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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며,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을 접하길 원하는 1인입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며 주기적으로 헌혈하는 헌혈자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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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사] 7세기 이슬람의 이집트와 페르시아 정복, 우마이야 왕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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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ovisionnew.tistory.com/501

 

[중동사]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황혼의 영광(부제: 야르무크 전투)

https://neovisionnew.tistory.com/384 [중동사] 초기 이슬람에서 무함마드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승리(~634년) https://neovisionnew.tistory.com/59 [전쟁사]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악연(Main: 5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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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1. 양면전쟁

 

  634년, 할리드가 피라즈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이하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을 때 계획대로라면 페르시아를 계속 공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전선에서도 이슬람군이 싸우고 있었고, 여기서 아부 우바이다 등이 밀리자 아부 바크르는 할리드에게 서쪽으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페르시아도 가만히만 있지 않았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이슬람 군대를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내부 사정이 엉망이라 그 이상으로 깊게 진격하지는 못했고, 2년 가까이 대치 상황만 지속했습니다.

 

  2. 알 카디시야 전투(Battle of al-Qadisiyyah, 636년)

 

  우마르는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라는 장수에게 4천 명의 지원 병력을 주고 페르시아에게 밀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는 7번째로 이슬람에 귀이한 인물이고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위협당할 때부터 함께 싸운 인물이었습니다. 사드는 우마르의 말대로 계속 협상하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귀이하라고 계속 회의했죠.

 

  페르시아군을 이끄는 사령관 루스담도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했습니다. 636년 8월, 이슬람 군대가 야르무크 전투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고 비잔티움 전선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우마르는 동쪽과 서쪽의 전선에게 모두 전령을 보냅니다.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에게 동쪽으로 지원군을 보내라고 명령했고, 사드에게는 지원군이 도착하면 행동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5천 명의 지원군이 카디시야 근처에 도착하자, 사드는 전투를 개시합니다.

 

  페르시아 군대의 병력은 5만, 이슬람 군대의 병력은 3만 5천 정도로 병력은 전자의 우위였습니다. 양쪽 군대 모두 기병이 4분의 1, 나머지가 대부분 보병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은 2년 ~ 3년 전 할리드에게 왈라자, 울라이스, 피라즈 전투 등에서 정예병을 대부분 상실했기에 경험이 전무한 병사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루스담은 병력을 4개로 나누고 각각 코끼리를 8마리씩 배치했습니다. 사드 역시 보병과 기병을 4개로 분리해서 맞대응했습니다.

 

 

  636년 11월 16일부터 나흘 동안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첫 날 페르시아 궁병의 공격과 코끼리의 돌격으로 기세가 매서웠습니다. 사드는 용맹한 기병들로 하여금 코끼리 가까이 진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코끼리 위 안장을 고정시킨 줄을 끊어버리거나 탑승한 페르시아 병사들을 화살로 저격했습니다. 사드는 바로 반격을 개시했지만 종결짓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병력의 일부는 상대 측 사령관 루스담을 노렸으나 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루스담은 이 기습으로 몸 여러 군데에 잔부상을 꽤 입었습니다.

 

  둘째 날에 '알 카카 이븐 암르 알 타미미(이하 카카)'라는 이름의 장수가 천 명의 지원군을 추가로 이끌고 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도착하기 직전 한 덩어리로 오는 게 아니라 지원군을 여러 갈래로 나누었습니다. 나누어진 모든 병력에게 흔히 말하는 '장사진' 진형으로, 길게 줄을 지어서 오도록 지시했습니다. 페르시아는 적들의 병력이 훨씬 더 많이 불어났구나 라고 착각했고, 그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이슬람의 선제공격이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전투를 종결짓지는 못했지만, 3배 ~ 4배에 달하는 전투교환비 이득을 봤습니다.

 

 

  셋째 날, 이슬람군의 눈앞에는 재정비를 마친 코끼리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슬람 진영 가까이까지 페르시아의 기병과 보병은 코끼리를 호위했고, 코끼리들이 이슬람군을 밟을 때가 되자 코끼리 앞에 있던 병력은 길을 비켜주었습니다. 무자비한 전투 코끼리들로 인해 이슬람 진형은 계속 뒤로 밀려났고,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사드는 싸울 수 있는 기병들에게 측면으로 파고 들어가 코끼리를 한두 마리씩 차례로 제압하도록 했습니다. 기병은 다시 한 번 코끼리 궁수들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었고 코끼리의 눈을 멀게했습니다. 서로 수천 명의 병사들을 또다시 잃었습니다.

 

 

  누구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넷째 날 전장에 모래 폭풍이 불었고, 서로 시야를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카카가 이끄는 이슬람 결사대는 페르시아가 정신을 못 차리는 시간을 틈타 중앙으로 파고 들어 루스담을 살해했습니다. 사드는 루스담이 희소식을 듣고,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반면 페르시아 군대는 우리들의 총지휘관이 죽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고, 혼비백산 상태에 처해졌고 도망쳤습니다.

 

  전투의 승리로 전리품이 산처럼 쌓이자 우마르는 병영 도시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쿠파'라는 도시가 만들어졌는데, 오늘날 이라크 도시 나자프의 시초였습니다. 이슬람군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바빌론에 도달했습니다. 바빌론을 지키던 페르시아의 장수들은 겁을 먹고 도망치고, 오히려 바빌론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슬람의 편에 서서 첩보원 역할을 하거나 건설 사업에 뛰어드는 등 협조적이었습니다. 심지어 공성 무기를 생산해주기까지 했습니다.

 

  3. 크테시폰 공성전(Siege of Ctesiphon, 637년)

 

  이제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은 풍전등화의 신세에 처했습니다. 637년 1월, 이슬람 군대는 크테시폰 옆에 있는 바르시르를 포위했니다. 티그리스 강 바로 동쪽에 크테시폰이, 서쪽에 바르시르가 있었습니다. 샤한샤(페르시아의 황제, 왕중의 왕) 야즈데게르드 3세는 바르시르 주위에 해자를 파면서 버텼습니다.

 

지도 속 Ktesiphon이 크테시폰, Veh-Ardashir가 바르시르입니다.

 

  수성 도중 크테시폰에서 바르시르로 가는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2개월 뒤 3월이 되자 바르시르 내부의 물자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페르시아는 포위망을 깨기 위해 훈련된 사자까지 동원했지만, 하심이라는 이슬람 장수가 명궁이었는지 화살을 쏴서 사자가 날뛰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페르시아는 주흐람이라는 이슬람 장수 1명이 전사하는 공적만 달성하고 전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고민 끝에 사신을 보냅니다.

 

  "우리 황제께서는 티그리스 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동쪽은 우리 페르시아의 것으로 남고, 서쪽은 당신들의 것으로 된 후에 평화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조건이 당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당신들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사드는 전혀 만족하지 않았고, 페르시아가 이슬람에 복종하고 세금을 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전쟁이라고 콧방귀를 뀌었죠.

 

  역시나 바르시르는 더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습니다. 다만 바르시르에 있던 페르시아군이 탈출하면서 티그리스 강에 있는 다리를 끊었습니다. 배는 강의 동쪽 기슭의 페르시아 진영 가까이 두었습니다. 마침 티그리스 강이 불어났고, 페르시아는 도랑을 파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슬람에 귀이한 페르시아인들이 강이 얕은 지점을 알려줬고, 덕분에 이슬람 기병대는 활로를 통해 강을 건넜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배로 대부분의 군대가 크테시폰으로 진입했습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왕궁의 보물을 갖고 동쪽의 '훌완'이라는 도시로 도망쳤습니다. 그럼에도 황궁 창고에 은화만 90억냥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사드는 크테시폰에 있던 페르시아인들에게 공물을 내는 조건으로 목숨을 살려두었지만, 도망친 난민들을 쫓아서 학살하고 약탈했습니다.

