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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RIP] 메이저리그 레전드 행크 애런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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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076&aid=0003684951

 

차별 넘어선 홈런왕 행크 애런, 8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다

현역 시절 행크 애런. AP연합뉴스행크 애런. 스포츠조선DB[스포츠조선 나유리 기자]인종 차별을 뛰어넘어 홈런왕으로 메이저리그의 전설이 된 행크 애런이 세상을 떠났다. 메이저리그에는 추모

sports.news.naver.com

 

 

  진정으로 위대했던 메이저리그 레전드가 세상을 떠났네요. 홈런왕의 상징 중 하나이자 MLB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행크 애런이 별세했습니다. 톰 시버, 밥 깁슨, 필 니크로, 토미 라소다, 그리고 행크 애런까지. 최근에 메이저리그의 별이 많이 지고 있어서 슬프기 그지없습니다.

 

  애런의 가정사는 많이 가난했다고 전해집니다. 어렸을 때 목화 농장에서 힘든 일을 했으며, 그도 스포츠를 꿈꾸었지만 방망이와 공을 구입할 형편이 안 되어서 나무 방망이와 병뚜껑으로 연습했다고 하죠. 학교를 다녔지만 그 학교에 야구 팀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15살에 지역 준프로팀의 구단주가 애런이 야구를 하는 모습을 알아보고 야구 팀이 있는 학교에 전학갈 수 있었고, 시간이 지나 니그로리그에 잠깐 활동한 뒤 메이저리그 브레이브스 팀에 입단했습니다.

 

  두 번째 시즌부터 그는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꾸준히 30홈런~40홈런 가까이를 치면서 MVP, 타격왕, 홈런왕의 커리어를 꾸준히 쌓아갔습니다. 4년차의 월드시리즈에 진출해서 OPS 1.2의 장타력으로 팀을 우승시키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애런은 훌륭한 정규시즌 성적에 그보다 강해지는 포스트시즌 성적을 보유한 레전드입니다. 당시 투고타저 시대라 홈런 등의 타자 기록에 손해를 봤음에도 그는 1974년, 베이브 루스가 가지고 있었던 714회의 홈런 1위 기록에 도달했습니다. 마흔 살의 나이에도 애런의 방망이는 식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루스의 기록에 가까워지자 애런을 향해 협박성 편지가 매일 수천 개가 왔다고 합니다. 루스를 추종하던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위대한 베이브 루스의 기록을 너 같은 흑인이 깬다면 너와 가족들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로 애런을 협박했죠. 애런은 포기하지 않고 715번째 홈런으로 홈런 1위 보유자에 올랐고, 마음고생이 심했던 그는 홈런을 친 뒤 어머니와 포옹하고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제 끝났습니다."라는 감동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jqYThEVoSQ

 

  훗날 배리 본즈가 애런의 홈런 기록을 넘었지만, 본즈는 약물 경력이 있기에 진정한 홈런 기록은 여전히 애런의 몫일 것입니다. 본즈는 애런을 존경했지만, 그가 홈런 기록을 깰 때 약물 복용이 이미 드러난 뒤라 애런은 직접 가서 축하해주지는 않고 영상 편지의 축하로 대신했습니다. 은퇴 뒤에도 그는 사회봉사와 인권운동에 기여했으며, 메이저리그에 흑인 차별이 없도록 노력했습니다.

 

 

행크 애런과 재작년 내셔널리그 행크 애런 상 수상자인 크리스티안 옐리치, 아메리칸리그 수상자인 마이크 트라웃은 부상 문제 때문에 수상 현장에 불참했습니다.

 

  애런의 발자취를 기억하기 위해 1999시즌부터 메이저리그는 리그별로 최고 타자 한 명 씩을 뽑아 '행크 애런 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수비와 주루와는 관계 없이 오직 타격만 보는 상이기도 합니다. 안타, 홈런, 타점만 보는 것은 다승, 방어율, 삼진만 보는 워렌 스판 상과 유사합니다. 다만 전자는 매 시즌 양대리그에서 한 명씩 뽑아 총 2명이 선정되지만, 후자는 좌완 투수들에게 한정되지만 매 시즌 양대리그 통합으로 한 명씩 선정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애런은 은퇴 후에도 한국과 일본 야구계를 방문하며 오 사다하루, 이만수 등의 타자들과 홈런 대결을 펼치면서 진심으로 축하해주었습니다. 선수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야말로 야구계의 모범이자 거장이었죠.

 

  필자는 애런을 세간의 위상에 비해서는 낮게 평가하는 편입니다. 최전성기 Fwar도 9가 안 되어서 다른 레전드에 비해 임팩트가 부족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메이저리그에 인종 구분이 없어진 뒤부터 뛰었다는 점과 투고타저 시대를 관통했다는 점에서 그를 무한히 존경하고 경이롭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경쟁이 치열해진 시대에 그 정도의 누적을 남기고 30대 후반에도 OPS 0.9를 넘긴 기록을 보면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행크 애런은 명예의 전당 헌액자들 중에서도 명예의 전당 헌액자였습니다. 그를 진심으로 기억하며 추모하겠습니다. RIP.

