했고, 다음은 부타였습니다.

 

  부타에 몇몇 부족들 중 '말리크'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무함마드가 신뢰했던 인재 중 하나로 지금으로 치면 국세청장의 직책에 있었습니다. 말리크는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 세금을 성실하게 메디나로 운송했는데 그가 죽고나자 부족들에게 세금을 돌려준 뒤 반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할리드가 코앞까지 다가오자 싸우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다시 세금을 징수하여 메디나로 보냈고, 본인은 동쪽의 사막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할리드에게 사로잡혀서 처형당했습니다.

 

  아부 바크르는 반역을 했더라도 이슬람의 율법에 따른다면 관용을 베풀라고 당부했습니다. 말리크는 여전히 본인은 이슬람 신자이며 주변의 적대적인 세력이 많아 어쩔 수 없었다고 호소하지만 할리드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도 열지 않고 말리크를 죽이고 심지어 그의 아내였던 라일라 빈트 알 민할과 바로 결혼했습니다. 메디나의 주요 인사들은 이것 때문에 말리크를 죽였냐며 그를 비난했습니다. 우마르도 할리드를 쫓아내야 한다며 강력하게 주장했는데, 아부 바크르는 처벌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뒤 할리드는 야마마까지 진군하여 하니파 부족 지도자인 무사일리마까지 물리쳤습니다. 이 야마마 전투에서 적들이 4만 명이나 될 만큼 최대 고비였는데 할리드는 3분의 1도 안 되는 병력으로 승리했습니다. 이렇게 할리드는 반 년도 안 되어 온전한 아라비아 통일을 이루었고, 배교 전쟁의 일등공신이었습니다. 다만 우마르 눈 밖에 나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2. 북진하는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

 

  그렇게 할리드는 다마스쿠스 공성전 - 마라즈 알 데바르 전투 이후 해임 소식을 들었습니다. 총사령관 직책은 다음 계급 순서이자 공성전에 참여한 아부 우바이다에게 넘어갔습니다. 할리드에 비해 우바이다는 온건파에 속하는 인물이라, 정복 속도가 느려졌습니다. 하지만 우바이다도 할리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뛰어난 인물이라 이슬람의 연전연승은 계속 진행되었습니다.

 

  성향이 달라도 우바이다는 할리드를 존경하고 있었고, 전쟁터에서 항상 그의 조언을 들으면서 정복했습니다. 우마르도 할리드를 아예 물러나게하거나 처형시키지는 못했습니다. 할리드는 예전 만큼은 아니지만 계속 주도적인 역할을 맡을 수 있었고 기병대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생소한 도시 이름과 위치는 이 지도에서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636년 5월까지 할리드를 비롯한 이슬람 장군들의 진격로입니다.

 

  한편 비잔티움 제국 입장에서는 과거 사산조와의 전쟁처럼 시리아를 상실하는 목전에 놓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할리드는 635년 1월 펠라(Pella)라는 도시를 손에 넣고 이슬람 군대는 양쪽으로 나뉘었습니다. 아므르와 슈르하빌이라는 장군들은 남쪽의 팔레스타인으로, 할리드와 우바이다는 북쪽의 에메사로 진군했습니다.

 

  이 때 헤라클리우스는 안티오크에 있었습니다. 적들이 다마스쿠스를 벗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테오도라스라는 장군에게 다마스쿠스를 되찾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테오도라스는 휘하 군대를 둘로 나누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을 먼저 보내고 후속 병력을 추가하는 식으로 편성했습니다. 후속병력은 샤나쉬라는 부하에게 맡기고 본인은 선봉대와 함께 달렸습니다. 그러나 반대편의 할리드의 대처가 더 빨랐습니다. 그는 우바이다에게 허락을 받아 친위 기병대를 이끌어 다마스쿠스에 가장 먼저 도착했습니다.

 

  심지어 할리드는 비잔티움 측에 스파이를 심어서 적들이 어느 방향으로 오는지 간파했고, 적들이 다마스쿠스 성 수비대 가까이 오자 후방을 급습하여 또다시 승리했습니다. 테오도라스는 전사했으며, 한편 우바이다도 똑같이 샤나쉬를 죽이고 추가로 오는 적 병력을 격파했습니다. 오히려 할리드와 우바이다는 다시 병력을 합쳐서 북쪽의 바알벡을 점령했습니다.

 

 

  3. 에메사 공성전(Siege of Emesa)

 

  헤라클리우스는 에메사로 전령을 보내 이슬람과 휴전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는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는데 병력을 모으고 있었고 우선 수비부터 신경써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바이다는 제의를 받아들이고 1년 동안 휴전을 맺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에메사의 시장을 이용하는 등 조용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증원군이 칼키스, 즉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우바이다는 1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즉시 에메사를 공격했습니다.

 

  635년 12월, 에메사 공성전이 시작되었습니다. 할리드는 성 밖의 병력을 공격했고 우바이다는 4개의 성문에 모두 병력을 배치하여 에메사를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해자로 둘러싸인데다 공성무기도 변변치 않아 서로 화살로 공격할 뿐 포위전은 단기간에 끝나지 않았습니다. 추운 겨울이 끝나고 에메사를 지키던 하비스(Harbees)라는 장수는 636년 3월 5,000명의 병력으로 이슬람 군의 한 쪽을 공격했습니다. 포위망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지만 할리드가 기병을 이끌고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그 다음날 회의에서 우바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할리드에게 의견을 구합니다. 할리드는 거짓 후퇴를 제안했고 우바이다는 실행에 옮깁니다. 다시 하루가 지나 새벽에 이슬람군은 남쪽으로 도망쳤습니다. 하비스는 다시 기병이 주력인 5,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슬람군의 뒤를 쳤습니다. 그 순간 할리드는 기병을 둘로 나누어 추격해온 적들의 양쪽 측면으로 역공했습니다. 하비스는 전사했고 다시 성으로 들어가려던 비잔티움군의 패잔병도 대부분 살아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결국 남아 있던 에메사의 시민들은 몸값을 지불하고 항복했습니다. 이 공성전 과정에서 비잔티움군은 4,9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이슬람군은 200명 ~ 300명 남짓이었습니다.

