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워크래프트3 장재호 선수가 WCG 2020에서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은메달을 획득했다는 소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개인전에서는 아쉽게 은메달에 그쳤지만 단체전 금메달로 장재호도 WCG 금메달의 커리어를 손에 넣었습니다.
사실 WCG라는 대회는 스타1에서 양대리그보다 많이 떨어지는 대회(게임큐, 겜tv, 프리미어리그, 곰tv클래식처럼)로 취급되었고, 스타2나 LOL에서도 정종현, 김민철, CJ Blaze가 금메달을 차지했으나 팬들은 잘 기억하지 않고 있죠. 이제동이나 이영호가 WCG 우승을 차지해도 스타리그와 MSL 우승을 훨씬 더 기억합니다. 하지만 워크래프트3에서는 WCG가 주요 메이저 대회 중 하나였습니다. 초창기를 제외하고 한국에서만 인기있어서 스타리그와 MSL이 더 큰 대회 취급받았던 스타1과 달리 워크3에서는 세계적인 유명 게이머들이 WCG에서 금메달을 놓고 경쟁했었습니다. 비슷한 사례로 스타1에서 IEF는 소수 게이머들이 초청되는 대회라(택신 김택용의 쏠쏠한 상금 리그...) 메이저 대회로 쳐주지 않았지만 워크3에서는 역시 중요한 대회였죠.
장재호 선수도 WCG 금메달을 강력하게 원했고, WCG 2013 워크래프트3 결승에서 후앙시앙(아이디: TH000)에게 아쉽게 패배한 뒤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당시 WCG가 2013년을 끝으로 폐지되었다고 확정되어서 장재호 선수가 더욱 안타까워한 것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WCG는 그렇게 폐지되었다가 부활해서 2019년과 2020년에 다시 개최되었습니다.
워크래프트3는 중국에서 국민 고전 게임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스타크래프트1이 있다면 중국에서는 워크래프트3가 있는 셈이죠. 2002년에 출시되고 확장팩 '프로즌 쓰론'은 2003년에 출시된 게임입니다. 출시되고 세계적으로도 인기를 끌었고 특히 중국에서 열기는 대단했습니다. 중국에서의 리샤오펑(ID: Sky)의 위상은 우리나라에서의 임요환에 비슷한 위상이고요.
하지만 게임이라는 특성상 인기가 영원하지는 못했습니다. 2010년대 와서 워크래프트3 대회가 많이 사라지죠. 물론 지금도 명맥이 유지되고 있습니다만 세계적인 인기가 있던 시절과는 달리 중국과 한국 게이머들의 게임입니다. 물론 중국 게이머들이 확연히 많고요.
저는 아직도 WCG 2013 결승이 잊히지 않습니다. 3판 2선승제 결승에서 1경기를 잡아내고도 2경기, 3경기를 너무나 아쉽게 패배했죠. 실시간으로 보면서 저도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WCG가 다시 열렸지만 장재호 선수는 아쉽게 2019년에는 동메달, 2020년에는 은메달을 걸었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프로게이머들 가운데 페이커를 제외하면 장재호 선수가 가장 위대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스타1에서도 임요환, 이윤열, 최연성, 이제동, 이영호가 대단했지만 장재호 선수와 비교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 위의 워크래프트3 상금 순위에서도 볼 수 있을 만큼 역대 최강의 워크래프트3 게이머이고, 2003년부터 활동해 지금까지도 꾸준히 대회에 나간다는 게 어떠한 수식어도 부족할 만큼 위대하고 경이롭습니다.
여담이지만 예전에 장재호 선수에게서 사인을 받은 적이 있어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친절하게 사인해주셔서 기억에 남고요.
수많은 대회를 지배하고 세계 e스포츠 역사에도 남은 30대 중반의 위대한 선수가, 여전히 현역에서 활동하면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위대함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활동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포디움(1위~3위)에 들만한 커리어와 경기력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은 그 위대함을 배로 만들고요.
장재호 선수가 건강한 모습으로 계속 활동하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WCG가 2021년에도 열려서 장재호 선수가 개인전에도 금메달을 목에 거는 모습을 꼭 보고 싶네요.