 

행크 애런의 통산 기록

 

통산 Bwar 타자 5위 (143.1 Bwar)

통산 Fwar 타자 6위 (136.3 Fwar)

통산 타점 1위 (2297타점)

통산 토탈 베이스 1위 (6856루타)

통산 순수 장타 개수 1위

통산 타수 2위 (12,364타수)

통산 홈런 2위 (755홈런)

통산 고의사구 4위 (293개)

통산 경기 출장 3위 (3298경기)

통산 안타 3위 (3771안타)

통산 타석 수 3위 (13,940타석)

통산 득점 4위 (2174득점)

통산 희생플라이 4위 (12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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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스포츠, 스타1] 1월 23일을 맞이하며 정확히 11년전의 정전사건을 돌아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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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5j1HheRw1kI

 

  이 경기도 벌써 11주년이 되었네요. 나무위키에서 네이트 MSL이 스타 개인리그 역사상 최악이고 MBC 게임 폐국의 단초가 되었다는 표현에 절절히 공감이 갑니다. 스타 팬이라면 다 아는 정전록이죠. 이제동 vs 이영호의 MSL 결승 3경기에서 정전이 나고 이제동의 우세승으로 처리된뒤, 그 다음 4경기도 이제동이 잡아내서 이제동이 우승자가 되었고 이영호가 준우승자가 되었습니다.

 

 

 

  이제동이 다 이긴 경기가 갑자기 끝났으니 저 경기가 우세승이 맞는 건 당연한 거고, 문제는 MBC게임의 대회 진행과 대응 방식이었죠. 당시 사과문에서도 화승, KT를 전신이었던 르까프, KTF로 쓰는(나중에 수정되긴 했지만) 대단한 사과문을 보여주었고, 결승 진행도 겨우 1,000석짜리 홀 경기장을 썼죠. 반대쪽 스타리그 결승(이영호 vs 진영화) 결승은 5,000석의 올림픽공원 경기장을 쓴 것과 참 비교되었습니다.

 

  대회 흥행이 잘 안 될 때도 있지만, 이건 결승 대진에 올라온 선수의 이름값이 낮거나, 동시간대 같은 스포츠 행사와 겹쳐서 어쩔 수 없이 시청률이 안 나올 때의 경우에서나 발생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6일 전에 스타리그 결승은 끝났고, 당시 꿈의 대진이었던 이제동 vs 이영호 결승이 짜였는데도 겨우 1,000석 경기장이라는 건 할 말이 없는 수준이었죠. 심지어 300석은 E스포츠와 두 선수의 관계자(기자들, 팀원과 가족들일 것입니다), 나머지 700석은 팬클럽들에게 반반 나눠서 줬다고 합니다.

 

  결승에서 이제동과 이영호의 등장 장면과 경기를 치르는 공간도 기억에 남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if_KVIG7b1Y&feature=emb_title

 

 

  다시 생각해도 저런 파란 공간에서 경기를 치르는 이제동과 이영호가 참 힘들었을 것 같네요. 심지어 팬들의 함성 소리도 안 들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2경기와 3경기(정전 되기 전까지) 경기력은 좋았습니다. 정전 원인이 이영호 옆에 있었던 온풍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당장 경기장의 난방도 제대로 안 되었다는 증거죠.

 

 

  E스포츠 팬으로서 다시 봐도 기가 막히는 일이고, 거의 모든 사람이 피해자였던 결승이었습니다. 나중에 중계진들도 대신 사과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경기장을 관람했던 팬이나 TV로 시청했던 팬들도 피해자고, 가장 큰 피해자는 이제동과 이영호겠죠. 이영호는 한이 남는 경기가 되었고, 이제동은 우승했는데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죠. 임이최마를 이어가는 스타판 5번째 최강자는 양대리그 동시 우승의 이영호인가, 통산 5회 우승과 3연속 우승의 이제동인가 논란이 불거졌는데 온풍기가 우승시켜줬다는 다소 유머스럽게 삼천포로 빠져버렸으니까요. 한 마디로 이제동은 최강자 대접 받을 수 있었던 것을 MBC게임 때문에 놓쳐버린 셈입니다.

 

 

 

 

  위의 내용은 2010년 1월과 2월의 케스파 랭킹인데, 결승전에서 승리한 쪽이 랭킹 1위에 자리잡는 게 확정이라 당시 MSL에서도 다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월 랭킹을 보시면 점수가 고작 25.5 차이라 아슬아슬했었죠. 2010년 3월에는 이영호가 랭킹 1위를 탈환하고 이어가는 데 성공하기는 했습니다.

 

  써보니 이제동 인생에서 MSL과 MBC게임은 참 도움이 안 되는게 위의 정전 사건을 시작으로 이제동 커리어에서 MSL의 맵은 스타리그에 비해 불리한 적이(특히 아레나 MSL) 너무 많았고, 도중에 폐지되어서 MSL 금뱃지도 받을 기회를 날려버렸죠. 스타판이 진행되었으면 충분히 이제동도 MSL 3회 우승해서 금뱃지를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김택용이나 이영호도 2회 우승을 하다가 중간에 살짝 주춤한 뒤(김택용은 세 시즌, 이영호는 한 시즌) 한 번 더 우승을 해서 금뱃지를 차지했었으니까요.