 

 

빨간색 화살표는 사드가 이끄는 이슬람군의 진격로고, 노란색 화살표는  야즈데게르드 3세가 도망친 퇴각로입니다.

 

  4. 잘룰라 전투(Battle of Jalula, 637년)

 

  남은 페르시아 군대는 북쪽의 모술, 티그리트, 잘룰라 등으로 흩어졌습니다. 태반 이상이 잘룰라에 있었는데, 이곳은 티그리스 강의 지류인 디얄라 강을 끼고 있는 곳이자 아제르바이잔으로 가는 길목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크테시폰 공성전에서 화살로 활약을 한 하심이라는 장수가 1만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라자드와 미흐란이 이끄는 페르시아 2만 군대와 싸웠습니다. 프라자드와 미흐란은 크테시폰 공성전에서도 페르시아 사령관으로 있었고, 프라자드는 알 카디시야 전투에서 전사한 루스담의 형제이기도 했습니다. 637년 4월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미흐란은 적들이 돌아서 공격하지 못하도록 자그로스 산맥과 디얄라 강 사이에 자리 잡았고, 앞에 마름쇠를 설치하고 참호를 팠습니다. 전투가 벌어지자 페르시아 궁수들이 전과를 올리고 이슬람군은 후퇴했습니다. 전황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미흐람은 참호에 다리를 놓고 페르시아군을 진격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심의 계산대로였습니다. 카디시야 전투에서 활약한 카카라는 장수에게 기병을 맡겨서 참호에 놓인 다리를 점령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역시나 이슬람의 승리로 끝났지만 수천 명의 페르시아군이 방어 요새로 다시 들어가는 것까지 막지 못했고, 이슬람 쪽 피해도 적지 않아서 몇 개월 간 포위전이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공물을 바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이슬람에 항복했습니다. 미흐람은 동쪽으로 도망치다가 추격병에 붙잡혀서 전사했고, 프라자드는 남동쪽으로 피신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뒤이어 모술도 무난하게 이슬람의 깃발이 꽂혔고, 638년이 되어서 이슬람은 이라크 일대를 완젆히 장악했습니다.

 

  다만 아라비아와 시리아에 가뭄과 전염병 사태가 심각해져서 몇 년 동안 정복전이 멈췄고, 당분간 이슬람은 페르시아의 역공을 막아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메디나로 몰렸고, 우마르는 식량을 배급하고 세금을 면제해주면서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5.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이집트를 정벌하다.

 

  637년 말 전염병 사태가 가라앉고 시간이 지나 식량 사정도 점차 개선되었습니다. 지난 글의 야르무크 전투에서 할리드 바로 밑의 부하 장수들 중 아므르 이븐 알 아스(아므르)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집트를 공격할 때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마르는 시리아 안정화가 우선이라며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므르는 지금이야말로 기회라고 간곡하게 호소했습니다. 우마르는 우선 기병 4천의 병력을 주긴 했지만 경거망동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메디나로 돌아가서 잘 의논하고 확답하겠다. 전령을 보낼테니, 그대가 이집트 국경에 도착하기 전에 허락하지 않는다는 서신을 열었다면 바로 회군하라. 그러나 그대가 이집트 땅에 침입한 뒤라면 알라에게 기도를 올리고 신의 뜻에 맡겨라."

 

  아므르가 이집트 삼각주로 진격할 동안, 메디나의 회의 끝에 우마르는 공격을 중단하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전령은 아므르가 이집트 국경을 넘어가기 전 만났습니다. 하지만 아므르는 눈치를 챘는지 일부러 이집트 국경 너머로 들어간 다음에야 우마르가 보낸 서신의 겉봉을 뜯었습니다. 639년 12월, 이슬람의 아프리카 팽창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음해 아므르는 이집트의 펠루시움과 발바이스 요새를 점령하고 바빌론 요새를 포위했습니다.(페르시아의 바빌론 요새과 이름만 같고 다른 장소입니다.) 우마르도 병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4천 명의 병력으로 아므르의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병력으로 바빌론을 함락시키는 건 무리였습니다. 시간이 지연되자 우마르는 주바이르라는 장수에게 다시 4천 명을 맡겨서 보냈습니다. 이렇게 1만 2천 명의 이슬람군은 동쪽의 헬리오폴리스라는 거점을 손에 넣었습니다. 2만 명의 비잔티움군은 늦은 대응으로 격퇴 당했고 바빌론은 다시 포위되었습니다. 바빌론은 이번에는 견디지 못했습니다.

 

  다음은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무역의 중심지이자 비잔티움에게 있어서 2번째로 큰 도시라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곳을 빼앗기면 이집트도 이슬람에게 내주게 되는 셈이었죠. 헤라클리우스는 대규모 지원군을 모아서 알렉산드리아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비잔티움으로서도 해볼만 했던 게, 해상 도시라 지중해를 통해 보급하면 당시 해군이 전무했던 이슬람은 그걸 저지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641년 2월 헤라클리우스는 세상을 떠나고 지원 계획은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여러 겹의 요새와 성벽이 축조된 알렉산드리아였지만, 반 년 가까이 자력으로 싸우다가 함락되었습니다. 얼마나 부유한 도시였는지 아므르는 우마르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우리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습니다. 이 곳에는 4천 개의 대궐과 4백 개의 유흥 시설, 헤아릴 수 없는 재산이 있습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므르는 나일강을 따라 계속 내려가서 누비아 지역을 점령했고 현재 리비아 북부까지 진격했습니다.

 

  6. 니하완드 전투(Battle of Nahavand, 642년), 그리고 페르시아의 멸망

 

니하완드 요새의 그림입니다.

 

  한편, 크테시폰을 빼앗기고 야즈데게르드 3세는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에 위치한 메르브로 저멀리 천도했습니다. 4년 가까이 힘을 기르고 각지를 돌면서 5만 명이라는 군대를 모았습니다. 이슬람을 공격하기 위해 니하완드 성에서 병력이 집결했습니다.

 

  우마르는 그 때까지 페르시아 정복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이슬람 수뇌부들은 부유한 시리아와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을 평정한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우마르 본인도 잘룰라 전투이후 동진하려는 장수들에게 그만 가라고 저지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자꾸 옛 땅을 노리는 페르시아의 태도에 칼을 뽑았습니다.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등 여러 이슬람 지휘관들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었습니다. 이 전투의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번에도 이슬람의 승리였고, 페르시아는 니하완드 성을 뺏겼습니다.

 

 

  니하완드 전투의 패배로 페르시아 사람들은 왕중의 왕이라고 불리는 야즈데게르드 3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페르시아는 더욱 분열되었고,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각 지역의 군벌이 난립했고, 백성들은 세금을 거부하기까지 했습니다. 다시 군대를 모집하려고 해봤자 허사였습니다.

 

  이슬람은 거침없이 페르시아의 남은 땅을 흡수했습니다. 오늘날 캅카스 산맥, 이란 전체, 투르크메니스탄과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아무다리야 강(당시 명칭은 옥수스 강)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였지만, 전쟁의 신이 와도 더 이상의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영토는 없었습니다.

