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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며,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을 접하길 원하는 1인입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며 주기적으로 헌혈하는 헌혈자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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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스포츠, 스타1] MSL 우승자의 스타리그 4강 잔혹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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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스타1판을 봐왔던 분들이라면 '온막', '엠막'이라는 은어를 기억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스타1판의 양대 개인리그로 게임넷 스타리그와 비씨게임 MSL이 있는데, 온막은 MSL에 비해 스타리그 성적이 시원찮은 게이머를, 엠막은 스타리그에 비해 MSL 성적이 시원찮은 게이머를 말합니다.

일단 엠막 게이머, 그러니까 통산 MSL 커리어가 기대이하인 게이머들로는 대표적으로 이 3명을 꼽을 수 있습니다.

1) 김준영: 스타리그에서 드라마틱한 우승을 했지만 MSL 본선 진출 경력 아예 없음

2) 박성준: 스타리그 골든마우스 수상자(3회 우승자)이지만 MSL에서는 8강이 한계라 4강 한 번 간 적 없음(프로토스의 재앙이지만 MSL 8강에서는 토스들에게도 발목 잡혔던게 흠좀무)

3) 정명훈: 스타리그 5회 결승진출자이지만 MSL에서는 0회 결승진출자)최전성기에도 김민철에게 4연패해서 연속 32강 광탈...)

제목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본격적인 내용은 게이머 명성에 비해 스타리그 경력이 다소 부족한 경우를 다뤄 보겠습니다. 사실 4강이나 8강 커리어도 절대 무시받을 만한 성적은 아니니 온막, 엠막이라는 용어는 부적절할 수 있어서 제목에는 넣지 않았습니다.

MSL 우승자 게이머들 중 스타리그에서 4강에서 다회로 무너지면서 결승에 가지 못한 약간 안타까운 경우만 다뤘습니다. vs는 결승이나 4강에서 만난 상대 게이머입니다.

 

 

1) 박태민: MSL 우승 1회(vs 이윤열)

4강 1회(vs 김택용)

스타리그 4강 2회(vs 이윤열, 이병민)

- 양대리그를 제외하고 스타판의 중요한 대회들 중 하나(ex-WCG, 게임큐, 겜tv, itv, 곰클래식 등)로 여겨졌던 '2차 프리미어리그'가 열렸을 때, MSL은 박태민이 이윤열을, 스타리그에서는 이윤열이 박성준을, 프리미어리그는 박성준이 박태민을 제압했었죠. 잠깐이지만 '삼신전'이라고 불릴만큼 스타판을 삼국지 구도로 만들었습니다.

박태민 삼신전 시기였던 당골왕 MSL 7전 4선승제 결승에서 이윤열을 이기고 우승하지만, 반대로 아이옵스 스타리그 4강에서 이윤열에게 떨어지고(승승패패패로 아쉽게), 다음 대회인 2005 에버 스타리그에서 이병민에게 떨어진 이후로 스타리그 4강을 밟지 못하게 됩니다. 나중에 MSL 4강에 오르긴 했지만 상대는 프저전의 끝판왕이었던 김택용...

2) 박찬수: MSL 우승 1회(vs 허영무)

스타리그 4강 2회(vs 송병구, 도재욱)

- 2010년 5월의 그 사건 때문에 딱히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저그 박찬수 또한 스타리그에서는 4강이 한계였던 MSL 우승자(박탈)였습니다.특이사항으로 여기 나와 있는 게이머들과는 달리 먼저 스타리그 4강을 두 차례 찍고 나중에 MSL을 우승합니다.

..

  3) 김윤환: MSL 우승 1회(vs 한상봉)

4강 1회(vs 이제동)

스타리그 4강 2회(vs 이영호, 정명훈)

 

  - 2009 아발론 MSL에서 김윤환은 4강에서 스타판을 지배하던 이제동을, 결승에서 한상봉을 꺾고 우승을 달성하죠. 하지만 다다음 대회의 MSL에서 이제동에게 4강에서 복수당하고, 스타리그 4강에서 이영호와 정명훈에게 무너지며 결승 진출에 실패합니다.

이영호와의 4강전에서는 1:3으로 패배, 정명훈과의 4강전에서는 2:3으로 아쉽게 패배했습니다. 이영호전 4강 3세트에서(맵: 투혼) 맵을 반으로 가르는 치열한 경기를 보였고, 정명훈전 4강 3-4세트에서는 백투백 4드론이 기억에 남네요. 4세트에서 정명훈이 4드론을 막고 배틀 세레머니를 선보인건 덤...

 

 

  4) 김택용: MSL 3회 우승(vs 마재윤, vs 송병구 vs 허영무)

1회 준우승(vs 박성균)

스타리그 3회 4강(vs 송병구, vs 이영호, vs 정명훈)

 - 역대 최강의 프로토스이자 프로리그의 지배자였던 역시택신 김택용. 그러나 스타리그에서는 3차례의 4강이 끝이었습니다. 라이벌 송병구도 커리어가 스타리그 편중이지만 MSL에서는 한 번 결승 갔다는 거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이기는 합니다.

박성균과의 결승에서 패배해서 MSL 쓰리핏이 무산되고, 스타리그 4강에서 송병구를 만나 셧아웃 당하면서 복수당하면서 한창 본좌로드를 달렸는데 결국 본좌 등극에는 실패했죠.