 

 

  결승에서 만나자 이영호. 이 것도 유명한 게 4강에서 이제동이 김구현을 셧아웃 시키고 이제동 vs 이영호 결승 대진이 거의 확정되니까 멋대로 좋다고 이런 사진을 올려서 김구현을 대놓고 무시하는 일을 벌였죠. 오죽 한심했으면 이승원 해설이 한동안 말이 없었던...

 

 

 

 

  정리하자면 이 사건도 스타판에 악재가 되었고, 2010년에 승부조작 사건과 또다시 중계권 파동으로 스타판은 망조의 길을 걷습니다. 당장 차기 대회였던 하나대투 MSL이 스폰서가 늦게 들어오기도 했었죠. 위의 시청률 자료는 2011년 7월 자료인데 MBC게임은 MSL이 끝난데 비해 온게임넷은 스타리그가 한창 진행중이라 온게임넷이 유리한 조건에서도 MBC게임이 더 높았습니다. 한 마디로 시청률 수익은 MBC게임이 더 나았는데도 폐국된 것이죠.

 

  2011년 말 MBC게임이 폐지되는 게 확정되었을 때 김철민 캐스터는 트위터로, 대화를 요청해도 받아주지 않는다며 한탄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이승원 해설도 킬링캠프에서 오히려 흑자였는데 일방적인 상부의 결정 때문에 문을 닫았다고 밝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time_continue=4&v=A0-sf-pHGgI&feature=emb_title

 

 

  당시 결승전을 중계했던 김철민 캐스터가 전태규 선수 방송에 나와서 했던 말들도 생각나네요. 높으신 분들은 이제동과 이영호의 결승 대진이 얼마나 주목받는지 알려고 하지 않았고 지원도 빈약했다고 합니다. 야외의 큰 경기장을 대관해서 결승전을 치를 수가 없었고 결국 MBC 스튜디오 홀에서 결승전을 치렀죠. 그러다가 조명이나 카메라, 선수와 기자들 컴퓨터까지 다 썼는데 감당할 수 있는 전력량이 초과되어 버려서 정전 사태가 일어났다고 밝혔죠. 근데 예비전력 용 전기차 정도는 준비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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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불허전 '마'와 예전 스타1 판이 망하게 된 과정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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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396278

 

[판결남] 전 유명 프로게이머, BJ 계약 맺었다 수천만원 배상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사건들은 대부분 1, 2심에서 해결되지만 특별한 ...

news.kbs.co.kr

 

* 개인적인 의견이 많이 들어간 글이고, 예전 스타크래프트1 판을 모르는 분들은 생소한 단어나 이야기가 많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뭐 대법원까지 판결을 봐야 겠지만, 정말 이럴 때 떠오르는 말이 '클래스는 영원하다' 라고 봅니다. 스타판에서 그런 짓을 벌이고도 개인방송에서 어떻게든 스타로 해먹겠다는 본좌님의 강인한 의지야 유명했었죠. 뭐 자업자득으로 게임 관련 방송을 금지시켰으니 방송에 대한 의지가 떨어질 수야 있지만, 저런 잡음이 들려오는 건 참 사람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여담으로 기사에서 본좌라인, 임이최마라는 단어 나오는 걸 보니 이 기사 쓴 기자가 옛날 스타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네요. 저 같은 경우는 한때 스타판이 활발했던 시절 승부조작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마씨 팬도 안티도 아니었습니다만, 조작과 때문에 스타판이 한순간에 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타판이 망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조작은 일부이지 전체적인 원인은 아니라고 여기니까요.

 

   무엇보다도 스타1이라는 게임 수명이 2012년에 다했고, 2007년부터 스타판은 계속 하락세였으며, 2010년에 스타2가 출시되면서 수많은 팬이 스타2로 넘어가고, 지재권 분쟁(+스타1이 공공재라는 답없는 얘기까지...)이라는 한심한 일에다가, MMORPG나 AOS라는 대세 장르가 바뀌고 스타1보다 그래픽 좋은 게임이 적지 않게 출시되면서 사람들이 스타판에 싫증난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놀거리가 많아지고 신규 유저보다 떠나는 유저가 훨씬 많은데 쇠락할 수밖에 없었죠.

 

   애당초 판이 너무 열악했고, 연습생들에 대한 처우문제나, 말기에는 시청룰도 하락했었죠. 당장 임요환-이윤열에 대한 인지도랑 김택용-이제동에 대한 인지도로 비교해볼때 그냥 인기가 하락하면서 문 닫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조작 사건이 스타판의 수명을 깎은 건 맞지만, 결국 문 닫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고요. 당장 스타2 판에도 조작사건 크게 벌어졌고, 롤판도 ahq korea 사건 벌어지고, 다른 종목에서도 승부조작, 심판매수 사건 벌어지는데 다들 잘 유지되죠.

