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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며,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을 접하길 원하는 1인입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며 주기적으로 헌혈하는 헌혈자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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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전 (2)
천하제일 제독 호레이쇼 넬슨, 과감함으로 해양을 지배하다 - 코펜하겐 전투(18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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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투 배경

 

  1800년 11월, 러시아는 발트 해에 영국 선박의 입출항 금지 명령을 내립니다. 러시아, 덴마크, 프로이센, 스웨덴은 무장 중립 동맹을 결성했고, 그들은 영국이 발트 해와 엘베 강에 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덴마크 역시 자국 항구의 영국 선박의 출입을 중단시켰습니다. 영국과 동유럽의 무역은 최악의 상황에 치달았습니다.

 

  당시 영국은 지금의 폴란드 지역 등 동유럽 내륙에서 많은 곡물을 수입했었습니다. 이는 산업혁명이 활발히 진행중인 것도 이유였습니다. 영국으로서는 다가올 식량 부족 문제에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영국 본토에서 식량을 어느정도 자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799년~1800년, 영국은 심한 흉년을 겪고 있었습니다. 1799년에는 소빙하기 현상으로 인해 비가 지나치게 쏟아지고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반대로 1800년에는 아조레스 고기압의 확장으로 강수량이 지나치게 감소했습니다. 그 해 여름에 큰 가뭄이 오고, 기후변화로 인해 농작물이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1799년~1800년의 영국의 밀 수확량은 예전 몇 년 동안의 평균 수확량에 비해 절반, 75% 수준이었습니다. 1799년 10월~1800년 9월까지 밀 수확량과 수입량을 합쳐도 영국 국민들이 소비해야 할 밀 양의 60% 뿐이었습니다. 1799년~1801년 밀 가격은 3배 이상 올랐습니다. 식량 부족에 참다못한 영국 백성들은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영국 정부는 무료 급식소를 설치하고, 곡물 수입상에 대해서 정부 보조금을 주면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근본적인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1800년 3월 영국 내 한 포스터에는 이런 메시지가 있었다고도 합니다.

 

“빵 아니면 피… 자유를 위한 프랑스인들의 투쟁을 당신들은 보지 못했습니까?”

 

  2. 전투 준비

 

  이미 식량 부족 문제가 커지던 상황이었습니다. 국가의 명운이 달린 시기, 영국은 무역로를 회복하기 위해, 북유럽의 동맹을 응징하기 위해 함선을 모아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1801년 3월 영국 전함들은 북해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발트해에 있는 러시아 항구까지 공격하는 건 영국 해군이라고 해도 무리였고, 덴마크를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습니다.

 

Hyde Parker

 

Horatio Nelson

  영국은 해군제독 하이드 파커 경을 사령관으로, 호레이쇼 넬슨 중장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들은 한 달이 지나 코펜하겐에 도달했습니다. 덴마크는 해역이 좁은 코펜하겐에 강한 방어벽을 구축했습니다. 요새들이 남북으로 쭉 방어선을 형성했고, 해안가 포대의 화력은 강력했으며, 수비를 위해 배치된 수십 척의 덴마크 함선 또한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넬슨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 해도를 포함한 갖고 있던 모든 정보를 검토했습니다. 코펜하겐 항구는 모래톱지대이며 해풍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곳이었습니다. 파커 경이 덴마크 함대가 항구 밖으로 나올 때를 노리자고 말하자 넬슨은 강력하게 설득했습니다.

 

  “덴마크의 방어벽은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에게나 겁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기동력으로서 덴마크 대포를 무력화할 것입니다. 모래톱은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과거 이집트의 나일 강에서도 우리는 모래톱을 이겨내고 프랑스군을 대파한 적이 있습니다. 해풍에 너무 민감하게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공격대형을 바꾸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접근이 용이한 남쪽 방향에서부터 공격하겠습니다. 사령관님과 예비 병력은 코펜하겐 북쪽에 대기해주십시오.”