양현종 선수가 메이저리그 무대에 도전하네요. 텍사스 레인저스의 스프링캠프에 스플릿 계약으로 초청받았습니다. 레인저스의 메이저리그 40인 팀 로스터에 포함되지는 않아서 메이저리그 무대를 보장받는 것은 아닙니다. 레인저스의 스프링캠프에는 확정된 40인 로스터와 초청선수 31인이 참가하는데, 시범경기에서 양현종 선수가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메이저리그가 본격적으로 개막할 때 엔트리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마이너리그에서 시작하고요. 만약 메이저리그로 승격되면 130만 달러의 연봉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양현종 선수의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며 메이저리그가 개막할 때 로스터에 포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130만 달러 계약은 메이저리그에 풀타임을 소화할 때 받아서 한국에 있을 때보다 조건이 더욱 험난하네요. 코로나 위험도 커서 더욱 어려운 길이지만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번 시즌 NPB 닛폰햄의 투수였고 이미 레인저스에 입단한 아리하라 코헤이는 메이저리그 명단에 확정되었는데 레인저스 선발진에서 얼마나 잘할지 궁금하네요. 개인적으로 메이저리그에 성공하는 아시아 투수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편입니다. 아무튼 메이저리그에 도전하는 KBO 선수들이 계속 나와서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좀 오래된 이야기입니다만 다나카 마사히로가 NPB 라쿠텐 골든이글스에 복귀했네요. 2013시즌 라쿠텐을 우승으로 이끌고 8시즌 만의 귀환입니다. 계약 규모에 비하면 이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메이저리그에서 훌륭한 커리어를 쌓고 양키스와 계약한 7년의 기간을 다 채우고 귀환하네요. 다나카는 내년에 다시 메이저리그 도전을 시도한다고 밝혔는데 힘들어 보이지만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건 지난 ASL 이후 오랜만에 쓰는 아프리카tv 스타판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tv 스타1 팀리그 시즌2가 플레이오프만 남았네요. 현재 아프리카tv에서 활동 중인 스타1 전 프로들이 5명씩 뭉쳐서 6개의 팀을 만들어 팀 대결을 벌이는 대회입니다. 6개 팀 중 상위 4개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3위와 4위 팀부터 시작하는 계단식 플레이오프를 벌이면서 우승 팀을 가립니다. 리그에서 1위를 한 팀은 결승에 진출하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최근에 아프리카tv 스타판에 흥미가 많이 떨어지고 리그 결과를 지금 확인했습니다. 이영호가 에이스인 팀은 1위가 되고 김명운이 에이스인 팀은 2위로 끝났네요. 3위 팀에서는 김택용과 임홍규가, 4위 팀에서는 김윤중의 성적이 가장 좋네요.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4개 팀의 게이머 중 가장 성적이 좋은 3명은 이렇게 됩니다.
1위 팀: 이영호 5승 1패 / 김성대 4승 1패 / 김민철 3승 2패
2위 팀: 김명운 6승 1패 / 한두열 3승 2패 / 유영진 2승 3패
3위 팀: 임홍규 4승 1패 / 김택용 4승 3패 / 유진우 1승 1패
4위 팀: 김윤중 3승 1패 / 도재욱 2승 3패 / 장윤철 2승 3패
정규 풀리그는 5전 3선승제로 치렀는데 포스트시즌은 7전 4선승제로 치르네요. 한 팀에서 3명이 2경기씩 치를 수 있는 포스트시즌이라 팀 내 1옵션, 2옵션, 3옵션 게이머들의 역할이 막중합니다. 포스트시즌 일정은 준플레이오프가 02월 18일 목요일 오후 7시, 플레이오프가 2월 21일 일요일 오후 7시, 결승전이 2월 28일 일요일 오후 7시로 끝나게 됩니다. 우승한 팀에게는 상금 1,000만원이 주어집니다.
