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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며, 새로운 지식과 상상력을 접하길 원하는 1인입니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으며 주기적으로 헌혈하는 헌혈자이기도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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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사] 7세기 이슬람의 이집트와 페르시아 정복, 우마이야 왕조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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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neovisionnew.tistory.com/501

 

[중동사]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황혼의 영광(부제: 야르무크 전투)

https://neovisionnew.tistory.com/384 [중동사] 초기 이슬람에서 무함마드와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의 승리(~634년) https://neovisionnew.tistory.com/59 [전쟁사] 비잔티움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의 악연(Main: 5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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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1. 양면전쟁

 

  634년, 할리드가 피라즈 전투에서 사산조 페르시아(이하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을 때 계획대로라면 페르시아를 계속 공략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비잔티움 전선에서도 이슬람군이 싸우고 있었고, 여기서 아부 우바이다 등이 밀리자 아부 바크르는 할리드에게 서쪽으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 페르시아도 가만히만 있지 않았고 유프라테스 강에서 이슬람 군대를 몰아냈습니다. 하지만 내부 사정이 엉망이라 그 이상으로 깊게 진격하지는 못했고, 2년 가까이 대치 상황만 지속했습니다.

 

  2. 알 카디시야 전투(Battle of al-Qadisiyyah, 636년)

 

  우마르는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라는 장수에게 4천 명의 지원 병력을 주고 페르시아에게 밀리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는 7번째로 이슬람에 귀이한 인물이고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위협당할 때부터 함께 싸운 인물이었습니다. 사드는 우마르의 말대로 계속 협상하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에서 이슬람으로 귀이하라고 계속 회의했죠.

 

  페르시아군을 이끄는 사령관 루스담도 함부로 싸움을 걸지 못했습니다. 636년 8월, 이슬람 군대가 야르무크 전투에서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고 비잔티움 전선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우마르는 동쪽과 서쪽의 전선에게 모두 전령을 보냅니다. 할리드와 아부 우바이다에게 동쪽으로 지원군을 보내라고 명령했고, 사드에게는 지원군이 도착하면 행동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5천 명의 지원군이 카디시야 근처에 도착하자, 사드는 전투를 개시합니다.

 

  페르시아 군대의 병력은 5만, 이슬람 군대의 병력은 3만 5천 정도로 병력은 전자의 우위였습니다. 양쪽 군대 모두 기병이 4분의 1, 나머지가 대부분 보병이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군은 2년 ~ 3년 전 할리드에게 왈라자, 울라이스, 피라즈 전투 등에서 정예병을 대부분 상실했기에 경험이 전무한 병사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루스담은 병력을 4개로 나누고 각각 코끼리를 8마리씩 배치했습니다. 사드 역시 보병과 기병을 4개로 분리해서 맞대응했습니다.

 

 

  636년 11월 16일부터 나흘 동안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첫 날 페르시아 궁병의 공격과 코끼리의 돌격으로 기세가 매서웠습니다. 사드는 용맹한 기병들로 하여금 코끼리 가까이 진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들은 코끼리 위 안장을 고정시킨 줄을 끊어버리거나 탑승한 페르시아 병사들을 화살로 저격했습니다. 사드는 바로 반격을 개시했지만 종결짓지 못하고 물러났습니다. 병력의 일부는 상대 측 사령관 루스담을 노렸으나 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루스담은 이 기습으로 몸 여러 군데에 잔부상을 꽤 입었습니다.

 

  둘째 날에 '알 카카 이븐 암르 알 타미미(이하 카카)'라는 이름의 장수가 천 명의 지원군을 추가로 이끌고 전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도착하기 직전 한 덩어리로 오는 게 아니라 지원군을 여러 갈래로 나누었습니다. 나누어진 모든 병력에게 흔히 말하는 '장사진' 진형으로, 길게 줄을 지어서 오도록 지시했습니다. 페르시아는 적들의 병력이 훨씬 더 많이 불어났구나 라고 착각했고, 그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습니다. 이번에는 이슬람의 선제공격이었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전투를 종결짓지는 못했지만, 3배 ~ 4배에 달하는 전투교환비 이득을 봤습니다.

 

 

  셋째 날, 이슬람군의 눈앞에는 재정비를 마친 코끼리들이 등장했습니다. 이슬람 진영 가까이까지 페르시아의 기병과 보병은 코끼리를 호위했고, 코끼리들이 이슬람군을 밟을 때가 되자 코끼리 앞에 있던 병력은 길을 비켜주었습니다. 무자비한 전투 코끼리들로 인해 이슬람 진형은 계속 뒤로 밀려났고, 피해가 막심했습니다. 사드는 싸울 수 있는 기병들에게 측면으로 파고 들어가 코끼리를 한두 마리씩 차례로 제압하도록 했습니다. 기병은 다시 한 번 코끼리 궁수들에게 화살 세례를 퍼부었고 코끼리의 눈을 멀게했습니다. 서로 수천 명의 병사들을 또다시 잃었습니다.

 

 

  누구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넷째 날 전장에 모래 폭풍이 불었고, 서로 시야를 분간할 수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카카가 이끄는 이슬람 결사대는 페르시아가 정신을 못 차리는 시간을 틈타 중앙으로 파고 들어 루스담을 살해했습니다. 사드는 루스담이 희소식을 듣고,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반면 페르시아 군대는 우리들의 총지휘관이 죽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고, 혼비백산 상태에 처해졌고 도망쳤습니다.

 

  전투의 승리로 전리품이 산처럼 쌓이자 우마르는 병영 도시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쿠파'라는 도시가 만들어졌는데, 오늘날 이라크 도시 나자프의 시초였습니다. 이슬람군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바빌론에 도달했습니다. 바빌론을 지키던 페르시아의 장수들은 겁을 먹고 도망치고, 오히려 바빌론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이슬람의 편에 서서 첩보원 역할을 하거나 건설 사업에 뛰어드는 등 협조적이었습니다. 심지어 공성 무기를 생산해주기까지 했습니다.

 

  3. 크테시폰 공성전(Siege of Ctesiphon, 637년)

 

  이제 페르시아의 수도 크테시폰은 풍전등화의 신세에 처했습니다. 637년 1월, 이슬람 군대는 크테시폰 옆에 있는 바르시르를 포위했니다. 티그리스 강 바로 동쪽에 크테시폰이, 서쪽에 바르시르가 있었습니다. 샤한샤(페르시아의 황제, 왕중의 왕) 야즈데게르드 3세는 바르시르 주위에 해자를 파면서 버텼습니다.

 

지도 속 Ktesiphon이 크테시폰, Veh-Ardashir가 바르시르입니다.

 

  수성 도중 크테시폰에서 바르시르로 가는 보급로가 차단되었고, 2개월 뒤 3월이 되자 바르시르 내부의 물자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페르시아는 포위망을 깨기 위해 훈련된 사자까지 동원했지만, 하심이라는 이슬람 장수가 명궁이었는지 화살을 쏴서 사자가 날뛰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페르시아는 주흐람이라는 이슬람 장수 1명이 전사하는 공적만 달성하고 전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고민 끝에 사신을 보냅니다.

 

  "우리 황제께서는 티그리스 강을 경계선으로 하여 동쪽은 우리 페르시아의 것으로 남고, 서쪽은 당신들의 것으로 된 후에 평화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 조건이 당신들의 욕망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어떤 것도 당신들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사드는 전혀 만족하지 않았고, 페르시아가 이슬람에 복종하고 세금을 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 전쟁이라고 콧방귀를 뀌었죠.

 

  역시나 바르시르는 더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습니다. 다만 바르시르에 있던 페르시아군이 탈출하면서 티그리스 강에 있는 다리를 끊었습니다. 배는 강의 동쪽 기슭의 페르시아 진영 가까이 두었습니다. 마침 티그리스 강이 불어났고, 페르시아는 도랑을 파면서 시간을 끌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슬람에 귀이한 페르시아인들이 강이 얕은 지점을 알려줬고, 덕분에 이슬람 기병대는 활로를 통해 강을 건넜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배로 대부분의 군대가 크테시폰으로 진입했습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왕궁의 보물을 갖고 동쪽의 '훌완'이라는 도시로 도망쳤습니다. 그럼에도 황궁 창고에 은화만 90억냥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사드는 크테시폰에 있던 페르시아인들에게 공물을 내는 조건으로 목숨을 살려두었지만, 도망친 난민들을 쫓아서 학살하고 약탈했습니다.

 

 

빨간색 화살표는 사드가 이끄는 이슬람군의 진격로고, 노란색 화살표는  야즈데게르드 3세가 도망친 퇴각로입니다.

 

  4. 잘룰라 전투(Battle of Jalula, 637년)

 

  남은 페르시아 군대는 북쪽의 모술, 티그리트, 잘룰라 등으로 흩어졌습니다. 태반 이상이 잘룰라에 있었는데, 이곳은 티그리스 강의 지류인 디얄라 강을 끼고 있는 곳이자 아제르바이잔으로 가는 길목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크테시폰 공성전에서 화살로 활약을 한 하심이라는 장수가 1만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프라자드와 미흐란이 이끄는 페르시아 2만 군대와 싸웠습니다. 프라자드와 미흐란은 크테시폰 공성전에서도 페르시아 사령관으로 있었고, 프라자드는 알 카디시야 전투에서 전사한 루스담의 형제이기도 했습니다. 637년 4월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미흐란은 적들이 돌아서 공격하지 못하도록 자그로스 산맥과 디얄라 강 사이에 자리 잡았고, 앞에 마름쇠를 설치하고 참호를 팠습니다. 전투가 벌어지자 페르시아 궁수들이 전과를 올리고 이슬람군은 후퇴했습니다. 전황이 유리하다고 판단한 미흐람은 참호에 다리를 놓고 페르시아군을 진격시켰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심의 계산대로였습니다. 카디시야 전투에서 활약한 카카라는 장수에게 기병을 맡겨서 참호에 놓인 다리를 점령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역시나 이슬람의 승리로 끝났지만 수천 명의 페르시아군이 방어 요새로 다시 들어가는 것까지 막지 못했고, 이슬람 쪽 피해도 적지 않아서 몇 개월 간 포위전이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공물을 바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이슬람에 항복했습니다. 미흐람은 동쪽으로 도망치다가 추격병에 붙잡혀서 전사했고, 프라자드는 남동쪽으로 피신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뒤이어 모술도 무난하게 이슬람의 깃발이 꽂혔고, 638년이 되어서 이슬람은 이라크 일대를 완젆히 장악했습니다.