 

   뭐 마씨야 더 이상 관심도 없고... 지금 조작 사건을 떠올려보면 오히려 조작 사건 때문에 스타판이 망조가 든데 가장 큰 책임이 있었던 인간들에게 향해야 할 화살이 덜 갔던 게 열받네요. 임요환과 이윤열의 기록을 삭제하거나 게이머 자격 박탈 같은 몹쓸 짓한 인간들에게 책임을 묻는 비난의 화살이 갔어야 했는데 대부분 조작러들에게 가버리니 지금 생각해도 짜증나네요. 스타2에 새로 도전한다는 이유로 레전드들의 기록을 지워버렸던 망나니 짓은 정말...

 

아무튼 스타1이 지금 ASL이나 간혹 상설 대회 열리는 쪽으로 가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다행이라고 봅니다.

   Ps. 가끔 가다 마씨랑 이제동이나 이영호를 게이머 레벨로 비교하는 사람도 있던데 기가 막혀서 웃기지도 않습니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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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스포츠, 스타1] 과거 스타1 프로게이머 숫자에 관한 자료 모음과 스타1 드래프트 세대에 대한 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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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글링을 통해 예전 스타1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니 '한국컨텐츠진흥원'에서 2010년 5월에 내놓은 '게임 문화 및 게임컨텐츠 동향' 자료가 있어서 예전 프로게이머들, 그 중에서도 되도록 스타1 프로게이머들 숫자에 대해 찾아봤습니다.

 

 

 

  전체 프로게이머들 숫자는 2001년 131명을 시작으로 중간에 떨어진 추세가 있었지만 계속 증가했습니다. 2007년 상반기에는 371명에 이렀죠.

 

  케스파 홈페이지에서 검색해보니 04년 하반기 ~ 07년 하반기까지 스타크래프트1 프로게이머들 현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 http://e-sports.or.kr/board_kespa2018.php?b_no=6&_module=data )

 

KeSPA 한국 e-Sports 협회

KeSPA 한국 e-Sports 협회

e-sports.or.kr

 

여기서 스타크래프트1 프로게이머들 숫자만 추려보면

 

2004년 11월: 103명(=프로게이머 교육 이수자들 현황)

2005년 4월: 117명(= 프로게이머 등록 현황)

2005년 9월: 120명(="SKY 프로리그 2005 후기리그" 게임단별 등록 선수)

2006년 4월: 162명(="SKY 프로리그 2006 전기리그" 게임단별 등록 선수)

2006년 8월: 191명(="SKY 프로리그 2006 후기리그" 게임단별 등록 선수)

2007년 4월: 212명(="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전기리그" 등록선수)

2007년 9월: 230명(="신한은행 프로리그 2007 후기리그" 등록선수)

 

  위의 한국컨텐츠진흥원의 전체 프로게이머 숫자 중 스타1 프로게이머들의 비중이 차지했던 비율은 대략 50%~65% 사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2010년 하반기에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했던 전체 프로게이머 현황을 찍어서 첨부합니다. 2008년~2010년 상반기 프로게이머 현황에 대해서는 케스파 홈페이지에서도 찾기가 힘들고 구글링을 해도 잘 안 나오네요.

 

 

 

  준프로게이머들은 모두 제외하고 총 437명 중 259명이 스타크래프트1 프로게이머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전체 인원 중 60% 정도가 스타1 선수였던 셈이죠.

 

  다음은 2005년 하반기부터 시행되었던 스타크래프트 드래프트에 대해서 찾아봤습니다. 케스파 홈페이지에 검색해보니 기사 자료가 남아있었습니다. ( http://www.e-sports.or.kr/board_pro2014.php?b_no=2&_module=proleague&_page=view&b_no=2&b_pid=9999904200 )

 

KeSPA 한국 e-Sports 협회

2011년 하반기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신인 드래프트 개최

www.e-sports.or.kr

 

 

  2011년 하반기에는 양대리그 대회였던 스타리그/MSL 개최 여부도 불투명해져서 몰락했고, 그 뒤의 드래프트는 스타1이 끝났으니 당연히 스타크래프트2 선수들을 선발하는 것으로 전환되었고, 해외나 과거 연맹팀들 연습생이나 아마추어들도 자유롭게 대회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2008년과 2009년 때도 스타크래프트 선수들은 더욱 꾸준히 유입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시기에 전체 프로게이머들 숫자가 가장 많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본격적으로 프로게이머들 숫자가 증가한 시기는 2006년 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PGR21에서 어떤 분이 온게임넷 스타리그 예선 참가자 숫자를 조사할 때도 06년 때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옵니다. 2007년에도 더욱 늘어났고요. ( https://pgr21.com/free2/56024 )

 

 

[기타] [스타1] 격동의 2007 시즌 : 드래프트 세대 라이즈

1. 개인적으로 스1판의 시대를 구분하자면 2001 시즌과 2003 시즌과 2007 시즌 - 여기서 시즌은 연도와는 구분되는 개념입니다. 2003년 즈음부터는 확실하게 양대리그 체제가 구축되어 3월 경에 양 방

pgr21.com

 

 

  프로게이머들 숫자가 늘어나면서 경기 수준이 상향되고, 이제동-이영호의 쌍두마차를 필두로 드래프트 세대들이 올드 게이머들을 밀어내고 스타판을 장악하게 됩니다. 특히 이제동은 과거 전설들에게 강하다는 의미로 '레전드 킬러'라는 별명이 있기도 했었죠. 확실히 과거 스타1판 경쟁 수준은 07년 중반부터 심화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올드 게이머들이 드래프트 세대들에게 이건 나이 때문도 아니고 실력과 개념에서 앞섰던 게 컸다고 생각합니다. 나이 때문이라면 아직도 30세 중반의 장재호가 워크3판의 핵심으로 활동하고 26살~27살의 조성호와 이신형과 전태양이 스타2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선수로 활동한다는 게 설명이 안 되니까요.