마지막으로 해외축구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네이마르가 또 다시 4주 부상을 입어서 이번 챔피언스리그 16강 출전이 힘들어졌습니다. 우선 1차전은 결장이 확정되었고, 2차전까지 결장할 가능성이 거의 유력합니다. 무슨 상위 팀들 간의 리그 경기도 아니고 고작 컵대회(쿠프 드 프랑스) 64강에 핵심 선수를 출전시켜서 부상을 입게 만든 포체티노가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
네이마르 팬은 아니지만 참 씁쓸하네요. 작년 12월에 발목에 들어오는 태클 때문에 큰 부상을 입었는데 또 부상이라니 안타깝습니다. 네이마르 본인 책임도 없는 건 아닙니다만 들어오는 태클 수위 보면 리그 앙은 진짜 너무한 리그네요. 네이마르는 인스타에서 슬픔을 표시했고 상대 팀 감독의 조롱에 네이마르 아버지는 분노했네요,
개인 취향입니다만 호날두랑 메시가 전성기에서 많이 내려오고 축구계에 존재하는 얼마 안 되는 테그니션 선수인데 이렇게 부상을 당하니 축구에 대한 흥미가 떨어집니다. 네이마르 같은 선수가 없는 해외축구 경기를 보면 기계들끼리 경기하는 느낌이라 답답합니다. 네이마르도 적지 않는 나이인데 위상을 올리려면 하루빨리 챔피언스리그나 국가대표에서 업적을 쌓아야 하는데 커리어가 어떻게 풀릴지 모르겠네요. 아무리 실력이 좋다고 해도 중요한 순간에 경기를 못 뛰면 후대 위상에서 크게 평가 절하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작년 이슈를 뜨겁게 달구었던 전쟁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전쟁일 것입니다. 2020년 9월 27일부터 진행된 아르메니아(+아르차흐 공화국) vs 아제르바이잔 전쟁이 11월 10일자로 끝났습니다. 10월 10일에도 휴전협정을 맺었으나 5일 만에 협정이 깨졌고, 한 달 동안 전쟁이 다시 이어지다가 재차 협정을 맺었습니다. 전세가 아제르바이잔 쪽으로 기운 상태에서 협정이 체결되어서 아르메니아 군대가 이를 파기하기는 힘듭니다. 캅카스 지역에 위치한 이 두 나라 간의 전쟁이 다시 벌어지는 건 당분간 힘들 거라고 봅니다.
이 전쟁은 아제르바이잔 영토 남서쪽에 있는 '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미승인국이 주요 전장이었습니다. 1991년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아르차흐 공화국은 영토 분쟁 지역이었습니다. 북키프로스 공화국이 터키의 괴뢰정부가 있고 터키군이 점령하고 터키계가 대부분인 지역인 것처럼, 아르차흐 공화국도 사실상 아르메니아의 괴뢰정부가 있었고 아르메니아군이 주둔하고 아르메니아계가 주도하는 지역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이 전쟁에서 아르메니아와 함께 싸웠습니다.
결론을 재차 말씀드리자면 이 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완승입니다. 지도에서 보시면 각 도시들 가운데 이름이 밑줄로 쳐진 스테파나케르트(Stepanakert)가 아르차흐 공화국의 수도인데, 수도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슈샤(shushi)라는 제 2의 도시가 아제르바이잔에게 점령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산맥이 많아 아제르바이잔군이 다가가기 힘들었는데도 공방전 끝에 점령한 것입니다. 슈샤 산맥을 아제르바이잔이 장악한 것은 스테파나케르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요충지를 점령했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이 지속되었다면 아르메니아는 더더욱 불리한 상황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2.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1988-1994)과 아르차흐 공화국
1980년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자치를 보장받고 있었습니다. 산맥 지대인 나고르노카라바흐에는 아르메니아인들이 다수인 자치주였습니다. 1988년 2월,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민병대를 조직하면서 아제르바이잔과 대립했습니다. 그 뒤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각각 자국에 살던 아르메니아계와 아제르바이잔계 사람을 추방시키는 등 대립했습니다.소련 해체 후 그들은 완전히 독립했습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병력의 열세에도 캅카스 지역에 남아 있던 소련 부대들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988년부터 1991년까지는 분쟁 초기 기간이었는데, 고립된 아르메니아군은 소련 공군의 헬기를 통해 서쪽의 아르메니아 본토에서 무기를 지원받았습니다.