 

  다만 아라비아와 시리아에 가뭄과 전염병 사태가 심각해져서 몇 년 동안 정복전이 멈췄고, 당분간 이슬람은 페르시아의 역공을 막아냈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메디나로 몰렸고, 우마르는 식량을 배급하고 세금을 면제해주면서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5. 아므르 이븐 알 아스, 이집트를 정벌하다.

 

  637년 말 전염병 사태가 가라앉고 시간이 지나 식량 사정도 점차 개선되었습니다. 지난 글의 야르무크 전투에서 할리드 바로 밑의 부하 장수들 중 아므르 이븐 알 아스(아므르)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집트를 공격할 때라고 주장했습니다. 우마르는 시리아 안정화가 우선이라며 탐탁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므르는 지금이야말로 기회라고 간곡하게 호소했습니다. 우마르는 우선 기병 4천의 병력을 주긴 했지만 경거망동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메디나로 돌아가서 잘 의논하고 확답하겠다. 전령을 보낼테니, 그대가 이집트 국경에 도착하기 전에 허락하지 않는다는 서신을 열었다면 바로 회군하라. 그러나 그대가 이집트 땅에 침입한 뒤라면 알라에게 기도를 올리고 신의 뜻에 맡겨라."

 

  아므르가 이집트 삼각주로 진격할 동안, 메디나의 회의 끝에 우마르는 공격을 중단하라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전령은 아므르가 이집트 국경을 넘어가기 전 만났습니다. 하지만 아므르는 눈치를 챘는지 일부러 이집트 국경 너머로 들어간 다음에야 우마르가 보낸 서신의 겉봉을 뜯었습니다. 639년 12월, 이슬람의 아프리카 팽창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다음해 아므르는 이집트의 펠루시움과 발바이스 요새를 점령하고 바빌론 요새를 포위했습니다.(페르시아의 바빌론 요새과 이름만 같고 다른 장소입니다.) 우마르도 병력이 부족하다는 걸 알고 4천 명의 병력으로 아므르의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병력으로 바빌론을 함락시키는 건 무리였습니다. 시간이 지연되자 우마르는 주바이르라는 장수에게 다시 4천 명을 맡겨서 보냈습니다. 이렇게 1만 2천 명의 이슬람군은 동쪽의 헬리오폴리스라는 거점을 손에 넣었습니다. 2만 명의 비잔티움군은 늦은 대응으로 격퇴 당했고 바빌론은 다시 포위되었습니다. 바빌론은 이번에는 견디지 못했습니다.

 

  다음은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무역의 중심지이자 비잔티움에게 있어서 2번째로 큰 도시라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이 곳을 빼앗기면 이집트도 이슬람에게 내주게 되는 셈이었죠. 헤라클리우스는 대규모 지원군을 모아서 알렉산드리아를 지키려고 했습니다. 비잔티움으로서도 해볼만 했던 게, 해상 도시라 지중해를 통해 보급하면 당시 해군이 전무했던 이슬람은 그걸 저지할 수단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641년 2월 헤라클리우스는 세상을 떠나고 지원 계획은 흐지부지 되었습니다.

 

 

  여러 겹의 요새와 성벽이 축조된 알렉산드리아였지만, 반 년 가까이 자력으로 싸우다가 함락되었습니다. 얼마나 부유한 도시였는지 아므르는 우마르에게 올리는 보고서에 "우리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습니다. 이 곳에는 4천 개의 대궐과 4백 개의 유흥 시설, 헤아릴 수 없는 재산이 있습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므르는 나일강을 따라 계속 내려가서 누비아 지역을 점령했고 현재 리비아 북부까지 진격했습니다.

 

  6. 니하완드 전투(Battle of Nahavand, 642년), 그리고 페르시아의 멸망

 

니하완드 요새의 그림입니다.

 

  한편, 크테시폰을 빼앗기고 야즈데게르드 3세는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에 위치한 메르브로 저멀리 천도했습니다. 4년 가까이 힘을 기르고 각지를 돌면서 5만 명이라는 군대를 모았습니다. 이슬람을 공격하기 위해 니하완드 성에서 병력이 집결했습니다.

 

  우마르는 그 때까지 페르시아 정복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이슬람 수뇌부들은 부유한 시리아와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을 평정한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냐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우마르 본인도 잘룰라 전투이후 동진하려는 장수들에게 그만 가라고 저지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자꾸 옛 땅을 노리는 페르시아의 태도에 칼을 뽑았습니다.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 등 여러 이슬람 지휘관들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었습니다. 이 전투의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번에도 이슬람의 승리였고, 페르시아는 니하완드 성을 뺏겼습니다.

 

 

  니하완드 전투의 패배로 페르시아 사람들은 왕중의 왕이라고 불리는 야즈데게르드 3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페르시아는 더욱 분열되었고, 본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각 지역의 군벌이 난립했고, 백성들은 세금을 거부하기까지 했습니다. 다시 군대를 모집하려고 해봤자 허사였습니다.

 

  이슬람은 거침없이 페르시아의 남은 땅을 흡수했습니다. 오늘날 캅카스 산맥, 이란 전체, 투르크메니스탄과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야즈데게르드 3세는 아무다리야 강(당시 명칭은 옥수스 강)에서 마지막 항전을 벌였지만, 전쟁의 신이 와도 더 이상의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영토는 없었습니다.

 

 

지도 속 Nahavand가 니하완드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보라색으로 표시한 곳이 페르시아가 마지막으로 저항한 메르브입니다.

 

  651년, 사산조 페르시아는 이렇게 멸망했습니다. 3세기 초반 파르티아를 무너뜨리고, 400년 가까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지속된 나라가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 이후 야즈데게르드 3세는 방랑하다가 메르브의 한 방앗간 주인에게 죽었고, 황태자 페로즈는 당나라 장안으로 도망쳐 당나라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사실 당태종 때부터 야즈데게르드 3세가 당나라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공물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당나라라도 고구려쪽 정세를 먼저 신경써야했고, 그 머나먼 이란까지 원정군을 보내는 건 무리라 제대로 도울 수 없었습니다. 당고종은 도망친 페르시아 황족과 난민들을 받아들였고, 명목 상의 직책이지만 페르시아 총독 자리를 주었습니다.

 

  7. 우마르와 우스만의 죽음

 

  이슬람군이 한창 동쪽으로 영토를 넓혀나가는 644년, 칼리프 우마르가 암살당하고 우스만 이븐 아판(이하 우스만)이 3대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우스만은 무함마드의 사위였고 메카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습니다. 우스만의 부는 초기 이슬람의 군자금이며 오아시스와도 같았습니다.

 

  우스만은 우마르 사망 직후 각자의 반란을 진압했고, 영토확장을 이어나가 리비아와 아르메니아를 점령했습니다. 무엇보다 이슬람의 교리인 '쿠란'을 대대적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는 우마르와 다르게 창고의 돈을 아끼지 않았고 대규모 공공사업을 벌였습니다. 수로를 파서 물을 공급했고 수천 개의 모스크를 건설했습니다. 상인 출신이라 상인들을 위한 도시와 시장도 대폭 늘어났습니다. 곳곳에 도로가 건설되었습니다.

 

  하지만 우스만은 지나치게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펼쳤습니다.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본인 가문(우마이야)에게 나눠주고, 다른 사람이 주는 선물을 마음껏 챙겼습니다. 사적으로 선물을 받지 않았고 가족에게도 금기시켰던 우마르와 대비되는 부분입니다. 또 규정을 변경해서 정복지의 매매를 허용했고, 장군과 병사들에게 중앙 정부의 돈을 마음껏 빌려주어서 그들이 땅을 사게 장려했습니다. 정복지의 이슬람 총독은 부를 축적하게 위해 세금을 크게 올렸습니다. 심지어 우스만은 일가친척을 정복지의 총독으로 보냈습니다.

 

  우스만과 우마이야 가문을 향한 피정복민의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메디나에 있는 우스만의 집 주위로 시위대가 모여들었고 우스만을 호위하는 사람들과 시위대와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결국 그는 담을 넘어 침입한 폭도들에게 656년 살해당했습니다. 그가 죽기 직전 읽었던 쿠란은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의 하자티 이맘 모스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우스만의 쿠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쿠란이라고 일컬어지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위 사진은 타슈켄트에 있는 하자티 이맘 모스크고 아래 사진은 모스크 내부에 안치된 우스만이 죽기 직전 읽었다고 전해지는 쿠란입니다. 굉장히 낡은 쿠란으로 세월의 흐름이 느껴집니다.

 

  8. 알리의 즉위, 그러나...

 

  우스만 사후 무함마드의 사촌인 알리가 4대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의 단결은 이미 퇴색되었고, 알리는 반대 세력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우스만과 가까웠던 우마이야 가문과 특히 주요 도시의 총독은 알리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알리는 그들을 해임했지만 요지부동이었고 예멘 총독은 국고의 돈을 모조리 털어서 달아났습니다.

 

  우스만의 친척이자 다마스쿠스 총독인 무아위야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비군을 자주 훈련시키고 투석기를 늘리는 등 무력으로 알리와 맞먹었습니다. 무아위야는 알리의 해임 명령에 반란을 일으켰고, 아므르 이븐 알 아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여기에 이집트 원정에서 후발대 역할을 맡았던 주바이르, 메카의 권력자 중 하나인 탈하, 셋째 부인인 아이샤 등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예멘 총독은 빼돌린 돈으로 그들을 지원했습니다.