 

 

코펜하겐 전투 지도

 

  3. 전투 과정

 

  1801년 4월 2일 아침,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넬슨은 파커 사령관 대신 대형 함선 12척, 프리깃 함선 5척, 폭탄선과 화공선 등의 소형 함선들을 이끌고 전장을 지휘했습니다. 미리 파악한 모래톱을 최대한 회피하면서 공격했습니다. 넬슨은 해풍에 따라 공격대형을 변화시키고, 최대한의 기동력을 이용해 해안포대의 공격에 대응했습니다. 영국 함선은 코펜하게의 부두를 향해 공격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반적으로 중무장한 함선이라고 해도 해안가 포대에 파손될 수 있어서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지만, 넬슨은 목표 지점을 향해 위험을 무릅씁니다. 강의 조류나 미처 피하지 못한 모래톱 때문에 영국 함선 중 3척(Bellona호, Russell호, Agamemnon호)이 좌초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스케치로 만들어진 코펜하겐 전투 지도(검은 점이 영국 함선입니다.)

 

  영국군은 적의 목덜미를 쥐기 위해 코펜하겐 도시를 최대한 폭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파열탄을 집중적으로 발사해서 덴마크의 기함인 Dannebrog호를 파괴했습니다. 덴마크의 피셔 제독은 급히 다른 함대로 피했습니다. 덴마크군은 강력하게 저항했고, 서로 일제사격 등 셀 수 없는 포격을 주고받았습니다. 전투 시간은 네 시간을 넘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파커 제독은 패전을 염려하여 ‘교전 중지 및 퇴각 신호’를 보냅니다. 하지만 넬슨은 승리를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실명한 눈에 망원경을 대고 신호를 확인했습니다. 그는 몇 년 전의 전투로 한 쪽 눈을 실명한 상태였는데, 퇴각 신호의 깃발을 보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신호가 보이지 않는군.”

 

  퇴각 신호를 모른척하는 넬슨

  오후 2시 쯤, 코펜하겐 항구의 해풍이 잦아들고 있었습니다. 움직임이 용이해진 영국 함선은 덴마크 함선을 포위하고 압도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넬슨은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덴마크 함선 가운데 Nybrog호와 Aggershuus호가 영국 함선의 포탄을 맞고 폭발했습니다. 덴마크의 전함은 포위된 채 항복했으며, 해안포 사격도 점차 무력해졌습니다. 오후 2시 반, 덴마크 방어선의 남쪽과 중앙이 본격적으로 무너졌습니다. 영국은 12척의 배를 나포하기까지 했으며, 마침내 전투는 영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4. 전투 이후와 총평

 

  코펜하겐 해전에서 영국군은 12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덴마크군은 사상자 1700명과 포로 4300명을 냈습니다. 영국군 역시 많은 피해를 입었기에 상륙 후 도시 점령은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은 함선 내포 이외에도 대형 박격포라는 전리품도 획득했습니다. 도시를 폭격할 수도 있었기에 덴마크의 프레데릭 황태자는 정전협정에 동의했습니다.

 

  영국과 덴마크 전쟁의 발단은 영국의 날씨와 식량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곡식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은 전쟁을 각오했습니다. 전투 이후 러시아나 북유럽 국가들은 영국에 쉽사리 맞서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함부로 영국을 적대하지 못했고, 러시아-덴마크-스웨덴-프로이센의 무장 중립은 깨졌습니다. 코펜하겐 해전은 영국과 덴마크에게 분기점이 될만큼 중요한 해전이었습니다. 이 해전의 패배 이후 덴마크의 해상 영향력은 추락했지만, 영국의 해상 영향력은 날아올랐으며 그들의 선박은 코펜하겐 항로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국 함대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넬슨의 치밀한 작전과 기민한 지휘력, 기회를 확실히 잡기 위해 상관의 명령을 임기응변으로 무시한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잘 훈련된 영국 선원들은 우월한 포술을 발휘할 수 있었고, 지속되는 원정 포격전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넬슨의 단호한 공격적 성향이 대단히 잘 나타난 전투입니다. 전투 해역이 좁았지만 날카로운 판단으로 말미암아 중요한 위치를 점거해서 승리한 것입니다.