 

  이런 걸 감안하면 택신 김택용의 3.3혁명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06시즌이 끝날 때(연도로 보면 2007년 3월)를 기점으로 스타판이 전후로 나뉘는데 택신께서 크게 기여했으니까요. 그는 드래프트 세대들의 대표주자 중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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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에 원촌공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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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구리시에 원촌공원이라는 작은 공원이 있어서 작년 여름에 찍은 사진 몇 장을 공유합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쉼터와 아담한 놀이터, 벤치와 운동기구도 있는 아담한 공원입니다. 주변에 나무도 많아서 더울 때 그늘에 있을 수 있는 공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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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메이저리그 포지션별 역대 최고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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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구 선수를 2차 스탯으로 평가할 때 투수는 Bwar과 Fwar 모두(다만 Bwar에 가중치를 더 줍니다.), 타자는 거의 Fwar과 Wrc+로 평가하는 편입니다.

* 지명타자는 타격만 충분하면 어떤 타자도 소화할 수 있는 포지션이라고 생각해서, 딱히 최고를 뽑지 않았습니다.

* 타점, 득점은 큰 의의가 없다고 생각해서 딱히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안타, 홈런, , 볼넷, 도루, 타율-출루율-장타율(이하 타-출-장), WRC+. OPS+를 표시했습니다. 투수의 ERA+와 ERA-는 각각 베이스볼 레퍼런스와 팬그래프의 조정방어율인데, 평균 투수를 100으로 놓고 구장의 차이와 타고투저인지 투고타저인지를 분석하는 기록입니다. ERA+는 숫자가 높을수록 좋고 ERA-는 숫자가 낮을 수록 좋습니다.

 

 

1. 투수 - 월터 존슨(1907~1927)

 

5914.2이닝 3509삼진 방어율 2.17

ERA+147 ERA-68 Bwar 151.9 Fwar 117.1

 

- The Greatest pitcher of all time. 투수 가운데 역대 블랙잉크 1위, 그레이잉크 2위, 110완봉승이라는 대기록의 소유자. 이닝, 삼진, 방어율 모두 1위 시즌을 수없이 만든 투수로 그의 커리어는 완벽합니다. 삼진 1위 시즌을 12번 소화했으며 월터존슨 이후 3000삼진 투수가 다시 나오는 건 5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월터 존슨보다 높다고 말할 투수는 사이 영 뿐인데, 지배력의 차이가 커서 월터 존슨이 위라고 생각합니다.

 

 

2. 포수 - 자니 벤치(1967~1983)

 

통산 2048안타 389홈런 891볼넷 68도루, 타출장 .267 .342 .476

OPS+126, WRC+125

Bwar 75.2 Fwar 74.8

 

- 70년대 신시네티의 막강한 타선인 '빅 레드 머신'을 이끈 포수. 자니 벤치는 포수 미트를 통해 한 손으로 투구를 받는 방식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포수의 수비 기술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10개의 골든글러브를 받을 만큼 역대 최고의 수비력을 가진 포수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고, 400홈런 가까이 치는 등 타격에서도 막강했습니다.

 

 

3. 1루수 - 루 게릭(1923~1939)

 

통산 2721안타 493홈런 1508볼넷 102도루, 타출장 .340 .447 .632

OPS+179, WRC+173

Bwar 114.1 Fwar 116.3

 

- 베이브 루스와 함께 양키스의 황금기를 이끈 역대 최고의 1루수. 통산 Wrc+가 173인 기록은 공동 역대 3위(로저스 혼스비와 동일)로, 베이브 루스와 테드 윌리엄스 다음입니다. 게릭이 1927시즌 기록한 Fwar 12.5 + Wrc+209 기록은 1루수로서는 불멸의 기록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는 14시즌 동안 2130경기를 연속으로 출장할 만큼 철인이었는데, 이 기록은 1995년 칼 립켄 주니어가 경신하기까지 깨지지 않았습니다.

 

 

4. 2루수 - 로저스 혼스비(1915~1937)

 

통산 2930안타 301홈런 1038볼넷 135도루, 타출장 .358 .434 .577

OPS+175, WRC+173

Bwar 127.1 Fwar 130.3

 

- 7번의 타격왕, 통산 Wrc+173에 달하는 엄청난 슬러거이자 윌리 메이스 다음 가는 우타자. 혼스비는 1920시즌부터 1925시즌까지 타율/출루율/장타율 모두 리그 1위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아메리칸리그의 지배자가 베이스 루스라면 내셔널리그 지배자는 로저스 혼스비였습니다. 그는 1924시즌 타율 .424와 Fwar 12.5를 기록했는데, 그와 한 번이라도 경기에서 만난 투수들 중 안타를 맞지 않은 투수는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할 정도로 투수들의 공포였습니다.