정명훈과의 4강전에서는 이겼어도 결승전 상대는 이제동이고 그 때 바투 스타리그가 저그에게 많이 좋은 맵이라 우승은 힘들었겠지만, 이영호와의 4강에서 이겼다면 결승전에서 꽤 무기력해지는 송병구를 만나서 충분히 스타리그 우승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실제로 송병구와의 결승전 중에 MSL 말고도 WCG 선발전 결승, ief 결승에서도 다 이겼으니까요.) 물론 이런 가정은 다른 다회 우승자들에게도 붙일 수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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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안골공원에서 잠깐 쉬면서 주변을 촬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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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리시청 앞에 있는 이문안호수공원과 교문사거리 사이에 안골공원이 있습니다. 교문사거리 쪽으로 갔다가 다시 오는 길에 볼 수 있었네요. 주위에 주차된 차들로 가득하고 공원 안에는 놀이터와 쉼터와 벤치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다른 공원의 놀이터에는 모래가 많았는데 안골공원은 깔끔하게 바닥이 포장되어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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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와 전쟁의 역사, 747년~751년의 고선지의 서역 원정과 아바스vs당나라의 탈라스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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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를 간략하게 그린 지도

  1. 8세기 초반 실크로드 무역과 서역 세력

  중국 왕조는 한나라 때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서쪽과 무역을 해왔습니다. 중국 - 타클라마칸 사막 - 파미르 고원 - 중앙아시아 초원 - 현재 이란 지역 - 지중해까지 닿는 어마어마한 무역로였습니다. 중국에서 만든 비단, 도자기 등의 물품과 양잠업, 제지술 등의 기술이 서방으로 넘어갈 만큼 동서양의 경제와 문화가 오고 가는 통로였습니다.

  그러나 실크로드 무역은 말처럼 쉽지 않았습니다. 파미르 고원은 험준했고 타클라마칸 사막 은 너무 넓어서 관리하기에 극악의 난이도였습니다. 주변의 사막, 초원, 산지로 둘러싸인 그 길에 여러 세력이 있었습니다. 당나라로서는 상인들이 문제없이 무역에 종사하도록 저들을 억제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중국 왕조를 적대하는 거대한 강대국이 무역로를 가로막으면 실크로드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죠.

  740년대 당나라는 실크로드의 무역이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토번 제국은 사방으로 세력을 넓혀나갔고 중앙아시아의 서역 통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파미르 고원 주위에는 수십 개의 작은 나라가 있었는데, 토번은 그들 중 실크로드의 심장부에 있는 ‘소발율’이라는 나라의 국왕에게 토번 공주를 왕비로 맞이함으로써 동맹을 맺었고, 파미르 고원에 있는 나라들 대부분이 토번에게 귀속되었다고 합니다.

  당나라도 그냥 보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개가운, 정인완 같은 여러 절도사를 보내서 소발율과 주변 국가들을 당나라의 영향력에 두려고 했지만 토번이 그들을 지원하는 바람에 모두 실패했죠. 하지만 당나라 현종은 실크로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선지의 원정로

  2. 고선지의 서역 원정

  747년, 당나라의 고선지는 왕에게서 1만 명의 병사를 받아서 원정을 떠났습니다. 그는 토번의 기습을 피해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기점으로 더욱 북쪽에 위치한 천산산맥을 가로지르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긴 행군에 대비하기 위해 1만의 병사들은 각각 말에 타면서 식량과 무기를 운반했습니다. 그렇게 병사 1만 명과 말 1만 필은 목이 타들어 가는 사막과 얼음이 가득한 고원을 넘어가며 힘든 원정을 계속했습니다.

  고선지와 당나라군은 100일간의 원정을 이겨내고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북동쪽에 도착했습니다. 병사들에게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하게 한 뒤, 고선지 파미르 고원의 험한 산맥 안에 있는 ‘연운보’라는 토번의 요새의 공략에 착수했습니다.

  고선지는 부대를 4천, 4천, 3천 이렇게 셋으로 나누어서 세 방향으로 연운보를 점령하기로 계획했습니다. 높은 언덕을 끼고 있는 연운보에 토번군 1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선지가 토번이 예상하지 못한 원정길로 오는 바람에 토번군은 당나라군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한 나절도 안 되어 당나라군은 연운보 기습에 성공하고, 토번군 5천명을 죽이고 1천명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말 1천 필과 의복, 식량, 병기 등의 전리품도 획득했죠. 고선지는 소발율국의 수도 아노월성을 향해 원정을 계속했습니다.

  고선지는 재차 소발율과 토번이 예상하지 못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힌두쿠시 산맥에 위치한 탄구령을 넘기로 결정한 것인데, 여기도 항상 얼음이 있을 만큼 춥고 산소가 희박한 고지대였습니다. 탄구령은 지금의 파키스탄 북부의 다르코트 고개로 자그마치 해발 4,700m가 넘었습니다. 절벽을 오르는 상행길도 목숨을 건 행군이었지만 하행길 역시 너무 험했습니다. 고개를 내려가는 도중 몇몇 병사와 말이 떨어져 죽는 사고가 빈번해지자 병사들은 더이상은 못 간다고 고선지에게 호소했습니다. 이 때 소발율국의 주민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나라군이었습니다. 고선지는 진즉에 20여 명의 병사들을 미리 앞으로 보내서 아노월성 주민으로 꾸미도록 명령했고, 지금 나타나도록 꾸민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은 주민들이 눈에 보이자 목적지가 멀지 않다며 사기가 올랐습니다. 그들은 눈으로 덮인 내리막길을 통과했습니다.

  한편 소발율국의 왕은 동맹국 토번의 힘만 믿고 당나라군을 피해서 아노월성 안에만 있었습니다. 고선지는 토번 편에 있는 추장들을 죽이고, 병사들에게 토번과 서역을 잇는 등나무로 만든 절벽다리를 끊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생긴 절벽다리를...

 

당나라군이 파괴해서 토번군의 길이 끊겼습니다.

  그때 마침 토번의 구원군도 동맹을 구하기 위해 나타났습니다. 아슬아슬한 시간에 당나라군은 다리를 끊는데 성공했고, 토번군의 길은 막혔습니다.

 

서기 750년경 아시아 세력 지도, 황색이 당나라고 녹색이 아바스입니다.