 

  코펜하겐 전투의 공로로 넬슨은 자작에 서임되었습니다. 그의 승전하면 일반적으로 트라팔가르 해전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본토에서 덴마크까지 도달한 이 코펜하겐 전투와 본토에서 이집트까지 도달해서 승리한 아부키르만 해전(나일 강 해전)도 백미입니다. 명실공히 호레이쇼 넬슨은 장거리 항해라는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난공불락의 요새를 공략했던 역대 최고의 해군 제독 중 한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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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남은 전쟁사, 페르시아-그리스 전쟁(~기원전 479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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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세기~6세기 후반의 오리엔트 4대 강국, 메디아, 리디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키루스 대제는 저 국가들을 아케메네스 제국으로 통합하고, 다리우스 대제 시기 페르시아 제국은 최대 세력을 이룩합니다

 

  1. 세계사 최초의 대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기원전 6세기 중반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는 장기간 압도적인 세계 최강의 대제국으로 군림했습니다. 키루스 대제가 메디아와 리디아를 차례로 평정하고, 바빌론의 높은 성벽을 공략해서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나머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을 제국의 영향권에 두었습니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해서 오리엔트 4대 강국이 모두 아케메네스 제국에 복속되었습니다. 캄비세스 2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도 역시나 인도와 마케도니아를 정복했습니다. 그는 샤한샤(왕 중의 왕)라는 대왕의 직위에서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제국을 ‘사트라피’라는 20여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습니다. 거기에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렸으나, ‘왕의 눈’과 ‘왕의 귀’라고 하는 감찰관을 통해 세금을 제대로 내는지 등을 감시시켰습니다. ‘왕의 길’이라는 역참 시스템도 강화했는데 감찰관이 2400km의 길을 7일 만에 주파하여 다리우스에게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앙집권화가 갖춰진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리스 보병이 양익 포위로 승리한 마라톤 전투, 빨간색이 페르시아군이고 파란색이 그리스군입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사방에 영향권을 넓혔습니다. 그리스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죠. 다리우스 1세는 사신을 보내서 복종하라는 의미로 흙과 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거절했습니다. 기원전 499년부터 494년까지 페르시아가 이오니아의 반란을 진압했을 때 아테네는 지원군을 보내 이오니아 도시를 도왔습니다. 페르시아는 반란을 진압하고 아테네를 정복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기원전 490년,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군은 다리우스 1세가 보낸 페르시아 원정군의 양익을 노리는 전술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페르시아군 중앙이 아테네군 중앙을 공략하여 파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군 양익 보병이 페르시아군 양익을 무너뜨려서 일방적인 아테네군 승리로 끝났습니다. 페르시아군은 뒤에 있는 함대로 후퇴해서 38km 정도 떨어진 아테네로 상륙을 노렸지만 이미 방비를 끝낸 아테네군을 보며 페르시아군은 후퇴했습니다.