 

 

  알리는 656년 12월 이라크 남부 외곽의 바스라(Barsa)에서 그들을 제압했습니다. 주바이르와 탈하는 죽고 알리는 아이샤를 포로로 잡아 메디나로 보냈습니다. 다음은 무아위야였습니다. 서로 우스만의 죽음에 대해 책임 공방을 벌였지만 결렬되었고 657년 7월 유프라테스 강의 라카(Raqqa)에서 알리와 무아위야는 '시핀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투는 알리 측의 우세였지만 아므르가 꾀를 발휘했습니다. 그의 조언대로 무아위야의 병사들은 창 끝에 쿠란 구절을 적은 종이를 꽂고 쿠란을 암송하면서 걸었습니다. 알리의 병사들은 쿠란을 찢으면서 싸우지 못한다는 반응을 보였고 다시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내부 분열로 알리는 다시 동쪽으로 군대를 물릴 수밖에 없었고, 무아위야는 세력을 계속 넓혔습니다. 몇 년 동안의 내전 끝에 알리는 반대파의 자객에게 661년 목숨을 잃었습니다. 알리의 아들 하산이 다섯 번째 칼리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기충천한 무아위야군에 비해 하산 측의 병력은 싸울 의지를 잃었습니다. 병력 12,000명 중 8,000명이 무아위야 쪽으로 탈영하고 배신자가 나와서 하산은 다리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결국 그는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하고 칼리프에서 물러났습니다.

 

  자연스럽게 무아위야가 6대 칼리프에 올랐습니다. 이렇게 1차 피트나(내전을 의미하는 아랍어)가 종결되었고, 그는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다마스쿠스로 옮겼습니다. 680년 무아위야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깨고 죽기 전 아들 야지드에게 권력을 세습했습니다. 그로 인해 반발이 시작되는 2차 피트나에서, 훗날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는 3차 피트나에서 알리 지지자들은 계속 잔존하고 저항했습니다. 알리 지지자들은 시아파가 되어 이슬람에서 두번째로 많은 종파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슬람 신자 중 시아파는 10% ~ 20%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이 수니파입니다.

 

  (여기까지 글을 마치고 8세기 이슬람 정복 전쟁은 시간이 나면 다뤄보겠습니다.)

 

  9. 출처

도서

버나드 루이스, 『이슬람의 세계사. 1』, 이산(2009)

김승철, 『포용의 정복자 이슬람』, 좋은땅(2014)

허진모, 『전쟁사 문명사 세계사 2』, 미래문화사(2020)

 

유네스코 세계디지털도서관 (https://unesdoc.unesco.org/home)

B. A. 리트빈스키 외 2인, The Arab conquest

 

유튜브

<Early Muslim Expansion - Khalid, Yarmouk, al-Qadisiyyah ...(초기 무슬림 제국 팽창사 - 시리아 및 이라크 정복 602-636)> (https://www.youtube.com/watch?v=r2cEIDZwG5M)

<Early Muslim Expansion - Arab Conquest of Iran and Egypt> (https://www.youtube.com/watch?v=baHT2nR5Wr4)

영문위키

<Battle of al-Qadisiyyah>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l-Qadisiyyah

<Siege of Ctesiphon (637)>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Ctesiphon_(637)

<Battle of Jalula>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Jalula

<Batle of Nahavand>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Nahavand

<Amr ibn al-As> https://en.wikipedia.org/wiki/Amr_ibn_al-As

<Muslim conquest of Egypt> https://en.wikipedia.org/wiki/Muslim_conquest_of_Egypt

<Siege of Alexandria (641)>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Alexandria_(641)

<Yazdegerd III> https://en.wikipedia.org/wiki/Yazdegerd_III

<First Fitna> https://en.wikipedia.org/wiki/First_Fit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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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추천] <본격 한중일 세계사 시리즈 1권 ~ 13권 ~>(작가: 굽시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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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 만화가 굽시니스트(김선웅)의 역사 만화책인 <본격 한중일 세계사>입니다. 말 그대로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를 만화로 그려냈습니다. 정확히는 19세기 청나라 아편전쟁 때부터 역사가 시작됩니다. 현재 13권까지 나왔는데 조선 말기 갑신정변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서 아트 슈피겔만의 <쥐>가 떠올랐습니다. 사람을 국적이나 민족에 따라 동물로 표현한 부분에서 아주 유사합니다. <쥐>에서는 유대인을 쥐, 폴란드인을 돼지, 독일인을 고양이, 프랑스인을 개구리, 미국인을 강아지로 표현했죠. <본격 한중일 세계사>는 조선인을 호랑이, 중국(청나라)인을 판다, 일본인을 고양이, 러시아를 북극곰, 영국인은 사자, 프랑스인을 닭, 독일인은 독수리 등으로 나눴습니다. <쥐>와 다른 점이라면 이 책에서는 국가 내 소수민족은 따른 동물로 세분화하고 무엇보다 국가 지도자들은 따로 구별했다는 점이 있겠네요.

 

 

  여담이지만 이 책의 내용은 한 웹툰 사이트에서 동시에 연재 중이기도 합니다.

 

  19세기 ~ 20세기 세 나라에 초점을 두었지만 서양이나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특정 상황도 종종 나옵니다. 인류사에 영향을 준 발명품 등장이나, 제국주의 시대에 서양 열강이 어떤 나라를 집어 삼켰는지 나와서 세계사와 동아시아사 흐름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분들도 재미삼아 보기에 좋은 책입니다. 만화책이라 웃으면서 볼 수 있고, 웹툰을 보는 느낌으로 접하면 딱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13권 나왔는데 책에 따라 조선에서 청나라로, 일본에서 조선으로 배경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청나라 이야기가 잠깐 끊기고 조선이나 일본으로 넘어가면 그 다음 청나라의 이야기는 어떻게 될까 하는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19세기 역사는 적어도 단편적으로는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상세하게 나와 있는 책을 보고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평천국 운동이 황혼기를 맞이하는 과정도 그렇고 일본 내부의 권력 다툼도 아주 흥미로웠고, 국제전이나 내전의 자세한 과정도 작가가 이해할 수 있게 그려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세이난 전쟁에서 패배한 쪽이 도주하면서 처절하게 항전하는 내용이 기억납니다.

 

  마지막으로 당시 조선 상황에서 느낀 건 당시 조선의 경제 사정은 진짜 최악이었다는 점이네요. 조정의 재정 수입도 다른 나라들과 넘사벽의 수준이었고, 그마저도 일본에게 계속 배상금을 물리고 이권은 각종 나라들에게 넘어가고... 청나라도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흔히 말하는 '안습'의 역사인데 조선은 그보다 국력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래였고요. 이 책은 은 같은 화폐 등 여러 국가들의 경제나 화폐 상황 등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습니다.

 

  그마저도 흥선대원군이 당백전 발행, 청전 수입으로 화폐 경제가 엉망이 되고, 부패한 관리들이 매관매직을 하는 것으로 상황이 악화되었고요. 그러다가 임오군란이라는 크리티컬 데미지를 맞은 건 덤이고요. 비관적으로 말하는 것 필자도 안 좋아합니다만, 그 상황에서 제대로 된 근대화를 이룩할 수 있을지에 관해서 부정적입니다.

 

  아무튼 계속 책이 나오고 있는데, 이 시리즈가 완결될 때까지 읽을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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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비잔티움과 사산조의 마지막 일전(2)(611년 ~ 628년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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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계속 땅을 집어삼키는 사산조 페르시아

 

  헤라클리우스는 지존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포카스가 망쳐놓아도 너무나 망쳐놓아서 제국은 정신을 차릴 틈이 없었습니다. 즉위하기 전에 이미 에데사(현재 터키 남동부의 샨르우르파)가 넘어가서 만딜리온을 사산조에게 뺏겼습니다. 만딜리온은 성스러운 수건으로 예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기독교의 성유물입니다. 614년에는 성지 예루살렘마저 함락됩니다.

 

지금은 루브르 박물관에 있다고 전해지는 성십자가의 일부 조각입니다.

 

  성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박히셨다고 알려진 십자가입니다. '참 십자가'라고 부르기도 하고, 기독교에서 아주 중요한 성유물입니다. 이 성십자가가 예루살렘 점령과 함께 성십자가와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인 사산조 군대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이 알려졌습니다. 성십자가는 사산조의 기록보관소에 만딜리온과 함께 놓였습니다.

 

  예루살렘 정복과 함께 가까이 있던 가산 왕국도 꼭두각시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산조를 따랐던 라흠 왕국은 아예 흡수됩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헤라클리우스는 우선 금이나 비단 등 값나가는 것들을 내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상을 시도합니다. 사산조라는 거대한 불길이 비잔티움의 인구와 농지를 계속 잠식하는 걸 진화시키는 게 먼저였습니다.

 

619년경 사산조 제국의 영역은 최대로 넓어졌습니다.

 

  그러나 호스로 2세는 더 요구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거절합니다.

 

  "우리와 같은 태양을 섬기기 전까지, 네가 십자가에 못 박힌 신을 포기하기 전까지, 내가 자비를 베푸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자신감이 있을만 했던 게 사산조는 영토를 넓혀나가는 도중 607년 ~ 608년에 있었던 서돌궐의 30만 대군을 재차 막아냈습니다. 그만큼 사산조 페르시아는 양면 전쟁에도 끄떡없을 만큼 당대 최강국이었습니다.

 

 2. 헤라클리우스의 호적수, 샤흐르바라즈

 

예루살렘을 공략하는 샤흐르바라즈와 사산조 군대입니다.

  사산조 진영에는 '샤흐르바라즈'라는 명장이 군대를 탄탄대로로 이끌었습니다. 사실 헤라클리우스라고 더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적들이 시리아 일대와 에데사를 장악했고 다마스쿠스까지 빼앗기자 구원병 6만 8천 명을 이끌고 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4만의 사산조 군대와 맞섭니다. 613년 안티오크에서 벌어진 이 전투는 사산조의 완승으로 끝났고, 사산조는 건국 400여년 만에 지중해에 처음으로 닿게 됩니다. 이는 비잔티움에게는 이집트에서 터키로 가는 육로가 끊겼다는 걸 의미합니다. 

 

지도에서 빨간색으로 표시한 곳이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안티오크, 카이사레아, 칼케돈 같은 주요 도시입니다. 개전 초기 사산조는 이를 모조리 차지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예루살렘 함락과 성십자가가 이제 없다는 소식에 백성들이 침울해하고 있었습니다. 안티오크의 대주교는 살해당하고 예루살렘의 대주교는 포로가 됩니다. 칼케돈에서도 헤라클리우스는 또다시 샤흐르바라즈의 군대를 막지 못했습니다. 사산조의 파상공세가 콘스탄티노플 코앞까지 왔습니다.