 

   3. 원정에서의 연승, 그러나......

   이렇게 고선지의 원정은 성공했습니다. 병력을 크게 잃지 않고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북부, 우즈베키스탄까지 당나라의 영향 아래에 두었습니다. 기록상으로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72개국이 당나라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고선지는 소발율국 점령 이외에도 몇 년 뒤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던 당시 석국이라는 나라도 정벌했습니다. 서쪽의 이슬람 왕조와 동쪽의 당나라 중 어느 쪽에 붙을까 고민하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점점 당나라로 향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석국 정벌에서 터졌습니다. 고선지는 석국의 수도에 있는 청년들을 모두 노예로 삼고 노약자들을 학살했습니다. 왕궁은 물론 백성들의 집까지 철저하게 약탈했습니다. 심지어 당나라로 압송된 석국의 왕은 현종에게 처형당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수많은 국가들은 왕이 항복했는데도 살해당했다는 사실과 고선지가 죄없는 백성들을 잔혹하게 억압한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아바스와 당나라 사이에 벌어졌던 탈라스 전투

  4. 탈라스 전투(751년, Battle of Talas)

  아바스 왕조는 분노한 중앙아시아의 국가들과 연합해서 당나라를 공격했습니다. 지하드 이븐 살리흐라는 장군이 아바스군을 이끌었고, 탈라스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고선지는 아바스 제국군이 몰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당나라군과 ‘카를룩’이라는 유목민족의 부대와 함께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751년의 이 전투에서 양측의 병력 규모는 확답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우선 수십 만을 동원했다는 설은 과장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사견입니다만 고선지의 병력은 3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살리흐의 아바스군은 이와 비슷할 것으로 보이나 연합한 중앙아시아 병력까지 연합하면 3만 몇천 명 정도로 약간 앞설 것으로

  전투는 5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양측이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도중 당나라 편에 있었던 카를룩의 군대가 배신하면서 아바스군으로 돌아서는 결정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내부가 분열되고, 외부에 살리흐가 이끄는 연합군이 함께 공격해오자 고선지는 병사들 태반을 잃었습니다. 퇴각하는 길에도 지형 때문에 험난해서 이동이 더뎠고, 쫓아온 연합군에 의해 또다시 많은 병사가 죽었습니다. 고선지는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본국으로 도망쳤습니다.

 

탈라스 전투의 진형. 노란색이 당나라, 파란색이 당나라->아바스로 전향한 유목민족 카를룩, 초록색이 아바스 병사들입니다. 아바스와 카를룩이 당나라를 협공하는 모양새입니다.

 

  5. 이후 고선지의 최후와 탈라스 전투의 의의

  패전 이후 고선지는 절도사 직책에서 물러나고 다시는 원정을 이끌지 못합니다. 다른 군사 작위는 유지한 채로 조정에서 계속 일했습니다. 예전에 토번의 가르친링에게 패배한 당나라 장수들은 신분 자체가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에 비하면 이례적인 일로 여겨집니다. 이는 고선지가 세웠던 공로가 커서 현종이 용서해준 것이나, 탈라스 전투가 총력전까지는 아닌 만큼 조정에서 피해가 그렇게까지 크지 않았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훗날 고선지는 안사의 난 시기 안록산에 맞서서 당나라 정부군을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감군 변영성이 고선지는 군자금을 착복하고 있다며 모함했고, 분노한 현종은 고선지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고선지는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혼란의 시대에 더 이상 발자취를 남기지 못했고, 끝내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고선지의 석국 원정에서 벌어진 끔찍한 억압 행동은 명백히 실책이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서역 국가들이 당나라에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케를룩 군대의 전향도 고선지의 끔찍한 행동이 다소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도 크다고 생각합니다. 고선지는 전쟁의 안목은 밝았지만, 정치에서는 까막눈이었습니다. 탈라스 전투 이후 실크로드 주변의 국가들이 이슬람 왕조의 편이 되었습니다. 종교와 문화도 이슬람의 영향을 받게 되죠.

  패배한 당나라나 승리한 아바스나 탈라스 전투로 국력이 크게 바뀐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바스 왕조도 탈라스 전투를 '몰락한 왕조(우마이야)의 지지자들이 당나라의 원조를 받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한 전투'라고 기록할 만큼 그저그런 규모의 전투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당나라가 이겼다고 가정해도 병력과 보급 문제로 아바스에게 결정타를 먹이는 건 불가능했고, 뒤에 벌어진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가 서역의 영향력을 유지할 가능성도 낮았습니다.

  다만 동서 문명이 교류하는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당나라의 제지기술자들이 아바스의 포로가 되어서 제지기술이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제지기술로 아바스의 영토 곳곳에 제지 공장이 세워져서 이슬람 문명은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술은 훗날 유럽에까지 전해졌습니다. 또한 탈라스 전투는 중국 왕조와 이슬람 왕조의 최초의 충돌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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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남은 전쟁사, 페르시아-그리스 전쟁(~기원전 479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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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세기~6세기 후반의 오리엔트 4대 강국, 메디아, 리디아, 바빌로니아, 이집트.
키루스 대제는 저 국가들을 아케메네스 제국으로 통합하고, 다리우스 대제 시기 페르시아 제국은 최대 세력을 이룩합니다

 