  2.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의 시작

  몇 년 뒤 다리우스 1세는 세상을 떠나고,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새로운 샤한샤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르다넬즈 해협에 부교를 놓아서 육군의 통로를 만들었고, 지난 원정에서 페르시아 해군이 풍랑에 직면했던 곳에 운하를 뚫어서 배가 더 원활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치밀한 원정 계획을 세웠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최소 10만명이 넘는 병력과 600척~1200척의 함대를 이끌고 공격했습니다. 아테네는 육지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리스티데스를 쫓아내고 함대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에 대항하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함선의 대부분은 ‘트라이림(Trireme)’이라는 3단 노선이었습니다. 3단 노선은 말그대로 노잡이들이 3단으로 앉은 함선을 뜻합니다. 가장 위에 있는 노잡이가 가장 긴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이 함선은 폭이 5.5m, 길이는 36m~39m 정도였고, 200명의 선원이 탈 수 있었습니다. 뱃머리 끝에 충각이 있어서 충돌을 통해 적군의 함선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해군의 주력도 트라이림이었지만, 일부 병력은 크기가 작고 쾌속선인 ‘바이림(Bireme)’이라는 2단 노선을 통해 전장에 투입했습니다. 바이림의 목표는 보병들을 빠르게 적선에 침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그리스 해전의 핵심이었던 트라이림
 지도 중간에 있는 '아르테미시움'이 전쟁 초기에 해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육군과 수군이 한꺼번에 진군해오는 페르시아군에 맞서서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은 아르테미시움이라는 항구에 함선을 집중시켰습니다. 기원전 480년 8월 셋째 주, 아르테미시움 항구에 모인 아테네, 코린트, 메가라, 칼키스 등의 도시국가들의 연합 해군은 371척에 달했습니다. 반면 북동쪽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페르시아의 해군은 1,207척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 트라이림의 항로 앞에 폭풍이 나타나 대략 200척이 침몰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르테미시움에서 그리스 해군과 페르시아 해군 사이의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선제공격을 선택했습니다. 앞선 그리스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의 횡대 중 느슨한 곳을 노렸습니다. 그들의 함선 측면을 충각으로 부딪히고 빠르게 뒤로 빠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트라이림의 핵심인 충각입니다. 뱃머리 아래에 돌출되어서 적선에 충돌시켜 침돌시킬 수 있었습니다.

 

  몇 차례의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충분한 전공을 올렸습니다. 첫 전투에서 페르시아 함선 30척을 나포하는 승리를 거두는 등 지속적인 손실을 입혔고, 또다시 폭풍우가 페르시아 함선 200여 척을 좌초시켰습니다. 하지만 전투 마지막 날에는 페르시아군도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았고, 그리스 연합군도 아테네에서 온 함선의 절반을 상실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영문위키에서는 3일 간의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100척을, 페르시아군은 400척의 함대를 잃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양쪽 함대는 재정비 상태로 들어가 시신을 수습하고 난파된 함선 중 쓸만한 게 있는지 돌아봤습니다.

 

  한편, 멀리 지상에서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지휘하는 그리스 연합군이 테르모필레에서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대군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스군은 좁은 계곡에서 적은 병력으로도 목숨을 걸고 저항했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도 아르테미시움 해전처럼 3일 전투로 끝났는데, 둘째 날까지는 그리스군이 압도적인 전투교환비를 거두었지만, 크세르크세스는 에피알테스로부터 산길에 협로가 있다는 정보를 듣자마자 페르시아군의 병력을 나누어 우회시켰습니다. 셋째 날 그리스군은 일방적으로 포위되었고, 결국 레오니다스 왕은 전사했습니다.

 

영화 <300>에도 묘사되었던 테르모필레 전투, 빨간색이 페르시아군인데 우회해서 파란색 그리스군의 뒤를 공격해서 승리했습니다.

  그리스 수군은 테르모필레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고 바로 아르테미시움을 떠났습니다. 페르시아 대군이 아테네까지 일사천리로 내려올 것은 뻔했고, 아테네보다도 북쪽에 있는 아르테미시움을 방어할 수는 없었습니다. 테베는 진즉에 페르시아의 편에 섰습니다. 9월 초 아테네인들은 아테네를 소개(疏開)했고 페르시아군은 텅 빈 아테네에 입성했습니다. 살라미스 섬은 아테네에서 피난 온 사람들로 북적였고, 그리스 지휘관들은 어디에서 일전을 벌일지 논의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회의에서 코린토스 지협을 지키자는 다른 지휘관들의 의견을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공간이 넓은 코린토스보다 좁은 해협이 있는 살라미스에서 싸워야 한다고 간신히 설득했습니다.