 

  샤흐르바라즈는 멈추지 않고 618년 이집트를 공격합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강을 따라 남쪽으로 진군합니다. 나일 강이 사산조의 소유가 되면서 비잔티움의 식량 공급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3. 절망적인 상황, 그러나 시작되는 역전의 시나리오

 

  헤라클리우스는 총독 시절 근거지였던 카르타고로 수도 이전을 시도합니다. 비밀리에 콘스탄티노플의 주요 보물을 배에 실어서 카르타고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이 배는 폭풍우 때문에 부서져서 진실이 세상에 퍼졌습니다. 시민들의 원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세르기우스는 황제를 말립니다.

 

헤라클리우스가 수도를 수호하겠다고 신께 맹세한 성 소피아 성당의 제단 사진입니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나 다름없습니다. 이곳을 지키는 일은 하늘이 황제께 부여한 신성한 의무입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마음을 고쳐먹고 성 소피아(현재 아야 소피아) 성당의 재단에서 다시는 콘스탄티노플을 버리지 않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합니다.

 

  한편 샤흐르바라즈가 이집트를 정리하면서 패기만만한 호스로 2세는 헤라클리우스에게 오히려 이런 편지를 보냅니다.

 

  [가장 위대한 신이자 세계의 주인인 호스로가 사악하고 어리석은 노예 헤라클리우스에게 보낸다. 왜 아직도 우리의 법에 복종하지 않고 스스로를 왕이라고 부르는가? 내가 그리스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던가? 너는 너의 신을 믿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는 내 손에서 카이사레아와 예루살렘과 알렉산드리아를 가져가지 아니한 것이냐? 세상의 대지와 바다는 모두 내가 만든 법에서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었는가? 이런 내가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파괴하지 못할 것 같은가? 그러나 네가 내게 복종하고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여기로 오면 네 죄를 용서하겠다. 나는 너에게 땅과 포도원과 감람원을 주고 자비로운 시선으로 너를 바라보겠다. ~~ . 바다 깊은 곳으로 도망갈지라도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 손으로 너를 찾아내리라. 신이 너를 구원해주리라는 헛된 소망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

 

  요약하면 "이미 대세는 기울었으니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라"라는 메시지입니다. 이런 거 보면 세상만사 새옹지마라고 말이 떠오릅니다. 과거에 내전이 벌어졌을 때 마우리키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의 사위가 되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졌죠.

 

  그런데 놀랍게도 이 편지가 반격의 실마리가 됩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사산조가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백성들에게 알리고, 자극을 받은 비잔티움의 시민들은 결사항전에 나섭니다. 이렇게 헤라클리우스는 사산조를 물리치기 위한 세금도 높일 수 있었고, 특히 교회로부터 세금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위에서 나온 세르기우스도 황제에게 교회의 보물을 군자금으로 쓰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부패한 관리들의 봉급을 절반으로 줄이고, 그 중에서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면 막대한 벌금을 매겼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앞마당이나 다름없는 칼케돈의 적들을 노리지 않고 멀리 돌아가서 상륙합니다.

 

  622년 헤라클리우스는 부활절 미사를 끝내고 전면에 나섰습니다. 가까이에 있는 칼케돈의 사산조군과 정면승부하지 않고 일부러 빙 돌아가서 토로스 산맥 근처에 진지를 구축합니다. 여름에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가을에 북동쪽 방향으로 공격해서 사산조의 허리를 끊으려고 합니다. 칼케돈에 있던 사산조군은 많은 병력을 동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 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집니다. 적들이 매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일부러 후퇴하고 매복한 적들이 가까이 오자 신속하게 정예병과 맞닥끄려서 격퇴시킵니다. 이렇게 헤라클리우스가 샤흐르바라즈를 상대로 첫 복수에 성공합니다.

 

  4. 623년 ~ 626년까지의 비잔티움의 반격

 

헤라클리우스와 대립했던 아바르족 카간의 자세한 이름은 기록이 소실되었는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이 승전을 기점으로 반격의 물꼬가 뚫렸지만, 623년 헤라클리우스는 북쪽의 아바르족이라는 숙제를 풀어야 했습니다. 그는 아바르족의 카간(지도자)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칠테니 다뉴브강 북쪽으로 군대를 물려달라고 부탁했죠. 카간은 직접 만나자고 제안하고 헤라클리우스는 약속된 장소로 향합니다. 하지만 이는 함정이었습니다. 카간은 기병을 동원하여 그를 포로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로서는 다행히 급습에 탈출했지만 협상단의 많은 인원이 아바르족에게 죽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참고 또 참으면서 노미스마 금화 20만 개(자그마치 900kg)과 사생아를 볼모로 보내면서 오로지 사산조와의 전쟁에 칼날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622년부터 헤라클리우스는 미친듯이 서아시아를 휩쓸고 다닙니다.
제가 표시한 1. 카이사레아, 2. 간자크, 3. 티그라노세르타, 4. 사루스 강 전역이 헤라클리우스 황제가 대표적으로 활약한 전장입니다.

 

  이듬해 황제는 사산조와의 캠페인을 재개합니다. 원정 이전에 또다시 호스로 2세에게 평화협상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샤한샤는 이제 페르시아 심장부가 공격당할거라는 헤라클리우스의 말에도 콧방귀만 뀝니다. 그러나 헤라클리우스는 언행일치가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위 지도에서 번호로 나타냈지만 우선 카이사레아를 수복하고, 다음으로 사산조 영토로 깊숙하게 들어가 'Ganzak(간자크)'라는 도시에서 호스로 2세의 4만 적군을 상대로 승리합니다.

 

 

현재 잔해로나마 남아있는 아두르 구쉬나스프(Adur Gushnasp) 사원의 잔해입니다.

 

  여기서 십여년 전 기독교의 성지가 더럽혀진 것에 대한 되갚음인 것인지, 조로아스터교의 중요한 사원인 아두르 구시나스프(Adur Gushnasp)를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분노한 호스로 2세는 부하 장군들인 샤힌, 샤라플라칸, 그리고 샤흐르바라즈에게 헤라클리우스를 포위하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헤라클리우스는 세 방향의 적들이 합치기 전에 샤라플라칸과 샤힌을 차례로 물리쳤습니다. 숙적 샤흐르바라즈가 다른 두 장군의 패장병들과 함께 추격하자 사루스 강에서 조우합니다.

 

현재 터키의 'Saros(영어로 Seyhan)'이라는 강을 두고 625년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여기서 무승부에 가까운 결과를 냅니다. 이번에는 샤흐르바라즈가 거짓으로 후퇴했고 적들이 다리를 통해 추격해오자 역공으로 비잔티움군의 선봉대를 꺾어버립니다. 하지만 뒷심 부족으로 다리까지는 장악하지 못했고 후위의 군대와 함께 반격해오는 헤라클리우스 상대로 큰 이득을 거두지 못합니다. 전투 끝에 서로 물러났고, 비잔티움군은 북쪽으로 가서 흑해 아래의 트레비존드(Trebizond, 현재 터키의 트라브존)이라는 도시에서 휴식합니다.

 

  5.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성전과 제 3차 사산조 vs 서돌궐 전쟁

 

  시간이 지나 626년 여름이 되었습니다. 호스로 2세는 결정적인 승리만이 비잔티움을 멸망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바르족에게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자고 제안했고, 그들은 예전의 협약을 깨고 남쪽으로 진군합니다. 여기에 아바르족과 사이가 좋지 않은 슬라브족까지 돈으로 회유해서 포위 작전에 끌어들입니다. 이 와중에 헤라클리우스와 정예군은 아직 소아시아쪽에 있었고, 몰려드는 적들을 막아내는 건 세르기우스 대주교와 수도를 지키던 보누스 장군의 몫이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의 위엄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8만 명 이상의 아바르족 + 슬라브족 + 사산조 군대는 1만 5천 명의 비잔티움군이 있는 콘스탄티노플 주변을 둘러쌌습니다. 하지만 성벽을 공략하려는 궁수들은 성 내부의 투석기에 녹아내렸고, 사산조의 해군은 비잔티움의 해군에 막혀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넘지 못했습니다. 사산조는 동맹군에게 공성 무기를 지원해줄 수 없었고, 결국 공성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여기서 호스로 2세가 공성전의 패인은 샤흐르바라즈가 못 싸운 탓이라고 판단했는지 '카르다리안(Kardarigan)'이라는 장군에게 샤흐르바라즈를 죽이고 그의 군대를 크테시폰으로 돌려보내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비잔티움군이 가로채고, 헤라클리우스가 샤흐르바라즈에게 이 사실을 전달합니다. 고민 끝에 샤흐르바라즈는 전쟁에서 이탈하여 시리아 북부에 주둔합니다.

 

서돌궐은 비잔티움과의 협공을 감안했는지 캅카스 산맥으로 침공합니다.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호스로 2세가 정치적인 그림을 그렸다면, 이제는 헤라클리우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627년 서돌궐이 사산조를 상대로 3차 침공을 감행합니다. 지난 1차, 2차는 모두 사산조의 승리였고 이란 방면으로 공격했는데, 이번에는 캅카스 지역으로 방향을 다르게 설정합니다. 헤라클리우스는 이미 625년 서돌궐에게 군사적으로 협공을 해준다면 많은 재물을 주겠다고 사신을 보냈습니다. 서돌궐도 사산조 때문에 막힌 비잔티움과 당나라 사이의 교역로인 '실크로드'를 다시 열고 주도할 기회라고 판단했습니다. 지도자 통엽호가한도 "나는 당신의 적들에게 복수할 것이고 당신의 요청에 호응하기 위해 용감한 군대와 함께 올 것입니다"라는 동의의 서신을 보냅니다.

 

  6. 니네베 전투(Battle of Nineveh), 전쟁의 종결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이 니네베 전투 지역이고, 위의 하늘색 화살표는 서돌궐이 남하한 곳입니다.

 

 

  서돌궐군은 캅카스 산맥의 사산조 요새들을 차례로 점령합니다. 여기서 통엽호가한과 헤라클리우스가 만나는데, 기록으로는 통엽호가한이 스스로 절을 하고 헤라클리우스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고 합니다. 기뻐한 헤라클리우스는 비잔티움의 왕관을 그에게 씌워주기도 하며 서로 얼싸안고 동맹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입니다. 또 서돌궐의 지휘관들은 비잔티움에게 비단옷과 보석을 선물받습니다. 잠깐의 합동 작전 이후 헤라클리우스는 서돌궐에게 요새 포위 작전을 맡기고 자신은 남하합니다.