  1. 세계사 최초의 대제국,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기원전 6세기 중반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는 장기간 압도적인 세계 최강의 대제국으로 군림했습니다. 키루스 대제가 메디아와 리디아를 차례로 평정하고, 바빌론의 높은 성벽을 공략해서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나머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을 제국의 영향권에 두었습니다.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해서 오리엔트 4대 강국이 모두 아케메네스 제국에 복속되었습니다. 캄비세스 2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도 역시나 인도와 마케도니아를 정복했습니다. 그는 샤한샤(왕 중의 왕)라는 대왕의 직위에서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제국을 ‘사트라피’라는 20여 개의 행정구역으로 나누었습니다. 거기에 총독을 파견하여 다스렸으나, ‘왕의 눈’과 ‘왕의 귀’라고 하는 감찰관을 통해 세금을 제대로 내는지 등을 감시시켰습니다. ‘왕의 길’이라는 역참 시스템도 강화했는데 감찰관이 2400km의 길을 7일 만에 주파하여 다리우스에게 보고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앙집권화가 갖춰진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리스 보병이 양익 포위로 승리한 마라톤 전투, 빨간색이 페르시아군이고 파란색이 그리스군입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사방에 영향권을 넓혔습니다. 그리스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죠. 다리우스 1세는 사신을 보내서 복종하라는 의미로 흙과 물을 바치라는 요구를 하지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거절했습니다. 기원전 499년부터 494년까지 페르시아가 이오니아의 반란을 진압했을 때 아테네는 지원군을 보내 이오니아 도시를 도왔습니다. 페르시아는 반란을 진압하고 아테네를 정복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기원전 490년, 마라톤 평야에서 아테네군은 다리우스 1세가 보낸 페르시아 원정군의 양익을 노리는 전술로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페르시아군 중앙이 아테네군 중앙을 공략하여 파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테네군 양익 보병이 페르시아군 양익을 무너뜨려서 일방적인 아테네군 승리로 끝났습니다. 페르시아군은 뒤에 있는 함대로 후퇴해서 38km 정도 떨어진 아테네로 상륙을 노렸지만 이미 방비를 끝낸 아테네군을 보며 페르시아군은 후퇴했습니다.

  2.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의 시작

  몇 년 뒤 다리우스 1세는 세상을 떠나고,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새로운 샤한샤가 되었습니다. 기원전 480년, 크세르크세스 1세는 다르다넬즈 해협에 부교를 놓아서 육군의 통로를 만들었고, 지난 원정에서 페르시아 해군이 풍랑에 직면했던 곳에 운하를 뚫어서 배가 더 원활하게 지나갈 수 있도록 치밀한 원정 계획을 세웠습니다. 페르시아군은 최소 10만명이 넘는 병력과 600척~1200척의 함대를 이끌고 공격했습니다. 아테네는 육지에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리스티데스를 쫓아내고 함대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에 대항하자는 테미스토클레스의 의견을 받아들였습니다.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함선의 대부분은 ‘트라이림(Trireme)’이라는 3단 노선이었습니다. 3단 노선은 말그대로 노잡이들이 3단으로 앉은 함선을 뜻합니다. 가장 위에 있는 노잡이가 가장 긴 노를 저어야 했습니다. 이 함선은 폭이 5.5m, 길이는 36m~39m 정도였고, 200명의 선원이 탈 수 있었습니다. 뱃머리 끝에 충각이 있어서 충돌을 통해 적군의 함선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페르시아 해군의 주력도 트라이림이었지만, 일부 병력은 크기가 작고 쾌속선인 ‘바이림(Bireme)’이라는 2단 노선을 통해 전장에 투입했습니다. 바이림의 목표는 보병들을 빠르게 적선에 침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페르시아-그리스 해전의 핵심이었던 트라이림
 지도 중간에 있는 '아르테미시움'이 전쟁 초기에 해전이 벌어진 곳입니다.

 

   육군과 수군이 한꺼번에 진군해오는 페르시아군에 맞서서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은 아르테미시움이라는 항구에 함선을 집중시켰습니다. 기원전 480년 8월 셋째 주, 아르테미시움 항구에 모인 아테네, 코린트, 메가라, 칼키스 등의 도시국가들의 연합 해군은 371척에 달했습니다. 반면 북동쪽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는 페르시아의 해군은 1,207척이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 트라이림의 항로 앞에 폭풍이 나타나 대략 200척이 침몰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르테미시움에서 그리스 해군과 페르시아 해군 사이의 해전이 벌어졌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선제공격을 선택했습니다. 앞선 그리스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의 횡대 중 느슨한 곳을 노렸습니다. 그들의 함선 측면을 충각으로 부딪히고 빠르게 뒤로 빠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트라이림의 핵심인 충각입니다. 뱃머리 아래에 돌출되어서 적선에 충돌시켜 침돌시킬 수 있었습니다.

 

  몇 차례의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충분한 전공을 올렸습니다. 첫 전투에서 페르시아 함선 30척을 나포하는 승리를 거두는 등 지속적인 손실을 입혔고, 또다시 폭풍우가 페르시아 함선 200여 척을 좌초시켰습니다. 하지만 전투 마지막 날에는 페르시아군도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았고, 그리스 연합군도 아테네에서 온 함선의 절반을 상실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영문위키에서는 3일 간의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100척을, 페르시아군은 400척의 함대를 잃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양쪽 함대는 재정비 상태로 들어가 시신을 수습하고 난파된 함선 중 쓸만한 게 있는지 돌아봤습니다.

 

  한편, 멀리 지상에서는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지휘하는 그리스 연합군이 테르모필레에서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대군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스군은 좁은 계곡에서 적은 병력으로도 목숨을 걸고 저항했습니다. 테르모필레 전투도 아르테미시움 해전처럼 3일 전투로 끝났는데, 둘째 날까지는 그리스군이 압도적인 전투교환비를 거두었지만, 크세르크세스는 에피알테스로부터 산길에 협로가 있다는 정보를 듣자마자 페르시아군의 병력을 나누어 우회시켰습니다. 셋째 날 그리스군은 일방적으로 포위되었고, 결국 레오니다스 왕은 전사했습니다.

 

영화 <300>에도 묘사되었던 테르모필레 전투, 빨간색이 페르시아군인데 우회해서 파란색 그리스군의 뒤를 공격해서 승리했습니다.