 

  4.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반격

 

지금도 시리아 지역의 저 강(Yarmuk)은 야르무크 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헤라클리우스는 10만 대군이 넘는 병력을 보냈습니다. 이 때 이슬람군은 우바이다와 할리드, 슈르하빌, 아므르, 야지드 등 여러 장수들의 휘하 병력으로 흩어져 있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각개격파를 꾀한 것입니다. 하지만 할리드가 포로로 잡은 비잔티움 보급 부대를 심문해서 이 소식을 들었고, 그는 우바이다에게 하루빨리 주변의 모든 병력을 집결시켜야 한다고 건의했습니다. 다마스쿠스와 에메사를 빼앗기는 출혈을 감수하고 이슬람 군대는 하나로 뭉쳤습니다.

 

  늦지 않게 이슬람의 유능한 장수들이 자비야(Jabiyah) 지역에 모일 수 있었고, 우바이다는 할리드에게 임시로 총사령관 직책을 돌려줍니다. 우마르도 6,000명의 지원군을 보내서 힘을 실어줍니다. 할리드는 고민 끝에 조금 더 남쪽으로 내려가 야르무크 강과 가까이 있는 동쪽 평원으로 이동했습니다. 전투 도중 우마르의 지원을 더욱 신속하게 받을 수 있었고, 할리드가 자랑하는 기병 활용도 근처에 흐르는 강들이 자연적으로 장벽을 형성해 동로마 군을 몰아넣기 용이한 구조였고 할리드의 장기인 기병을 활용하기에도 괜찮은 조건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5. 야르무크 전투(Battle of the Yarmuk)

 

  636년 8월 15일, 서아시아의 패권을 결정짓는 역사적인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노년의 나이라 안티오크에서 대기했고 그의 동생이자 장군인 테오도르 트리티리우스가 총지휘를 맡았습니다. 비잔티움 편으로 가산 왕국의 잔당, 슬라브족, 아르메니아군이 함께했습니다.

 

이슬람군은 좌익 -> 우익까지 야지드 -> 아부 우바이다 -> 슈르하빌 -> 아므르 이 순서로 주요 지휘관이 있었고, 비잔티움 군은 우익 -> 좌익까지 그레고리 -> 다이르잔 -> 자발라 -> 카나티르 순서입니다.

 

 

  이슬람을 총괄하는 건 할리드였고 세부적으로 중앙은 아부 우바이다와 슈르하빌, 좌익은 야지드, 우익은 아므르가 맡았습니다. 3만 ~ 4만의 이슬람 군대는 10만에 달하는 비잔티움 대군과 마주했습니다. 비잔티움의 총사령관은 테오도르였고 좌익에 슬라브족 지휘관 카나티르, 우익에 부사령관 중 하나인 그레고리, 중앙에 아르메니아 사령관 바한과 부사령관 다이르잔, 가산 왕국의 왕인 자발라가 있었습니다. 또 비잔티움의 진열은 10km에 달할만큼 길었습니다.

 

  비잔티움 총사령관은 테오도르였지만 기록을 보니 2인자인 바한이 부하들에게 직접적인 지시는 더 많이 내린 것 같습니다. 양군 휘하 지휘관들의 대진표는 야지드 vs 그레고리 / 아부 우바이다 vs 다이르잔 / 슈르하빌 vs 자발라 / 아므르 vs 카나티르 이렇게 됩니다.

 

 

  양군 모두 보병 뒤에 기병을 배치했습니다. 당연히 비잔티움은 중기병을, 이슬람은 경기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다만, 할리드는 유격으로 움직이는 기병대를 따로 편성해서 최후방에 배치했습니다. 이들은 할리드가 이끌던 정예 경기병 병력인 '모바일 가드'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할리드는 바한과 만나 대화했습니다. 바한은 거만한 태도로 할리드를 맞았습니다.

 

  바한: "음식과 황금을 줄테니 이 땅에서 물러가라"

 

  할리드: "우리는 배고프지 않고 필요한 것도 없다. 너희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평화로울 것이다. 이를 거절한다면 전쟁 뿐이다."

 

  바한: "우리의 땅을 차지하려는 자들은 모두 패배했다."

 

  바한은 비잔티움 군대는 사산조를 이겼다는 걸 암시했습니다. 협상은 간단히 결렬되었고 남은 건 살육이었습니다.

 

  전투 첫째 날은 무력이 강한 장수들의 일기토와 소규모 교전으로 서로 큰 피해 없이 끝났습니다.

 

 

회색으로 칠해진 기병대가 할리드가 유사시에 대비하기 위한 유격 기병대입니다. 아므르의 병력을 지원합니다.
할리드는 바로 좌익의 야지드를 구원합니다.

 

  둘째 날, 테오도르와 바한은 이슬람군이 아침에 기도하는 시간을 노려서 아침에 적들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할리드는 첫째 날 밤 전방에 작은 초소 기지를 만들어서 기습에 잘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은 양쪽 측면에 거센 공격을 가했고, 중앙은 충분히 묶어둘 수 있는 정도의 압박을 가했습니다. 이슬람군의 중앙군이 측면에 신경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비잔티움 좌익을 맡은 카나티르는 이슬람군 우익에 있던 아므르의 군대를 상대했습니다. 아므르는 보병에게 후퇴하라고 명령하고 뒤에 있는 기병대에게 반격을 지시했습니다. 할리드는 늦지 않게 아므르의 기병에게 카나티르의 왼쪽을, 자신의 유격 기병대에게 카나티르의 오른쪽을 타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카나티르가 이끄는 비잔티움 좌익 군대는 후퇴했습니다. 이렇게 할리드는 우익의 위기를 수습했지만, 반대쪽 형세는 더욱 심각했습니다. 그레고리의 비잔티움 우익은 야지드의 이슬람 좌익을 그들의 베이스캠프까지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베이스캠프에 있던 병사들의 부인들이 갑자기 천막을 해체했습니다. 천막을 지탱한 나무 막대로 무장하면서 당신들은 불명예와 파멸을 맞을 것이라는 노래를 부릅니다. 야지드와 병사들은 잃어버린 사기를 되찾고 다시 비잔티움에게 달려갔습니다.