소련이 해체되고, 전쟁은 본격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옛 소련군 장교들의 상당수는 용병으로 고용되었습니다. 양국은 러시아로 떠나면서 남겨진 헬리콥터와 항공기 등 소련군의 장비를 확보하는데 혈안이었고, 소련군 고위 장교들에게 돈을 주고 무기를 구입했습니다. 1991년 9월 2일,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자치주 지도자들은 아제르바이잔으로부터 독립하겠다고 전격적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들은 아르메니아에 합병되겠다고 말했습니다.
1992년 2월, 아르메니아인들은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아르메니아 국경을 연결할 수 있는 통로를 개척했습니다. 대대적인 공세는 성공했으며, '라츤 회랑(Lachin Corridor)' 이라는 도로 연결망을 확보했습니다. 러시아가 고립된 곳에 보급품을 공급하기 위해 헬기를 보내주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나아졌습니다. 3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라츤 회랑을 절단하기 위한 공격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습니다. 러시아가 아르메니아를 지원한 이유 중 하나가 그루지아(조지아)와 체첸에 투입되어있는 러시아군의 후방을 안전하게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같은 해 아르메니아는 미국으로부터 100만 달러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미국에 이민을 간 아르메니아인들의 로비가 결정적이었습니다. 1993년 3월, 아르메니아군은 '켈바드야르(Kel’badjar)' 전투에서 아제르바이잔 육군 2군단을 포위 및 격파했습니다. 7월에는 아제르바이잔의 도시 아그담을 점령했고, 1994년 1월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을 기점으로 서쪽과 남쪽의 아제르바이잔 영토를 거의 빼앗았습니다. 1994년 5월 16일 전쟁이 끝났고, 아제르바이잔은 동원한 병력 4만2천명 ~ 5만6천명 중 2만5천명 ~ 3만명이 전사하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아르메니아에 비해 아제르바이잔은 고립되었습니다. 터키가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해주기는 했지만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적극적인 지원까지는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1991년 독립을 선언한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국제법상으로 인정받지 못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습니다. 7000 제곱킬로미터의 막대한 땅을 얻는 전과를 거두고, 그들은 2017년 2월의 국민투표를 거쳐'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국명을 바꿨습니다.
3. 다시 발발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 대한 감상
1994년의 휴전 이후에도 양국의 분쟁은 계속되었습니다. 2016년 충돌에도 양쪽이 합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만큼 분쟁지역이었습니다. 올해 전쟁이 터졌는데 애당초 아제르바이잔은 국력에서 아르메니아를 압도했습니다. 인구가아제르바이잔이 1000만이고 아르메니아가 300만으로 차이가 나고, GDP도 3배 이상 아제르바이잔이 앞섰습니다.
아제르바이잔군은 전쟁 초기부터 일방적으로 몰아붙였습니다. 남부 전선을 집중적으로 타격했죠. 하드루트(Hadrut)시와 주위의 마을들을 점령하고, 이란 국경에 가까이 있는 아라스 강을 따라 남쪽 영토를 계속해서 장악했으며, 슈샤 전투의 승리로 전쟁을 종결지었습니다. 아르메니아와 아르차흐 공화국도 유리한 산악 지형으로 방어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은 터키와 이스라엘으로부터 드론이라는 무인 공격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드론의 활용으로 산악 지대에 자리잡은 아르메니아군을 철저히 타격하면서 연전연승했습니다. 물론 아르메니아도 100대가 넘는 드론을 격추시켰으나 고지대에 자리잡은 포병이 점점 무력화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교훈은 외교라고 생각합니다. 국력 차이도 현격했는데 외교적으로도 아르메니아는 불리한 입장에 놓였습니다. 내륙국인 아르메니아가 항구를 조지아로부터 임차해서 사용했는데 전쟁이 터지고 조지아가 군수물자의 통과를 막았습니다. 아제르바이잔은 터키, 이스라엘까지 완벽하게 우호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북쪽에 있는 조지아는 아르메니아로 들어가는 군수물자를 끊어주고, 남쪽에 있는 터키는 전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원해주고 이스라엘은 무기를 공급했습니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이 바쿠 유전으로 대표되는 산유국이라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했습니다.