 

 

지도 속 Nahavand가 니하완드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보라색으로 표시한 곳이 페르시아가 마지막으로 저항한 메르브입니다.

 

  651년,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렇게 멸망했습니다. 3세기 초반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400년 가까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지속된 나라가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 이후 야즈데게르드 3세는 방랑하다가 메르브의 한 방앗간 주인에게 죽었고, 황태자 페로즈는 당나라 장안으로 도망쳐 당나라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사실 당태종 때부터 야즈데게르드 3세가 당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공물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당나라라도 고구려쪽 정세를 먼저 신경써야했고, 그 머나먼 이란까지 원정군을 보내는 건 무리라 제대로 도울 수 없었습니다. 당고종은 도망친 페르시아 황족과 난민들을 받아들였고, 명목 상의 직책이지만 페르시아 총독 자리를 주었습니다.

 

  7. 우마르와 우스만의 죽음

 

  이슬람군이 한창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나가는 644년, 칼리프 우마르가 암살당하고 우스만 이븐 아판(이하 우스만)이 3대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사위였고 메카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습니다. 우스만의 부는 초기 이슬람의 군자금이며 오아시스와도 같았습니다.

 

  우스만은 우마르 사망 직후 각자의 반란을 진압했고, 영토확장을 이어나가 리비아와 아르메니아를 점령했습니다. 무엇보다 이슬람의 교리인 '쿠란'을 대대적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는 우마르와 다르게 창고의 돈을 아끼지 않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습니다. 수로를 파서 물을 공급했고 수천 개의 모스크를 건설했습니다. 상인 출신이라 상인들을 위한 도시와 시장도 대폭 늘어났습니다. 곳곳에 도로가 건설되었습니다.

 

  하지만 우스만은 지나치게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본인 가문(우마이야)에게 나눠주고, 다른 사람이 주는 선물을 마음껏 챙겼습니다. 사적으로 선물을 받지 않았고 가족에게도 금기시켰던 우마르와 대비되는 부분입니다. 또 규정을 변경해서 정복지의 매매를 허용했고, 장군과 병사들에게 중앙 정부의 돈을 마음껏 빌려주어서 그들이 땅을 사게 장려했습니다. 정복지의 이슬람 총독은 부를 축적하게 위해 세금을 크게 올렸습니다. 심지어 우스만은 일가친척을 정복지의 총독으로 보냈습니다.

 

  우스만과 우마이야 가문을 향한 피정복민의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메디나에 있는 우스만의 집 주위로 시위대가 모여들었고 우스만을 호위하는 사람들과 시위대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그는 담을 넘어 침입한 폭도들에게 656년 살해당했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 읽었던 쿠란은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하자티 이맘 모스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우스만의 쿠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쿠란이라고 일컬어지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위 사진은 타슈켄트에 있는 하자티 이맘 모스크고 아래 사진은 모스크 내부에 안치된 우스만이 죽기 직전 읽었다고 전해지는 쿠란입니다. 굉장히 낡은 쿠란으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8. 알리의 즉위, 그러나...

 

  우스만 사후 무함마드의 사촌인 알리가 4대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의 단결은 이미 퇴색되었고, 알리는 반대 세력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우스만과 가까웠던 우마이야 가문과 특히 주요 도시의 총독은 알리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알리는 그들을 해임했지만 요지부동이었고 예멘 총독은 국고의 돈을 모조리 털어서 달아났습니다.

 

  우스만의 친척이자 다마스쿠스 총독인 무아위야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비군을 자주 훈련시키고 투석기를 늘리는 등 무력으로 알리와 맞먹었습니다. 무아위야는 알리의 해임 명령에 반란을 일으켰고, 아므르 이븐 알 아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여기에 이집트 원정에서 후발대 역할을 맡았던 주바이르, 메카의 권력자 중 하나인 탈하, 셋째 부인인 아이샤 등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예멘 총독은 빼돌린 돈으로 그들을 지원했습니다.

 

 

  알리는 656년 12월 이라크 남부 외곽의 바스라(Barsa)에서 그들을 제압했습니다. 주바이르와 탈하는 죽고 알리는 아이샤를 포로로 잡아 메디나로 보냈습니다. 다음은 무아위야였습니다. 서로 우스만의 죽음에 대해 책임 공방을 벌였지만 결렬되었고 657년 7월 유프라테스 강의 라카(Raqqa)에서 알리와 무아위야는 '시핀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투는 알리 측의 우세였지만 아므르가 꾀를 발휘했습니다. 그의 조언대로 무아위야의 병사들은 창 끝에 쿠란 구절을 적은 종이를 꽂고 쿠란을 암송하면서 걸었습니다. 알리의 병사들은 쿠란을 찢으면서 싸우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였고 다시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내부 분열로 알리는 다시 동쪽으로 군대를 물릴 수밖에 없었고, 무아위야는 세력을 계속 넓혔습니다. 몇 년 동안의 내전 끝에 알리는 반대파의 자객에게 661년 목숨을 잃었습니다. 알리의 아들 하산이 다섯 번째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기충천한 무아위야군에 비해 하산 측의 병력은 싸울 의지를 잃었습니다. 병력 12,000명 중 8,000명이 무아위야 쪽으로 탈영하고 배신자가 나와서 하산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그는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하고 칼리프에서 물러났습니다.

 

  자연스럽게 무아위야가 6대 칼리프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1차 피트나(내전을 의미하는 아랍어)가 종결되었고, 그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다마스쿠스로 옮겼습니다. 680년 무아위야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깨고 죽기 전 아들 야지드에게 권력을 세습했습니다. 그로 인해 반발이 시작되는 2차 피트나에서, 훗날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는 3차 피트나에서 알리 지지자들은 계속 잔존하고 저항했습니다. 알리 지지자들은 시아파가 되어 이슬람에서 두번째로 많은 종파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슬람 신자 중 시아파는 10% ~ 20%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수니파입니다.

 

  (여기까지 글을 마치고 8세기 이슬람 정복 전쟁은 시간이 나면 다뤄보겠습니다.)

 

  9. 출처

도서

버나드 루이스, 『이슬람의 세계사. 1』, 이산(2009)

김승철, 『포용의 정복자 이슬람』, 좋은땅(2014)

허진모, 『전쟁사 문명사 세계사 2』, 미래문화사(2020)

 

유네스코 세계디지털도서관 (https://unesdoc.unesco.org/home)

B. A. 리트빈스키 외 2인, The Arab conquest

 

유튜브

<Early Muslim Expansion - Khalid, Yarmouk, al-Qadisiyyah ...(초기 무슬림 제국 팽창사 - 시리아 및 이라크 정복 602-636)> (https://www.youtube.com/watch?v=r2cEIDZwG5M)

<Early Muslim Expansion - Arab Conquest of Iran and Egypt> (https://www.youtube.com/watch?v=baHT2nR5Wr4)

영문위키

<Battle of al-Qadisiyyah>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l-Qadisiyyah

<Siege of Ctesiphon (637)>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Ctesiphon_(637)

<Battle of Jalula>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Jalula

<Batle of Nahavand>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Nahavand

<Amr ibn al-As> https://en.wikipedia.org/wiki/Amr_ibn_al-As

<Muslim conquest of Egypt> https://en.wikipedia.org/wiki/Muslim_conquest_of_Egypt

<Siege of Alexandria (641)>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Alexandria_(641)

<Yazdegerd III> https://en.wikipedia.org/wiki/Yazdegerd_III

<First Fitna>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Fit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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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사] 초기 이슬람에서 무함마드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승리(~6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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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악연(Main: 530년의 다라 전투)

1. 로마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 476년, 오토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킴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그 이후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의 왕국이 옛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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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1년 지도입니다.(출처:GeaCron)

 

  1. 7세기가 시작할 때 세계 현황, 그리고 무함마드

 

  601년의 상황은 수나라와 비잔티움 제국이 세계 최강국을 다투고 있었고, 이들에 비견될 만한 국가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분열된 서돌궐과 동돌궐이었습니다. 고구려 역시 몇 년 전 수문제의 침공을 막아낼 만큼 강대국이었고, 인도는 삼국지의 군웅할거처럼 조각조각 분열되었으며, 유럽은 고트족과 아바르 칸국이 주요 세력이었습니다.