 

  한편 할리드는 기병 유격대의 일부를 빼내어 비잔티움 중앙을 기습했고, 이 결과로 비잔티움의 우익 중앙을 맡았던 다이르잔이 전사했습니다. 그는 남은 기병대로 야지드와 함께 좌익의 위기도 수습했습니다.

 

  셋째 날 전투 역시 비잔티움의 공세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좌익에 힘을 실어서 이슬람의 우익 군대부터 붕괴시킨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병력차로 비잔티움이 밀어붙이는 듯 했지만, 이번에도 할리드는 큰 피해없이 후퇴하면서 유격 기병대로 하여금 따라오는 적들에게 측면 공격을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번에도 테오도르와 바한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할리드는 비잔티움의 좌익 중앙이 들어오자 3방향에서 공격하여 상황을 반전시켰습니다.

 

  전투 넷째 날이자 636년 8월 18일, 바한은 어제의 방식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카나티르와 자발라에게 병력을 더욱 실어주면서 반드시 이슬람의 우익을 붕괴시키도록 했습니다. 할리드는 아부 아부이다와 야지드에게 각각 맡은 전선에서 전선이 합쳐지거나 길어지지 않도록 신경쓰라고 당부했습니다.

 

  좌익 중앙에 있던 자발라의 병력이 깊숙히 들어오고, 자발라와 카나티르의 병력이 서로 약간 멀어졌습니다. 이 때 할리드는 유격 기병대를 둘로 나누어서 자발라의 양쪽 측면을 동시에 공격했습니다. 아부 우바이다도 호응해서 정면을 공격했고, 이렇게 이슬람의 우측 상황은 안정되었습니다. 다른 이슬람 장군들도 끈질기게 버티면서 불리한 상황을 이겨냈습니다.

 

다섯째 날, 바한은 할리드에게 휴전 서신을 보내고 이슬람 장군들이 모여서 회의했습니다.

  이제 다섯째 날입니다. 비잔티움이 압도적인 병력차에도 누적된 피해는 오히려 훨씬 더 많았고, 바한은 할리드에게 사자를 보내서 며칠 동안 휴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할리드는 회의에서 몇몇 장군들이 휴전을 받아들이자는 건의를 물리쳤습니다. 지금이 바로 결정적인 타격을 줄 때라면서 강하게 주장했습니다.

 

 

  할리드는 기병대를 집결시켜서 8천 명의 기병을 한 부대로 모았습니다. 그 중 500명을 한 장수에게 맡깁니다. 야르무크 강의 다리이며, 적들이 퇴각할 것으로 예측되는 경로를 끊으라고 지시했죠. 그 장수는 밤에 귀신같이 이동해서 다리를 점령했습니다.(위 지도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

 

  여섯째 날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할리드는 모든 병력에게 총공세를 퍼부으라고 명령했고 본인은 어제 모은 8천의 기병대를 이끌었습니다.

 

 

  우선 카나디르가 이끄는 좌익 적들부터 무너뜨렸습니다. 기병을 둘로 나누어서 적들의 보병과 기병을 신속하게 소멸시켰습니다.

 

 

  비잔티움이 다급하게 남은 기병을 집중시켰습니다. 할리드는 적 기병이 재정비하기 전에 기병과 기병 맞대결을 벌였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패배한 비잔티움의 기병대는 북쪽으로 도망쳤고 자발라의 병력도 포위당해서 무너졌습니다.

 

 

  더 이상 비잔티움은 전투를 지속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할리드는 북쪽을 차단했고 남은 비잔티움 보병들은 서쪽으로 황급히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줄 알았던 다리 퇴각로에는 500기의 이슬람 기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잔티움군은 포위되자 다리 아래의 절벽으로 몸을 던지다가 바위에 부딪혀서 사망하고, 다른 방향으로 도망치다가 이슬람 기병의 추격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만 전장이 워낙 광활해서 도주에 성공하는 병사도 많았지만, 이 전투 끝에 비잔티움은 10만 중 5만의 병사를 상실했습니다.

 

  테오도르, 바한, 그레고리는 전사했고, 자발라만 간신히 살아남아서 도망쳤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참패 소식을 듣자 몹시 침통했습니다. 많은 자금을 썼음에도 돌아온 건 정예병을 거의 잃는 대참사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있었던 성십자가 등 중요한 유물을 빼내라고 지시했습니다.

 

  6. 할리드의 마지막 원정

 

 

  할리드는 북쪽으로 진군하여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637년 4월, 몇 달 동안의 공성전 끝에 기독교의 성지이자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한 이 도시를 손에 넣었습니다. 예루살렘을 지키고 있던 소프로니우스 주교의 항복 문서는 우마르가 직접 와서 전달받았습니다. 우마르는 세금을 내는 대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겠다고 서명했습니다.

 

  우마르는 예루살렘에서 기도를 올리고, 다섯 장군들에게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므르와 슈르하빌은 이집트로, 야지드는 카이세리아로,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는 북쪽으로 나아가라고 임무를 나누었습니다.

 

  할리드는 다마스쿠스를 다시 회복했고, 6월에는 7천 명의 적 수비대를 물리치고 칼키스를 점령했습니다.(하지르 전투, 637년 6월) 이 때 할리드의 망치와 모루 전술과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후방을 타격하여 속전속결로 마무리했습니다. 이 보고를 듣고 평소에 할리드를 싫어하던 우마르도 감탄했다고 전해집니다.

 

  "할리드는 진정한 군사 사령관이다. 알라께서 아부 바크르를 축북해주시길. 그는 나보다 위대한 재판관이었다."

 

  과거 배교 전쟁에서 할리드를 감쌌던 아부 바크르의 판단이 옳았다고 인정한 것이죠.

 

알레포 중심에 있는 거대한 성채입니다. 기원전 16세기 아시리아 때부터 지어진 역사적인 건축물입니다. 다만 시리아 내전 이후로 상당히 파괴되었습니다.

  4개월 뒤 알레포까지 점령했습니다. 알레포는 비잔티움이 차지한 레반트 지역의 주요 도시였고, 알레프를 지키던 비잔티움 지휘관도 야전에서 할리드에게 패배하자 백기를 들었습니다. 그 뒤 우바이다와 함께 아자즈를 점령했고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있는 안티오크로 향했습니다.