 

5. 3루수 - 마이크 슈미트(1972~1989)

 

통산 2234안타 548홈런 1507볼넷 174도루, 타출장 .267 .380 .527

OPS+148, WRC+147,

Bwar 106.9 Fwar 106.5 Wrc+147

 

- 필라델피아 필리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이자 이견의 여지가 없는 역대 최고의 3루수. 'Hot Zone'이라는 포지션인 3루수에서 홈런왕 8회와 골든글러브 10회의 엄청난 대기록을 달성할 만큼 공격과 수비 모두 완벽했습니다. MVP 3회 수상은 어떤 약물 복용 선수를 제외하면 공동 1위의 수상 기록입니다.

 

 

6. 유격수 - 호너스 와그너(1897~1917)

 

통산 3420안타 101홈런 963볼넷 722도루, 타출장 .328 .391 .467

OPS+151, WRC+147,

Bwar 130.8 Fwar 138.1 Wrc+147

 

- 데드볼 시대를 대표하는 선수 중 한 명이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의 '최초의 5인' 중 한 명. 타율 1위 시즌과 OPS 1위 시즌을 각각 8번씩 만들고, 도루 1위 시즌도 5번이고 수비에서도 팬그래프의 Def 수치에서 184.4를 쌓을 만큼 무결점 유격수였습니다. 그만큼 '완벽함'으로 평가하면 와그너를 능가할 선수가 손에 꼽힐 것입니다. 홈런 개수가 101개인 것은 그가 데드볼 시대에서만 뛰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08시즌 와그너는 안타, 2루타, 3루타, 타점, 도루,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토탈베이스 모두 1위를 차지하고 Fwar도 11.8을 기록했지만 홈런이 3개 부족해서 트리플 크라운 달성에 아쉽게 실패했습니다.

 

 

7. 좌익수 - 테드 윌리엄스(1939~1960)(1942~1945년 2차 대전으로 경력 중단, 1952~1953년도도 한국 전쟁으로 43경기만 출전)

 

통산 2654안타 521홈런 2021볼넷 24도루, 타출장 .344 .482 .634

OPS+191, WRC+188,

Bwar 121.9 Fwar 130.4

 

- 최후의 4할 타자이자 보스턴 레드삭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통산 출루율 .482는 역대 1위이며, 그가 1941시즌 기록한 출루율 .553은 어떤 약쟁이가 2002시즌과 2004시즌에 갱신했지만 약물 기록은 무의미하므로 단일 시즌 출루율 1위는 테드의 몫일 것입니다. 전성기 시절 5년 가까운 기간을 전쟁 참전으로 상실했는데, 그가 온전히 뛰었으면 메이저리그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입니다. 열악한 전쟁 환경에서도 그는 야구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습니다. 2차 대전과 한국전쟁 사이의 기간에서 그는 OPS 1위 시즌을 5번이나 만들어냈고, 한국전쟁 참전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3번이나 만들었습니다.Wrc+는 통산 2위일 만큼 타격 면에서는 궁극이었지만, 수비가 좌익수 수비를 봤는데도 아주 못했다는 점은 옥의 티입니다.

 

 

8. 중견수 - 윌리 메이스(1951~1973)(테드의 52~53년도와 비슷하게 메이스도 52년도에 34경기만 출전하고 53년도에 경력 중단)

 

통산 3283안타 660홈런 1464볼넷 338도루, 타출장 .302 .384 .557

OPS+ 156, WRC+154,

Bwar 156.2 Fwar 149.9

 

- 윌리 메이스를 가리켜 "Willie could do everything from the day he joined Giants"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완벽한 5툴 플레이어였습니다. 최근에 발표된 'The Athletic'의 역대 야구 선수 순위에서 베이브 루스를 제치고 1위를 할 만큼 메이스는 간혹 역대 최고의 야구 선수로 불리기도 합니다.(그러나 필자는 루스가 당연히 역대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며, 12회 연속 골든글러브 수상과 통산 660홈런, OPS 1위 시즌 5번을 기록했습니다. 골든글러브 수상 규정이 1957시즌에야 신설되었는데, 일찍 신설되었으면 메이스는 더 많은 수상 기록을 남겼을 것이고, 테드 만큼은 아니지만 메이스도 2시즌 가량을 군복무로 손해봤습니다.

 

 

9. 우익수 - 베이브 루스(1914~1935)

 

통산 2873안타 714홈런 2062볼넷 123도루, 타출장 .342-.474-.690, OPS+206, Wrc+197

Bwar 182.5(타자 162.1 + 투수 20.4) Fwar 180.8(타자 168.4 + 투수 12.4)

 

 