  그리스 수군은 테르모필레에서의 패전 소식을 듣고 바로 아르테미시움을 떠났습니다. 페르시아 대군이 아테네까지 일사천리로 내려올 것은 뻔했고, 아테네보다도 북쪽에 있는 아르테미시움을 방어할 수는 없었습니다. 테베는 진즉에 페르시아의 편에 섰습니다. 9월 초 아테네인들은 아테네를 소개(疏開)했고 페르시아군은 텅 빈 아테네에 입성했습니다. 살라미스 섬은 아테네에서 피난 온 사람들로 북적였고, 그리스 지휘관들은 어디에서 일전을 벌일지 논의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회의에서 코린토스 지협을 지키자는 다른 지휘관들의 의견을 결사적으로 반대했고, 공간이 넓은 코린토스보다 좁은 해협이 있는 살라미스에서 싸워야 한다고 간신히 설득했습니다.

 

  그는 동시에 시킨노스라는 첩자를 적군에게 보내서 페르시아에 복종하겠다는 거짓 항복을 알렸습니다. 또한 그리스 연합군은 서로 분열되어있고 일부는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실제로도 그리스 쪽 지휘관들은 소속이 달라서 뜻이 쉽게 맞지 않았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대왕 회의에서 살라미스 해협으로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살라미스 해전 지도
책 <살라미스 해전>에 그려진 해전 지도

 

  3. 전황이 뒤바뀐 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480년 9월, 살라미스 해협에 남은 함선을 모두 모은 그리스 해군은 370여척이었지만, 페르시아 해군은 적게 잡아도 700척이 넘었습니다. 심지어 그 이외의 페르시아 함대 200척이 살라미스 섬 서쪽의 퇴로를 차단했습니다. 해전이 벌어지고 그리스 함대 40척이 뒤로 후퇴했습니다. 후퇴하는 그리스 해군을 타격하려고 페르시아 해군은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습니다. 비좁은 해협에 페르시아 편으로 참전한 페니키아인의 해군 부대, 이오니아인의 해군 부대 등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그 순간,

 

 

  바람이 강하게 불고 높은 파도가 살라미스 해협을 뒤덮었습니다. 페르시아 함선들은 크게 흔들렸고 서로 부딪혔죠. 테미스토클레스는 즉시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스 함선은 페르시아 함선에 가까워질 때 젓던 노를 위로 들어 올렸습니다. 그 뒤 뱃머리로 페르시아 함선의 노를 집중적으로 파괴하고 충각으로 파괴시키는 방식을 썼습니다. 페르시아 함대는 구조가 높아서 그리스 파도보다 상대적으로 더욱 크게 흔들렸고, 잘 훈련된 그리스 해군은 함대를 더 빠르게 진격시켰습니다. 전투가 지속되고, 좁은 해협에서 양군의 함대가 콩나물시루처럼 서로 오도 가도 못하자 양군은 직접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4. 전투 결과 및 전쟁의 종결과 의의

  전투는 하루종일 지속되었고, 날이 저물자 그리스 해군의 피해량이 40척인데 반해 페르시아 해군은 200척이었습니다. 특히 페르시아 정예 해군인 페니키아인들의 함선이 거의 전멸했습니다. 크세르크세스는 패배하는 전황을 지켜보면서 분노했지만, 퇴각로를 아테네 해군이 끊을 것을 우려해서 원정을 포기했습니다. 부하 마르도니우스에게 그리스의 점령지를 맡겼고, 자신은 페르시아로 돌아갔습니다. 이듬해 그리스 연합군은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마르도니우스를 죽이고, 미칼레 전투의 연승으로 페르시아를 그리스 땅에서 완전히 몰아냈습니다.

 

장기간 지속되었던 페르시아-그리스 전쟁

 

  이 전쟁의 패배로 페르시아는 에게해 일대에 다시는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내부의 정치적 혼란으로 페르시아는 재차 공세를 펼치지 못했고, 그리스 연합군은 에게해에 델로스 해상 동맹을 결성하여 섬을 점령하는 등 동쪽으로 세력을 뻗어 나갔습니다. 물론 페르시아 제국의 국력이 세계 최강 제국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고,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페르시아-그리스 전쟁은 역사를 크게 바꿨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중동 제국이 서양 세력을 복속시켰을 수도 있는 전쟁에서 그리스는 오히려 승전했고, 국력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패전이 짙어진 상황에서 대승을 거둔 살라미스 전쟁은 간혹 역대 4대 해전이라고 불릴 만큼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은 『역사철학』이라는 저서에서 살라미스 해전의 역사적 의의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역사상 정신의 힘이 물질의 양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이 이렇게 명백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다." 그만큼 그리스 사령관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의 역량(속임수와 지형 선택 등)이 빛났던 전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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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MLB 관련] 김형준의 <메이저리그 레전드>와 배우근의 <메이저리그 나를 위한 지식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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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640834

 

메이저리그 레전드

메이저리그 전설, 그 ‘레전드 스토리’를 만난다!미국 프로야구 140년 전설이 된 야구인 이야기『메이저리그 레전드』. 이 책은 저자가 네이버 스포츠에서 연재했던 '레전드 스토리'를 단행본

book.naver.com

 

 

  필자는 고등학교 3학년 수능이 끝나고 난 뒤부터 메이저리그에 입문했습니다. 우리나라 프로스포츠로서는 야구가 가장 인기 많고 생활 스포츠로서도 야구가 활성화되어 있어 메이저리그 자료들을 접하기 쉬웠습니다. 메이저리그 다큐들이나 역사들을 찾아봤고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2011년에 출판된 김형준 기자의 <메이저리그 레전드>였네요. 타이콥, 베이브 루스, 테드 윌리엄스, 윌리 메이스 같은 선수들의 기록이 그 책에 잘 나와 있었습니다. 출루율이나 장타율, 방어율의 계산법을 알고 난 후라, 메이저리그 레전드들의 타율, 출루율, 장타율, 안타, 홈런 등의 기록도 나와 있어서 얼마나 대단한 레전드인지 한 순간에 체감이 되었습니다.