필자가 화살표로 표시한 강이 오론테스 강입니다.

 

  이 때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남은 2만 ~ 3만의 병력을 모아서 불구대천의 원수와 직접 승부를 벌였습니다. 오론테스 강을 두고 벌어진 전투였는데 자세한 과정은 찾아보기 힘들어서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9개의 아치형 돌다리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 전투라고 해서 '철다리 전투(Battle of the Iron Bridge)'라고 전해집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만 명의 병력만 잃고 안티오크에서 물러났습니다. 반면 할리드는 1만 7천의 병력이 거의 온전했습니다. 알레포와 안티오크, 두 도시에 깃발을 꽂을 때 수비대의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조건을 보장해서 큰 병력 소모 없이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의 수비대는 콘스탄티노플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할리드는 멈추지 않고 터키 중부의 키질이르마크 강으로 이동했습니다. 심지어 아르메니아도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머지 않아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위험해질 판국이었습니다. 결국, 황제는 레반트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7. 퇴장하는 알라의 검

 

  헤라클리우스는 타르수스 등 중요한 요새에 병력을 철수시켜 비무장지대로 두었고, 우마르도 이 완충지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마르는 아부 우바이다에게 시리아 총독 자리를 주고 점령한 지역의 통치를 굳건하게 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이후 한동안 이슬람 세력의 확장은 터키가 아닌 동쪽과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방향이 되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배를 타고 시리아에서 물러나면서 이렇게 한탄했습니다.

 

  "잘 있거라. 나의 속주, 시리아에 긴 작별을 고한다. 그대는 이제 이교도의 땅이 되었구나. 오 시리아여, 그대에게 평화가 함께하거라. 원수의 손에 그대가 얼마나 아름다운 땅이 될 수 있을까."

 

  그는 641년 2월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리드의 이야기는 638년에 끝났습니다. 우마르가 할리드를 해임한 것인데, 명분으로 삼은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할리드가 말년에 터키 원정에서 페르시아 출신의 한 시인을 만났습니다. '아쉬아'라는 시인에게 1만 디르함(대략 은 30kg)를 줬는데 우마르는 그것이 국고에서 나온 돈이 아닌가 조사했습니다. 할리드는 내 개인 돈이라고 주장했고 곁에 있던 우바이다도 그를 변호했습니다. 여담이지만 할리드의 마지막 원정에서 이슬람이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고, 이 때 원정군 모두가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끝내 우마르는 이걸 명분 삼아 할리드를 메디나로 불러들였습니다.

 

  할리드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그런데 우마르는 그대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수긍했고 할리드를 인정했습니다.

 

  "너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 너는 해냈다. 그 누구도 네가 해낸 것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위업은 인간이 성취한 게 아니다. 모두 알라의 뜻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할리드가 해고당한 것에 분개했고 실제로 몇몇 장수들은 할리드에게 우마르에게 반기를 들어야 합니다라는 강력한 주장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할리드는 우마르와 이슬람에게 끝까지 충성했습니다. 우마르는 주위에서 반발하는 여론이 많자 그 누구도 우상화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해명했습니다.

 

  "나는 할리드를 원망하거나 그가 흠결이 있어서 해고한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할리드를 미화하고 잘못된 길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승리를 위해 위대한 알라보다 그에게 의지할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사람들이 모든 승리를 만드는 건 알라라는 사실을 인지했으면 한다. 이 땅에 그릇된 예언자가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된다."

 

  4년 뒤 할리드는 자신이 공성전으로 승리한 에메사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기 직전 그는 전장에서 죽지 못한 걸 한탄했습니다. 같은 해 사산 왕조 전역에서 우마르는 할리드를 다시 사령관으로 임명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에메사, 현재 홈스인 시리아의 도시에는 할리드를 기념하는 모스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름도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모스크'.

 

 

  할리드가 이슬람 편에 서서 활동한 건 10년이 안 되지만 그 길지 않은 시기의 강렬함은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무함마드 사후 반짝으로 끝날 뻔한 이슬람을 반석 위에 세우고, 이제 막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한 이슬람 세력으로 거대 제국인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을 상대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사산조 정벌에 나서는 633년부터 비잔티움 전역이 끝나는 638년까지 6년이 채 안 되는 역사에서 못해도 30번이 넘는 전투에서 언제나 승리했습니다.

 

  중요한 전투 때마다 열세의 전력일 때도 많았고, 거의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전투를 치렀을 때도 있었고, 사막 수백 km를 원정하기도 했지만 그런 것들은 할리드에게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포위전, 수공, 공성전, 기습, 공성전, 일기토 등 다양한 방식으로 승리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비잔티움과 사산조 간의 오래 지속된 전쟁도 훗날 이슬람이 승리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특히 사산조는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죠. 그리고 할리드와 함께한 아부 우바이다, 아므르 이븐 알 아스 같은 훌륭한 이슬람 장군들의 조력도 빼놓을 수 없겠죠. 하지만 그렇다 해도 신생 이슬람과 두 제국 사이의 국력(특히 비잔티움)은 까마득했다고 생각합니다. 할리드와 맞선 적들이 전쟁 경험도 많았다는 점도 그를 높이 평가할 수 있고, 특히 할리드는 그 대단한 헤라클리우스마저 꺾었습니다.

 

  저명한 미국 군사학자 조지 나프지거는 할리드의 대표적인 영광인 야르무크 전투를 역사의 분기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야르무크 전투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전투임에도 인류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 하나이며, 비잔티움의 군대가 승리했다면 현대 세계는 인식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변화했을 것이다."