 

  그는 동시에 시킨노스라는 첩자를 적군에게 보내서 페르시아에 복종하겠다는 거짓 항복을 알렸습니다. 또한 그리스 연합군은 서로 분열되어있고 일부는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리스 쪽 지휘관들은 소속이 달라서 뜻이 쉽게 맞지 않았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대왕 회의에서 살라미스 해협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살라미스 해전 지도
책 <살라미스 해전>에 그려진 해전 지도

 

  3. 전황이 뒤바뀐 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480년 9월, 살라미스 해협에 남은 함선을 모두 모은 그리스 해군은 370여척이었지만, 페르시아 해군은 적게 잡아도 700척이 넘었습니다. 심지어 그 이외의 페르시아 함대 200척이 살라미스 섬 서쪽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해전이 벌어지고 그리스 함대 40척이 뒤로 후퇴했습니다. 후퇴하는 그리스 해군을 타격하려고 페르시아 해군은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습니다. 비좁은 해협에 페르시아 편으로 참전한 페니키아인의 해군 부대, 이오니아인의 해군 부대 등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 순간,

 

 

  바람이 강하게 불고 높은 파도가 살라미스 해협을 뒤덮었습니다. 페르시아 함선들은 크게 흔들렸고 서로 부딪혔죠. 테미스토클레스는 즉시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스 함선은 페르시아 함선에 가까워질 때 젓던 노를 위로 들어 올렸습니다. 그 뒤 뱃머리로 페르시아 함선의 노를 집중적으로 파괴하고 충각으로 파괴시키는 방식을 썼습니다. 페르시아 함대는 구조가 높아서 그리스 파도보다 상대적으로 더욱 크게 흔들렸고, 잘 훈련된 그리스 해군은 함대를 더 빠르게 진격시켰습니다. 전투가 지속되고, 좁은 해협에서 양군의 함대가 콩나물시루처럼 서로 오도 가도 못하자 양군은 직접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4. 전투 결과 및 전쟁의 종결과 의의

  전투는 하루종일 지속되었고, 날이 저물자 그리스 해군의 피해량이 40척인데 반해 페르시아 해군은 200척이었습니다. 특히 페르시아 정예 해군인 페니키아인들의 함선이 거의 전멸했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패배하는 전황을 지켜보면서 분노했지만, 퇴각로를 아테네 해군이 끊을 것을 우려해서 원정을 포기했습니다. 부하 마르도니우스에게 그리스의 점령지를 맡겼고, 자신은 페르시아로 돌아갔습니다. 이듬해 그리스 연합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마르도니우스를 죽이고, 미칼레 전투의 연승으로 페르시아를 그리스 땅에서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장기간 지속되었던 페르시아-그리스 전쟁

 

  이 전쟁의 패배로 페르시아는 에게해 일대에 다시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내부의 정치적 혼란으로 페르시아는 재차 공세를 펼치지 못했고, 그리스 연합군은 에게해에 델로스 해상 동맹을 결성하여 섬을 점령하는 등 동쪽으로 세력을 뻗어 나갔습니다. 물론 페르시아 제국의 국력이 세계 최강 제국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고,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은 역사를 크게 바꿨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중동 제국이 서양 세력을 복속시켰을 수도 있는 전쟁에서 그리스는 오히려 승전했고, 국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패전이 짙어진 상황에서 대승을 거둔 살라미스 전쟁은 간혹 역대 4대 해전이라고 불릴 만큼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역사철학』이라는 저서에서 살라미스 해전의 역사적 의의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역사상 정신의 힘이 물질의 양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이 이렇게 명백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그만큼 그리스 사령관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의 역량(속임수와 지형 선택 등)이 빛났던 전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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