- 그 어떤 수식어가 필요없는 야구 역사상 역사상 최고의 선수. 스포츠 역사상 가장 강력했으며 위대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스포츠인. 루스는 홈런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데드볼 시대를 종결시키고 라이브볼 시대를 열었습니다. 정규시즌보다 월드시리즈에서 OPS가 높아지기도 했으며, 양키스 시절 7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지금의 뉴욕 양키스를 만들었습니다. 루스는 통산 장타율, OPS, Wrc+, OPS+, Bwar, Fwar 모두 1위에 군림하는 'Greatest of all time'이었습니다. 그는 누적과 임팩트 모두 견줄 야구선수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투수로서도 통산 2.28의 방어율과 1916시즌 1.75의 방어율을 찍고 방어율 1위 시즌을 만드는 등 투타겸업의 커리어도 남겼었습니다. 여담으로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두 차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서 31이닝을 소화하면서 0점대 방어율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1927시즌 루스가 기록한 60홈런은 로저 매리스가 1961시즌 61홈런으로 갱신했지만, 약물 복용자들을 제외하면 오직 매리스 만이 이 기록을 깼습니다. 현대 야구의 선수들로서는 루스의 기록을 깨는 게 'Mission impossible'로 여겨지는데, 루스가 세운 통산 180이 넘는 War과 Wrc+197의 타격, 10번의 출루율 1위 시즌, 13번의 장타율과 OPS 동시 1위 시즌 기록은 공포감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듭니다.

단적인 비유로 브라이스 하퍼가 2015시즌 Wrc+197, Fwar9.3을 기록하면서 그 시즌 압도적인 최고의 선수로 지배했었는데, 베이브 루스는 통산 Wrc+가 197인데다가, Wrc+가 200이 넘는 시즌을 1919시즌부터 1931시즌 동안 자그마치 10번이나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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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 가능골공원에서 찍은 사진들을 업로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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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리시청과 교문도서관 사이에 있는 공원으로 역시 주변에 주거단지가 많습니다. 제가 갔을 때 예전에 눈이 많이 내렸지만 날씨가 따뜻해서 눈이 녹아내리던 시기였네요. 놀이터와 방범대 건물, 경로당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쉼터가 있는 작은 공원입니다. 개인적으로 구리시청 가는 길에 가끔씩 보는 공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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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B] 단일 시즌 가운데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선발 투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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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단일 시즌 최고점을 찍었던 선발 투수들을 비교해보겠습니다. 범위는 아메리칸리그가 창설된 1901시즌부터 지금까지입니다. 투수로서의 가치는 선발 투수가 마무리 투수보다 월등하다고 생각해서 선발 투수만 놓고 비교했습니다.

 

* 투수로서 Bwar과 Fwar을 둘 다 고려했습니다. 선수의 전체 커리어로는 Bwar을 더 중시하지만 단일 시즌 비교는 반반이라고 봅니다.

 

* 오랜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삼진과 이닝, War 등 시대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에 단일 시즌 기록에서 그 시대에 다른 선수들을 얼마나 압도했는 가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또 전인미답의 대기록을 달성했다고 여긴 경우라면 개인적인 보너스 점수를 주기도 했습니다.

 

* 작성한 기록은 이닝, 삼진, 방어율, Fwar, Bwar, ERA+(Bwar, 레퍼런스 쪽 조정방어율). ERA-(팬그래프 쪽 방어율 보정)를 썼습니다. 해당 시즌 리그 1위 기록에는 굵은 글씨를 표시했고, 전체 1위 기록에는 기울인 글씨를 추가했고, 만약 역대 1위 기록(1901시즌 부터 지금까지)이라면 빨간색 글씨를 더 붙였습니다.

 

 

 

1. 1908시즌 크리스티 매튜슨

 

390.2이닝 259삼진 1.43 방어율

Fwar 10.8 Bwar 11.7 ERA+169 ERA-61

 

- 역대 메이저리그 시즌 중 역대 1위의 FIP 시즌(수비 무관 투구 기록, 1.29). 단일 시즌 Fwar 역대 4위로 1960년대까지 최고의 Fwar 기록.

 

 

 

 

2. 1912시즌 월터 존슨

 

369이닝 303삼진 1.39 방어율

Fwar 9.3 Bwar 13.2 ERA+243 ERA-42

 

- 데드볼 시대의 300삼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즌. 이 시즌의 월터 존슨 이후 300삼진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한 투수는 1946시즌 밥 펠러로, 자그마치 34시즌이 걸렸습니다. 단일 시즌 Bwar 2위의 기록.

 

 

 

 

3. 1913시즌 월터 존슨

 

346이닝 243삼진 1.14 방어율

Fwar 8.5 Bwar 15.1 ERA+259 ERA-39

 

- 단일 시즌 Bwar 역대 1위의 대업을 달성한 역대 최고 투수의 시즌입니다. 모든 기록에서 전체 1위, 심지어 다승, 승률, 완투승, 완봉승 횟수도 전체 1위였습니다. ERA-는 역대 6위, ERA+는 역대 5위(단축 시즌이었던 2020시즌 제외), 단순 방어율은 역대 5위로 역사에 남을 궁극의 기록.

 

 

4. 1968시즌 밥 깁슨

 

304.2이닝 268삼진 1.12 방어율

Fwar 8.6 Bwar 11.2 ERA+258 ERA-38

 

- 역대 방어율 3위, ERA+ 역대 6위(단축 시즌이었던 2020시즌 제외)의 대기록이 나온 시즌입니다. 역대 방어율 1위, 2위의 선수들이 War이나 이닝이 부족해서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그에 비해 깁슨의 이 시즌은 독보적이었습니다. 투고타저시대인 걸 감안하더라고 1.12의 방어율은 불멸의 기록입니다. 13번의 완봉승도 기록했는데 이는 역대 3위로 라이브볼 시대인 1920년대 이후부터는 역대 1위입니다.