 

니네베 전투에서 승리한 헤라클리우스에 대한 그림입니다. 비잔티움 병사가 들고 있는 목은 아무래도 적 장수 라하자드일 것 같네요.

 

  그는 2만 5천 명 ~ 5만 명의 정병을 이끌고 현재 이라크 쪽으로 공세를 펴립니다. 기원전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니네베'라는 역사적인 도시에서 회전이 일어납니다. 호스로 2세는 라하자드(Rhahzadh)라는 장군에게 막으라고 명령했지만, 병력은 겨우 1만 2천 명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캅카스 쪽 전황도 시원찮았기에 사산조는 니네베에서 전력을 동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헤라클리우스는 라하자드가 평야에서 싸우도록 유도했고, 8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적들의 절반을 죽였습니다. 그는 직접 결투에서 라하자드를 전사시킵니다. 남은 사산조의 병력도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다스타기르드를 점령하고 사산조 수도인 크테시폰(Ctesiphon)에 더욱 근접합니다.

 

  비잔티움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티그리스강 동쪽 도시인 다스타기르드(Dastagerd)로 향합니다. 호스로 2세는 손도 못 쓰고 도망쳤고, 비잔티움군은 무난히 입성하여 사산조의 왕궁을 약탈하고 태워버립니다. 다음 목표는 사산조의 수도인 크테시폰이었지만 사실 헤라클리우스로서도 모험이었고, 그는 사신을 보내 평화를 촉구합니다.

 

  "나는 평화를 쫓고 쫓는다. 나는 페르시아를 불태우는 걸 바라지 않았지만 네가 그걸 강요하게 만들었다. 즉시 모두 무기를 내려놓고 평화를 선택하자. 모든 것을 태우기 전에 이 불길을 끄도록 하자."

 

  이 와중에 사산조의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서 호스로 2세를 몰아내고 그의 아들을 제위에 앉힙니다. 새로운 샤한샤가 된 카바드 2세는 먼저 화친을 요청하고 이라클리오스는 받아들입니다. 이렇게 비잔티움은 빼앗은 땅을 돌려받는다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덧붙여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고 포로로 잡힌 군인들을 되찾습니다. 무엇보다 성십자가 등 성유물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7. 에필로그

 

 

개선식에서 헤라클리우스가 직접 성십자가를 들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위 그림은 그걸 묘사했습니다.

 

  헤라클리우스는 630년 3월 21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성십자가를 만천하에 보여주는 승리의 개선식을 벌입니다. 시민들은 성십자가를 되찾았다는 기쁨에 기뻐했습니다. 성 소피아 성당에서 성십자가를 안치하는 의식을 벌이고, 훗날 예루살렘에 반환합니다.

 

  원래대로라면 이 때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도 돌려받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샤흐르바라즈가 사산조의 중앙 조정과 따로 놀았기에 명령도 거부합니다. 카바드 2세가 즉위 몇 개월 만에 죽자 헤라클리우스는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지금 페르시아의 왕이 죽었고, 왕좌와 왕국은 너에게 다가왔다. 내가 그걸 너와 네 후손들에게 수여하겠다. 만약 군대가 필요하다면, 네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많은 군대를 파견하여 얼마든지 도움을 주겠다."

 

  샤흐르바라즈는 2년 동안 내부의 몇몇 귀족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 630년 충성스러운 병사 6,000명과 함께 크테스폰으로 돌격합니다. 아르다시르 3세를 죽이고 스스로 샤한샤에 등극했고, 이집트와 시리아를 헤라클리우스에게 돌려줍니다. 그러나 서돌궐이 마지막으로 약탈하는 과정에서 파견한 10,000명의 병력이 궤멸되는 일이 벌어져서 위신이 추락합니다. 2개월도 안 되어 암살당하고 호스로 2세의 딸인 푸란도흐트가 즉위합니다.

 

 

나무위키에서 퍼온 호스로 2세부터의 샤한샤 계보입니다. 630년 ~ 632년 상황을 보면...

 

  그 뒤로 사산조에는 암살과 반역이 계속됩니다. 샤흐르바라즈의 아들이 즉위하기도 하고, 호스로 2세의 또다른 딸이 즉위하기도 하고, 아예 스스로 샤한샤라고 자칭하는 경우도 있었죠. 이 시기 사산조는 그 옛날 로마의 군인 황제 시대보다도 더한 혼란이 찾아왔습니다.

 

  사산조는 빼앗은 땅을 모두 상실하고 전쟁 이전보다 심각한 상황으로 돌아왔습니다. 많은 병사가 희생되고 막대한 돈만 잃었을 뿐입니다. 632년 야즈데게르드 3세가 유일한 샤한샤로 정립이 이루어지지만 추락할 대로 추락한 권위는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사산조에는 호스로 2세를 끝으로 강력한 전제 군주가 등장하지 않았고, 내부적으로 온전히 단합하지 못한 형편은 나중에 이슬람군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됩니다.

 

샤흐르바라즈에게서 이집트와 시리아를 돌려받고 비잔티움은 포카스 등장 이전의 땅을 대부분 회복했습니다.

 

  사산조에 비해 위기를 극복한 비잔티움은 헤라클리우스 황제에 대한 칭송이 높아졌습니다. 원로원은 그에게 '새로운 스키피오'라는 칭호를 수여했고,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도 "스키피오-한니발 시대 이후로 헤라클리우스가 제국을 구원하기 위해서 달성한 것보다 더 진취적인 시도는 없었다"라는 평가를 내릴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헤라클리우스는 진정으로 위대한 황제였습니다. 하지만 말년을 편하게 보내지 못하고 몇 년 뒤 이슬람 세력, 특히 할리드 이븐 알 왈리드라는 악몽이 그에게는 천추의 한이 되었습니다.

 

  8. 출처

 

  도현신,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서해문집(2019)

 

  수잔 와이즈 바우어, 『수잔 와이즈 바우어의 세상의 모든 역사 - 중세편 1권』, 부키(2010)

 

  유튜브 <Avar-Slav-Persian Siege of Constantinople 626 (DOCUMENTARY)> (https://www.youtube.com/watch?v=dvKehRDnATM)

 

영문위키 <Heraclius> (https://en.wikipedia.org/wiki/Heraclius)

 

<Shahrbaraz> (https://en.wikipedia.org/wiki/Shahrbaraz)

 

<Byzantine–Sasanian War of 602–628> (https://en.wikipedia.org/wiki/Byzantine%E2%80%93Sasanian_War_of_602%E2%80%93628)

 

<Battle of Antioch (613)>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Antioch_(613))

 

<Sasanian conquest of Jerusalem> (https://en.wikipedia.org/wiki/Sasanian_conquest_of_Jerusalem)

 

<Sasanian conquest of Egypt> (https://en.wikipedia.org/wiki/Sasanian_conquest_of_Egypt)

 

<Heraclius' campaign of 622> (https://en.wikipedia.org/wiki/Heraclius%27_campaign_of_622)

 

<Battle of Sarus>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Sarus)

 

<Third Perso-Turkic War> (https://en.wikipedia.org/wiki/Third_Perso-Turkic_War)

 

<Siege of Constantinople (626)>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Constantinople_(626))

 

<Battle of Nineveh (627)>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Nineveh_(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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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현재까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상황(포위전, 시가전, 푸틴의 오판, 핵무기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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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20227500123

 

“우크라 침공 계획보다 더뎌… 푸틴, 노발대발”

英교수 “푸틴의 정치적 승리 어려운 전쟁될 듯” 시가전 확대로 러시아군 사기 저하 가능성 지적 에스토니아 전 사령관 “러 자금·무기 고갈 중” 푸틴이 4일 내 승전 예상하고 있었다는 주장

www.seoul.co.kr

https://newsis.com/view/?id=NISX20220228_0001776076

 

[속보]우크라 사령관 "수도 키예프에서 러시아군 후퇴"

[서울=뉴시스] 이현미 기자 = 우크라 사령관 "수도 키예프에서 러시아군 후퇴" ◎공감언론 뉴시스 always@newsis

www.newsis.com

 

  러시아의 침략 전쟁은 지지부진한 상태입니다.

  러시아는 병력 수십만 대군을 우크라이나 전역에 투입했지만 우크라이나의 결사항전에 그들 생각대로 되지 않고 있습니다. 서방이 병력 제공은 못하지만 정보 제공과 물자 제공과 자본 제공은 넉넉하게 하고 있으며, 악몽 높은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걸 보니 1차 러시아-체첸 전쟁에서 러시아가 고생했던 게 떠오르네요. 필자도 러시아군을 지나치게 고평가한 것 같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이 만만치 않습니다.

  과거 1차 러시아-체첸 전쟁에서 그로즈니(체첸 수도)를 점령하는데 러시아가 어마어마한 출혈을 감수했고, 이게 원인이 되어 1차 체첸 전쟁은 러시아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심지어 키예프는 그로즈니 면적의 2.5배가 넘고 인구는 그보다 훨씬 많습니다. 현대 시가전은 러시아가 아니라 미국 군대라도 못할 짓입니다. 아파트 등 고층 빌딩 하나하나가 요새나 다름없는데 건물 사이와 각 층에 숨어서 치고 빠지면 공격하는 쪽에서는 한숨이 나오죠.

 

  키예프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이자 9세기에 건국되고 11세기에 황금기를 누린 '키예프 루스'(키예프 공국)의 수도이기도 했던 역사적인 도시입니다. 러시아의 역사와도 연결되는 도시라 푸틴으로서도 무자비하게 파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현재 각종 뉴스를 보면 일단 서쪽과 동쪽의 진격로를 연결해 포위 작전을 시도하려는 듯 합니다.

https://namu.wiki/w/%EB%9D%BC%EC%8A%A4%ED%91%B8%ED%8B%B0%EC%B0%A8

 

  하지만 포위전도 절대 좋은 묘책이 아닙니다. 이제 3월으로, 얼음이 놓고 곳곳에 진흙탕이 많아지는 '라스푸티차' 현상이 우크라이나 땅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포위망을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도 지연되고, 완성한 후 러시아군의 보급의 지속력이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도 애매합니다. 그리고 키예프 인구가 300만이라 러시아가 포위로 조여 온다고 해도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입니다.

https://news.v.daum.net/v/20220227160308361

 

[우크라 침공] 러 안방여론에 시선집중.."벌써 전쟁비용 체감" 관측도

(서울=연합뉴스) 이의진 기자 =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국을 위기로 인도하고 있다." 2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 결정에 내놓은 평가다.

news.v.daum.net

 

 

  러시아 내부에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습니다. 중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세계가 러시아에게 강한 경제 제재를 가하는 중입니다. 루블화의 가치가 폭락하고,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러시아에서도 반대하는 목소리가 결코 적지 않습니다. 야당 등 푸틴에 반대하는 세력은 기회를 잡았습니다. 러시아 경제가 악화될수록 푸틴의 몰락도 급속도로 가까워질 것입니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힘겹게 싸우고 있지만 세계에서 지원받는 물자는 날이 갈수록 쌓이고 훈련 안 된 신병까지 강하게 무장될 것입니다.