 

  8. 출처

도서

버나드 루이스, 『이슬람 1400년』, 까치글방(2010)

김승철, 『포용의 정복자 이슬람』, 좋은땅(2014)

아이라 M. 라피두스, 『이슬람의 세계사 1』, 이산(2008)

 

유튜브

<Battle of Yarmouk, 636 AD (Part 1/2) Storm gathers in the

Middle East> (https://www.youtube.com/watch?v=vL33R5F2Pkg)

<Battle of Yarmouk, 636 AD (Part 2/2) Storm gathers in the

Middle East> (https://www.youtube.com/watch?v=_4YePBWh0-w)

 

영문위키

<Siege of Emesa>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Emesa

<Battle of the Yarmuk>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Yarmuk

<Siege of Jerusalem (636–637)>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Jerusalem_(636%E2%80%93637)

<Siege of Aleppo (637)>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Aleppo_(637)

<Battle of the Iron Bridge>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Iron_Bridge

<Siege of Germanicia>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Germani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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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사] 초기 이슬람에서 무함마드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승리(~6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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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ovisionnew.tistory.com/59

 

[전쟁사]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악연(Main: 530년의 다라 전투)

1.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476년, 오토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그 이후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의 왕국이 옛 제국

neovisionnew.tistory.com

601년 지도입니다.(출처:GeaCron)

 

  1. 7세기가 시작할 때 세계 현황, 그리고 무함마드

 

  601년의 상황은 수나라와 비잔티움 제국이 세계 최강국을 다투고 있었고, 이들에 비견될 만한 국가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분열된 서돌궐과 동돌궐이었습니다. 고구려 역시 몇 년 전 수문제의 침공을 막아낼 만큼 강대국이었고, 인도는 삼국지의 군웅할거처럼 조각조각 분열되었으며, 유럽은 고트족과 아바르 칸국이 주요 세력이었습니다.

 

 

  비잔티움과 사산조가 끝없는 전쟁을 벌이던 610년대,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 지대에 살던 사람들은 메마른 땅에서 하루하루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다만 메카는 무역의 중심지로 많은 자본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씨족과 씨족들이 모인 부족들이 메카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이 중 가장 강력한 씨족이 '쿠라이시족'이었습니다.

 

  570년에 태어난 이슬람의 사도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 고아였습니다. 태어나기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여섯 살에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25살이 되자 한 쿠라이시족의 여성 상인에게서 무역을 대신 맡았고, 문제 없이 시리아에 도착해서 그녀의 투자금을 배로 불렸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를 마음에 들어한 여성 상인의 이름은 '카디자'로 그에게 청혼하여 결혼이 성사되었습니다. 갑부가 된 무함마드는 메카의 빈부 격차와 씨족들 사이의 돈을 둘러싼 갈등을 염려했는지,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찾아오면 식량을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lt;무함마드 전기&gt;의 삽화 중 하나입니다. 무함마드에 반대하는 메카 사람들이 돌을 던지려고 할 때 아부 바크르가 사람들을 말립니다. 흰 천으로 얼굴이 나타나 있지 않은 사람이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610년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포교했습니다. 아내들과 친구들을 이슬람의 신도가 되었고, 나날이 추종자들이 불어났습니다. 특히 씨족에서 내쳐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씨족장 등의 상류층 대부분이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의 메시지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고, 부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함마드를 따르던 사람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거나, 메카 바깥으로 쫓겨나거나, 식량과 물을 구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무함마드는 자신을 키워준 큰아버지 아부 탈리브와 아내 하디자가 619년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자신을 따르는 일행과 함께 622년 암살단의 눈을 피해서 메디나에 도착했습니다.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금방 메디나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메카를 출발해서 북쪽으로 가는 상인들을 습격하면서 전쟁물자를 모았습니다. 메디나를 지나치는 메카 유력자 중에 '아부 수피안'이 있는데 그는 행렬 중 메디나군이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고 메카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전투 위주로 역사를 분석했습니다. 전투 연도, 추정되는 양쪽 병력, 전투가 벌어졌던 위치를 현재로 치환했으며, 마지막으로 전투의 과정을 썼습니다. 중간에 몇 번의 역사 배경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병력이 여러 자료에서 이견이 갈리는 경우는 물결표를 썼습니다.)

 

바드르 전투의 삽화, 초록색 옷의 무함마드는 하얀 천으로 가려져 있는데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리는 걸 터부시하고 있습니다.

 

2. 바드르 전투(Battle of Badr, 624년)

병력: 이슬람군 300명 ~ 400명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1,000명

결과: 이슬람군 승, 이슬람군 14명 전사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70명 전사, 70명 포로

이슬람 지휘관: 무함마드

위치: 사우디아라비아 히자즈 지역(메디브 근방)

 

  과정: 메디나로 근거지를 옮긴 무함마드는 622년 부터 630년까지 메카를 장악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을 벌입니다. 홍해 연안과 가까운 바드르(Badr)라는 우물가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여기서 무함마드의 장수들이 쿠라이시의 장수들 간의 일기토에서 연승했고 동요하는 적들을 상대로 화살비를 퍼부어 승리했습니다.

 

  바드르는 메카보다 메디나 쪽에 몇 배는 가까이 위치했는데, 이 때문에 메카의 군대는 지쳐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무함마드가 메카군이 오는 길에 있는 우물을 못 쓰게 흙으로 메워서 물 확보에도 어려웠습니다. 병력 3배 앞서는 건 그 상황에서 거의 무의미했죠. 하지만 아부 수피얀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 메카로 일찍 도주하면서 대부분의 상인 행렬을 보존했고, 이슬람의 전리품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

 

  70명의 포로 중에는 그 유명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동생인 왈리드 빈 왈리드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후드 전투의 형세, 언덕에 이슬람 궁병이 있습니다.

 

3. 우후드 전투(Battle of Uhud, 625년)

병력: 이슬람군 보병 700명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3,000명(+낙타 3,000마리), 기병 200명

결과: 메카군 승리, 이슬람군 62명 ~ 75명 전사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22명 ~ 35명 전사

이슬람 지휘관: 무함마드

위치: 사우디아라비아 우후드 산

 

  과정: 앞에서 말한 아부 수피안은 많은 돈을 투자하여 이번에는 메디나를 공격하는 총사령관이 됩니다. 3,000명 이상의 군대를 이끌고 메디나로 향합니다.

 

  원래 무함마드에게는 1,000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메디나의 유력자 한 명이 너무 불리하다며 도망치고, 겨우 700명의 병력만 남았습니다. 전황이 불리하다는 걸 깨달은 무함마드는 메디나 근처의 우후드 산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보병으로 긴 전선을 형성하고 언덕에 궁병을 배치했습니다. 아부 수피안은 이크리마(Ikrimah)라는 장수와 할리드에게 200명의 병력(이 중 기병이 100명)을 주고 양 날개를 맡을 것을 지시하고 자신은 대부분의 보병을 이끌었습니다.