2018년 4월까지 아르메니아의 총리를 지냈던 세르지 샤르키샨은 철저하게 친러시아 행보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샤르키샨이 민주화 운동으로 권좌에서 물러나고, 이후 니콜 파시냔 총리는 어설프게 친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러시아의 심리를 거스르는 실책을 범했습니다. 서방 국가들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보여서 러시아도 아르메니아가 패배하는 것에 그러려니 하는 태도였죠. 아르메니아는 이렇게 상황이 불리하면 최소한 터키와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지 않은 이란을 비롯한 중동의 이슬람 국가들이라도 설득시켜야 했는데 괜히 몇몇 서방 국가들에게 기대하다가 일방적인 패전을 맞이한 것입니다. 프랑스 등이 아르메니아에 지지를 표시했다고 한들 현실적으로 그들은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중재하지 않았습니다. 유럽과 미국은 코로나 때문에 경제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최악의 나날을 보내고 있고, 특히 미국은 대선에 초점이 맞춰질 때라 아르메니아에 별로 관심이 없었죠. 그 밖에도 아르메니아는 우크라이나 내전(돈바스 전쟁) 시기에 동부 친러 반정부군을 지원하겠다고 의용군을 보내서 우크라이나와의 관계도 최악이 되었습니다.
이 전쟁의 종전 내용은 우선 양국의 군대가 더 이상의 개전을 중단하고, 아제르바이잔이 점령한 땅을 아르메니아가 인정하는 것입니다. 수도 스테파나케르트는 아흐차르 공화국에 남지만, 점령한 슈샤는 아제르바이잔의 몫이 되었습니다. 아그담, 라츤, 캘배제르는 가까운 시일에 아제르바이잔에 반환되지만, 아르메니아와 스테파나케르트를 잇는 라츤 회랑은 아제르바이잔 쪽에서 인정하고 통행을 보장시켜주는 것입니다. 라츤 회랑에 러시아 평화유지군이 5년 동안 주둔하고, 전쟁 포로와 전사자 시신은 서로 교환하는 조항도 있습니다. 사실상 아제르바이잔은 영토 상으로아흐차르 공화국을 포위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쟁은 많은 점을 시사하는 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비 병력에 비수를 꽂는 드론이 이 전쟁에서 끊임없이 사용되고 그 효과가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대전에서 드론의 위력이 더욱 커질 것이라 생각하며. 세계 각국이 드론 부대를 대대적으로 늘리지 않을까 하는 예감도 듭니다. 우리나라도 드론을 더욱 늘리고 개발하는 것으로 검토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전쟁에서 외교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인구와 경제력으로 대표되는 국력의 차이가 전쟁을 얼마나 좌지우지 하는지 한 번 더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특히나 현대전으로 올수록 국력의 중요도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를 오랜만에 가봤는데 제빵봉사활동 신청 항목이 많이 감소했네요. 특히 'KB나눔제빵소'라는 매월 이루어지는 봉사활동도 있었는데 그것도 작년 3월부터 중단되었습니다. 물론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안 되니 참가 인원에도 제한이 생길 수밖에 없죠. 실제로 제빵봉사활동에 20명~30명 이상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감염자가 한 명이라도 나오면 감당이 안 되니까요.
대학생 시절 저는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에서의 신청을 통해 수많은 제빵봉사활동을 했습니다. 처음에 헌혈자 대상으로 제빵봉사활동을 경험하게 해주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대한적십자사 홈페이지에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경기도,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곳곳을 돌아다니며 적십자사와 관련된 '빵 나눔터'나 여러 봉사관에 가서 빵을 만드는 일에 자원했습니다. 물론 그 빵은 어렵게 살아가시는 어르신들께 주로 전해집니다.