  지난날 소련 vs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도 소련의 경제가 치명타를 입었듯이,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러시아 경제는 나락으로 추락할 것입니다.

  이건 필자 생각이지만 일선의 러시아군의 사기도 그리 높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 등의 정보 제공으로 러시아의 움직임은 우크라이나가 읽고 있으며, 내부에서도 명분 없는 전쟁이라고 인식하는 군인들이 꽤 있을 테고요. 적들이 무슨 서방의 사주를 받아 러시아에 선제 공격한 것도 아니고 우크라이나가 무슨 대량 살상 무기로 러시아를 위협한 것도 아니니까요.

  지금부터 속전속결로 우크라이나 동부를 러시아가 장악해도 푸틴은 실패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크라이나 안에서 러시아를 좋게 생각했던 사람들도 상당수 등을 돌려 우크라이나라는 깃발 아래 결사항전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드네프르 강(위 지도의 키예프를 끼고 우크라이나를 반으로 가르는 강)과 동쪽 땅을 모조리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두어야 푸틴이 그 자리를 지킬 명분이 설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크라이나는 최근 협상에서 크림반도와 돈바스 지역에서도 러시아군을 철수시켜라라고 하는 걸 보면 그런 꼴은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설령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를 장악한다고 해도 수천 만명의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계속 저항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이러면 러시아가 전쟁 이후에도 군대를 주둔 안 시킬 수가 없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계속 전비가 소모될 거라 이 역시로 러시아의 최선의 시나리오는 아닙니다.

  진짜 전쟁을 시작하면 우크라이나 수뇌부는 도망가고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도 혼란이 생겨 며칠 만에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푸틴이 전쟁 전후로 쿠데타를 일으키라는 메시지를 우크라이나 쪽에 보냈던 게 잊히지 않습니다.

  전쟁의 결말이 어떻게 마무리 될지 예측하기 힘듭니다만, 이 전쟁은 역사책에 독재자가 전쟁을 왜 일으킨 건지 모를 어리석은 선택으로 기록될 거라 확신합니다.

https://apnews.com/article/russia-ukraine-kyiv-business-europe-moscow-2e4e1cf784f22b6afbe5a2f936725550

 

Putin puts nuclear forces on high alert, escalating tensions

KYIV, Ukraine (AP) — President Vladimir Putin dramatically escalated East-West tensions by ordering Russian nuclear forces put on high alert Sunday, while Ukraine's embattled leader agreed to talks with Moscow as Putin's troops and tanks drove deeper int

apnews.com

 

  여기저기서 핵무기 사용이 언급되는 걸 보면 진짜 무섭습니다. 계산적으로 생각하면 방사능 낙진, 민간인 피해, 키예프라는 도시의 절대적인 파괴와 주변국에게 가는 피해를 생각하면 쓰지 않는 게 정답이죠. 하지만 푸틴이 더욱 궁지에 몰려서 미쳐버린다면 진짜 무슨 일이 벌어질까 두렵습니다. 진짜 2차 대전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벌어진 사망자 숫자보다 더한 사망 피해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일은... 정말 없기를 바랍니다.

  러시아 테니스 선수이자 TOP 랭커이기도 한 루블레프가 최근 테니스 대회에서 'No war Please'라는 메시지를 카메라에 썼네요.

 

이 비극의 역사가 하루빨리 끝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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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아드리안 골즈워디의 <로마전쟁영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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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제국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나라 중 하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로물루스의 로마 왕국 건국부터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으로 인한 비잔티움 제국 멸망까지 2,000년 이상을 존속한 위대한 제국이었습니다. 중국 왕조가 수백 년을 지탱하지 못하고 멸망했을 때 로마의 계보는 살아서 2,000년을 이어졌습니다. 유럽과 북아프리카, 서아지아까지 세력을 넓히 '팍스 로마나(Fax Romana)' 라고 불리는 로마의 질서를 만들었죠.

 

  아우구스투스,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등의 5현제, 콘스탄티누스 1세 등의 명군은 세계사에 남았고, 스키피오, 카이사르, 벨리사리우스, 헤라클리우스 등 역대급 군재를 발휘한 명장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콜로세움과 수도교 등의 건축물이 대표적이고, 콘크리트와 시멘트의 사용은 시대를 앞서갔습니다. 지중해 패권을 확립한 웅장한 영토와 제국의 최전성기에 6천만 이상의 인구는 그야말로 로마의 위대함을 말합니다. 공화정, 군주정 등의 기나긴 역사에서 나타난 정치 체제에서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로마에 관한 기록은 역사에 귀중한 자료인 것입니다.

 

  <로마전쟁영웅사>는 그런 로마 제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발전시킨 명장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했다/패배했다고 설명하는 게 아닌, 전쟁 전후의 자세한 상황과 한니발 같은 적장, 연도별 진행과 전장의 위치, 로마군의 병력 체계, 전쟁의 과정과 의의 등 다양한 과정으로 로마의 전쟁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 아드리안 골즈워디는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해석을 통해 인물과 사건을 분석했습니다. 실제 로마사를 기록한 옛 문장과 전쟁을 묘사한 그림과 초심자도 알아볼 수 있는 지도도 있어서 흥미를 더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명장이 계획한 전략, 전쟁에서 발휘한 지휘와 전술, 로마에 기여한 업적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사는 중국사와 다르게 전쟁 과정이 상세하고 다채로워서 의의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병력 규모도 더욱 정확하게 나와 있어서 신뢰성도 높고요. 전쟁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거대한 일이듯이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국가의 힘과 병사들의 숫자와 정예의 정도, 함께하는 장군들, 주변 지형과 같이 평가해야 할 요소가 많습니다. 로마사는 전쟁의 과정을 비롯한 기록이 많아서 명장들을 판별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책이 국내에서 절판되었다는 점과 콘스탄티누스 1세를 다루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필자도 이 책을 도서관에서의 대출로 말미암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전쟁영웅사>를 직접 읽으시려면 중고로 구하시거나 도서관에서 보시는 방법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로마의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 로마를 휩쓸고 연전연승한 명장이자 대단한 명군인데 그의 기록이 책에 거의 없다는 점은 살짝 안타까웠습니다. 물론 그 이외에 부족하다고 여겼던 부분은 없었습니다.

  로마의 역사, 특히 전쟁사를 중심으로 알고 싶으신 분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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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 제독 호레이쇼 넬슨, 과감함으로 해양을 지배하다 - 코펜하겐 전투(18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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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투 배경

 

  1800년 11월, 러시아는 발트 해에 영국 선박의 입출항 금지 명령을 내립니다. 러시아, 덴마크, 프로이센, 스웨덴은 무장 중립 동맹을 결성했고, 그들은 영국이 발트 해와 엘베 강에 오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덴마크 역시 자국 항구의 영국 선박의 출입을 중단시켰습니다. 영국과 동유럽의 무역은 최악의 상황에 치달았습니다.

 

  당시 영국은 지금의 폴란드 지역 등 동유럽 내륙에서 많은 곡물을 수입했었습니다. 이는 산업혁명이 활발히 진행중인 것도 이유였습니다. 영국으로서는 다가올 식량 부족 문제에 절대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영국 본토에서 식량을 어느정도 자급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1799년~1800년, 영국은 심한 흉년을 겪고 있었습니다. 1799년에는 소빙하기 현상으로 인해 비가 지나치게 쏟아지고 날씨가 추워졌습니다. 반대로 1800년에는 아조레스 고기압의 확장으로 강수량이 지나치게 감소했습니다. 그 해 여름에 큰 가뭄이 오고, 기후변화로 인해 농작물이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1799년~1800년의 영국의 밀 수확량은 예전 몇 년 동안의 평균 수확량에 비해 절반, 75% 수준이었습니다. 1799년 10월~1800년 9월까지 밀 수확량과 수입량을 합쳐도 영국 국민들이 소비해야 할 밀 양의 60% 뿐이었습니다. 1799년~1801년 밀 가격은 3배 이상 올랐습니다. 식량 부족에 참다못한 영국 백성들은 곳곳에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영국 정부는 무료 급식소를 설치하고, 곡물 수입상에 대해서 정부 보조금을 주면서 해결하려고 했지만 근본적인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1800년 3월 영국 내 한 포스터에는 이런 메시지가 있었다고도 합니다.

 

“빵 아니면 피… 자유를 위한 프랑스인들의 투쟁을 당신들은 보지 못했습니까?”

 

  2. 전투 준비

 

  이미 식량 부족 문제가 커지던 상황이었습니다. 국가의 명운이 달린 시기, 영국은 무역로를 회복하기 위해, 북유럽의 동맹을 응징하기 위해 함선을 모아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1801년 3월 영국 전함들은 북해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발트해에 있는 러시아 항구까지 공격하는 건 영국 해군이라고 해도 무리였고, 덴마크를 일차적인 목표로 삼았습니다.

 

Hyde Parker

 

Horatio Nelson

  영국은 해군제독 하이드 파커 경을 사령관으로, 호레이쇼 넬슨 중장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들은 한 달이 지나 코펜하겐에 도달했습니다. 덴마크는 해역이 좁은 코펜하겐에 강한 방어벽을 구축했습니다. 요새들이 남북으로 쭉 방어선을 형성했고, 해안가 포대의 화력은 강력했으며, 수비를 위해 배치된 수십 척의 덴마크 함선 또한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넬슨은 전투가 벌어지기 전 해도를 포함한 갖고 있던 모든 정보를 검토했습니다. 코펜하겐 항구는 모래톱지대이며 해풍이 시시각각 변화하는 곳이었습니다. 파커 경이 덴마크 함대가 항구 밖으로 나올 때를 노리자고 말하자 넬슨은 강력하게 설득했습니다.