 

  레전드들 개개인의 이야기도 알 수 있어서 좋았고요. 1차 대전 참전으로 부상을 입어서 커리어에 큰 손해를 본 피트 알렉산더, 월드 시리즈 최다 우승자 요기 베라, 자선 활동을 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로베르토 클레멘테, 유격수로서 궁극의 수비를 보여준 아지 스미스, 욕심 많은 구단주 때문에 최상의 실력으로도 25세에 메이저리그에 입성한 레프티 그로브, 팔꿈치 부상으로 최고의 전성기에서 화려하게 은퇴한 샌디 쿠팩스 등 책을 읽는 데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최근 선수였던 그레그 매덕스와 랜디 존슨의 이야기도 흥미로웠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노모 히데오와 박찬호의 스토리도 빼놓을 수 없고요.

 

  <메이저리그 나를 위한 지식 플러스>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메이저리그를 다루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레전드>가 역대 74명의 레전드들의 이야기를 중점으로 메이저리그 역사를 드러냈다면, 이 책은 30개 팀이 창단된 과정 등 팀의 역사, 각종 대기록의 보유자들, 사이클링 히트나 퍼펙트 게임 등에 관한 이야기, 선수로서 최고의 옥좌인 명예의 전당의 설명, 세이버매트릭스와 샐러리캡, 투수 마운드의 높이 변화 등 다각도로 메이저리그를 다루고 있습니다. 양키스와 레드삭스의 라이벌 구도, 자이언츠와 다저스의 라이벌 구도도 조명하고 있고요.

 

  2017년에 나온 책이라 비교적 최근 사건인 시카고 컵스의 우승도 다루었고요. 다만 명예의 전당에 대해 만장일치 입성은 힘들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마리아노 리베라가 만장일치로 들어가기 전에 나온 책이라는 걸 감안하면 흥미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박찬호, 구로다, 이치로, 추신수 등 아시아 메이저리거들에 대한 분량이 꽤 되었습니다. 비단 선수 이외에도 빌 제임스와 스캇 보라스, 토니 라루사 등 명감독들처럼 과거부터 지금까지 메이저리그계에 영향을 끼치는 인물들을 주제로 한 문단도 많았습니다.

 

  필자는 독서나 스포츠를 모두 좋아해서 스포츠에 많은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주인공인 책에 관심이 많은 편입니다. 축구에서도 리오넬 메시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주인공으로 다룬 책들도 읽었고, 스포츠 규칙에 관한 책들도 관심이 많습니다. 앞으로도 유익한 스포츠 서적을 많이 접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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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사] 홍무제 주원장의 일생일대의 승리, 파양호 대전(13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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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수성가의 표본, 주원장

 

  중국 역사에서는 통일된 제국이 멸망할 때 여러 나라로 분열되거나 군웅들이 난립했습니다. 주나라가 멸망하고 춘추전국 시대가 열렸고, 진나라가 멸망한 다음 초나라와 한나라의 다툼이, 한나라가 멸망하고 삼국지 시대가, 서진이 멸망한 뒤 오호십육국 시대가 열렸죠. 수나라 -> 당나라, 원나라 -> 명나라로 통일 왕조가 바뀌는 과정에서도 군웅들이 패권 다툼을 했습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망하고 중화민국이 대체했지만 수많은 군벌들이 중국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이번에는 원나라 말기 군웅들이 난립했을 때 벌어진 전투를 다루고자 합니다. 곽자흥이라는 홍건적의 지도자가 반란을 일으켰고, 훗날 명나라의 태조가 되는 주원장은 그의 밑으로 들어갑니다. 주원장이 그의 밑에 처음 있을 때는 한낱 병사였는데 나중에 차츰차츰 올라가서 반란군의 2인자가 되죠. 곽자흥 역시 주원장의 능력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양녀를 그와 결혼시켰습니다. 1355년 곽자흥이 죽고 주원장이 우두머리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2. 날로 번영하는 주원장에 대립하는 경쟁자들

 

지도 속의 'Zhu Yuanzhang'이 주원장의 세력이었고, 서쪽과 북쪽에 진우량과 장사성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네모로 표시한 곳 안에 위치한 호수가 파양호입니다.

 

  지도자가 된 주원장에게는 중국 통일을 위해 진우량, 장사성, 그리고 원나라와 같은 격파해야 할 적이 많았습니다. 우선 그는 장강 이남으로 세력을 넓혀 나갔습니다. 1356년 그는 난징 점령을 통해 비옥하고 넓은 땅을 얻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며 믿심을 얻었고 유능한 학자들을 모아서 때를 기다렸습니다. 주원장의 밑에는 서달 같은 유능한 장수가 있어서 장사성을 격퇴하는 등 군사적인 힘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원나라 말기의 강력한 군벌로 자리잡았습니다.

 

  최대의 적수는 서쪽의 진우량이었습니다. 이미 진우량은 주원장보다도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진우량과 싸우기 전 주원장 휘하의 장수들 사이에서 투항할 것을 주장하거나 소극적으로 나가자고 주장하는 의견도 나왔죠. 하지만 주원장은 물러서지 않았으며 몇 년 동안의 전투에서 열세의 전력에도 상대를 괴롭혔습니다. 1363년 봄, 진우량은 기록 상으로 60만 대군을 이끌고 파양호 호수 근처에 있는 홍도(지금의 장시성에 위치)를 포위한 뒤, 임강과 무위주를 점령했습니다. 장강을 통해 어마어마한 수군을 이끌고 나타났는데, 산만한 배를 수백 척이나 동원했습니다. 이번에 주원장을 끝장내지 못하면 자신이 끝난다는 결의였는지 자신의 나라를 비운 상태로 가족과 문무백관까지 배에 태웠다고 합니다. 그 배는 최소 2천 명, 최대 3천 명의 병사를 실을 수 있는 높이가 십여 장(약 30m)인 배로 말이 배의 난간을 돌며 충분히 전력으로 달릴 수 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파양호를 확대해보면 호수의 지도가 이렇게 됩니다.