 

 

  비잔티움과 사산조가 끝없는 전쟁을 벌이던 610년대,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 지대에 살던 사람들은 메마른 땅에서 하루하루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다만 메카는 무역의 중심지로 많은 자본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씨족과 씨족들이 모인 부족들이 메카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이 중 가장 강력한 씨족이 '쿠라이시족'이었습니다.

 

  570년에 태어난 이슬람의 사도 무함마드는 어린 시절 고아였습니다. 태어나기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여섯 살에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25살이 되자 한 쿠라이시족의 여성 상인에게서 무역을 대신 맡았고, 문제 없이 시리아에 도착해서 그녀의 투자금을 배로 불렸다고 합니다. 무함마드를 마음에 들어한 여성 상인의 이름은 '카디자'로 그에게 청혼하여 결혼이 성사되었습니다. 갑부가 된 무함마드는 메카의 빈부 격차와 씨족들 사이의 돈을 둘러싼 갈등을 염려했는지,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찾아오면 식량을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lt;무함마드 전기&gt;의 삽화 중 하나입니다. 무함마드에 반대하는 메카 사람들이 돌을 던지려고 할 때 아부 바크르가 사람들을 말립니다. 흰 천으로 얼굴이 나타나 있지 않은 사람이 무함마드.

 

  무함마드는 610년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계시를 받고 이슬람교를 포교했습니다. 아내들과 친구들을 이슬람의 신도가 되었고, 나날이 추종자들이 불어났습니다. 특히 씨족에서 내쳐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씨족장 등의 상류층 대부분이 그를 싫어했습니다. 그의 메시지 중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고, 부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라는 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함마드를 따르던 사람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거나, 메카 바깥으로 쫓겨나거나, 식량과 물을 구하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무함마드는 자신을 키워준 큰아버지 아부 탈리브와 아내 하디자가 619년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자신을 따르는 일행과 함께 622년 암살단의 눈을 피해서 메디나에 도착했습니다. 무함마드의 추종자들은 금방 메디나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메카를 출발해서 북쪽으로 가는 상인들을 습격하면서 전쟁물자를 모았습니다. 메디나를 지나치는 메카 유력자 중에 '아부 수피안'이 있는데 그는 행렬 중 메디나군이 공격한다는 사실을 알고 메카에게 구원을 요청합니다.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전투 위주로 역사를 분석했습니다. 전투 연도, 추정되는 양쪽 병력, 전투가 벌어졌던 위치를 현재로 치환했으며, 마지막으로 전투의 과정을 썼습니다. 중간에 몇 번의 역사 배경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병력이 여러 자료에서 이견이 갈리는 경우는 물결표를 썼습니다.)

 

바드르 전투의 삽화, 초록색 옷의 무함마드는 하얀 천으로 가려져 있는데 이슬람교에서는 무함마드의 얼굴을 그리는 걸 터부시하고 있습니다.

 

2. 바드르 전투(Battle of Badr, 624년)

병력: 이슬람군 300명 ~ 400명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1,000명

결과: 이슬람군 승, 이슬람군 14명 전사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70명 전사, 70명 포로

이슬람 지휘관: 무함마드

위치: 사우디아라비아 히자즈 지역(메디브 근방)

 

  과정: 메디나로 근거지를 옮긴 무함마드는 622년 부터 630년까지 메카를 장악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을 벌입니다. 홍해 연안과 가까운 바드르(Badr)라는 우물가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여기서 무함마드의 장수들이 쿠라이시의 장수들 간의 일기토에서 연승했고 동요하는 적들을 상대로 화살비를 퍼부어 승리했습니다.

 

  바드르는 메카보다 메디나 쪽에 몇 배는 가까이 위치했는데, 이 때문에 메카의 군대는 지쳐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무함마드가 메카군이 오는 길에 있는 우물을 못 쓰게 흙으로 메워서 물 확보에도 어려웠습니다. 병력 3배 앞서는 건 그 상황에서 거의 무의미했죠. 하지만 아부 수피얀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 메카로 일찍 도주하면서 대부분의 상인 행렬을 보존했고, 이슬람의 전리품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

 

  70명의 포로 중에는 그 유명한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동생인 왈리드 빈 왈리드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후드 전투의 형세, 언덕에 이슬람 궁병이 있습니다.

 

3. 우후드 전투(Battle of Uhud, 625년)

병력: 이슬람군 보병 700명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3,000명(+낙타 3,000마리), 기병 200명

결과: 메카군 승리, 이슬람군 62명 ~ 75명 전사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22명 ~ 35명 전사

이슬람 지휘관: 무함마드

위치: 사우디아라비아 우후드 산

 

  과정: 앞에서 말한 아부 수피안은 많은 돈을 투자하여 이번에는 메디나를 공격하는 총사령관이 됩니다. 3,000명 이상의 군대를 이끌고 메디나로 향합니다.

 

  원래 무함마드에게는 1,000명의 병력이 있었는데 메디나의 유력자 한 명이 너무 불리하다며 도망치고, 겨우 700명의 병력만 남았습니다. 전황이 불리하다는 걸 깨달은 무함마드는 메디나 근처의 우후드 산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보병으로 긴 전선을 형성하고 언덕에 궁병을 배치했습니다. 아부 수피안은 이크리마(Ikrimah)라는 장수와 할리드에게 200명의 병력(이 중 기병이 100명)을 주고 양 날개를 맡을 것을 지시하고 자신은 대부분의 보병을 이끌었습니다.

 

  전투 초반은 숫자가 적은 이슬람군의 우세였습니다. 이슬람군은 메카군의 중앙을 휩쓸었고, 할리드는 적 궁병이 있는 언덕을 공략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다 이겼다는 듯이 이슬람군의 약탈이 거세지자 언덕 위의 이슬람 궁병도 약탈에 참가하려고 대부분이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 할리드는 소수의 궁병을 공격했고 반대쪽의 이크리마도 가담했습니다. 궁수들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자 할리드는 이슬람군의 후방을 노렸고, 이크리마는 무함마드가 있는 적 본진으로 진격했으며, 총사령관인 아부 수피안도 재정비해서 반격에 나섭니다.

 

  전세가 역전되자 이슬람군은 후퇴하고 무함마드도 산 속에 숨었습니다. 이슬람군 입장에서는 다행히도 메카군이 죽은 이슬람군 시체에서 약탈할 게 있나 정신이 팔려서 그렇게 피해가 크지 않았습니다. 산비탈에서 이슬람군은 재정비하여 방어진을 구성했습니다. 할리드와 이크리마의 기병은 산비탈을 올라가기 힘들었고 아부 수피얀은 메카로 되돌아갔습니다. 무함마드는 이마와 입술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Trench, 즉 참호를 썼다고 해서 이 전투를 참호 전투라고 부릅니다.