지금 저는 개인적인 스케줄로 헌혈을 제외하면 참여하는 정기적인 봉사활동이 없는 형편입니다. 특히 평일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에 시달리죠. 코로나 때문에 기존에 하고 있었던 일에서 쫓겨나고, 새로 찾은 일이라도 감지덕지 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신세입니다. 대학생 시절에는 어느정도 낭만이 있고 보람된 일을 찾으러 봉사활동에 나섰는데, 이제 그것도 못하게 되는 제가 한심해지기도 합니다. 한때나마 열심히 빵을 만드는 봉사활동으로 이루어진 아련한 추억이 있는 것이죠. 하물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최근에는 그 봉사활동이 정상적으로 진행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되새기고, 재차 확인하니 슬프네요.
모두가 힘든 이 현실이 언제쯤 나아질지 속상하기만 합니다. 무조건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한다는 게 익숙해지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터진 날짜도 오래되었다고 느낍니다. 백신 등을 통해 하루빨리 해결되고, 봉사활동이 원활하게 진행되면 좋겠네요. 저는 그저 꾸준히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과거가 그립고 다시 오지 않을 나날이라고 여깁니다...
결론부터 얘기하겠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네요. 알렉스 코라는 휴스턴 애스트로스 코치시절 사인 훔치기를 설계했고, 이후 보스턴 레드삭스 감독이 되어서도 주도적으로 사인 훔치기를 계속했죠. 사태가 불거졌던 앤드류 힌치(당시 휴스턴 감독) 카를로스 벨트란(당시 휴스턴 선수), 제프 르나우(당시 휴스턴 단장)처럼 메이저리그 사인 훔치기 스캔들의 최대 가담자였던 사람을 또 감독으로 부르다니요.
보스턴 레드삭스에게도 정 떨어집니다. 저런 사람에게 2년+2년 계약이라니요? 아니 감독할 사람이 그렇게 없습니까? 휴스턴도 힌치를 다시 감독으로 데려오지는 않았습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앤드류 힌치를 감독으로 부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가 있었네요.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힌치야 화를 내면서 사인 훔치기를 말렸다는 이야기라도 있지(그러나 휴스턴 선수들은 감독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사태의 최대 악질 주범을 감독으로 세우다니 야구 팬으로서 한숨만 나오고 답답합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사인 훔치기를 고발했던 마이크 파이어스가 얼마나 위대한 스포츠인인지 느끼게 됩니다. 물론 당시 휴스턴 투수로서 사인 훔치기를 시작하자마자 고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위협받거나 협박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진실을 알렸으니까요. 또 훔치기 짓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건 타자들과는 달리 투수 포지션인 선수였죠. 고발 이유가 마이너리그에서 올라온 상대팀 투수가 사인 훔치기로 말미암아 휴스턴 타자들에게 홈런 맞았던 적이 있었는데, 휴스턴 타자는 환호하고 그 투수는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가는 광경을 참지 못해 고발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양심적인 스포츠인이자 내부 고발자가 되었습니다.
MLB 이번 시즌이나 내년 시즌이 궁금해지네요. 과연 보스턴에게도 열정적으로 야유하는 관중이 나올지, 혹은 사인 훔치기 당시 보스턴에 있었던 타자들에게 빈볼을 날리는 투수가 등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코로나 때문에 내년 시즌은 계속 무관중 경기가 이어질 것 같습니다. 구단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코라나 힌치 같은 작자들이 우승 반지를 끼는 모습은 더 보고 싶지 않습니다.
또 다른 주범인 카를로스 벨트란도 궁금하네요. 최근에 근황을 찾아보기 힘든데 과연 야구계에 다시 등장할지, 명예의 전당에 표는 얼마나 받을지 여러모로 기대되는 인물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첫 투표에 광탈했으면 좋겠네요.
가뜩이나 코로나 때문에 모든 스포츠계가 울상인데 이런 부조리한 일이 있어서 갑갑하네요. 메이저리그에서 Cheater들이 설치는 걸 보면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 사실 스타1이 우리나라의 고전 국민게임이긴 하지만 밸런스는 그렇게 맞지 않았던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토스가 불리하고 저프전이 심각하고 테저전도 저그에게 불리했죠.