 

 

  진우량은 강에 붙어 있는 홍도를 수륙 양용으로 석 달 가까이 포위했으나 주문정이라는 장수는 능히 방어했고, 주원장의 20만 대군이 도착하자 어쩔 수 없이 홍도의 포위를 풀고 주원장의 대군으로 향했습니다. 파양호라는 호수는 엄청나게 넓어서 천문학적인 숫자의 배가 싸우는 게 가능했습니다. 물이 가득 차는 시기의 호수의 면적은 서울시의 82배나 된다고 합니다.

 

  우선 주원장은 복병을 동원해서 진우량의 대군이 오기 전 파양호에서 서쪽의 장강으로 통하는 길을 막았습니다. 적의 보급에 차질을 주겠다는 의도였습니다. 함선의 높이와 병력은 진우량이 압도적이었으나 홍도의 공성에서 실패해서 그의 병력은 피로가 쌓여있었죠. 진우량의 함선은 수십 척의 큰 배를 쇠사슬로 묶어놓아서 풍랑에도 끄떡없었습니다. 반면 주원장의 함선은 어선이나 상선 형태의 작은 배가 많았지만 속도나 이동방향을 변화시키는 전법에 있어서는 우위였습니다. 후방으로부터의 보급이 원활해서 그의 병사들은 넉넉한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파양호 대전의 방향을 그린 지도입니다.

 

  3. 파양호 대전(鄱陽湖之戰, battle of Lake Poyang - 1363년)

 

  해전은 7월 20일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양군은 강랑산에서 작은 교전을 벌였습니다. 다음 날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고 서달과 상우춘은 앞장서서 수천 명의 적군을 죽이고 배를 탈취하는 등 용감하게 맞섰습니다. 주원장의 전술은 강력한 화기를 사용해서 적의 함선을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화포, 화전, 화총, 화질려, 철포, 신기전 등 다양한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주원장은 진우량과 한창 싸우는 도중 동쪽의 장사성이 뒤를 노릴 것을 우려해서 서달을 난징으로 보냈고 남은 장수들과 어떻게 싸워야 할지 회의를 했습니다.

 

  7월 22일 아침, 진우량은 총공세를 퍼부었고 주원장은 전선에서 장병들이 잘 싸울 수 있도록 격려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이 작은 배였던 주원장의 배는 난관에 부딪혔고, 압도적인 높이를 점하던 진우량이 승리의 깃발을 잡는 듯 했습니다. 주원장이 지휘하는 배가 적의 포격에 좌초되기 직전에 이르자 그는 다른 배로 이동해서 가까스로 포로 신세가 되는 걸 피했습니다.

 

  그러나 오전 11시, 바람의 방향이 동북풍으로 바뀌었습니다. 주원장은 산더미같은 화약과 갈대를 실은 배 일곱 척을 보내서 진우량의 함대를 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의 결사대는 배에 불을 붙힌 다음 적들을 덮쳐서 적의 함대와 동귀어진했습니다. 강력한 풍랑으로 불길은 더욱 넓게 타올랐습니다. 쇠사슬에 묶인 진우량의 함대는 일방적 손해를 보는 전투교환비를 입었고 전세는 완벽하게 뒤집혔습니다. 파양호 호수에는 화염과 연기가 가득했고 죽은 진우량의 장병들로 물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화공이 성공하자 주원장의 본대는 총공격을 가했습니다. 작은 배들은 침몰한 함선의 잔해 사이를 기민하게 돌파하며 셀 수 없을 만큼 적들을 몰살시켰습니다. 

 

 

 

 

  이 싸움에서 진우량의 동생도 전사하고 장병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퇴로마저 막혀서 수로로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그의 우금오장군은 배를 불태우고 육지에 상륙해서 후퇴해야한다고 주장했고, 좌금오장군은 적들이 뒤쫓으면 방도가 없으니 계속 싸워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우량은 전자의 의견을 들어주었지만 좌금오장군과 우금오장군은 차례로 주원장에게 투항했습니다. 부하들을 잃은 진우량에게 주원장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나는 공과의 약속을 따르고자 하여 각자 일방(一方)을 편안케 하며 천명을 기다렸소. 공이 실계(失計)하고 방자하여 그 독이 나에게까지 미쳤소. 나는 군대를 가벼이 해 그 틈을 빠져나왔으나, 문득 공은 용흥(龍興) 11군을 차지하였으면서도, 오히여 스스로 후회하여 뉘우치지 않고, 또다시 병화(兵禍)의 단서를 만들었소. 한번에 홍도(洪都)에서 곤궁해졌고, 두번째는 강랑산에서 패하였으니, 골육과 장사(將士)들은 거듭 도탄에 빠졌소. 공은 다행히 살아 돌아갔으니, 또한 의당 황제의 호칭을 버리고, 진정한 주인을 앉아 기다려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가속을 잃고 일족이 멸할 것이니, (그때는) 후회해도 늦소."

 

  화가 난 진우량은 포로들을 죽이면서 울분을 토했지만 주원장은 포로들을 잘 대해주었고, 전사한 장병들의 가족들을 위로했습니다.