 

4. 한다크 전투(참호 전투, Battle of the Trench, 627년)

병력: 이슬람군 3,000명 vs 메카 쿠라이시 부족 + 아랍 부족들 10,000명

결과: 이슬람군 방어 성공, 양쪽 병력 소규모 피해(최대 10명), 한 달 간의 포위 끝에 메카군 후퇴

이슬람 지휘관: 무함마드

위치: 사우디아라비아 메디나

 

  과정: 627년 1월에 있었던 전투입니다. 메카 쿠라이시 부족이 아라비아 쪽 부족들과 연합하여 1만 명의 병력을 구성했고 이번에는 메디나까지 가서 물샐틈 없이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영리한 무함마드는 참호를 파고 3천 명의 병력으로 막아냈죠.

 

  오히려 이 전투보다 3년 뒤 메카를 함락한 전투나 6,000명의 포로와 수만 마리의 양과 낙타를 전리품으로 획득한 후냔 전투(Battle of Hunayn)를 꼽아야 하나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참호전이라는 과정이 있고 이를 기점으로 무함마드가 더욱공격적으로 나와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봅니다. 또한 이 전투 이후 가까운 시기에 휴전이 성사되고 적이었던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이슬람으로 개종합니다. 바드르 전투에서 포로가 된 동생을 돈을 주고 데려왔는데, 그에게서 몇 년 동안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지도 속 녹색이 무함마드가 생전에 정복한 영역입니다. 다만 현재 오만 지역까지 녹색으로 칠해진 건 오류인 것 같네요.

  무함마드는 632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메카를 정복한 뒤 아라비아 반도 땅 중 홍해를 따라서 남북으로 긴 땅을 확보했고, 훗날 이슬람 세력이 제국을 만드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왈라자 전투를 요약한 gif 파일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한 전투 지도를 더 첨부합니다.

 

 

5. 왈라자 전투(Battle of Walaja, 633년)

병력: 정통 칼리파 이슬람 15,000명 vs 사산조 페르시아 30,000명 ~ 50,000명

결과: 이슬람군 대승, 이슬람 병력 2,000명 상실 vs 사산조 페르시아 20,000명 상실

이슬람 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위치: 현재 이라크 알 나자프 지역

 

  '알라의 검'은 무함마드 사후 아라비아 지역에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고, 바로 사산조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제국을 향한 정복 전쟁에 돌입합니다. 할리드의 승전은 수십 회나 되지만 그 중 위대하고 역사적인 승리만 골랐습니다. 왈라자 전투는 그의 전술이 얼마나 경이로운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과정: 왈라자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도 할리드는 체인스 전투(Battle of Chains)와 리버 전투(Battle of Rivers)에서도 대승을 거두었고, 위기감을 느낀 사산조 페르시아는 지원군을 파견합니다. 다만 어찌된 이유인지 1차 지원군과 2차 지원군이 합쳐지기 전까지 지연되었습니다. 할리드는 척후병들에게서 이 정보를 얻고 전투를 벌입니다.

 

  전투 이전 날에 4,000의 기병을 사산조군의 뒤쪽 언덕에 보이지 않게 숨겨놓았고, 2배 이상의 전력 차이에도 적극적인 공세를 취합니다. 상대 지휘관 안다르자그하르는 보병, 기병이 중무장이라는 우위를 점한다는 걸 알고 일부러 이슬람군이 지칠 때를 노립니다. 전투가 유리해지자 때가 되었다는 걸 판단하고 역공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할리드는 후방에 대기시킨 경기병의 공격을 명령하고 포위 작전은 대성공을 거둡니다. 안다르자그하르는 전멸하는 전장에서 겨우 도망치지만 사막에서 물을 구하지 못해 죽고 말았습니다.

 

할리드의 633년경 원정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보라색으로 표시한 곳이 왈라자 전투, 피라즈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6. 피라즈 전투(Battle of Firaz, 634년)

병력: 정통 칼리파 이슬람 15,000명 vs 사산조 + 비잔티움 연합군 120,000명+

결과: 이슬람군 대승, 이슬람군 피해 미미 vs 연합군 100,000명 상실

이슬람 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지역: 현재 이라크-시리아 국경지대 중 유프라테스 강이 교차하는 곳

 

  배경: 이 전투 이전에 할리드는 사산조 전역에서 10전 전승이라는 대기록으로 사산조의 정예군을 황폐화 시켰습니다. 이는 추후에 이슬람군이 사산조에 깊숙히 진군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비잔티움은 할리드를 경계하기도 했고, 피라즈가 비잔티움의 국경이기도 해서 한 때 철천히 원수였던 사산조에게 지원군을 보냅니다. 피라즈에서 사산조군은 패잔병을 긁어모았습니다.

 

이슬람군과의 전투 도중 수공으로 중앙이 혼비백산해진 연합군

  과정: 유프라테스 강을 두고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우선 할리드는 후퇴 명령을 내리고 적들이 강을 건너길 기다렸습니다. 할리드는 적은 병력에도 길게 저지선을 형성했고 양 날개에 있는 기민한 병력은 강둑으로 가라고 지시했습니다. 명령을 받은 이슬람군은 강둑을 파괴시키고 순식간에 강물이 불어났습니다. 연합군의 중군은 물에 휩쓸리고 이미 강을 건넌 병력과 후방의 병력이 따로 고립되었고, 이슬람은 압도적인 전투교환비를 거둡니다.

 

동그랗게 성을 둘러싼 빨간색 병력이 이슬람군입니다.

 

7. 다마스쿠스 공성전(Siege of Damascus, 634년)

병력: 정통 칼리파 이슬람 20,000명 vs 비잔티움 제국군 16,000명(+지원군 12,000명)

결과: 공성 성공, 이슬람의 다마스쿠스 점령 및 비잔티움 큰 피해

이슬람 총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위치: 현재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할리드는 회전은 물론 공성전에 있어서도 단 한 차례 패배조차 몰랐습니다.

 

빨간 줄은 할리드가 수백km의 사막을 횡단했다는 걸 알려줍니다.

 

  전투 이전 배경: 할리드는 직접 정예 경기병 군단인 모바일 가드(Mobile Guard)를 창설했다고 합니다. 이들을 이끌고 비잔티움이 예측한 경로를 피해서 무보급으로 진격했습니다. 오아시스에 의존하여 수백km나 되는 사막을 돌파했고, 쉴틈 없이 진군하여 수와, 팔미라 등의 요새를 떨어뜨리고 남진합니다. 남쪽에는 비잔티움의 동맹이자 방패인 가산 왕조의 수도인 보스라가 있었습니다. 비잔티움의 지원에도 할리드는 보스라 공성전(Battle of Bosra)에 성공하고 가산 왕조는 4년 뒤 멸망합니다.

 

  보스라 공성전 이후 아즈나다인 전투(Battle of Ajnadayn)와 야쿠사 전투(Battle of Yaqusa)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승리하고 시리아 남부를 안정시킵니다. 이제 할리드는 보스라 공성전 때문에 미뤄두었던 다마스쿠스 공략에 나섭니다.