 

  전투 초반은 숫자가 적은 이슬람군의 우세였습니다. 이슬람군은 메카군의 중앙을 휩쓸었고, 할리드는 적 궁병이 있는 언덕을 공략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다 이겼다는 듯이 이슬람군의 약탈이 거세지자 언덕 위의 이슬람 궁병도 약탈에 참가하려고 대부분이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 할리드는 소수의 궁병을 공격했고 반대쪽의 이크리마도 가담했습니다. 궁수들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자 할리드는 이슬람군의 후방을 노렸고, 이크리마는 무함마드가 있는 적 본진으로 진격했으며, 총사령관인 아부 수피안도 재정비해서 반격에 나섭니다.

 

  전세가 역전되자 이슬람군은 후퇴하고 무함마드도 산 속에 숨었습니다. 이슬람군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메카군이 죽은 이슬람군 시체에서 약탈할 게 있나 정신이 팔려서 그렇게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산비탈에서 이슬람군은 재정비하여 방어진을 구성했습니다. 할리드와 이크리마의 기병은 산비탈을 올라가기 힘들었고 아부 수피얀은 메카로 되돌아갔습니다. 무함마드는 이마와 입술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Trench, 즉 참호를 썼다고 해서 이 전투를 참호 전투라고 부릅니다.

 

4. 한다크 전투(참호 전투, Battle of the Trench, 627년)

병력: 이슬람군 3,000명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 아랍 부족들 10,000명

결과: 이슬람군 방어 성공, 양쪽 병력 소규모 피해(최대 10명), 한 달 간의 포위 끝에 메카군 후퇴

이슬람 지휘관: 무함마드

위치: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

 

  과정: 627년 1월에 있었던 전투입니다. 메카 쿠라이시 부족이 아라비아 쪽 부족들과 연합하여 1만 명의 병력을 구성했고 이번에는 메디나까지 가서 물샐틈 없이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영리한 무함마드는 참호를 파고 3천 명의 병력으로 막아냈죠.

 

  오히려 이 전투보다 3년 뒤 메카를 함락한 전투나 6,000명의 포로와 수만 마리의 양과 낙타를 전리품으로 획득한 후냔 전투(Battle of Hunayn)를 꼽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참호전이라는 과정이 있고 이를 기점으로 무함마드가 더욱공격적으로 나와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봅니다. 또한 이 전투 이후 가까운 시기에 휴전이 성사되고 적이었던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이슬람으로 개종합니다. 바드르 전투에서 포로가 된 동생을 돈을 주고 데려왔는데, 그에게서 몇 년 동안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도 속 녹색이 무함마드가 생전에 정복한 영역입니다. 다만 현재 오만 지역까지 녹색으로 칠해진 건 오류인 것 같네요.

  무함마드는 63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메카를 정복한 뒤 아라비아 반도 땅 중 홍해를 따라서 남북으로 긴 땅을 확보했고, 훗날 이슬람 세력이 제국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왈라자 전투를 요약한 gif 파일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전투 지도를 더 첨부합니다.

 

 

5. 왈라자 전투(Battle of Walaja, 633년)

병력: 정통 칼리파 이슬람 15,000명 vs 사산조 페르시아 30,000명 ~ 50,000명

결과: 이슬람군 대승, 이슬람 병력 2,000명 상실 vs 사산조 페르시아 20,000명 상실

이슬람 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위치: 현재 이라크 알 나자프 지역

 

  '알라의 검'은 무함마드 사후 아라비아 지역에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고,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을 향한 정복 전쟁에 돌입합니다. 할리드의 승전은 수십 회나 되지만 그 중 위대하고 역사적인 승리만 골랐습니다. 왈라자 전투는 그의 전술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과정: 왈라자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도 할리드는 체인스 전투(Battle of Chains)와 리버 전투(Battle of Rivers)에서도 대승을 거두었고, 위기감을 느낀 사산조 페르시아는 지원군을 파견합니다. 다만 어찌된 이유인지 1차 지원군과 2차 지원군이 합쳐지기 전까지 지연되었습니다. 할리드는 척후병들에게서 이 정보를 얻고 전투를 벌입니다.

 

  전투 이전 날에 4,000의 기병을 사산조군의 뒤쪽 언덕에 보이지 않게 숨겨놓았고, 2배 이상의 전력 차이에도 적극적인 공세를 취합니다. 상대 지휘관 안다르자그하르는 보병, 기병이 중무장이라는 우위를 점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이슬람군이 지칠 때를 노립니다. 전투가 유리해지자 때가 되었다는 걸 판단하고 역공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할리드는 후방에 대기시킨 경기병의 공격을 명령하고 포위 작전은 대성공을 거둡니다. 안다르자그하르는 전멸하는 전장에서 겨우 도망치지만 사막에서 물을 구하지 못해 죽고 말았습니다.

 

할리드의 633년경 원정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보라색으로 표시한 곳이 왈라자 전투, 피라즈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6. 피라즈 전투(Battle of Firaz, 634년)

병력: 정통 칼리파 이슬람 15,000명 vs 사산조 + 비잔티움 연합군 120,000명+

결과: 이슬람군 대승, 이슬람군 피해 미미 vs 연합군 100,000명 상실

이슬람 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지역: 현재 이라크-시리아 국경지대 중 유프라테스 강이 교차하는 곳

 

  배경: 이 전투 이전에 할리드는 사산조 전역에서 10전 전승이라는 대기록으로 사산조의 정예군을 황폐화 시켰습니다. 이는 추후에 이슬람군이 사산조에 깊숙히 진군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비잔티움은 할리드를 경계하기도 했고, 피라즈가 비잔티움의 국경이기도 해서 한 때 철천히 원수였던 사산조에게 지원군을 보냅니다. 피라즈에서 사산조군은 패잔병을 긁어모았습니다.