 

  “덴마크의 방어벽은 전쟁을 모르는 아이들에게나 겁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저는 기동력으로서 덴마크 대포를 무력화할 것입니다. 모래톱은 위협적이지 않습니다. 과거 이집트의 나일 강에서도 우리는 모래톱을 이겨내고 프랑스군을 대파한 적이 있습니다. 해풍에 너무 민감하게 신경 쓸 필요도 없습니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공격대형을 바꾸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접근이 용이한 남쪽 방향에서부터 공격하겠습니다. 사령관님과 예비 병력은 코펜하겐 북쪽에 대기해주십시오.”

 

 

코펜하겐 전투 지도

 

  3. 전투 과정

 

  1801년 4월 2일 아침,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넬슨은 파커 사령관 대신 대형 함선 12척, 프리깃 함선 5척, 폭탄선과 화공선 등의 소형 함선들을 이끌고 전장을 지휘했습니다. 미리 파악한 모래톱을 최대한 회피하면서 공격했습니다. 넬슨은 해풍에 따라 공격대형을 변화시키고, 최대한의 기동력을 이용해 해안포대의 공격에 대응했습니다. 영국 함선은 코펜하게의 부두를 향해 공격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일반적으로 중무장한 함선이라고 해도 해안가 포대에 파손될 수 있어서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지는 않지만, 넬슨은 목표 지점을 향해 위험을 무릅씁니다. 강의 조류나 미처 피하지 못한 모래톱 때문에 영국 함선 중 3척(Bellona호, Russell호, Agamemnon호)이 좌초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스케치로 만들어진 코펜하겐 전투 지도(검은 점이 영국 함선입니다.)

 

  영국군은 적의 목덜미를 쥐기 위해 코펜하겐 도시를 최대한 폭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파열탄을 집중적으로 발사해서 덴마크의 기함인 Dannebrog호를 파괴했습니다. 덴마크의 피셔 제독은 급히 다른 함대로 피했습니다. 덴마크군은 강력하게 저항했고, 서로 일제사격 등 셀 수 없는 포격을 주고받았습니다. 전투 시간은 네 시간을 넘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던 파커 제독은 패전을 염려하여 ‘교전 중지 및 퇴각 신호’를 보냅니다. 하지만 넬슨은 승리를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실명한 눈에 망원경을 대고 신호를 확인했습니다. 그는 몇 년 전의 전투로 한 쪽 눈을 실명한 상태였는데, 퇴각 신호의 깃발을 보고 웃으며 말했습니다.

 

“신호가 보이지 않는군.”

 

  퇴각 신호를 모른척하는 넬슨

  오후 2시 쯤, 코펜하겐 항구의 해풍이 잦아들고 있었습니다. 움직임이 용이해진 영국 함선은 덴마크 함선을 포위하고 압도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넬슨은 총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덴마크 함선 가운데 Nybrog호와 Aggershuus호가 영국 함선의 포탄을 맞고 폭발했습니다. 덴마크의 전함은 포위된 채 항복했으며, 해안포 사격도 점차 무력해졌습니다. 오후 2시 반, 덴마크 방어선의 남쪽과 중앙이 본격적으로 무너졌습니다. 영국은 12척의 배를 나포하기까지 했으며, 마침내 전투는 영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4. 전투 이후와 총평

 

  코펜하겐 해전에서 영국군은 1200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덴마크군은 사상자 1700명과 포로 4300명을 냈습니다. 영국군 역시 많은 피해를 입었기에 상륙 후 도시 점령은 무리였습니다. 하지만 영국군은 함선 내포 이외에도 대형 박격포라는 전리품도 획득했습니다. 도시를 폭격할 수도 있었기에 덴마크의 프레데릭 황태자는 정전협정에 동의했습니다.

 

  영국과 덴마크 전쟁의 발단은 영국의 날씨와 식량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곡식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은 전쟁을 각오했습니다. 전투 이후 러시아나 북유럽 국가들은 영국에 쉽사리 맞서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함부로 영국을 적대하지 못했고, 러시아-덴마크-스웨덴-프로이센의 무장 중립은 깨졌습니다. 코펜하겐 해전은 영국과 덴마크에게 분기점이 될만큼 중요한 해전이었습니다. 이 해전의 패배 이후 덴마크의 해상 영향력은 추락했지만, 영국의 해상 영향력은 날아올랐으며 그들의 선박은 코펜하겐 항로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국 함대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넬슨의 치밀한 작전과 기민한 지휘력, 기회를 확실히 잡기 위해 상관의 명령을 임기응변으로 무시한 덕분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잘 훈련된 영국 선원들은 우월한 포술을 발휘할 수 있었고, 지속되는 원정 포격전에서 승리하는 비결이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넬슨의 단호한 공격적 성향이 대단히 잘 나타난 전투입니다. 전투 해역이 좁았지만 날카로운 판단으로 말미암아 중요한 위치를 점거해서 승리한 것입니다.

 

  코펜하겐 전투의 공로로 넬슨은 자작에 서임되었습니다. 그의 승전하면 일반적으로 트라팔가르 해전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본토에서 덴마크까지 도달한 이 코펜하겐 전투와 본토에서 이집트까지 도달해서 승리한 아부키르만 해전(나일 강 해전)도 백미입니다. 명실공히 호레이쇼 넬슨은 장거리 항해라는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고 난공불락의 요새를 공략했던 역대 최고의 해군 제독 중 한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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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말기 위나라와 오나라의 최대 공방전: 동흥전투(252년)와 합비신성전투(2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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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폭풍전야

 

  위촉오 삼국시기 중 250년대 초반은 권력 승계의 시대였습니다. 251년에 사마의가 죽고 아들 사마사가 위나라의 권력을 승계하고, 252년에는 손권이 죽고 손량이 오나라의 제위에 오릅니다. 253년에는 비의가 죽고 강유가 촉나라의 군사권을 잡습니다.

  이 시기 오나라의 대장군 제갈각이 전권을위임받습니다. 제갈각은 제갈근의 아들이고 제갈량의 조카이기도 합니다. 여담이지만 제갈서, 제갈탄 등 제갈씨 성을 가진 인물은 위나라에도 있었습니다.

  제갈각은 위나라의 국경 바로 앞의 '동흥'이라는 곳에 동흥제라는 제방을 건축합니다.

 

 

 

  (하늘색 선 왼쪽이 위나라 영토, 오른쪽이 오나라 영토입니다.)

 

  위 지도의 푸른색 호수가 소호입니다. 소호는 위나라의 영역에 있었지만 오나라가 옆의 강을 제방으로 막으면 소호의 물이 막히게 됩니다. 자칫 범람할 위험도 있었죠. 제갈각은 이를 노리고 여기에 수비를 강화하고자 동흥제의 양쪽으로 성을 쌓습니다. 옆에 산이 있어서 수비하기에도 용이했습니다. 성 하나당 천 명의 병력만을 남겨두고 제갈각은 본진으로 귀환합니다.

 

  2. 동흥전투의 시작

 

 

 

(맨 왼쪽 파란색 지점이 강릉, 보라색 지점이 무창, 청록색 지점이 동흥으로 향하는 위나라 군대고 분홍색 지점은 오나라 구원군의 방향입니다.)

 

  제갈각의 도발에 사마사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어 오나라를 침공했습니다. 정남장군 왕창, 진남도독 관구검, 진동장군 제갈탄과 정동장군 호준에게 각각 강릉, 무창, 동흥 공격을 지시했습니다. 제갈탄과 호준은 7만 대군의 주력 병력을 이끌고 동흥을 공략했고, 사마소가 감군의 직책에서 이 둘을 감독했습니다.

  무창에는 대치전이 계속되었고, 강릉은 워낙에 요충지인 곳이라 오나라가 쉽게 내주지 않았습니다. 제갈각은 무창과 강릉에 지원을 하면서도 4만 대군의 지원군과 정봉, 여거, 당자, 주이 등의 휘하 장수와 함께 동흥에 당도합니다. 동흥의 두 성은 각각 병력이 천 명밖에 없었지만 지원군이 올 때까지 위나라 대군의 공세를 충실히 방어합니다.

  제갈각과 정봉은 행군이 지지부진 하다는 사실을 알고 별동대를 조직합니다. 이는 위나라가 병력을 강에 놓은 부교로 이동시키고 제방 위에 많은 병력을 배치시켰기 때문입니다. 정봉은 3천 명의 별동대를 제갈각은 평북장군 정봉에게 군사 3000명을 주어 장강을 따라 나가고 여거, 당자, 주이에게 나머지 병력을 주어 따르게 했습니다. 정봉은 병력을 30척의 배에 나누어서 싣고 빠르게 진군합니다.

 

  3. 평북장군 정봉, 전장을 뒤흔들다

 

  정봉이 도착했을 때 절묘하게도 위군은 공성을 중단하고 연회를 벌이면서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정봉과 그의 별동대는 칼과 방패만 가지고 제방에 올랐습니다. 갑옷이 없어서인지, 병력이 적어서인지 위군은 오군을 보고 크게 비웃으며 방심했습니다. 정봉과 오군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나라의 주둔지를 깨뜨렸고, 여거, 당자, 주이가 이끄는 오나라 대군이 뒤를 이어 도착하자 놀란 위군은 앞다투어 도망쳤습니다.

  그 뒤에 전투는 일방적이었습니다. 부교에 너무 많은 퇴각 병력이 타서 무너지기도 했고, 주이의 별동대 수군으로 인해 부교가 끊어지기도 했습니다. 퇴각로가 막히자 위군이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거나, 도망치지 못하고 죽는 병력도 셀 수 없었습니다. 호준의 휘하 장수인 환종과 한가로 정봉에게 죽었습니다. 호준은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수만 명의 위군이 죽었고, 강릉과 무창 방면에 있었던 왕창과 관구검은 동흥에서의 패전 소식을 접하고 후퇴했습니다. 전투의 대승으로 오군은 수천 대의 수레와 가마, 수천 마리의 소, 말, 노새, 당나귀를 노획하고, 빼앗은 물자와 무기가 산처럼 쌓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4. 동흥전투 이후의 향방

 

  패전한 위나라에는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위나라 조정에서는 일선에 장수들을 처벌해야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서쪽 지방에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심각한 대패에 사마사는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면서 본인과 동생 사마소의 즉위를 강등시키면서 사태를 수습했습니다.