* 물론 스타1 프로 Scene에서 많은 대회가 열렸고, 테란이 강세였던 대회도 있었고 토스가 강세였던 대회도 있었고 저그가 강세였던 대회도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4강에서 같은 종족이 3자리를 차지하면 그 대회에 쓰인 맵은 대부분 그 종족에 유리했던 대회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 그런 면에서 8강에서 1테란, 1토스, 1저그의 유일한 생존자로 살아남고 우승까지 차지한 선수들을 검색했습니다. 8강부터는 진짜배기 실력자들의 경쟁이라고 생각해서 찾아봤습니다.
1. 2002 SKY 스타리그 우승자 박정석
- 16강에도 겨우 토스가 2명(나머지 1명은 김동수)이었던 스타리그.
- 박정석은 4강 홍진호, 결승 임요환을 이기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 보통 스타1에서 '가을의 전설'하면 가장 많이 떠올리는 대회이기도 합니다.
- 준우승자 임요환은 전승으로 올라갔지만 결승에서 1:3으로 패배
- 프로리그 결승을 제외하면 스타1 개인리그에서 가장 많은 관중을 동원한 대회였습니다.(최소 1만명 이상이었습니다.)
2. 2004 질레트 스타리그 우승자 박성준
- 2007 곰tv 시즌1 MSL처럼 스타1의 분기점이 되었던 대회
- 4강에서 저그전 90% 이상 찍을 만큼 말그대로 괴물테란이었던 최연성을 3:2로 이기고 결승 진출, 8강과 결승에서 꺾은 상대도 서지훈과 박정석으로 토너먼트 상대들 모두 만만치 않았습니다.
- 박성준은 저그가 최초로 스타리그 우승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왕중왕전 제외)
- 비슷한 시기에 박성준은 기타대회(스타리그/MSL보다 많이 떨어지는 대회들)인 itv 랭킹전도 우승하는 경력을 쌓았습니다.
3. 2008 곰tv 시즌4 MSL 우승자 이제동
- MSL에서는 유일하게 8강에서 최후의 종족 생존자로서 우승했던 대회였습니다.
- 이제동은 이 대회에서 박성준, 김택용, 박찬수, 이영호, 박성균, 김구현을 모조리 꺾음으로써 3종족 강자들을 압살하며 우승했습니다.
- 심지어 로키 2, 카트리나, 조디악 같은 저그에게 불리한 맵들에서 대회를 치렀는데도 우승했으니 그 가치가 더욱 높은 우승이었습니다.
- 시즌별로 따지면 이제동은 2007 에버 스타리그 우승과 이 대회 우승으로 양대리그의 무대를 바꾸며 연속 우승을 달성한 셈입니다.
4. 2009-2010 EVER 스타리그 우승자 이영호
- 이영호 최전성기 시작을 알렸던 대회
- 이영호는 2002 스타리그 박정석처럼 반대쪽 MSL도 동 시즌에 결승 진출하는 '양대리그 결승 동시 진출'의 기록을 달성했습니다.(물론 MSL에서는 준우승)
- 8강, 4강에서 당시 저그 1인자/2인자였던 이제동과 김윤환을 격파, 결승에서 진영화를 상대로 승리해서 트로피를 들었습니다.
5. 2011 진에어 스타리그 우승자 허영무
- 스타1판 역사에 손꼽힐 만큼 드라마틱했던 최고의 대회 중 하나.
- 8강, 결승에서 테란 양대산맥인 이영호와 정명훈을 꺾고, 4강에서도 토스전 승률 70%를 찍었던 어윤수를 셧아웃시키는 등 대진 난이도도 허영무에게 어려웠습니다.
- 사실 원래 허영무는 PC방 예선 탈락이었는데 1명이 기권하면서 열린 와일드카드에서 극적으로 듀얼토너먼트에 진출하면서 본선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 후일 허영무는 마지막 스타리그인 티빙 스타리그도 우승하면서 스타리그 연속 우승을 달성하게 됩니다.
* 게임큐나 겜tv, 프리미어리그나 곰tv 클래식 같은 양대 개인리그 다음으로 인정할 만한 대회들 중에 저 위의 경우 같은 대회가 있나 찾아봤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두 개의 대회가 나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