 

이슬람군과의 전투 도중 수공으로 중앙이 혼비백산해진 연합군

  과정: 유프라테스 강을 두고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우선 할리드는 후퇴 명령을 내리고 적들이 강을 건너길 기다렸습니다. 할리드는 적은 병력에도 길게 저지선을 형성했고 양 날개에 있는 기민한 병력은 강둑으로 가라고 지시했습니다. 명령을 받은 이슬람군은 강둑을 파괴시키고 순식간에 강물이 불어났습니다. 연합군의 중군은 물에 휩쓸리고 이미 강을 건넌 병력과 후방의 병력이 따로 고립되었고, 이슬람은 압도적인 전투교환비를 거둡니다.

 

동그랗게 성을 둘러싼 빨간색 병력이 이슬람군입니다.

 

7. 다마스쿠스 공성전(Siege of Damascus, 634년)

병력: 정통 칼리파 이슬람 20,000명 vs 비잔티움 제국군 16,000명(+지원군 12,000명)

결과: 공성 성공, 이슬람의 다마스쿠스 점령 및 비잔티움 큰 피해

이슬람 총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위치: 현재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할리드는 회전은 물론 공성전에 있어서도 단 한 차례 패배조차 몰랐습니다.

 

빨간 줄은 할리드가 수백km의 사막을 횡단했다는 걸 알려줍니다.

 

  전투 이전 배경: 할리드는 직접 정예 경기병 군단인 모바일 가드(Mobile Guard)를 창설했다고 합니다. 이들을 이끌고 비잔티움이 예측한 경로를 피해서 무보급으로 진격했습니다. 오아시스에 의존하여 수백km나 되는 사막을 돌파했고, 쉴틈 없이 진군하여 수와, 팔미라 등의 요새를 떨어뜨리고 남진합니다. 남쪽에는 비잔티움의 동맹이자 방패인 가산 왕조의 수도인 보스라가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의 지원에도 할리드는 보스라 공성전(Battle of Bosra)에 성공하고 가산 왕조는 4년 뒤 멸망합니다.

 

  보스라 공성전 이후 아즈나다인 전투(Battle of Ajnadayn)와 야쿠사 전투(Battle of Yaqusa)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승리하고 시리아 남부를 안정시킵니다. 이제 할리드는 보스라 공성전 때문에 미뤄두었던 다마스쿠스 공략에 나섭니다.

 

  과정: 다마스쿠스는 비잔티움 동부의 핵심 중의 핵심인 도시로 성벽의 높이는 11m, 길이는 1,500m에 달했다고 합니다. 문은 6개나 되었고요.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사위인 토마스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쪽에서도 할리드 뿐만 아니라 훗날 이집트 원정에 큰 공을 세우는 아므르 이븐 알 아스, 보스라 공성전에서 선발대 역할을 맡은 슈르하빌 등의 여러 사령관 등 총 출동하여 20,000의 대군을 모았고, 634년 8월 21일 철저하게 성을 포위합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도 다마스쿠스를 잃는 참사는 피해야 했기에, 12,000명의 병력을 보내서 구원을 시도합니다. 할리드는 정찰병들에게서 이 소식을 듣고, 즉시 5,000명의 별동대와 동쪽 문을 지키던 사령관인 라파이 빈 우마이르를 보냅니다. 성 내부의 적군이 이 사실을 알지 않기 위해 다마스쿠스에서 32km나 떨어진 곳에서 지원군과 싸우도록 했습니다. 선봉으로 보낸 라파이의 군사들이 포위되자, 할리드는 직접 4,000명의 병력을 다시 이끌고 지원군의 후방을 기습하여 재차 승리했습니다. 그 뒤 안심할 수 없었기에 할리드는 포위 진영으로 돌아갑니다.

 

  한편, 토마스는 지원군이 왔다 간 사실과 이 때문에 적들이 일시적으로 병력을 빼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직접 정예 5,000병을 뽑았고, 성벽 위의 궁수들의 지원 사격을 시작으로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슬람군에 의해 오른쪽 눈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고 다시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 돌파전은 4개의 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격했습니다. 토마스는 슈르하빌이 지키고 있던 '토마스 문'과 할리드가 있던 동쪽 문에 힘을 강하게 실었습니다. 특히 생포해야 할 대상인 할리드 쪽에는 상당한 병력이 배정되었으나 그가 이끄는 정예병을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아군의 피해가 더 심하다고 여긴 토마스는 다시 후퇴했습니다.

 

  이슬람군은 당시 기준으로 공성병기가 부족했기에 할리드도 적극적인 성벽 공략은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고, 할리드는 성 안의 '요나(Jonah)'라는 한 그리스 출신 사람로부터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정보를 듣습니다. 오늘(9월 18일) 큰 축제가 있으니 수비군이 약할 것이라는 정보였죠.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할리드는 100명의 결사대을 이끌고 동쪽 문의 성벽을 올라갑니다. 아니나 다를까 성벽 꼭대기에는 수비 병력이 없었습니다. 6개의 문 중 동쪽 문이 가장 튼튼한 벽인데도 비잔티움군은 축제에 심취해 있었던 것입니다. 할리드는 즉시 성 내부로 진입해서 안의 경비병을 살해했고 문을 열었습니다. 개방되자마자 이슬람군은 성 안으로 진입했고 처절한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초록색 = 이슬람군, 보라색 = 비잔티움군, 성 안으로 할리드가 침입했을 때 상황입니다. 빨간색으로 그려진 건 토마스가 다른 이슬람 지휘관에게 보낸 평화 협상 사절입니다.

  토마스는 이 소식을 듣고 동쪽 문만 뚫렸을 뿐 다른 문은 아직 호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반대쪽에 있던 '쟈비야 문'을 지키던 아부 우바이다에게 성을 넘겨줄 테니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평화 협정을 제안했습니다. 우바이다는 이를 받아들였고 토마스와 함께 '마리아미테 대성당'까지 행진했고, 눈에 들어온 모든 적들을 죽이면서 진군한 할리드의 군대와 만납니다.

 

토마스와 할리드 등 이슬람 지휘관들이 협상했다고 전해지는 마리아미테 대성당입니다.