 

  과정: 다마스쿠스는 비잔티움 동부의 핵심 중의 핵심인 도시로 성벽의 높이는 11m, 길이는 1,500m에 달했다고 합니다. 문은 6개나 되었고요. 헤라클리우스 황제의 사위인 토마스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슬람 쪽에서도 할리드 뿐만 아니라 훗날 이집트 원정에 큰 공을 세우는 아므르 이븐 알 아스, 보스라 공성전에서 선발대 역할을 맡은 슈르하빌 등의 여러 사령관 등 총 출동하여 20,000의 대군을 모았고, 634년 8월 21일 철저하게 성을 포위합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도 다마스쿠스를 잃는 참사는 피해야 했기에, 12,000명의 병력을 보내서 구원을 시도합니다. 할리드는 정찰병들에게서 이 소식을 듣고, 즉시 5,000명의 별동대와 동쪽 문을 지키던 사령관인 라파이 빈 우마이르를 보냅니다. 성 내부의 적군이 이 사실을 알지 않기 위해 다마스쿠스에서 32km나 떨어진 곳에서 지원군과 싸우도록 했습니다. 선봉으로 보낸 라파이의 군사들이 포위되자, 할리드는 직접 4,000명의 병력을 다시 이끌고 지원군의 후방을 기습하여 재차 승리했습니다. 그 뒤 안심할 수 없었기에 할리드는 포위 진영으로 돌아갑니다.

 

  한편, 토마스는 지원군이 왔다 간 사실과 이 때문에 적들이 일시적으로 병력을 빼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직접 정예 5,000병을 뽑았고, 성벽 위의 궁수들의 지원 사격을 시작으로 돌파를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이슬람군에 의해 오른쪽 눈에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고 다시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다음 돌파전은 4개의 문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격했습니다. 토마스는 슈르하빌이 지키고 있던 '토마스 문'과 할리드가 있던 동쪽 문에 힘을 강하게 실었습니다. 특히 생포해야 할 대상인 할리드 쪽에는 상당한 병력이 배정되었으나 그가 이끄는 정예병을 돌파하지 못했습니다. 아군의 피해가 더 심하다고 여긴 토마스는 다시 후퇴했습니다.

 

  이슬람군은 당시 기준으로 공성병기가 부족했기에 할리드도 적극적인 성벽 공략은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고, 할리드는 성 안의 '요나(Jonah)'라는 한 그리스 출신 사람로부터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정보를 듣습니다. 오늘(9월 18일) 큰 축제가 있으니 수비군이 약할 것이라는 정보였죠.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판단한 할리드는 100명의 결사대을 이끌고 동쪽 문의 성벽을 올라갑니다. 아니나 다를까 성벽 꼭대기에는 수비 병력이 없었습니다. 6개의 문 중 동쪽 문이 가장 튼튼한 벽인데도 비잔티움군은 축제에 심취해 있었던 것입니다. 할리드는 즉시 성 내부로 진입해서 안의 경비병을 살해했고 문을 열었습니다. 개방되자마자 이슬람군은 성 안으로 진입했고 처절한 시가전이 벌어졌습니다.

 

초록색 = 이슬람군, 보라색 = 비잔티움군, 성 안으로 할리드가 침입했을 때 상황입니다. 빨간색으로 그려진 건 토마스가 다른 이슬람 지휘관에게 보낸 평화 협상 사절입니다.

  토마스는 이 소식을 듣고 동쪽 문만 뚫렸을 뿐 다른 문은 아직 호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반대쪽에 있던 '쟈비야 문'을 지키던 아부 우바이다에게 성을 넘겨줄 테니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평화 협정을 제안했습니다. 우바이다는 이를 받아들였고 토마스와 함께 '마리아미테 대성당'까지 행진했고, 눈에 들어온 모든 적들을 죽이면서 진군한 할리드의 군대와 만납니다.

 

토마스와 할리드 등 이슬람 지휘관들이 협상했다고 전해지는 마리아미테 대성당입니다.

  할리드는 평화 협정에 기가 막혔고 이미 도시는 무력으로 점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우바이다는 평화 협정으로 다마스쿠스를 손에 넣었다고 주장하며 대립했습니다. 몇몇 장군들의 설득에 할리드는 불만족하면서도 평화 협정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마스쿠스 사람들은 아무도 노예가 되지 않고, 사원 등의 건물은 파괴할 수 없고, 사람들이 다마스쿠스에서 도망쳐도 안전을 보장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다만 협정에는 사흘의 유예 기간이 있었습니다. 사흘이 지나면 군대와 군대 간의 전투는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었습니다.

 

마라즈 알 데바르 전투를 요약한 gif 파일입니다. 할리드의 기병은 네 방향에서 적들을 둘러쌉니다.

 

8. 마라즈 알 데바르 전투(Battle of Maraj-al-Debaj, 634년)

병력: 정통 칼리파 이슬람 4,000명 vs 비잔티움 제국군 10,000명

결과: 이슬람군 승리, 토마스 살해, 수천 명을 포로로 잡음.

이슬람 지휘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

위치: 현재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와 터키 안타키아 사이의 지역

 

  과정: 유예 기간이 끝나고 할리드는 앞에서 언급한 정예 경기병 군단인 '모바일 가드(Mobile Guard)' 4,000을 이끌고 기습에 나섰습니다. 병력을 정확하게 4등분하여 할리드는 포위 섬멸할 것을 계획합니다. 먼저 기병 1,000명은 남쪽에서 적들의 후방을 치고 동쪽과 북쪽에도 기병 1,000명 씩을 할당하여 안티오크로 가는 퇴각로를 막고, 남은 1,000 기병도 서쪽을 차단하여 포위망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후퇴하던 비잔티움 병사들 10,000명은 죽기 살기로 싸웠습니다. 기병의 우위는 있었지만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수천 명의 비잔티움군은 포위를 벗어나 후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휘관인 토마스는 할리드와와의 칼싸움에서 패배하여 전사했고, 수많은 다마스쿠스 출신 사람들이 포로가 되었고, 황제의 딸이자 토마스의 아내까지 포로가 됩니다. 어마어마한 양의 비단도 전리품으로 획득했습니다.

이슬람군이 전리품으로 획득했다는 보로케이드 직물 비단입니다.

 

  한편 다마스쿠스 함락에서 할리드에게 힌트를 준 '요나'라는 사람(후에 이슬람으로 개종)도 이 전투에 따라왔습니다. 원래 할리드에게 정보를 알려준 대가로 사랑하는 약혼녀와 결혼시켜 달라고 요청했는데, 성이 포위당해 결혼이 취소당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 전투가 끝나고 그녀를 발견하여 다가갔습니다. 하지만 약혼녀는 배신자인 그를 혐오했고 품에서 단검을 꺼내 자살했습니다. 할리드는 요나에게 황제의 딸과 결혼하는 건 어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약혼녀가 죽었으니 이제 다른 여자는 눈길조차 주지 않겠다고 맹세했다면서 거절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다마스쿠스로 다시 돌아가는 할리드에게 사절을 보내서 딸을 돌려달라고 간청합니다.

 

  "짐은 그대가 내 군대에 한 짓을 알고 있다. 그대는 짐의 사위를 죽이고 딸을 사로 잡았다. 그대는 이겼고 무사히 탈출했다. 짐은 이제 그대에게 짐의 딸을 요청한다. 몸값을 지불하고 그녀를 짐에게 돌려주거나 그녀를 짐에게 선물로 주거라. 그대의 성품에 명예가 강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라는 편지를 읽은 할리드는 대사에게 말했습니다.

 

"그녀를 선물로 데려가시오. 몸값은 없을 것이오."