 

1968시즌은 메이저리그 역사를 가르는 시즌입니다. 투고타저를 완화하기 위해 다음 시즌부터 마운드의 높이가 15인치에서 10인치로 조정되었고, 아메리칸리그에 지명타자제도가 도입되었죠.

 

 

 

5. 1972시즌 스티브 칼튼

 

346.1이닝 310삼진 1.97 방어율

Fwar 11.1 Bwar 12.1 ERA+182 ERA-80

 

- Bwar 역대 5위(라이브볼 시대로 한정하면 역대 2위), Fwar 역대 2위. 칼튼은 이 시즌에서 최약체였던 필라델피아 필리스 팀의 총 승수의 절반 가까이(59승 중 27승)를 맡았습니다. 지금은 볼 수 없고, 역대로도 거의뽑기 힘든 야구에서의 '원맨캐리'라면 칼튼의 이 시즌을 우선적으로 뽑고 싶습니다. Bwar과 Fwar을 모두 11 이상 달성한 것은 오직 칼튼 뿐입니다.

 

 

6. 1985시즌 드와이트 구든

 

276.2이닝 268삼진 1.53 방어율

Fwar 8.9 Bwar 12.2 ERA+229 ERA-44

 

- 라이브볼 시대 Bwar 역대 1위, 역대 메이저리그 선수들 중 2년차 선수가 이렇게 잘한 경우는 거의 보기 힘들 것입니다. 앞에서 1969시즌부터 마운드 높이가 낮아졌다고 말씀드렸는데, 구든의 1.53 방어율은 50년 넘게 깨지지 않았습니다. 비율 스탯과 누적 스탯 모두 완벽했던 최고의 시즌이었습니다. 큰 의미는 없지만, 구든이 마약을 멀리하고 자기관리에 철저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아직도 남습니다.

 

 

 

 

7. 1999시즌 페드로 마르티네즈

 

213.1이닝 313삼진 2.07 방어율

Fwar 11.6 Bwar 9.8 ERA+243 ERA-42

 

- 모든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일 시즌 Fwar 투수 1위, 스테로이드 시대라고 불릴 만큼 극한의 타고투저 시대의 FIP 1.39라는 기록은 충격과 공포였습니다. 2018시즌이 끝나고 mlb.com은 역대 사이영 수상자들의 단일 시즌을 비교하면서 1999시즌의 페드로가 역사상 가장 위대하다고 말했습니다( https://sports.news.naver.com/news.nhn?oid=477&aid=0000148620&redirect=false ) 이 시즌 올스타전에서 2이닝 무실점 5삼진의 퍼포먼스는 아직도 회자되죠.

 

 

 

 

 

8. 2000시즌 페드로 마르티네즈

 

217이닝 284삼진 1.74 방어율

Fwar 9.4 Bwar 11.7 ERA+291 ERA-35

 

- Bwar 11.7은 위의 드와이트 구든의 단일 시즌 이후 가장 높은 기록입니다. 방어율 조정한 두 기록은 20세기 이후 역사상 1위의 시즌입니다. 투수의 전성기를 두 시즌으로 한정하면 1912시즌~1913시즌의 월터존슨과 1999시즌~2000시즌의 페드로 마르티네즈를 천상계로 놓을 것입니다.

 

 

 

 

9. 2001시즌 랜디 존슨

 

249.2이닝 372삼진 2.49 방어율

Fwar 10.4 Bwar 10.1 ERA+188 ERA-55

 

- 페드로의 두 시즌 중 하나만 고른다면 이견이 갈리듯이, 랜디도 오랜 전성기에서 하나만 꼽기에는 고민될 것입니다. 필자는 2001시즌이라고 생각하고 야구 역사에 남을 시즌이라고 보는 편입니다. Bwar과 Fwar 둘 다 10 이상을 달성했고, 372개의 삼진은 역대 3위이며, 9이닝 당 삼진이 13.4개나 되었는데 이는 2019시즌 게릿 콜이 경신하기 전까지 역대 1위였습니다. 2001 포스트시즌에서도 커트 실링과 함께 애리조나의 쌍두마차로 팀을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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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투수들 중 사이 영, 피트 알렉산더, 레프티 그로브, 샌디 쿠팩스, 밥 펠러의 시즌도 넣을까 말까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다만 방어율이 부족하거나 War이 부족하거나 하는 등의 아쉬움이 있던 경우가 많아서 위의 9번의 시즌만 추려봤습니다.

 

- 야구에 만약은 없지만 1994시즌-1995시즌에 파업으로 시즌 단축이 안 되었으면 매덕스의 저 두 시즌, 랜디의 95시즌도 넣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if도 듭니다.

 

- 현역 선수들 중, 즉 랜디 존슨 이후 최고 시즌은 아무래도 2009시즌의 잭 그레인키나 2018시즌의 제이콥 디그롬으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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