  할리드는 평화 협정에 기가 막혔고 이미 도시는 무력으로 점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우바이다는 평화 협정으로 다마스쿠스를 손에 넣었다고 주장하며 대립했습니다. 몇몇 장군들의 설득에 할리드는 불만족하면서도 평화 협정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마스쿠스 사람들은 아무도 노예가 되지 않고, 사원 등의 건물은 파괴할 수 없고, 사람들이 다마스쿠스에서 도망쳐도 안전을 보장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다만 협정에는 사흘의 유예 기간이 있었습니다. 사흘이 지나면 군대와 군대 간의 전투는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마라즈 알 데바르 전투를 요약한 gif 파일입니다. 할리드의 기병은 네 방향에서 적들을 둘러쌉니다.

 

8. 마라즈 알 데바르 전투(Battle of Maraj-al-Debaj, 634년)

병력: 정통 칼리파 이슬람 4,000명 vs 비잔티움 제국군 10,000명

결과: 이슬람군 승리, 토마스 살해, 수천 명을 포로로 잡음.

이슬람 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위치: 현재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와 터키 안타키아 사이의 지역

 

  과정: 유예 기간이 끝나고 할리드는 앞에서 언급한 정예 경기병 군단인 '모바일 가드(Mobile Guard)' 4,000을 이끌고 기습에 나섰습니다. 병력을 정확하게 4등분하여 할리드는 포위 섬멸할 것을 계획합니다. 먼저 기병 1,000명은 남쪽에서 적들의 후방을 치고 동쪽과 북쪽에도 기병 1,000명 씩을 할당하여 안티오크로 가는 퇴각로를 막고, 남은 1,000 기병도 서쪽을 차단하여 포위망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후퇴하던 비잔티움 병사들 10,000명은 죽기 살기로 싸웠습니다. 기병의 우위는 있었지만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천 명의 비잔티움군은 포위를 벗어나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휘관인 토마스는 할리드와와의 칼싸움에서 패배하여 전사했고, 수많은 다마스쿠스 출신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고, 황제의 딸이자 토마스의 아내까지 포로가 됩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비단도 전리품으로 획득했습니다.

이슬람군이 전리품으로 획득했다는 보로케이드 직물 비단입니다.

 

  한편 다마스쿠스 함락에서 할리드에게 힌트를 준 '요나'라는 사람(후에 이슬람으로 개종)도 이 전투에 따라왔습니다. 원래 할리드에게 정보를 알려준 대가로 사랑하는 약혼녀와 결혼시켜 달라고 요청했는데, 성이 포위당해 결혼이 취소당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 전투가 끝나고 그녀를 발견하여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약혼녀는 배신자인 그를 혐오했고 품에서 단검을 꺼내 자살했습니다. 할리드는 요나에게 황제의 딸과 결혼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약혼녀가 죽었으니 이제 다른 여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면서 거절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다마스쿠스로 다시 돌아가는 할리드에게 사절을 보내서 딸을 돌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짐은 그대가 내 군대에 한 짓을 알고 있다. 그대는 짐의 사위를 죽이고 딸을 사로 잡았다. 그대는 이겼고 무사히 탈출했다. 짐은 이제 그대에게 짐의 딸을 요청한다. 몸값을 지불하고 그녀를 짐에게 돌려주거나 그녀를 짐에게 선물로 주거라. 그대의 성품에 명예가 강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라는 편지를 읽은 할리드는 대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녀를 선물로 데려가시오. 몸값은 없을 것이오."

 

  라고 대사와 황제의 딸을 헤라클리우스에게 돌려보냈습니다.

 

할리드라는 인물을 나타낸 대표적인 그림입니다.
할리드가 전투를 지휘했던 모든 전쟁 구역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9. 총평

 

  할리드는 역사상 최고는 아닐지라도 이슬람 역사상에서 만큼은 가장 위대한 군사지휘관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그를 향해 '사이프 알라흐(Sayf Allah)'라는 별칭으로 부르는데 이는 '신(알라)의 검'을 의미합니다.

 

  비잔티움과 사산조가 자랑하는 중기병(카타프락토이)는 이슬람군에게 거의 없었지만, 할리드는 경기병의 기동력을 극대화시켰습니다. 포위전, 수공 등 빠른 전술 수행에 경기병은 보탬이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보병에 있어서도 이슬람은 사산조, 페르시아에 비해 중보병 숫자가 적었는데도 할리드는 무패 신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할리드는 영토를 아주 크게 확장한 명장에 속하지는 않지만 사산조와 비잔티움의 정예 병력을 수없이 궤멸시켰고, 이는 정통 칼리파 이슬람이 훗날 영토를 대폭 확장하는 원인이자 공로였습니다. 신생 이슬람 세력이 그 시기 세계 최강 제국을 두 나라나 압도한 건 할리드의 전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심지어 두 제국이 연합했는데도 할리드에게는 어림없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용인술도 전술 못지 않게 높았습니다. 이슬람 규율에 도덕적인 지침을 명령한 친구이자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있었고, 한 때 적이었던 할리드를 개의치 않고 크게 중용했으며, 2대 칼리프 우마르도 적이었지만 이슬람 교리에 감화되어 개종했으며, 이집트 정복의 영웅 아므르 이븐 알 아스와 페르시아 정복의 영웅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도 일찍이 무함마드와 함께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 시절 이슬람군은 점령지의 백성들이 저항하거나 배신하지 않으면 권리를 보장해주고 차별 대우를 적게 했습니다. 이는 초기 이슬람이 팽창하는 근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634년까지의 전투와 상황을 다뤘습니다. 할리드의 비잔티움 전역은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어지는 글을 올리겠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위대한 황제였지만 말년에는 할리드라는 악몽에 시달렸고, 심지어 634년까지의 상황은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10. 출처

 

  출처: 정명섭 외 1인, 『전쟁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2016)

  고원, 『이슬람 역사 1400년 - 알라가 아니면 칼을 받아라』, 동서문화사(2002)

  수잔 와이즈 바우어,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권』, 부키(2010)

  유튜브 <Siege of Damascus 634 - Arab - Byzantine Wars DOCUMENTARY>(https://www.youtube.com/watch?v=ZGo5ck2EEHg)

 

영문위키 <Battle of Badr>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adr)

<Battle of Uhud>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Uhud)

<Battle of the Trench>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Trench)

<Battle of Walaja>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laja)

<Battle of Firaz>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Firaz)

<Siege of Damascus (634)>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Damascus_(634))

<Battle of Maraj-al-Debaj>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Maraj-al-Deb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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