 

  라고 대사와 황제의 딸을 헤라클리우스에게 돌려보냈습니다.

 

할리드라는 인물을 나타낸 대표적인 그림입니다.
할리드가 전투를 지휘했던 모든 전쟁 구역을 표시한 지도입니다.

 

  9. 총평

 

  할리드는 역사상 최고는 아닐지라도 이슬람 역사상에서 만큼은 가장 위대한 군사지휘관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그를 향해 '사이프 알라흐(Sayf Allah)'라는 별칭으로 부르는데 이는 '신(알라)의 검'을 의미합니다.

 

  비잔티움과 사산조가 자랑하는 중기병(카타프락토이)는 이슬람군에게 거의 없었지만, 할리드는 경기병의 기동력을 극대화시켰습니다. 포위전, 수공 등 빠른 전술 수행에 경기병은 보탬이 되었습니다. 여담이지만 보병에 있어서도 이슬람은 사산조, 페르시아에 비해 중보병 숫자가 적었는데도 할리드는 무패 신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할리드는 영토를 아주 크게 확장한 명장에 속하지는 않지만 사산조와 비잔티움의 정예 병력을 수없이 궤멸시켰고, 이는 정통 칼리파 이슬람이 훗날 영토를 대폭 확장하는 원인이자 공로였습니다. 신생 이슬람 세력이 그 시기 세계 최강 제국을 두 나라나 압도한 건 할리드의 전술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심지어 두 제국이 연합했는데도 할리드에게는 어림없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용인술도 전술 못지 않게 높았습니다. 이슬람 규율에 도덕적인 지침을 명령한 친구이자 초대 칼리프 아부 바크르가 있었고, 한 때 적이었던 할리드를 개의치 않고 크게 중용했으며, 2대 칼리프 우마르도 적이었지만 이슬람 교리에 감화되어 개종했으며, 이집트 정복의 영웅 아므르 이븐 알 아스와 페르시아 정복의 영웅 사아드 이븐 아비 와카스도 일찍이 무함마드와 함께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 시절 이슬람군은 점령지의 백성들이 저항하거나 배신하지 않으면 권리를 보장해주고 차별 대우를 적게 했습니다. 이는 초기 이슬람이 팽창하는 근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634년까지의 전투와 상황을 다뤘습니다. 할리드의 비잔티움 전역은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어지는 글을 올리겠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위대한 황제였지만 말년에는 할리드라는 악몽에 시달렸고, 심지어 634년까지의 상황은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10. 출처

 

  출처: 정명섭 외 1인, 『전쟁사를 움직인 100인』, 청아출판사(2016)

  고원, 『이슬람 역사 1400년 - 알라가 아니면 칼을 받아라』, 동서문화사(2002)

  수잔 와이즈 바우어,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권』, 부키(2010)

  유튜브 <Siege of Damascus 634 - Arab - Byzantine Wars DOCUMENTARY>(https://www.youtube.com/watch?v=ZGo5ck2EEHg)

 

영문위키 <Battle of Badr>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Badr)

<Battle of Uhud>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Uhud)

<Battle of the Trench>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Trench)

<Battle of Walaja>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Walaja)

<Battle of Firaz>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Firaz)

<Siege of Damascus (634)>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Damascus_(634))

<Battle of Maraj-al-Debaj>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Maraj-al-Deba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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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사] 16세기에 시작된 페르시아 사파비 제국의 이야기(vs 오스만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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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파비 왕조의 건국

사진 속 'Persia'가 사파비 왕조입니다.

  사파비 왕조는 근대 이란 역사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창건자 이스마일 1세는 1501년 사파비 교단과 튀르크계 전사들을 모아 지금으로 치면 이란 북부의 '타브리즈'라는 도시(카스피해 서쪽의 도시)에 사파비 왕조를 건국했습니다. 이스마일 1세에게 강력한 전력이 된 붉은 모자를 쓴 기병을 '키질바시'라고 합니다. 그는 자기자신을 시아파의 화신이라 칭하고 과거 페르시아 군주의 칭호인 '샤'를 계승하기로 했습니다. 주변국이 쓰고 있던 '칸'이나 '숱탄'의 칭호가 아니었죠.

 

키질바시 전사의 그림 중 하나입니다.

  수도 주민들의 반 이상이 수니파교도였음에도 이스마일 1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수니파가 존경하는 초대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와 2대, 3대 칼리프인 우마르와 우스만을 폄하할 것을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기존 시아파가 그랬듯이 4대 칼리프인 알리를 신성시했습니다.

  옛 페르시아의 영광을 찾고자 이스마일 1세는 남쪽, 동쪽, 서쪽으로 정복전쟁을 벌입니다. 아제르바이잔에 머물렀던 국가가 10년이 안 되어 제국을 이룩하죠. 이란 전역을 석권했고, 동쪽으로는 페샤와르(현재 파키스탄 도시), 서쪽으로는 바그다드와 디야르바키르(현재 터키 도시)에 닿았습니다.

 

이스마일 1세(왼쪽)과 셀림 1세(오른쪽)

 

  2. 찰디란 전투(Battle of Chaldiran, 1514년)

  하지만 서쪽으로는 당시 사방에 세력을 넓히는 오스만 제국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다른 정복자인 셀림 1세가 재위하고 있었죠. 수니파가 국교인 국가와 시아파가 국교인 국가는 서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1514년 8월 찰디란 전투에서 사파비의 기병은 오스만의 포병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마일 1세는 중앙에 쏟아지는 포격을 피해 오스만군의 양익을 노렸습니다. 하지만 마차로 이루어진 장벽을 뚫을 수는 없었습니다. 막힌 기병의 앞에는 강력한 머스킷으로 무장한 예니체리 군단과 배치를 바꾼 포병의 화력 사례가 소나기처럼 쏟아졌습니다.

 

찰디란 전투 전후의 상황을 그린 지도가 있습니다.
찰디란 전투의 상상화입니다.

 

  패색이 짙어지는 와중에 이스마일 1세 본인조차 팔에 총상을 입고 도망쳤고, 양쪽의 수만명이 격돌한 전투에서 오스만군은 2,000명의 사상자 뿐이었지만 사파비군은 5,000명의 사상자를 냈습니다. 이 때 확실한 병력을 찾기 힘든데 개인적으로 오스만군은 8만, 사파비군은 5만 쯤 되지 않을까 예측합니다. 디야르바키르를 비롯한 서쪽 영토를 상실했고, 일시적이지만 패전의 여파로 수도인 타브리즈까지 점령당했습니다. 동쪽의 부하라 칸국과의 싸움에서도 국력을 소모해야 했습니다. 병사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라서 셀림 1세는 철수했습니다.

  3. 계속 웅크리는 사파비 제국

 

쉴레이만 1세(대제)의 초상화입니다.

  1520년대 이스마일 1세가 죽고 타흐마스프 1세가 샤의 자리를 이었고, 오스만에도 셀림 1세가 죽고 그 아들인 쉴레이만이 뒤를 이었습니다. 후자는 그 위대한 쉴레이만 대제로, 알제리와 이라크 지역을 손에 넣고 헝가리를 멸망시키고 지중해의 절반 이상을 장악한 세계사의 초역대급 명군이었습니다. 사유재산을 보호했고 노예 신분일지라도 능력이 출중하면 등용했으며, 모스크 건설을 지원하는 등 예술인들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전설적인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쉴레이마니예 모스크입니다. 당연히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합니다.