  반면 오나라의 제갈각은 대승에 고무되어 대규모의 북벌을 주장합니다. 입지가 탄탄해진 그는 지금이 기회라고 주장하며 반대 목소리를 눌렀습니다. 동흥전투 이후 3개월 만에 자그마치 20만 대군을 모아서 합비로 진군합니다. 삼국지에서 20만 명이 한 전쟁에 동원된 사례는 손에 꼽을 만큼 대병력이었습니다.

 

 

 

 

  5. 3,000 vs 200,000: 수성의 장특

 

  253년 3월, 제갈각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합비신성을 포위합니다. 이 때 위나라의 장특이라는 장수가 합비신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배송지주-장특전'에 의하면 신성 안의 병력은 겨우 3천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90여일간 필사적으로 수성하지만, 제갈각이 토산까지 쌓으며 공격하고 성의 곳곳에 구멍이 생깁니다. 풍전등화의 상황에 이르자 장특은 고심 끝에 항복하겠다는 말을 전합니다.

 

  ["오늘 나는 다시 싸울 마음이 없다. 그러나 우리 위나라의 법에는 공격을 받아서 100일이 넘었는데도 구원병이 오지 않게 되었다면 비록 항복을 하여도 그 집안사람들이 연좌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적의 공격을 받은 이래로 90여 일이 지났고, 이 성 안에는 본래 4천여 명이 있었는데, 전사자가 이미 반을 넘겼지만 성이 비록 함락된다고 하여도 오히려 이 반쯤 남은 사람들은 항복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지금 돌아가서 서로 상의하여 좋은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해서 내일 일찍 명단을 보내겠고, 또한 인수를 버리는것으로 신표를 삼겠다."]

 

  장특은 오군 쪽으로 인수를 던지고 제갈각은 공격을 중단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항계였고, 오군이 공격을 중단한 날 밤에 성 안에 있던 목재로 성벽을 채우면서 성을 수리합니다. 다음 날 장특은 "나는 다시 싸우다가 죽을 뿐이다."라고 전하죠. 분노한 제갈각은 재차 공격을 명령하지만 오군의 피해는 막심해지기만 했습니다. 심지어 여름이 되어 전염병이 창궐하고 그렇게 병력 태반이 병에 걸리거나 공성전에서 죽고 다치는 사태로 귀결됩니다. 사기가 땅에 떨어지자 오군은 뒤늦게 퇴각하지만 관구검과 문흠의 위나라 추격병으로 또다시 많은 피해를 입고 간신히 퇴각합니다.

 

  6. 대패의 후폭풍

 

  오나라는 합비신성의 패전으로 치명타를 입었습니다. 인구 250만명인 오나라에서 20만명의 대군이 만신창이를 입었으니 백성들의 원성은 높아져갔죠. 그러나 제갈각은 실패를 인정해도 시원찮을 시기에 주변 사람들을 탓하면서 재차 북벌을 주장합니다. 지난날 숙부 제갈량이 1차 북벌 실패의 책임을 느끼고 즉위를 스스로 낮췄던 것과는 비교되는 일입니다. 결국 오나라에는 당해 내분이 일어났고 제갈각은 암살당합니다.

 

  반면 위나라와 사마씨 형제의 권력은 오히려 공고해졌습니다. 오나라는 그 이후 동흥 전투만큼 위나라 상대로 수만 명을 살해하는 전공을 다시 세우지 못합니다. 물론 그 뒤에도 양국 사이에 계속 충돌은 있었지만 오나라는 유의미한 전과를 세우지는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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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대전은 확실히 세계사 흐름을 바꿔놓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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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 사진에서 파란색이 전진이고 노란색이 동진입니다.

  383년 11월 벌어진 비수대전은 전진의 100만 대군과 동진의 8만 명이 맞선 전투였죠. 심지어 서역으로도 10만명의 원정군을 더 보냈다고 합니다. 물론 이건 기록상에 나오는 기록이고, 실제 전진의 병력은 3분의 1도 안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4세기 후반 전진의 군주 부견은 대륙 통일을 거의 완성하고 있었습니다. 370년 전연을 정복하고, 북벌로 전진과 맞섰던 환온이 죽자 역공을 가해서 한중을 비롯한 서쪽의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378년에도 동진이 가진 양양 영토를 가져갔죠. 핵심이었던 화북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과거 삼국지의 촉나라 땅까지 손에 넣으면서 전진과 동진의 격차는 압도적이었습니다. 반면 동진이 가진 남쪽 영토는 개발이 아직 안 된 곳이 너무 많았죠. 당시 두 나라의 국력 격차는 삼국지의 위나라와 오나라의 격차보다 훨씬 더 크게 나타났습니다.

   비수대전이 벌어진 강력한 원인은 위대한 재상이었던 왕맹이 375년 죽은 게 가장 크다고 생각합니다. 군대를 이끌고 전연을 평정하고, 부견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호족들을 정리하면서 최전성기 동진을 이끌었던 대단한 인물이었죠. 내정도 탄탄했고요. 왕맹은 죽기 직전 "동진을 도모하지 말고, 내치에 집중하시고 선비족과 강족을 멀리하고 때가 되면 제거하십시오"는 유언을 남깁니다. 왕맹이 죽자 부견은 하늘이 왜 그를 이렇게 빨리 데려가냐고 원통해했습니다. 왕맹은 부견 휘하의 선비족의 모용수와 강족의 요장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맹이 죽고 대략 7년이 지나자 부견은 거대한 병력을 동원할 마음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회수 정벌에서 동진의 군대에게 막히는 일도 일어나고, 더 이상 소규모의 병력을 통한 점진적인 정복에 싫증이 난 것인지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내와 아들들, 신하들과 스승으로 모시던 스님들까지 부견을 말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맹이 멀리한 다음 숙청하라고 간언했던, 선비족 출신의 명장이었던 모용수가 찬성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전진의 기세가 막강했습니다. 운성이 모용수에게 떨어지고, 수양성이 부융에게 떨어지고, 수춘성 근처까지 전진의 군대가 들이닥쳤죠. 그 다음 비수를 사이에 두고 거대한 전진의 대군과 한참 적은 동진의 군대가 맞섰습니다. 동진의 총사령관 사현은 대군을 조금 뒤로 후퇴시킨다면 항복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 부견은 의심했지만 우선 제의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후퇴시켰습니다. 설사 동진의 거짓말이었고 뒤를 공격한다고 해도 바로 역습해서 섬멸시키겠다고 계획했죠.

   그러나 부견의 몰락은 시작되었습니다. 부견이 군대를 뒤로 이동시켰는데 후속 부대에게 그 이유를 제대로 명령내리지 않았습니다. 전진의 대군은 혼란에 빠졌고, 심지어 겉으로는 전진에 항복했으나 부견을 제대로 섬길 마음이 없었던 주서라는 지휘관이 "전진이 패배했고 동진이 이겼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려서 대군이 순식간에 붕괴되었습니다.

   그 때 동진의 기병이 비수를 도하해서 뒤를 급습했습니다. 지리멸렬한 대군으로 부견의 계획은 실행할 수 업섰고, 전진의 병사들은 살 길을 찾아 도망갔습니다. 부융은 말이 넘어지는 바람에 사망했고, 부견도 화살에 맞아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남은 전진의 병력도 동진군의 공격에 패퇴했습니다. 호위병도 없이 혼자 도망간 부견은 모용수의 군대와 접촉해서 전진으로 돌아갔습니다. 부견이 직접 비수대전에서 거느리던 87만의 원정군 병력 중 제대로 수습할 수 있었던 병력은 10만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비수대전은 부견의 입장에서 참담하게 끝났습니다. 역사에 남을 참패 이후 전진은 분열의 길로 추락하죠. 왕맹이 경고했던 이민족 출신의 모용수는 후연을 건국하고, 요장은 후진을 건국하고, 모용홍도 서연을 건국했습니다. 중국 역사는 또다시 분열의 역사와 마주했습니다. 다만 모용홍은 오래 가지 못하고 부하들에게 죽고 그의 동생 모용충이 서연을 이어받았습니다.

 

   서연의 군대는 장안성을 포위했고, 부견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서쪽으로 도주했으나 요장에게 잡혀서 포로가 되어버립니다. 과거 신하였던 요장에게 부견은 385년 살해되고, 전진도 394년 멸망했습니다. 비수대전이 벌어지고 2년 만에 부견이 죽고, 11년 만에 사방의 반란을 이겨내지 못하고 망한 것입니다.

   부견이 제대로 통솔하지 못한 게 패인이고, 너무 많은 병력을 잃은 것도 컸습니다. 부견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한 이 전쟁은 재상 왕맹만 살아있어서 말렸어도 벌어지지 않았을 참사였다고 생각합니다. 혹은 계속 소규모 병력으로 손해를 크게 줄일 수도 있었겠죠. 이 말년의 큰 실책만 아니었어도 부견의 이름은 더욱 위대하게 남았을 것입니다. 만약 통일에 성공했다면 6세기 후반 수나라의 통일을 200년 정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진은 세계사의 위대한 제국이자 패권국으로 엄청난 칭송을 받았을 것입니다. 4세기가 끝나길 시기라면 로마가 동서로 갈라졌을 때라 동시대 중국 통일 왕조는 당대 압도적인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는 의의가 있었죠. 사산 왕조와 굽타 왕조도 만만치 않은 국가였지만 통일 중국 왕조의 국력에 비할 바는 아니었겠죠.

   물론 당시 전진이 통일했으면 고구려가 위험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 한국인으로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전쟁이라는 역사가, 잘하다가 한 번의 실패만으로도 몰락하거나 시대의 패배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점이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삼국지의 원소도 관도대전 이전까지 전쟁에서 전승이었고 조조보다 훨씬 강한 세력을 구축했으나 관도대전의 대패로 이미지가 너무 평가절하 되어있는 것처럼요. 왕맹 같은 훌륭한 신하의 존재가 군주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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