 

  큰 전투 없이 한 달 넘게 대치가 이어졌습니다. 8월 26일, 진우량이 가진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고 그는 마지막 저항으로 백 척의 함선으로 장강을 뚫음으로써 무창 방면으로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호수는 따뜻한 햇볕으로 수위가 낮아져 있었으며 거대한 함선이 습기를 지나치게 흡수해서 더욱 무거워졌습니다. 반면 주원장은 그 사이 호수 어귀에 보병을 두면서 포위망을 더욱 정교하게 짰습니다. 진우량은 혼신의 힘으로 포위망을 돌파하려고 했지만 이미 전세는 기울었습니다. 그는 화살에 눈과 머리가 관통당하고 즉사했습니다. 첫째 아들인 진선아는 프로로 잡혔으며 장정변이라는 진우량 휘하 장수가 둘째 아들 진리와 진우량의 시신을 가지고 겨우 도망쳤습니다. 주원장은 7천 명의 장병을 잃었지만 진우량은 수만 명의 장병이 전사하고 남은 대부분의 장병이 흩어졌으며, 본인까지 전사했습니다.

 

  4. 파양호 대전 이후와 평가

 

  1364년 주원장은 무창으로 원정군을 이끌었습니다. 큰 교전 없이 진우량의 뒤를 이은 진리의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진리가 주원장 앞에서 바닥을 기어가며 벌벌 떨면서 항복하자, 직접 부축한 뒤 두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너를 벌하지 않겠다는 말로 진리를 안심시켰습니다. 진우량의 아버지와 형들에게 작위까지 내렸죠. 부하들이 죽여야 한다고 계속 요청하고 진리가 스스로를 한탄하자 주원장은 진우량의 부하였던 자들이 진리를 부추길까 걱정해서 그를 고려로 보냈습니다. 공민왕에게 비단과 함께 진리를 잘 부탁한다는 서신까지 전했습니다.

 

  홍무제는 파양호 해전의 승리로 장강 이남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같은 해 주원장은 스스로를 오왕이라고 칭했습닏. 1367년에는 장사성을 죽이고 중국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듬해 봄에 주원장은 황제의 재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 홍무제입니다. 홍무제는 서달과 상우춘에게 25만 대군을 주어서 원나라를 철저하게 끝장낼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몇 달 뒤 북경을 점령했습니다. 서달은 북원의 장수 코케 테무르와 치열한 승부를 거듭하면서 북원을 몽골고원으로 쫓아냈습니다.

 

  파양호 대전은 근대 이전 최대 규모의 해전 중 하나로, 기록이 과장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중국사를 넘어 세계사에도 찾기 힘들 만큼 엄청난 병력이 동원된 해전이었습니다. 파양호 대전의 승리로 주원장의 앞에 황제와 통일의 지름길이 깔렸습니다. 이 거대한 전투는 민첩함이 힘을 이긴 경우이며 기회를 잡는 자가 역사의 승리자가 된다는 걸 입증했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도서 <주원장전>

 

네이버 지식백과 '파양호대전'(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955764&cid=62060&categoryId=62060 )

 

영문위키 'Battle of Lake Poyang'(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Lake_Poyang )

 

Brad's Battle Maps of the World의 New: Battle of Lake Poyang 자료( https://bradnbarrett.wixsite.com/bradsbattlemaps/post/new-battle-of-lake-poyang )

 

서울경제 기사( https://www.sedaily.com/NewsVIew/1L2K8VT9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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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혈 캠페인 당첨 후기]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 <그린스토어와 함께하는 사랑나눔 캠페인> 이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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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odinfo.net/event_history.do?action=detail&eventno=159133&search_option=&search_keyword=¤t_pagenum=1&postscript_current_pagenum=1

 

소식 이벤트>이벤트>지난 이벤트/캠페인-상세보기(그린스토어와 함께하는 사랑나눔 캠페인) | 대

 

bloodinfo.net

 

  적지 않게 오래된 이야기입니디만, 2020년 8월~9월에 개최되었던 '그린스토어와 함께하는 사랑나눔 캠페인'에 당첨된 적이 있어서 후기를 작성합니다. 혈액관리본부 홈페이지를 통해 캠페인에 당첨되었다는 정보를 얼마 전 확인했습니다. 당첨 제품이 언제 올까 궁금했었는데 주말이라 집에서 휴식하는 도중 오후에 택배로 온다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자세히 확인해보니 캡슐 제품이었습니다. 품명은 '향균-면역엔 프로폴리스 플러스 아연'이었고 프로폴리스 추출물, 아연 함유 제품이며 츄어블 캡슐이며 건강기능식품입니다. (주)그린스토어의 제품이며 1일 1회, 2캡슐을 섭취하는 게 적당량입니다. 양도 넉넉하고, 정말로 헌혈자로서 든든한 제품입니다.

 

 

   품질과 상표와 디자인 모두 훌륭한 제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중한 물품이니 잘 보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관 방법은 직사광선을 피해서 서늘한 곳에 두면 됩니다. 헌혈자로서 좋은 건강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기뻤습니다.

 

   혈액관리본부 홈페이지로 말미암아 가끔씩 캠페인이나 이벤트에 당첨되고, 헌혈자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이 듭니다. 앞으로도 헌혈을 꾸준히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더욱 굳게 다졌습니다. 혈액관리본부와 (주)그린스토어 관계자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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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 이문안호수공원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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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리시청 앞에 있는 이문안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며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아차산에 등산을 갔다가 하산한 뒤 입구를 중심으로 구리시청 방면으로 걸어가면 맞은 편에 이문안호수공원이 보입니다. 제가 갔을 때는 날씨가 춥고 눈이 내려서 호수가 꽁꽁 얼어 있었습니다.

 

  양 옆에 CU편의점과 주유소도보였고, 운동기구나 벤치는 공원 곳곳에 있었습니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쉼터도 많았고 호수 주위로 울타리가 쳐져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공원 한 바퀴를 가볍게 도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공원을 안내하는 표지판도 곳곳에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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