  그의 정복에는 선대부터 맞붙은 사파비가 빠질 수 없었습니다. 1532년 '이브라힘 파샤(Ibrahim Pasha)라는 장군에게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고, 대제 본인은 뒤에 합류했습니다. 2년 뒤 수도인 타브리즈와 바그다드를 점령했으나 사파비군은 청야 전술로 대응했고, 1536년까지 점령하다가 물러갔습니다. 타브리스에서는 물러갔지만 바그다드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은 내주지 않았습니다.

 

쉴레이만 대제 시대에 오스만 제국 최대 영역입니다.

  쉴레이만 대제는 그 해에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과거 오스트리아와 사파비가 동맹을 맺고 양쪽에서 오스만을 압박한 적이 있었는데, 똑같이 대응하고자 한 방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담이지만 당시 프랑스 국왕인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그는 스스로를 '술탄 중의 술탄, 지상의 군주에게 왕관을 하사하는 신의 그림자'라고 표현했습니다.

  1548년과 1553년에 연이어 오스만군은 계속 사파비를 침공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서쪽 영토를 획득하고, 20년 동안 휴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파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압박과 청야 전술의 피해를 견디지 못했습니다. 결국 1555년 수도를 타브리즈에서 남동쪽의 카즈빈으로 천도했습니다.

  4. 제국의 황금기 - 아바스 1세 시대, 그리고 우르미아 전투(Battle of Urmia, 1604년)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이 사파비 제국의 첫 번째 수도 타브리즈, 두 번째 수도 카즈빈, 세 번째 수도 이스파한입니다.

 

  훗날 1588년 아바스 1세가 사파비 제국의 5번째 샤로 즉위했습니다. 즉위 당시에 또다시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3세와 10년 동안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1590년 조약을 맺고 약간의 남서쪽 영토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대부분을 넘겼습니다. 피해를 감수하고 전쟁이 멈추자 아바스 1세는 칼을 갈았습니다.

 

아바스 1세의 초상화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키질 바쉬'는 과거에는 사파비 왕조 창건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바스 1세에 이르자 왕에게 불충하고 지방 족장에게 충성을 바치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아바스 1세는 이들을 해체하고 '샤 샤반'이라는 새로운 샤의 군대를 창설했습니다. 500문의 포병대와 12,000명의 보병을 총으로 무장시키고 이들은 샤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러시아, 스페인, 영국에 사절을 파견하고, 서양의 군사 전문가들을 관료로 채용하고 무기의 근대화에 성공했습니다. 봉건적인 영주제를 폐지하는 걸로 말미암아 중앙에 권력을 집중시켰고, 지방의 조세권을 확실히 장악하자 샤의 군대에게 충분한 봉급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맘 광장의 사진과 그림입니다. 원래 이름은 샤의 광장이었는데 이란 혁명이후 팔레비 왕조가 끝나고 이름이 바뀝니다.

  1597년 새롭게 옮긴 수도 이스파한에서 대규모 건설 사업을 벌였습니다. 이렇게 대도시가 생겼고 지금도 이스파한은 이란의 제 3의 도시입니다. '이스파한은 세계의 절반'이라는 이란의 유명한 속담까지 있을 정도죠.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이맘 광장(당시 샤의 광장)은 이 때 건설을 시작하여 1629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에게 쉴레이만 1세가 역사상 최고의 군주였다면 사파비 제국에게는 아바스 1세가 역사상 최고의 군주였던 셈입니다.

  아바스 1세는 정예화된 병력으로 복수를 시작했습니다. 부하르 칸국 상대로 잠깐이지만 발흐(Balkh,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부 도시)까지 나아갔으며 오스만 제국 상대로도 더 이상 청야 전술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우르미아 전투를 묘사한 지도입니다. 철저히 준비된 언덕 매복&포위로 오스만군의 선봉을 괴멸시킵니다.

  1604년 발발한 우르미아 전투가 아바스 1세에게는 영광의 순간일 것입니다. 전투가 사파비 장군 알라흐베르디가 기병을 이끌고 작전 장소까지 오스만군을 유인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아바스 1세가 매복군을 여러 개로 나누었는데, 언덕에 포병을 배치하고 남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일부는 알라흐베르디를 쫓아온 적군을 정면에서 막고 나머지는 오스만 본진을 타격하는 듯하다가 기민하게 방향을 바꿔 튀어나온 적군의 후미를 급습했습니다. 오스만군의 선봉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남은 병력은 그대로 퇴각했습니다. 이어진 수피얀 전투, 간자 전투에서 사파비는 연전연승했고 1600년대 전황은 사파비 제국의 승리였습니다.

  이렇게 옛 수도인 타브리즈가 포함된 아제르바이잔 영토를 재탈환했고 야전에서오스만을 이길 수 있음을 증명했습니다. 그 뒤 두 나라는 휴전과 전쟁 재개를 반복하고, 1624년에는 거의 90년 만에 바그다드를 회복하는 대업을 이루었습니다. 남쪽에서는 반다르아바스, 바레인, 호르무즈 해협의 포르투갈 세력을 몰아내고 1622년 무굴 제국과의 전쟁에서도 승리로 마무리했습니다.

  5. 제국의 황혼기와 몰락

 

 

  그러나 아바스 1세 사후 사파비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1638년 바그다드가 다시 오스만의 손에 넘어가고 사파비 왕조는 멸망할 때까지 이라크를 되찾지 못합니다. 15세기 ~ 16세기 오스만과 사파비의 전쟁에는 대부분 오스만이 승리했습니다. 찰디란 전투를 시작으로 100년이 넘는 기나긴 전쟁에서 사파비가 이겼던 건 거의 아바스 1세 시기 뿐이었습니다.

  7대 샤인 아바스 2세를 제외하고 후대의 왕들은 내치든 외치든 무능한 경우가 아주 많았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대항해시대에 실크로드의 무역로 중요성이 예전같지 않았고, 사파비 왕조의 비단 산업도 무굴 제국의 비단 산업에 고전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1724년 지도에서 사파비 왕조는 사라졌습니다.

  1722년 수도 이스파한이 동쪽의 호타키 왕조에게 점령당한 건 사파비 왕조에게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죠. 왕조 영토 중에 중부와 동부의 대부분이 호타키 왕조에게, 카스피해 남쪽 땅은 러시아에게, 서부는 오스만에게 넘어가서 왕조가 산산조각났죠.

  수도가 함락되자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던 타흐마스프는 북쪽의 호라산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훗날 새로운 샤가 되는 호족 나디르 베그를 만납니다. 몇 년 뒤 나디르 베그는 왕조를 재건했으나 실권자에 만족하지 않았고, 사파비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로운 샤의 자리에 올라 아프샤르 왕조를 창건합니다.

훗날 새로운 왕조의 초대 샤가 되는 나디르 베그입니다.

 

출처: 미야자키 마사카츠, 『한눈에 꿰뚫는 중동과 이슬람 상식도감』, 이다미디어(2015)

고원, 『이슬람 역사 1400년 - 알라가 아니면 칼을 받아라』, 동서문화사(2002)

영문위키 <Battle of Chaldiran>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Chaldiran)'

영문위키 <Abbas the Great> (https://en.wikipedia.org/wiki/Abbas_the_Great)

영문위키 <Battle of Urmia (1604)>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Urmia_(1604))

영문위키 <Suleiman the Magnificent> (https://en.wikipedia.org/wiki/Suleiman_the_Magnificent)

<GeaCron Project>(http://geacron.com/hom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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